진주라 천리길

내가 만난 여류시인/2/2015년

김현거사 2018. 4. 4. 17:04

      

 

    내가 만난 여류시인/2

 

  원래 진주는 풍광 좋고 미인 많은 곳이다. 매년 개천예술제 때 진주 드나들면서, 나는 진주 출신에 김정희 정혜옥 김여정 세 원로 여류시인이 있다는 것, 그 세 분이 공히 미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명색이 수필가인지라 나는 간혹 서울서 이름 있는 여류들을 만나 본 적 있다. 그러나 이 세 분처럼 재주와 미모 고루 갖춘 분은 드물다. 나는 그  점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하나 명확히 해놓고 싶었다. 내 비록 김삿갓은 아니지만, 이 아름다운 선배님들 만나 미인의 편모는  밝혀두고 싶었다. 그 일은 고랑 치고 가재 잡는 일이요,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다.

  대구 정혜옥 선배님은 먼저 시를 통해 알았다. 진주여고 3학 때 개천예술제에서 장원한  그 분의 시 <국화>는, 재기발랄한 단발머리 여고생 모습을 떠오르게 한다.  

 

<국화>

 

화려한 정원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여기
메마른 흙과 하늘이 통한 곳에
조상이 물려준 절개를 외우며 섰습니다.
하나의 넋두리 속에서 피는 화려한 의상이 아니기에
더욱 가냘픈 생명이옵니다.

내 조국은 찬바람 부는 언덕을 넘은 곳
외로움은 가을 불나비처럼
견디기 어려운 것입니다.


나에게 노래를 주십시오.
오월의 푸른 언덕은
내가 지킬 언약은 아니라구요.

가도 가도 바람은 불고 서리는 내리는데
내일을 기다려 참아야만 하는
서러운 전설 속에서 피는 국화
나는 국화이옵니다

 

  화법이 여학생 냄새가 나지만, 당시 이 분이 여고 3학년 아니던가. 나는 이 시를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 보다 더 사랑한다. 그 옛적 내 어릴 때 진주 남강 가에 이런 아름다운 여학생이 살았다는 사실 자체가 자랑스럽다.

 정선배님을 처음 뵌 일이 생각난다. 반갑게 인사 드렸더니 갸름한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떠오른다. 그동안 책이 오갔으니 서로 구면이다. 선배님 손 한번 잡아본 후, 단도직입으로 <국화>란 시가 좋더라는 인사부터 드렸다. 수많은 작가가 글을 쓰고, 독자가 글을 읽지만, 작가에겐 작품 이야기 해주는 독자가 가장 소중할 것이다.

 행사 중에 마침 선배님 좌석이 내 앞이라, 그냥 가만히 있기 싫었다. 살짝 어깨를 두드리고 과자를 드렸더니, 아카시아 꽃처럼 향기로운 미소 뛴 얼굴로 돌아본다. 남강문학회 초대 회장 정재필 선배님 누님이니, 나는 귀여운 막둥이 후배 쯤 된다. 

  여고 때 쓴 <국화>를 기억하는 후배니 그랬을 것이다. 그 후 서울서 한 수필지에 실린 내 글을 읽고 따뜻한 격려전화를 해주시기도 했다. 

 이 참에 진주 여인 매력이 어딧는지 한번 살펴보자. 진주 여인은 한마디로 말해서 인근 산야에서 자라는 야채와 과일 비슷하다. 부드럽기는 신안동 토란처럼 부드럽고, 시원하기는 도동 수박처럼 시원하다. 달콤하기는 비봉산 산딸기 같고, 연하기는 습천못 무화과 같다. 감성은 촉석공원 석류처럼 새콤달콤하고, 피부는 비온 후 대밭 속의 죽순처럼 하얗고 보들보들하다. 그러면서 논개처럼 가슴 속에 시퍼른 은장도 하나 지니고 있다.

 선배님은 봄이면 비봉산에 나가 쑥 캐고, 여름이면 봉선화 꽃물 들인 손톱을 자랑했을 것이다. 5월이 되면 아카시아 꽃향기가 은총처럼 스며드는 옥봉 성당에서 새벽 기도하였을 것이다. 내 5년 선배인 동생 정재필 시인은 <어머님의 성모상>이란 시에서, '6 .25 피난길에서도 예쁘게 핀 작은 풀꽃 만나면 그 곁에 작은 청동 성모상 놓으시고 기도하시던 어머님'을 읊었다. 남매가 독실한 카톨릭 집안의 종교적 여운을 평생 몸에 지닌 모습 존경스럽다.

 근년에 선배님이 출판한 <은혜로운 날들의 기억> 이란 신앙에세이 곳곳에도  년륜  오래된 신앙이 진주알처럼 빛나고 있었다.

 

 

  선배님은 대구 여성문학회 회장, 카톨릭문학회 회장, 대구 수필가 협회 초대회장을 지냈고, 지금은 대구가 터전이다. 초기에 시로 시작하여 한국 수필계 원로이다. 지금도 나는 대구 근처를 지나면, 문학과 인생 모두 아름다운 정혜옥 선배님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