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총장님 자서전

자서전 26-30번

김현거사 2016. 12. 6. 07:05

26. 관계에서 학계로 건너는 10년교(十年橋)

 

 26. 넘어진 나무에도 움이 돋는다.

 

 1983년 7월 19일, 당시 이규호(李奎浩)장관이 나를 불러 “대통령께서 문교부차관 교체 지시를 내리셨습니다”라는 전언을 하자, 나는 “예, 알겠습니다”하고 물러나와 보따리를 쌌다. 둘 사이의 짧은 이 대화하나로 나는 차관 재임 2년 4개월만에 물러나  이튿날 이임식을 미치고 24년간의 문교부 생활을 마감하였다. 

(*1983년 여름날, 돌연 문교부차관직을 퇴임하였다. 이규호(李奎浩)장관이 불러 “대통령께서 문교부차관 교체 지시를 내리셨습니다”라는 전언을 하였다. 나는 “예, 알겠습니다”하고 물러나와 보따리를 쌌다. 둘 사이에는 짧은 이 대화뿐이었다. 7월 19일이었다. 차관 재임기간 2년 4개월만의 일이었다. 이튿날 이임식을 미치고 24년간의 문교부 생활을 마감하였다. 동시에 모든 관직으로부터의 마지막 퇴직이었다.)

 

이때 내 나이 53세였고, 퇴직 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걱정한 적도 없이 그저 굶지 않으면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공직 일에 온 정성을 쏟고 살던 터라, 이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정신이 멍멍한 상태였다. 

 

 (*이날이 53세였었고, 또 앞길에 대한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 내 젊은 날은 내일은 모르고 오늘만 열심히 일하는 스타일의 인생을 살아왔었기 에, 내 한평생의 고직을 완전히 물러나오는 이날도, 앞날에 대해서는 그저 멍멍한 정신 상태였다. 지금의 나 같았으면 퇴직 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하여 걱정도 하고 준비도 했을 것이지만, 그 당시 대부분의 공무원들은 그저 오늘의 일에 온 정성을 쏟고 내일의 삶은 모르고 사는 것이 하나의 생태였다고 생각된다. 가정형편으로나 사회전체로 봐서 굶지 않으면 다행이라는 수준의 생활환경에다 국가발전과 공공봉사에만 전념하는 외골수였기 때문이었다고 회상된다, 아니, 아예 돈 하고는 담을 쌓고 사는 생활신조였다고나 할까. 이와 같은 인식으로 나의 공직 총 퇴임을 맞이하였다. )

 

돈 하고는 담을 쌓고 지낸 외골수라 한강 백사장에 혀를 박고 죽을 일이었다. 집에서 멍청하게 몇 주쯤 지나고 나서야 출근이 중지되었구나 하는 느낌이 오고 ‘앞으로 뭘 하고 살지?’ 하고 정신이 돌아왔다. 그러나 아무런 대책도 생각나지 않아(았다.) 그저 뒹굴며 위로 전화나 받고 지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충격으로 집에서 멍청하게 몇 주쯤 지나고 나서야 출근이 중지되었구나 하는 느낌이 오고 ‘앞으로 뭘 하고 살지?’ 하고 정신이 돌아왔다. 그러나 아무런 대책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뒹굴며 위로 전화나 받고 지냈다. )

 

그런데 넘어진 나무에도 움이 돋는다고 이 퇴직(* 실업)자에게 전혀 예상치 않은 큰 도움이 줄줄이 닥쳐왔다. 웃 돌도 못 믿고 아랫 돌도 못 믿는 심정인데, 참으로 기적 같은 수많은 인연들이 칠년대한(七年大旱)에 대우(大雨) 나리듯 쏟아진 것이다. 

 

(* 와 밤낮으로 일에 쫓기는 현상이 일어나고, 다시 10년 후를 대비하는 학습까지 하게 된다. 지금에 와서 되돌아보니, 중앙청 문교부(지금의 교육부)에 공무원으로 입문하여 4반세기(25년간)를 넘기고, 완전 퇴임한 53세(1983)부터 마지막 봉직인 대진대학교에 안착한 62세(1992)까지의 그 사이 10년간, 즉 관계(官界)에서 학계(學界)로 건너가는 그 사이 10년간은 방황기 과도기 재도전기였다고 회상된다.

기이하게도 이 간난의 시기를 화상해보니 참으로 기적 같이 수많은 인연들이 나를 찾아와 동력이 뚝 떨어져 널불어져 있는 니를 두들겨 깨워 견인하고 후원해 주었다는 것을 실감한다.)

 

 한 인생을 둘러싼 인연의 오묘한 조합이 없이는 일어날 수 없는 이 10년 동안에 여섯 번이나 나타났다. 여섯 번이나 구세주가 나타나 내 직업을 알선해 준 것이다. 기적 같은 사실들을 적어본다(*보기로 한다.)

 

그 첫 번째는, 대학교수의 문이 열린 것이다. 급작스런 퇴직으로 분(憤)을 못이겨 우황(牛黃) 든 소(牛) 같던 처지에 있던 나에게 원앙(鴛鴦)이 녹수(綠水) 만났다고 할까. 노용(老龍)이 구름을 얻었다 할까 춘삼월 봄바람이 불어온 것이다. 

(*대학 교수의 관문에 첫발을 드려놓은 새 출발을 하게 된다. 실업자로 전ㄹㄱ한 나에게 단구대 교육대학원 교수라는 직자을 선물한 것이다. 이는 이미 앞에 거론한 신방현교수와 장충식총장 두 분의 따스한 손길의 결과물이었다. 무료한)

퇴직한지 한 달이 지나 8월 중(준)순 쯤에 단국대 신방현(申邦鉉) 교수가 (반가운) 전화를 걸어왔다. “ 교육법규」라는  새 과목이 신설되었으니, 우리 교육대학원(야간)에 강의 하나 맡아보겠느냐?”는 것이다.(였다.) 장충식(張忠植) 총장과 기꺼이 협의가 되었다는 것이다.

` (「교육법규」라는 새 설정 과목이라 했다. )

 역시 모교(였)구나 싶어(하며) 나는 바로 그 부름에 응해(했다. )그 해 9월초부터 「교수에 임함」이라는 발령을 받고 주1회 출강하였다.

 신 교수는 단국대 (그 대학) 1회 선배다.(로) 교수로 재직하면서 대 문교부 업무를 맡아 항시 중앙청을 출입하여 나와는 친숙한 사이였다. 그는 수 년 뒤에 부총장을 맡았고 가끔 골프 회동도 함께한 사이였다.(가 되었다.) 장 총장은 설립자 장형(張炯)선생의 아들로 오랫동안 총장직을 수행하여 학교를 반석위에 놓은 분인데, 내가 (았으며) 서울본부 대학 외에 천안 캠퍼스를 확장할 때 조력해드린 적(도) 있었다. 이런저런 인연이 나를 부른 것이다.

사실 대학 교육에 관한 일이라면  문교부 대학교육 국.과장을 거친 나로서야 밤송이 우엉송이 다 밟아본 일이다. 이미 문교부 재직 중에도 외대 교수로 문교부 고등교육자문위원으로 (한) 10(녀) 년 간 자주 만난 바 있는 오한진(吳漢鎭) 교수(뒤에 교육대학원장,부총장)의 알선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 외국어대학원(야간)에 한 3년 방과 후 출강한 경험도 있다.

 

(한 3년간 교육법규 과목으로 방과 후 출강이었다.)

(*외대 교수로 문교부 고등교육자문위원으로 (한) 10(녀) 년 간 자주 만난 바 있는 오한진(吳漢鎭) 교수(뒤에 교육대학원장,부총장)의 알선 덕분이(었)다.)

(*재직시절의 이 경험이 이번의 새 출발에 즉시 응할 수 있는 동력노릇을 한 셈이었다.  퇴직의 슬픔에 잠긴 50중반의 무력한 나에게 이날부터 간간이 봄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그건 대학교육과장과 국장 당시에 한국외국어대학교 야간 외국어대학원 출강경험이었다. 한 3년간 교육법규 과목으로 방과 후 출강이었다. 외대 교수로 문교부 고등교육자문위원으로 한 10녀 년 간 자주 만난 바 있는 오한진(吳漢鎭) 교수(뒤에 교육대학원장,부총장)의 알선 덕분이었다.)

 

 재직시절의 이 경험이 이번의 새 출발에 즉시 응할 수 있는 동력 노릇을 한 셈이었다.

그 두 번째는, 대한교원공제회 이사장 취임을 한 것이다. (이규호 문교부장관의 배려로 굴러들어온 보석이었다.) 헤어진 지 석달만인 10월의 어느 날 이규호 장관이 불러서(그가 불러) 장관실에 갔더니 “교원공제회 이사장 직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마침 전임 김한주(金翰周) 이사장이 동국대 총장으로 취임할 예정이어서 공석이 생겼던 것이다.

장관이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아마 (그는) 나의 차관 퇴임에 약간의 (동정심과) 미안함과 부담감이 남아있었던 것 같았다. 2년 반 동안 자기를 보좌한 차관을(이) 아무 잘못 없이 정치적 이유로 경질시켜 (책문제 만으로 퇴직 당한 것뿐 아니라,) 그 귀책사유가 장관이냐 차관이냐(를) 설왕설래했던 것도 사실이다.

(만으로 일말의 미안감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았다. 사실 그 졸업정원제 입안에는 이 장관은 추호의 관련도 없었는데도 말이다.)

 

어떻든 이리하여 (그 긍휼지심으로 공제회 이사장직을 나에게 선물하게 된 것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낮에는 대한 교원공제회 이사장실에, 밤에는 단국대 교육대학원을(에) 오가는 바쁜 세월을 맞게 되었고,(다.) 이후 약 2년간(정확히는 1년 6개월간) 열심히 봉사하였다.

그 세 번째는, 일본 국립 쓰쿠바(筑波)대학 「객원 연구원」으로 위촉받은 일과 (대망의) 박사학위를 받은 일이다. 문교부 장학실을 거쳐 주일한국대사관의 교육관으로 있던 진주사범(고교) 후배 손상철(孫相哲) 교육관(뒤에 동경한국학교 교장)의 뜻밖의 도움으로 얻은(시작된) 늦가을(의) 알곡수확이었다.

교직원공제회 이사장 근무 (*시작) 석 달째 되던 익년(1984) 초에 손 교육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소망하신 쓰쿠바대학 박사학위 도전을 해보시지요”하는 것이(었)다. 박사 (이) 학위 문제는 차관 재임 당시에 우연히 손 선생과 대화한 일이 있(였)었는데(던 사안이었는데), 고맙게도 그 뒤 꾸준히 일을 추진,(모색해오시다가 결국) 쓰쿠바대학 교육학과 박성우(朴聖雨)교수와의 합의에 이르렀으니,(고,) 박 교수와(의 내부 양해 성공에 따라) 면담절차를 (거쳐) 착수해보라는 통보였다. (나는 반색하며 환영하였다. )

즉시 일본으로 건너가 손 교육관과 박 교수를 만났더니(나고, 이 대사를 부탁드렸다. )

그 과정은 속전속결이었다.

 쓰쿠바대학은 동경에서 한 시간 거리의 이바라기현 쓰쿠바시에 있었는데,(는 대학을 방문하였다.) 이 대학은 해방 전 우리에게 동경고등사범학교(東京高師)로 알려진 친근감 있는 학교다. 이날 교육학과 교수 합동 면담이 있었다. 이 자리에는 지도교수인 마노미야오(眞野宮雄)교수와 부지도교수인 구와하라도시아키(桑原敏明)교수, 마쓰시마히토시(松島均)교수, 다카쿠라쇼(高倉翔)교수, 시모무라테쓰오(下村哲夫)교수가 나왔고, 손 교육관과 박성우(朴聖雨)교수가 임석하고, ( 손 교육관과 내가 마주 앉아 인사를 나누고), 이력서와 서류를 건네고 두 시간 가량의 문답과 대화가 있었다.

리고( 결과,) 며칠 뒤에 「객원 연구원」(외국인 연구교수) 발령장을 받았다. 상근은 하지 않지만( 않고) 보수 없이 연구 토론 학습할 수 있는 편리한 직책에 임명된 것이다. 기간은 2년간(1984.2.1.~86.1.31)이었다. 뒤에 안 일이지만 일본에서(의) 교수 또는 연구원이란 직위는 함부로 발부되지 않는 귀한 것이다(으로 인식되어 있지만). 내 경우는 일본에서 (매우) 명성 높는 「문부성 사무차관」의 예우로 (중히) 대우한 특례라 한다.

그 후 2년간, (마침) 동경도립(都立)대학에서 박사과정 중인 후배 김용만(金龍滿, 뒤에 동경한국학교 교장)님과 함께 자주 교육학과를 방문 출석하고 지도교수와 여러 교수를 만나 토의하고 지도받았다. 그 과정에서, 인권의 하나인(로서) 「국민의 교육권」의 중요성에 (특별한) 관심을 집중하고 연구주제로 삼기로 하였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교육권 연구에 초보적인 상황이었다. 나는 관계(되는 일본)서적을 파고들고 한국 교육법의 현실과 그 역사를 거슬러 공부하다가, 상해임시정부가 UN의 세계인권선언(1948)보다 7년 전에 공포한 「건국강령」(1941)에서 「국민의 수교육권(受敎育權)」이 명문화되어 있는 것을 처음 찾아냈다. 그 입안자는(인) 조소앙(趙素昻, 본명 趙鏞殷)선생 이었다.(름도 처음 접했다.)

 그리하여 「한국교육법의 성립과정에 관한 연구(교육권의 인식과 보장을 중심으로)」라는 학위논문을 작성하여 심사를 신청하여(였다. 이는) 그 대학의 교수들로부터 모범 논문이라는 칭찬을 받으면서 통과되었다.

1986년(56세) (*의) 3월 25일(의) 쓰쿠바대학 졸업식장에서(에 마지막 출석하여) 늦깎이 교육학박사 학위를 받았는데,(다.) 이날 후꾸다(福田信之)학장(총장)이 따로 불러 차 대접을 하면서 특별한 찬사와 격려를 받은 기억(생각)이 남아있다. 이후 마노교수는 타계하셨지만 박 교수님을 위시한 여러 은사들과의 교류는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고 있다. 그동안 일본을 왕래하면서 한중일 교육사 연구가 아베(阿部洋)교수와 동경대학 와다하루키(和田春樹)교수, 최서면(崔書勉)선생이 계신(의) 동경한국연구원 도서관으로부터 많은 자료를 얻은 일과, 손상철님에게 새삼 감사드린다.

그 네 번째는, 서울교육대학 학장(*총장)취임이다. 교원공제회에서 일한지 1년 반 만의(에 갑자기 다가온) 경사였다. (정초가 두 번 바뀌고 한창 근무에 열중하고 있던) 퇴직 후 정초가 두번 바뀐 어느 날 문교부의 손성식(孫成植) 기획관리실장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용인즉, )서울교육대학 학장(뒤에 총장으로 개칭)으로 옮기지 않겠느냐? 라는 것이었다. 교육학박사 학위도 완성되어가고 있고 과거(의) 사범학교와 초등교원 경력 등으로 보아 꼭 알맞은 직책으로 생각된다는 것이다(간곡한 말도 잊지 않았다). (나는 대환영이라고 대답하였다.)

 나는 당시(의) 손제석 장관의 승낙 받는데 자신이 있어 대환영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리하여 1985년 4월 1일자로 발령받아 학장에 취임하였는데, 그 뒤에 알고 보니  히든 스토리가 있었다.  손 실장은 권이혁 장관 시절에 국장에서 1급인 실장으로 승승장구하다가 1985년 2월에 장관이 손제석 장관으로 교체되자 기획관리실(살)장 퇴임할 때가 온 것으로 (으로 공직을 마감해야 할 시기를 맞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때 마침 서울교대 학장 자리가 비게 되자 그 자리로 나를 적임자로 추천하고, 공제회 이사장 자리는 자신이 옮겨간 것이다.(  된 듯하다. 그래서 자기의 전 적지를 공체회로 지목하고, 나를 교육대학장 적임자로 보고 권고해 온 셈이었다.) 그 결과는 나에게도 알맞은 길이라 매우 만족스러운 재배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속담에 고랑 치고 가재 잡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사건이었던 셈이다.

 

내 후임 공제회 이사장은 놀랍게도 바로 그 손성식 실장이 부임하였다. 그 뒤에 알고 보니 손 실장은 권이혁 장관 시절에 국장에서 1급인 실장으로 승승장구하다가 1985년 2월에 손제석 장관으로 교체되자 기획관리살장 퇴임으로 공직을 마감해야 할 시기를 맞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때 마침 서울교대 학장 자리가 비게 된 듯하다. 그래서 자기의 전출 적지를 공체회로 지목하고, 나를 교육대학장 적임자로 보고 권고해 온 셈이었다. 그 결과는 나에게도 알맞은 길이라 매우 만족스러운 재배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속담에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사건이었던 셈이다.)

 

 여기서 잠시 되돌아보면 사람 관계는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일처럼 중요한 것이 없다. 문교부 퇴임 후 신방현 교수의 단국대 대학원 '교육 법규' 강의 제의가 없었으면 강단에 설 일이 없었고, 대한교원공제회 이사장 취임은 이규호 장관의 배려라 하겠지만, 1984년 진주사범 후배인 손상철 당시 동경한국학교 교장의 쓰쿠바대학 박사학위 도전 권유가 없었다면 쓰쿠바대학 교육학 박사학위 취득이 없었을 것이고, 그 박사학위 덕분이지만 문교부 후배 손성식 기획관리실장 제의가 없었다면, 언감생심 서울교대 학장 진입은 불가능했을 것이고, 그 뒤 이야기지만, 포천 대진대학 초대 총장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인생사는 바다의 파도 같다. 한번 작은 파도가 발생하자 줄줄이 파도가 이어져 간다.

 

 세상 살아보니 뚝배기 깨고 국 쏟는 불행도 있지만, 부처님 살지고 파리하기는 석수(石手)에게 달렸다고 사람 잘 만난 행운도 있다.

 

 나의 서울교대 진입은 학계와 대학진입의 두 번째인 셈이다. 그러나 (었으나) 2년 근무 후에 87년의 거센 학생 운동기를 만나 좌초하고 말았다.(꺾이고 만다.)

 당시는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대통령의 교체기였다. 요동치는 6월항쟁(6.10)을 만난 것이다. 25년간에 걸친 나의 공직생활 전부는(가) 박정희시대 20년과 최규하 전두환시대 7년의 산업화시대였다. 나라가 단군 이래 최고의 부흥기를 맞은 시대를 충실한 일해 온 나는, 좌익세력이 섞인 민주화세력과는 물과 불의 관계였다. 민주화 혹은 진보란 미명으로 등장한 좌파적인 새로운 움직임은 시간이 지나면 역사가 이 나라에 도움이 되었는지 걸림돌이 되었는지 그 본질을 밝혀질 것이다.

  사실 이런 움직임은 내가 문교부 재직시 주장했던 '졸업정원제'만 지켜졌어도 발생할 수 없는 일이다. '졸업정원제'는 빈둥빈둥 노는 학생은 졸업할 수 없도록 한 조치이다. 그 부담 때문에 대학생들은  도서관에 파묻혀 공부에 열중하고 한가하게 밖으로 떠돌며 학생운동할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류와 현실은 항상 이상이나 꿈과 일치하지 않는 법이다.(의 노도를 만나 버텨낼 수가 없었다.) 밖의 영향을 받은 학생세력과 반정부 성향의 내부 교수들의 합세로 서울교육대학은 교원양성대학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나의 대학 진입의 재출발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 세력들은 지금도 전교조세력으로 살아남아 준동하고 있어 아직도 우리나라 교육 현장에 미결의 숙제로 남아있다.( 다.)

다만, 그 기간 중에 「대한교육법학회」의 설립 발족에 힘을 쏟고 그 초대회장으로서 학술대회와 학회지 「교육법학연구」를 창간하고 지금까지 20년의 발전을 거듭하고 있어 다행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교대 재직 시에 출발시킨 「한국초등교육학회」는 수년 뒤에 문을 닫고 말아 아쉽게 생각한다.

그 다섯 번째는, 진로문화재단의 이사장직을 잠시 맡아 활동한 일이다.(하였다. 진로 소주로 유명한) 진로재단에서 장진호(張震浩) 회장으로부터 연락이 와 만났더니, 그 단체의 문화재단의 새 이사장을 맡아달라는 것인데(이었다. 한가한 재단이었으나 회사경영을 이익금을 희사하여) 진로는 전국 대학의 장학금 지급과 학비 보조 등 기초적인 육영사업을 막 개시한 시기였다. 장 회장은 이런 장학재단(러한 간접지원) 이외에 회사의 발전에 발맞추어, 국내 대학을 설립하거나 기설 대학을 인수하는데 뜻을 두고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서울시내 유수대학교의 인수에 정보를 수집하고 진행을 서두르고 있었다.(는 것을 느끼기도 하였다.) 1987~90년 사이(의 한) 3년 봉직한 후 자퇴하였다.(여 만에 자퇴하는 바람에 인연이 끊어지고 말았다.)

그 여섯 번째는, (주)국정교과서(의) 이사장직을 3년간(1988.1.5.~91.1.5) 맡은 일(특례)이다. 당시의 문교부 장관 비서실장으로 있던 고시 후배 이원우(李元雨)실장(현재는 꽃동네 대 총장)의 깊은 배려 덕분이다.(의 손길이었다.) 그는 (뜻밖의 나의) 내가 서울교육대 학장에서 물러나자( 퇴임으로 마음의 상처를 입었으리라 동정하고 위로하고자,) 서명원(徐明源)장관에게 건의하여 승락을 얻고 관계국장과 국정교과서 사장과도 협의하여 선임절차를 거쳐 나를 (주)국정교과서 이사장으로 취임하게 한 것이다. 국정교과서 이사장 일은 사장이 따로 있어 이사회 열릴 때만 나가는 직책이었으나,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다.

 

끝으로 이 과도기 10년간에 그동안 밀려온 저작활동을 정리,(시작하여) 여러 저서를 출간하였다.

(함으로서 과거를 정리한 흔적이 남았었다.)

 차관이 편찬위원장을 맡아 진행해온 교육개혁 소개서인 「80년대의 한국교육개혁」(pp360)을 퇴임 전날 출간하였다. 퇴임 후에는 「교육개혁에서 교실개혁까지」(pp440, 1984) 「소련한족사」(pp360, 1989) 「7. 30 교육개혁」(pp477, 1991) 「한국교육정책개발사」(pp1061, 1989) 「전환기의 한국교육」(pp1451, 1991) 「아동의 권리협약」(pp260, 1991) 등이 그것이다. 또 그 기간에 회갑기념 출판기념회도 가졌다.

이상과 같이 공직 퇴임 이후 많은 (변화와 시련 속에서도) 인연들의 성원과 조력에 힘입어 수많은 일을 이루었다고 자평할 수 있겠는데,(다 하겠다.) 무슨 예정이 있어 이런 일을 한 것은 아니다. 다음을 준비해서도 아니었다. 다만 지난 일을 매듭짓고자 하는 마무리로 생각했던 것으로 (스스로) 짐작해 볼 뿐이(었)다.

(그런데도)  동안  뜻밖에(도) 옛 인연들이 나서서 예고도 없이 은혜와 도움을 주는 바람에, 공직을 떠난 낙엽인생에게 용기와 희망을 더해주어 많은 열매를 맺게 해 준 점에 감사드린다.(주었다. 뒤에) 뒤돌아보니 (이) 퇴임 후 10년간(53~62세)은 관직을 정리하는 동시에 대학 총장으로 나서는(안착하는) 준비기간 이었던 것이라 싶다.

 (연습기간으로서의 몫을 다한 행운의 10년간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27. 평생 매일 학습(의 삶과 4학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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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90을 바라보면서도 매일 공부한다. 무슨 공부꺼리라도 만들어 쉼 없이 공부한다. 신문도 정독하고 빨간 밑줄을 긋고 스크랩을 해둔다. 초 중등의 기초교육을 마치고 교직에 뛰어들었을 때부터 나의 부족함을 통감하고 기회나 여가만 생기면 언제나 새로움에 도전하는 것이 습성화되어 나갔다. 언제나 배울 것이 항상 넘쳐났다. 그리하여 그 습성이 굳어져 결국에는 「평생 매일 학습」이라는 좌우명이 생겨나게 되었다.)

 

 나의 20대 10년은 교직에 적응 훈련한 전 5년(진주시대)과 새로운 두 고시에 응시하는 후5년(고시공부와 야간대학 시대)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뒤이은 부산의 한 5년도 두 가지 고시공부를 개척하느라 열성을 쏟았다. 하나는 고교교사 검정고시를 위한 국사 동양사 서양사 공부였고, 뒤이은 새 공부는 고등고시 행정과 4부 응시 과목을 위한 헌법 행정법 교육학 국사였다. 부산 5년은 이 두 시험을 위한 매일 공부에 영정을 쏟아 성과를 거두었다. 그 뿐 아니다. 대학과정을 마치느라 피란 온 야간대학에 진학한 것이다. 이리하여 법학사 학위를 거두었다., 이 부산 5년은 주경야독으로 교직과 면학과 고시 3중고를 동시에 치룬 시절이었다. 이와 같이 나의 20대 10년은 직장 적응용과 고시 응시용 공부에 소비하게 된다.

나의 30대도 위 20대의 패턴을 되풀이 한다. 전5년은 문교부에서 부과 받은 새 업무에 적응하기 위한 실무 공부에 힘을 쏟고, 후 5년은 석사과정에 도전한 시기였다. 낮에는 과장이라는 직책을 수행하고 밤에는 신촌의 연세대 경영대학원 석사과정에 도전하였다. 역시 주경야독의 연속이었다. 학위논문은 「문화재관리특별회계의 개선방안연구」였다.

40대의 과장 국장 원장 차관 시대에는 주경야독이 불가능하여 공무에 전념하였으며, 차관 시절에 중화민국(대만) 중흥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를 받는데 그쳤다. 그리고 1983년에

 (중앙청 문을 나서고 말았다.)

차관 퇴임 후 일본 쓰쿠바(筑波)대학(일정 때의 동경고등사범학교) 외국인 연구원이란 직명으로 인연을 맺고 56세(1986)에 학위 논문 「한국 교육법의 성립과정에 관한 연구」를 제출하여 교육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와 같이하여 법학사 경영학석사 교육학박사 명예법학박사, 모두를 갖게 되어 공부와 학위의 한을 풀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평생 매일학습’이란 좌우명의 덕택이며 그 성과였다 자부하고 있다. 명예박사를 제외한 학위 셋은 서로 단계를 이루는 제도여서 그 계단을 순차 밟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즉 학사 없이는 석사를 얻을 수 없고 석사 없이는 박사를 딸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학문 간에는 연계성과 복합성이 있어 그 종류는 다를수 있어 나의 경우는 학사는 법학, 석사는 경영학, 박사는 교육학으로 각각 그 분야가 다르다.

 

 평생 공부하고 살아온 습관이 몸에 배여, 나는 지금 90을 바라보면서도 매일 공부한다. 무슨 공부꺼리라도 만들어 쉼 없이 공부한다. 신문도 정독하고 빨간 밑줄을 긋고 스크랩을 해둔다. 초 중등의 기초교육을 마치고 교직에 뛰어들었을 때부터 나의 부족함을 통감하고 기회나 여가만 생기면 언제나 새로움에 도전하는 것이 습성이 된 것이다.(화되어 나갔다. 언제나 배울 것이 항상 넘쳐났다. 그리하여)

 그 습성이 굳어져 나는(*결국에는) 「평생 매일 학습」이라는 좌우명을 갖게 되었다.

(*이 생겨나게 되었다.)

 

 우공이산 (愚公移山)의 고사()가 떠오른다.

'열자(列子)' <탕문편(湯問篇)>에 나오는 이야기다.

 태항산(太行山)· 왕옥산(王屋山)은 둘레가 700리나 되며 기주(冀州) 남쪽과 하양(河陽) 북쪽에 있는 산이다. 두 산 사이 북산(北山)이라는 곳에 살고있던 우공(愚公)이란 사람은 나이가 이미 90세에 가까웠다. 이 두 산이 가로막혀 돌아다녀야 하는 불편을 덜고자 자식들과 의논하여 산을 옮기기로 하였다.

흙을 발해만(渤海灣)까지 운반하기로 했는데, 한 번 왕복에 1년이 걸렸다.

이것을 본 친구 지수(智搜)웃으며 만류하자 그는 정색을 하고

“나는 늙었지만 나에게는 자식도 있고 손자도 있다. 그 손자는 또 자식을 낳아 자자손손 한없이 대를 잇겠지만 산은 더 불어나는 일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언젠가는 평평하게 될 날이 오겠지”

하고 대답하였다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산신령이 깜짝 놀라서 옥황상제에게 이 일을 말려 주도록 호소하였다.

 그러나 옥황상제는 우공의 정성에 감동하여 가장 힘이 센 과아씨의 아들을 시켜 두 산을 옮겨, 하나는 삭동(朔東)에 두고 하나는 옹남(雍南)에 두게 하였다고 한다. 

 

28. 서울교육대학의 회상

 

29. 대한교육법학회의 창립과 초대 회장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교육헌법 60주년을 기념하는 오늘의 학술대회를 축하하며, 이시우 학회장을 위시한 대한교육법학회 운영진과 회원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또한 「헌법 제정 60주년, 교육법학적 성과와 과제」라는 주제를 걸고, 논의하는 뜻 깊은 이 자리에 참석한 다수의 대학원생 여러분에게 교육법학은 공부해볼 만한 학문이라는 권학하는 의미에서 우리나라 교육법학의 발생사를 짧게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르네상스 이후 인류는 세 번의 큰 생각을 바꾸면서 近世 近代 現代라는 3시대사를 꾸려 왔습니다. 즉 중세의 神으로 부터 해방된 근세 인류는 먼저 세속적인 절대군주 밑에 뭉쳐 민족국가를 만들고 近世라는 절대군주시대를 열었고, 오랜 뒤에 다시 프랑스 혁명을 일으켜 自由를 최고의 가치로 하는 近代를 꽃피웠습니다. 나아가 20세기 들어 人權을 비롯한 權利를 지고의 가치로 삼는 現代를 전개하여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국가주의,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권리사상이라는 시대사조의 전환에 따라, 우리 교육도 교육의 의무시대와 교육의 자유시대를 거쳐 지금의 교육의 권리시대로 교육사적 발전을 거듭해온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한국인에게는 언제부터 현대 즉 교육받을 권리 시대를 노래하게 되었을까요. 그 뿌리는 약 7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국주의 일본의 최후 발악으로 우리의 해방과 復國이 어슴푸레 보이던 1941년에 선포된 상해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건국강령」에서 免費 受學權(무상으로 교육받을 권리)과 學權이라는 성문의 권리선언을 한 것이 그 효시입니다. 임시정부 최고의 이론가였던 素昻 趙鏞殷선생에 의하여 기초된 것입니다. 교육은 국가와 왕에게 충성하기 위하여 모든 국민이 「의무」로 받아야 된다는 종래의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교육은 국민의 「권리」라는 바뀐 생각을 성문화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어져 임시정부 마지막 헌법인 1944년의 제6차 헌법에 就學要求權이라는 단어로 첫 헌법화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국토와 국민이 없던 임시정부로서는 그 실현수단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始祖다운 그 선언적 의미는 큰 것이었습니다.

그 후 1945년의 해방과 조국 광복 후의 미군정 3년간은 군국주의 일본 교육으로 특정되는 「교육의 근세」를 청산하고 자유 민주 교육을 처음으로 받아들여 「교육의 근대」로 옮겨간 우리의 대전환기였습니다. 그 새벽의 선두에는 吳天錫선생이 있었습니다. 일본 식민지 교육체제를 쓸어버리고 자유민주 교육이념과 제도를 깔았습니다. 그리하여 이 체제를 이어 받은 1948년 건국기의 대한민국 헌법은 「국민의 교육받을 권리」를 명문화한 교육헌법을 제정하였으니 이는 兪鎭午선생이 기초한 것으로서 비로소 진정한 「교육의 현대」를 활짝 열게 된 것입니다. 유진오 선생이 참고한 문헌에는 서구의 선진국 헌법과 우리 임시정부의 헌법도 들어 있어 조소앙 선생의 선각사상을 계승한 흔적이 역력합니다. 그 당시에 일반 법학계가 제안한 헌법안은 교육의 의무 만을 규정하였던 점으로 보나 제헌국회에서도 교육의 의무와 권리의 차이에 관한 질문 하나 없었던 것을 보면 이 권리조항은 선각자들의 개념이었을 뿐, 일반 학계나 정치인뿐 아니라 국민의 인식을 넘어선 신 단어였다고 생각되기도 합니다.

건국 후 많은 논의를 거쳐 그 이듬해에 초대 문교부 장관 安浩相 선생에 의해 「1949년 교육법」이 제정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초등교육을 받을 권리」로 명문화되었습니다. 권리의 내용이 헌법보다 축소된 셈이지요. 요새 같으면 위헌법률이라 하여 시끄러울 것입니다. 하기야 헌법을 만든 유진오선생 조차 교육권은 국민의 受益權이라고 논설할 정도였으니 교육권에 대한 문교부와 국회의 인식수준을 알 수 있다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교육권이라는 시대정신은 구미에서 수백 년간 걸려 발효된 사조인데도 우리는 완성품을 순식간에 받아들여 반세기 밖에 숙성 안 된 신품종인 셈입니다. 여기서 四字成語 하나 만들겠습니다. 교육권의 역사 즉 현대 교육법제사의 선구자 네 분을 기억하기 위한 고사성어 입니다. 「趙吳兪安」이 그것입니다. 우리 현대 교육법학의 조상 네 분입니다. 영원히 기억합시다. 이로써 현대사상의 근간이 되는 권리 사상의 약사 70년을 묶어봤습니다만 교육헌법 이후에도 학계나 일반 국민의 교육권에 관한 견식은 이 높이에 머문 채로 일본 식민지 기간의 길이만큼의 ‘또 36년’ 이라는 휴식기간이 흘러갔습니다. 모든 국민이 교육권이란 소리만 듣고 눈을 뜨지 못한 몽매한 긴 세월이었습니다.

이 긴 침묵이 흘러간 후, 계몽의 새벽닭이 울기 시작합니다. 1984년부터 동지 3인(만난 순서대로 鄭泰秀 姜仁壽 安基成)이 자주 모여 제각기 공부한 교육법 연구자료를 토론하고 급기야 일본의 선례를 참고하여 학회 발족에 합의한 후 1986년 9월 21일 고려대학교에서 19명이 모여 趙吳兪安 네 분의 뒤를 잇는 학회를 창립했습니다. 그것이 우리 「대한교육법학회」입니다. 예산 있으면 권리 있고 예산 없으면 권리 없는 상태의 「수익권 수준의 교육권」이, 이 학회 이후「기본인권으로서의 교육권」이라는 본연의 진면목을 캐고 일본과 구미유학 회원들이 모여들고 학회지 발간을 시작하여 시동 걸린 새 물결이 강단으로 교육현장으로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학회가 교육법학을 갈고 닦은 지 20여년에 다수의 교육법 관련 국내 박사학위가 태어나고 250명의 회원과 20여의 기관회원으로 하나의 학문세계를 이루어, 교육정책 교육입법 교육행정 학교행정 교육판례 교육현장 시민운동에 이르기까지 그 열매가 새 씨앗으로 확산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최초의 입법 당시에는 초안 기초자만이 알고 있던 교육권이 학습권이란 이름으로 어머니와 학생도 외치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국가가 쥐고 있던 고전적 교육권이 교사로, 또 학부모로 이동하고 그 중심에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뚝 서있는 이 좋은 가을에 우리 학회의 성과가 대학 강단은 물론, 초․중․고교의 교실 현장에 까지 살랑이는 오늘, 이 학술대회는 우리 교육사의 한 기념비적인 일이라 느껴져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회우 여러분과 학회의 발전을 기원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2008. 9. 27. 초대회장 鄭 泰 秀)

回 顧 辭

鄭 泰 秀

(본회 초대 회장)

大韓敎育法學會가 탄생의 소리를 울린 지 20년의 세월이 쌓여, 오늘 그 창립 기념행사를 갖게 되니 감개무량 합니다. 스무 살의 믿음직한 成人으로 자란 우리 學會가, 그 동안에 배출된 수많은 학자들이 은하수처럼 빛나는 이때에, 그 初期에 産婆役을 맡았던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서 自祝의 말씀을 드리게 됨을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모든 學問이 인간의 필요에 따라 生老病死를 거치듯이, 우리 敎育法學도 교육과 교육계의 필요에 따라 때를 맞춰 태동했다고 하겠습니다. 뒤돌아보면 解放과 建國이라는 준령을 넘어 정부 稼動 1년 반이 지난 1949년 세모에야 敎育法이 제정되었는데, 반년 뒤에 6, 25 戰亂이 일어나 나라가 아수라장이 되니, 그 施行令은 더 늦어져 母法이 생긴 후 3년이 지난 1952년에 겨우 정비되었습니다. 나라는 세웠지만 교육법을 위시한 法治國家의 모습을 갖추는 데에는 민족상잔이 큰 지체요인이 되었고, 폐허 위의 우리 敎育現場은 껍데기만 겨우 유지하였으니 그 알맹이라 할 敎育的 學問的 成果를 바라는 일은 過欲에 불과하였습니다.

1970년대에 들어 겨우 民生이 안정됨에 따라 교육과 학문도 몸을 가누어 脈이 뛰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敎育法學」이라는 면을 펼쳐보면, 앞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교육법이 존재는 하지만, 學制와 學期制, 교원임용 등 제도 운영에만 작용하고 있을 뿐, 일반 국민은 물론, 교육계 내부에서조차 「교육에 법이 뭐 필요한가」라는 무지한 先入觀이 팽배하여 교육법 연구에는 엄두도 못내는 환경이었습니다.

이러한 건국으로부터 교육법학회 탄생까지의 40년 세월, 교육법에 대하여 敎育界는 무관심하고 學界는 눈도 뜨기 전의 긴 세월에, 교육법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나설 사람은 敎育行政界 밖에 없는 시기였습니다. 일찍이 교육법 制定 직후에 출판되어 교육법 敎材의 始祖가 된 朴熙秉 선생의 「교육법 解義」(1950)가 나온 이후, 15년 만인 1960년대 중반부터 金在奎 金洛熉 그리고 본인 등 교육행정인 들이 實定法을 널리 알리기 위한 解說書들을 출간하였는데, 이때를 「교육법 官邊學 시기」라 할 것입니다. 이때의 해설서들은 교육학을 台木으로 삼아 헌법법을 接木하여 실정법을 註釋하고 啓蒙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두가 우리 학회로서는 先史時代의 귀한 유적들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또 10년이 지난 1970년 중반에 교육현장인 대학에서 「교육법學」을 연구하자는 提唱이 나왔는데 그것이 1976년에 「새 교육」誌에 실린 安基成 교수의 논설이었습니다. 안 교수는 일본을 본으로 삼아 주창한 것으로서 이것이 우리 교육법학의 학문적 독립을 외친 효시였습니다. 그러나 이 외침에도 교육계는 묵묵부답으로 또다시 10년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1980년대에 이르러 새 氣運을 맞게 되었습니다. 제가 늦깎이로 일본에서 敎育權이라는 새 視角으로 교육법의 學問化에 도전하고 있을 때, 姜仁壽 교수(당시 KEDI 재직)의 희귀한 교육법 관계 석사논문을 接하고 同志를 처음 발견한 감격으로 손짓하여 교육법의 토론을 시작한 것은 1983년 가을이었습니다. 그 후 안기성 교수와 셋이 자주 모임을 갖고 같은 관심사를 토로하던 차에 우리 세 사람은 교육법학회 創立의 논의를 시작하였고, 마침내 金洛熉 張基玉 安圭哲 表時烈 朴在允 許在郁 崔允眞 등 여러 인재들이 합류한 기억이 납니다만, 일일이 다 거명하지 못하여 미안합니다. 그리하여 1986년 9월 21일(일요일) 고려대학교에서 19명이 모여 대한교육법학회 創立總會를 열어 會則 통과와 任員 선출을 마치고 學會가 출범하였습니다. 그 해 말에 제가 있는 서울敎大에서 제1회 학술발표회를 개최하고 1988년에 이르러 학회지 『敎育法學 硏究』를 創刊하게 되어 비로소 하나의 학회로 그 터전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서예가 李熙贊씨의 글씨로 새 간판도 걸고 학회지 표지 제호도 썼습니다. 이 때 初代회장의 광영을 입은 저는 보람으로 벅찼었습니다.

사실 兪鎭午 선생이 起草한 「1948년 헌법」에는 敎育條項이 명시되고 그 속에 現代를 상징하는「국민의 敎育權」도 조문화 되었지만, 국민과 교육계의 權利 認識은 이 水準에 미치지 못함으로서 약 40년간 死文化되어 있다가, 1980년대 중반 이후 우리 學會人의 입과 붓을 통하여 비로소 「교육 받을 권리」라는 낱말에 피가 돌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때 까지는 우리 憲法에 국민교육권이 있는지 없는지 잘 모를 뿐 아니라, 敎室에서는「교육은 국민의 의무」라고 그릇 가르치고 있는 실정이었습니다. 지금은 교사뿐 아니라 주부들도 외치고 있는 「학습권」을 말입니다. 그 후 교육법에 관한 관심이 생기기는 했지만 교육법학을 교육행정학의 심부름꾼쯤으로 보는 시각이 많았습니다. 제가 속해있던 敎育行政學會의 중진으로 부터 「교육행정학이면 됐지 교육법학은 또 뭡니까」라는 말을 듣기도 하는 환경에서 우리 교육법학이 出生 신호를 올린 것이었습니다. 학회 발족 후, 안기성 교수와 저는 일본 교육법학을, 표시열․최윤진 교수는 미국의 그것을, 박재윤 박사는 영국의 것을, 許宗烈 교수는 독일의 것을 각각 도입하는 물꼬를 트고 점차 國際化의 길을 넓혀, 1990년대부터는 新進學者들의 참여도 증가하여 오늘과 같은 발전을 보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우리 학회 창립 초기를 돌아보는데 그치고자 합니다.

이제 우리 학회에는 少壯학자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교육법학」이라는 새 학문분야를 獨創的으로 개척해 나가면서, 많은 論文과 학술발표회, 學術誌와 單行本 발간 등 실적을 꾸준히 축적함으로서 부러움을 사는 학회로 발돋움 하였습니다. 더구나 特筆할만한 것은, 약 50년간 운용해 온 「1949년 교육법 체제」를 「1997년 교육법 체제」로 대전환하는 교육법 全面改定立法에 끼친, 강인수 교수를 위시한 우리 학회인 들의 공로는 우리들의 큰 자부심이라는 사실입니다. 다 함께 잊지 못할 자랑꺼리라 할 것입니다.

앞으로도 밖으로는 지금 계속 중인 比較敎育法 연구와 인접학문과의 學際的인 연구를 지속하면서, 國家別 교육법제의 변화를 신속히 소개하고, 안으로는 「敎育條理」 개발과 「敎育判例」 형성에 더욱 천착함으로써 인간교육과 민주교육 발전에 큰 기여가 있기를 기대하며, 아울러 나날이 증대되어가는 교육 當事者 간의 敎育現場에서의 법적 갈등 문제에 대하여 교육법학이 해결할 수 있는 特殊論理 개발에 힘을 기울여, 우리 학문의 獨自性과 實效性 그리고 寄與度를 높일 것을 감히 注文드리는 바입니다.

끝으로 歷代 任員團과 學會誌 편집진 여러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리고, 허종렬 현회장과 임원 여러분이 우리 학회 20주년 기념행사를 훌륭하게 기획 집행하시는데 대하여 敬意를 표하며, 회원 여러분의 건강을 빌면서 회고의 인사에 가름하는 바입니다. (2006. 9. 9) 대한교육법학회 역대 회장(1986.09.22 ~ 2015.12.31)

역대

임기

성명

소속

초대

1986. 09. 22 ~ 1989. 04. 13

정태수

서울교육대학교

제2대, 3대

1989. 04. 13 ~ 1994. 07. 02

안기성

고려대학교

제4대, 5대

1994. 07. 03 ~ 1998. 12. 31

강인수

수원대학교

제6대, 7대

1999. 01. 01 ~ 2002. 12. 31

표시열

고려대학교

제8대

2003. 01. 01 ~ 2004. 12. 31

박재윤

한국교육개발원

제9대

2005. 01. 01 ~ 2006. 12. 31

허종렬

서울교육대학교

제10대

2007. 01. 01 ~ 2008. 12. 31

이시우

서울여자대학교

제11대

2009. 01. 01 ~ 2010. 12. 31

고 전

제주대학교

제12대

2011. 01. 01 ~ 2012. 12. 31

이기우

인하대학교

제13대

2013. 01. 01 ~ 2014. 12. 31

염철현

고려사이버대학교

제14대

2015. 01. 01 ~ 2016. 12. 31

이종근

동아대학교

 

30. 대진대학교 창학기의 회고

선생님 총장 재임 시 사진 서너장 삽입하였으면 좋겠습니다.

1. 「대진」의 동이 틀 무렵

「대진대학교 10년사」의 특별기고 주문을 받고 펜을 드니 깊은 감회 속에 빠져든다. 나의 교육일생의 마지막 작품이 되겠기에 축적된 모든 힘을 쏟아 한국 으뜸의 대학 하나를 후세에 남기고자 달려든 11년 전을 뒤돌아보니, 보람과 悔恨, 상반된 두 회고감이 교차함을 느낀다. 현재에서 돌아보는 과거는 언제나 미숙과 부족 그것일 뿐이다.

대진대학교는 번창 융흥기의「종단 대순진리회」(도전 朴漢慶 님)가 수백만 명이 낸 성금으로 설립하여 사회에 기부한 학교로 종단 교육사업 중의 꽃이라 할 수 있다. 정부가 수도권 억제정책의 일환으로 고수해 온「한수 이북 4년제 대학설립 절대금지」라는 법령에 특례를 내어,「漢水 이북에 1개 대학만 설립」이라는 예외규정을 만들어 내 준 1989년 말의 예비인가에서, 10개학과(입학정원 400명)를 배정받고, 開土祭(91. 1. 27, 왕방산)와 기공식(92. 4. 13)을 거쳐, 착공 10개월 만에 현재와 같은 위용의 건물군을 완성하고 제1회 입학식(92. 3. 11)을 함으로서 개교하게 되었다.

나는 鄭大珍 선감(뒤에 이사장)의 추천과 박한경 이사장의 결정으로 총장 예정자로서 91년 1월 21일에 첫 출근하여 약 1년간의 개교준비에 착수하였다. 당시 曺泰龍 법인사무국장(뒤에 李順範 국장으로 변경되었다가 다시 되돌려짐)과 裵圭漢 교수와 함께, 학칙․장기발전계획․교육과정․직원배치․최초의 교수임용․최초의 학생모집 공고 순으로 개교준비를 진행해 나갔다. 포항공대가 1년 먼저 개교한 바 있어 제2의 포항공대를 이상으로 그리면서 의욕적으로 일하였다.

2. 종교와 교육의 시각 차, 그리고 그 합류

대순진리회와 나와의 만남은 실로 생소한 것이었다. 이제와 돌아보니 그 만남은 종교지상주의와 교육제일주의의 첫 상면이며, 대학을 잘 모르는 종교인과 종교를 모르는 교육인과의 해후였다. 그리하여 내가 본 첫 번째 문제는 개교 당시의 여느 대학과 같이, 종단․재단․학교의 3자 관계의 불균형관계였다. 종단 측에서 보는 대학은 종교가 만든 피조물로서 부속체로 인식하고 있었고, 법인은 명목만 유지되고 있었다. 법인과 학교가 이렇게 乳兒인 시기의 종단의 위상은 설립 모체로서의 강력한 어머니였다. 나는 이러한 상황을 인정은 하되 교육 그 자체의 종속성은 수긍할 수 없었다. 어찌 처음부터 상통할 수 있었겠는가.

둘째로 운영상의 동맥경화증이 문제였다. 백 년 앞을 내다보고 한 대학의 레일을 까는 일은 전문가와의 협의와 조정과정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이사장직을 종교 최고 지도자인 도전님이 겸임하고 있어 만나기조차 어려워, 그 대안으로 법인 사무국장 라인을 통한 간접대화 방식의 의사소통 경로가 가동되었다. 이 경로로 인한 불확실성, 불완전성, 곡해, 와전, 지체는 부득이한 것이었으며, 종단의 엄격한 상하관계 때문에 의사의 상달은 지난하고 하달사항은 총장에 의해 거부되는 수도 있어 中間子의 곤경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앞에 말한 두 가지 요인은 시간이 흐르자 양측의 시각차가 하나하나 표면화하여 냉각과 우려의 도가 높아만 갔다. 이렇게 되자 나는 소신대로 밀고 나가겠다는 태도로 격화되어 갔다. 희생적 배수진을 치게 된 것이다. 내 스스로를 반 교육적인 존재로 교육사에 남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내부적 격랑과 폭풍은 정점에 도달했다.

셋째로 그러나 2~3년이 흐르면서 점차 상호 이해의 폭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나도 종교측 입장을 약간씩 이해하게 되었고, 종단과 법인에서도 종교 일변도가 아닌 교육 중심으로 선회하였다. 교육을 도구로서가 아니라 교육 그 자체의 목적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 결과는 안목의 긍정적 개선으로 나타났다. 대학의 본질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대학교육 이해 마인드로, 종교 위주체제에서 교육위주 체제로, 종단 직위 우위에서 학교직위 위주로, 종단 종속 제계의 법인이 차차 자주운영으로, 직원우위에서 교수우위로, 교수임용의 자의성에서 교수단 평가제로, 교수의 초기 불안정에서 수업과 연구 분위기 정착으로, 학생 지배 사고에서 학생중심 사고로, 反 大巡성향과 운동권으로 경사된 총학생회가 면학 분위기로, 경기 북부라는 지역대학에서 국제화 추세로, 큰 물줄기가 요동치면서 새 방향감을 잡아나갔다. 개교 3년 만에 양측이 태산준령을 넘을 것이다. 새 살림의 과정에서 생긴 진통은 높게 날기 위한 움츠림이 아니었나 한다.

넷째로 특기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 대학 창학의도면에서 비추어 본 상호 부조관계의 설정 문제이다. 종단이 이 대학을 만들 당시에는 敎勢확장의 꿈을 갖고 있었다. 이는 양 치중의 종단의 생태적 필연 현상이었다. 그러나 이 근시안적 욕구에 대하여는 저항전선이 크고 넓게 형성되어 있었다. 이 욕구의 상대편에는 대학생․학부모․사회․타종교 등 더 많은 세력이 대치하고 있어 학교의 생사문제가 걸린 중대사였다. 종단인이 이 꿈을 급히 이루고자 행동할 경우 대학은 곧 사회로부터 외면당하여 찾는 사람이 없게 됨으로, 우리 대학의 살길을 신중히 설정해야 했다. 나는 우리 학교가 설립자 측에 보답(?)할 길은 학생의 대량 신도화나 교세의 직접적 확대를 돕는 것이 아니라 신생 종교의 장래에 대비한 교리연구, 학승 고승 등 지도층과 포교자 양성의 기반조성에 있다는 視座를 굳히고 있었다. 이것이 종단과 대학 간의 경계선이며 공존과 상호보완 관계라고 믿고 있었다. 학교도 살고 종단도 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大巡眞理會는 신흥종교로서「교(敎)」에 도달하기 위한 「회(會)」의 단계에 있는 점과,「민족종교」단계에서「보편화․세계화」단계로의 발전과정에 있는 점이 그 필요성이다. 마찰음과 폭발음도 많았으나 결국 상호 이해로 시각차가 좁혀져서 學生 布敎는 중단되고, 제1차로 부담이 적은 P․F제로 일반 학생에게「대순사상」이라는 교과목을 과하게 되었다. 또 제2차로「대순종학과」를 본교 유일의 추천입학제로 개설하였고, 제3차로 대학원에「대순협동과정」을 설치하였다. 이상 세 번의 단계 격상시 마다 축적된 이론이 미흡하여 교재구성에 난점이 많았으나,「선 설과(設科), 후 교재」주의로 다소 무리하게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대순학(大巡學) 탄생을 위한 교수들의 노력도 수반되었다. 한편 정대진 이사장의 창도로 이루어진「대순사상 학술원」의 발족과「대순사상 학술논총」의 간행은 이와 궤를 같이 한 쾌거로서 교리의 집성과 개발에 큰 전진을 이룩하였다. 이와 같이 나는 교육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상호관계를 유지하면서 종단의 건학 취지를 먼 안목으로 지혜롭게 수용하려고 노력하였다.

3. 성정 멈춤병의 극복과 교세 신장

우리 대학의 심대한 기본적 외환(外患)은 낳자말자 닥쳐온「성장 멈춤병」이었다. 그것은 정부의「수도권 대학 증과 증원 동결정책」이었다. 수도권 정비법과 그 시행령, 그리고 건설부 주관의 수도권 정비 심의위원회가 그것이었다. 당초부터 규모 확대를 할 수 없는 조건하에 인가받은 우리 대학이 10개 학과 400명 수준에서 성장을 멈출 위기감과, 약간 늘어나더라도 이공계 편중 대학으로 굳어질 위험성을 직감하였다. 당초부터 정부투자로 해야 할 이공계를 이 신설대학에 짐 지우고 종합대학도 불가능으로 예고 받은 것이었다. 설립만으로도 특혜를 받았으니 더 바라지 말라는 의도인 것이었다. 그런데 사립대학은 인문․사회계가 없거나 종합대학이 아니면 유지 불가능한 것이다. 나는 그 탈출구로서 수도권 정책에 걸리지 않는 야간학과 증설에 승부를 걸어야 산다는 판단으로 이 정책을 밀기로 하였다. 야간부는 언젠가는 주간 전환할 수 있다는 나의 경험도 뒷받침되었다. 그런데 이 정책은 누구 한사람 인식조차 없을뿐더러 위기 설명을 해도 수긍하는 이가 없었다. 도리어「우리 일은 다 잘되게 되어있다. 염려 말라」는 묵살을 받을 뿐이었다. 대규모 대학, 종합대학의 꿈을 접은 것이 아니면 과신과 오만에서 나온 대응이 아니었나 한다. 나 혼자 속이 탔다. 나는 개교 얼마 후 제2차년도(1993)부터의 야간학과 신청을 건의하였으나 불가 판정이 내려왔다.「세계1류 대학을 만드는데 무슨 3류 대학식 야간부냐」라는 간단한 이유였다. 1년의 기회를 놓쳤다. 이듬해 재차 건의했으나 또 다시 불허 지침을 받았는데 역시 서울대학교는 야간부가 없다라는 이유였다. 그리되면 신생 대학으로서 치명상을 입을 것이 분명해졌으므로 나는 이사장을 직접 찾아뵙고 야간부 신설의 긴요성을 역설하였다. 즉석 즉답을 받지는 못했다. 수일 후 허락이 떨어졌다. 그리하여 1994학년도부터 주로 인문․사회계의 야간학과를 인가 받기 시작하였다.

야간학과는 수도권 규제 대상이 아니라 문교부 단독으로 증과 증원할 수 있기에, 내 친정 문교부 후배들의 도움으로 인문․사회․예술계 야간부가 연차적으로 증가하여 몇 년 뒤에는 도리어 주소야대형(晝小夜大型) 대학으로 변모하였다. 그런데 예측한대로 다소 빠른 1998년에 문교부의「야간의 주간 전환정책」이 채택되었다. 이렇게 적중해 나갈 줄이야. 그 햇살을 받아 우리 대학은 1999학년도부터는 3년간에 걸쳐 연차적으로 야간을 주간학과로 바꾸어 나가게 되었다. 야간부 개설 불과 5년 만에, 그것도 내가 퇴임하기 전에 그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렇게 일의 앞뒤가 시원하게 뚫려 나갈 줄이야.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나 혼자만의 희열이었다. 직행로가 막혀 우회로를 돌아 결국에는 성장을 멈추지 않고 종합대학으로서의 품격을 갖추게 되었다. 그 뿐이랴, 많은 학생이 야간학과를 거쳐가고 반수 이상의 많은 교수가 야간에 임용되었으나 오늘의 주간으로 모습을 바꾸어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 2․3항에서 우리대학의 대표적인 內憂外患에 관한 사항만 언급하였다.

4. 회상되는 기본정책과 6대 장점

새 학교의 틀을 짜는 일은 몇 가지 기본문제가 있었다. 첫 번째,「학과 선정 7원칙」을 들 수 있다. ① 이공학계는 정부 특혜를 기대하며 주간으로 증과하고, ② 인문․사회계는 문교부와의 조율로 야간으로 키우며, ③ 야간의 주간화를 도모하되 이 지역의 교원․공무원․군인․기업인들을 위한 야간학과는 잔류시키고, ④ 취업 잘되는 매력있는 학과를 증설하며, ⑤ 예술계 학과를 증설하며 문화의 세기에 대비하고, ⑥제1기 교수에게는 각기 그 전공학과를 개설해 드리며, 그리고 ⑦가급적 특수 대학원을 많이 설치한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로 학교행사의 설계는 초창기에 설정할 일이었다. 춘추 두 번의 학생축전, 학기당 한 번씩의 전체 교수회의. 한해 한 번씩의 교수 하계연수회, 격월제의 교무위원회, 주 1회씩의 처장회의 등이 그 대강이다.

세 번째로, 교수의 질 확보책을 둘러싼 문제도 난제였다. 이는 대학의 흥망을 좌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돌이켜 보면, 교수임용에 대한 종단의 최초 구상은 교수회망자에게 입도 후 1~2년간의 도인화 과정을 거쳐 그 분의 전공학과를 신설해 나간다는 제도였다. 즉「先 道人敎授 양성과정, 後 그의 학과신설」방식이었다. 이것은 2년여 만에 일반대학과 같이「선 학과설치, 후 교수모집」으로 시정되었다. 그러나 교수 응모 자격에 수임선감 추천 요건제도는 응모수의 격감과 질이 심히 우려되는 형편에 이르렀다. 이에 대한 나의 대응책은 박사학위 필수요건(예체능 제외)을 추가하는 것이었다. 우리 대학과 당사자들의 장래를 위한 부득이한 정책이었다. 이 정책이 어렵사리 승인되자 旣 임용자와 待機 중이던 수많은 석사들에게 본의 아닌 고통을 주게 되었다. 또한 교수임용 심사의 자의성을 제도적으로 방지하기 위해 교수심사단 평점제를 도입하였다. 이로서「교수인사 자율제」가 가동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일부 종단 측의 불만은 컸다. 총장의 작은 힘으로 교수 심사단이 매긴 평점순서대로 어김없이 낙점시키자니 무척 힘들었다. 귀하게 얻은 자율권을 교수들 자신의 혼탁으로 스스로 휴지화하는 愚를 경계해야 할 것이다.

네 번째로 민주성과 전문성을 2대 축으로 하는 대학자치의 실현도 그 필수요건이었다. 대학별 학과별 교수조직 위에 민주성을 위한 대표자 중심의 각종 행정회의, 교수의 전문성을 살린 각 전문위원회, 이 두 개의 원에 전 교수가 직․간접으로 다 참여하고, 사무직은 또 하나의 원이 되어 동참하는「3원(三圓) 시스템」을 작동한 것이다. 초기에는 총장의 단독 행정이 부득이 하였지만, 후반기에는 모든 대소사가 회의를 거쳐 이루어졌으며, 세 기둥의 정점에서의 총장의 역할은「체크와 밸런스」만으로도 지탱할 정도로 그 권익옹호를 지원하였다.

다섯 번째로 교육부․종단․대학 3자 협조로 基金을 제법 축적해 놓은 일이다. 종단 전성기에 종단 재정으로 조성된 것인데 법인회계에 130억 원이 확보되었고, 학교회계에도 연구기금 39억 원, 대외협력기금 11억 원, 특별사업기금 24억 원, 모두「3대 기금 74억 원」을 보유하고 있다. 목적 따라 사용하되 위기가 닥치면 몇 년간 버틸 수 있는 재원이 확보된 셈이다. 타 대학에서는 볼 수 없는 흐뭇한 일로 회상된다.

끝으로 10년간을 돌아보니 대진대학을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대학들이 겪은 고질병에 오염되지 않는 장점들을 가지고 있다. 회계부정(학교 돈 빼내기)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발상조차 하지 않는 재단, 개학 이래 단 한 사람도 부정입학이 없는 대학, 교수 임용에 불공정 인사의 말썽이 전무한 대학 등 세 가지 고질병이 없는 3무대학(三無大學), 또 법인으로 부터의 학사 독립성, 실험실습 시설의 우위성, 교육용 건물․중앙도서관․남녀기숙사를 미리 충분히 완비한 연후에 개교한 대학 등 세 가지 고점(高點)을 갖춘 3고대학(三高大學)임을 자랑할 수 있다. 최고 경영자의 의지가 아니었던들 이루어낼 수 없는 높은 공든 탑들이다. 또 하나의 특성은 우리대학 10년사는 종단변천사와 표리관계에 있어, 앞으로의 한국 대학사 연구에 특이한 자료가 될 소재이기도 하다.

5. 명실상부한「대학」기반의 완성

이제 우리대학은 종교와 교육의 알력상은 그림자도 찾을 수 없고 성장이 멈추어진 난쟁이도 아니다. 발전만이 기다리고 있다. 20세기 말에 태어난 조그마한 신생 대학이 가속도가 붙어 그 20세기가 끝나기 전에, 즉 1999년에 대학으로서의 기반 구축이 끝났다는 두 가지의 공인(公認)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 하나는 한 중앙지의 대학 종합평가에서 개교 8년 일천한데도 1세기가 걸려도 얻을지 말지 한「전국대학 20위」(전년도에는 28위)라는 높은 위상을 차지한, 다소 과분한 낭보를 접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때에 신설된 지 20년 미만의 후발대학 42개 중에서도 대진대가 「종합 4위」라는 높은 위상을 동시에 차지하였다. 다음으로 그 둘은 한국 대학교육협의회가 수년에 걸쳐 전국적으로 실시한 대학 종합평가에서 우수대학으로「평가인정」을 받아 명실공히 대학 반열에 오른 것이다. 이 두 번의 평가로서 우리 대학이 학문 공동체로서의 토대가 완성되었다는 합격 선언을 받게 되었다.

나의 퇴임 후 종단과 재단의 혼란기에 김병태 총장대리체제에서도 교수와 직원의 자중으로 어려움을 잘 극복하고, 내 후임에 능력과 경륜을 갖춘 홍기형 제3대 총장 총장이 바통을 이어 받았으니 우리 대학에 행운이라 하겠다. 과수원 하나를 이루는데 주인이 세 번 바뀐다는 속담이 있다. 첫 주인은 돈 들여 산을 사들이고 기반공사를 마치고는 돈 떨어져 넘겨주고, 둘째 주인은 밭을 만들고 과수를 심어 기르다가 기진맥진 물러가고, 셋째 주인이 와서 과수나무를 잘 길러 마침내 과일 수확을 시작한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 대학은 재 성장기와 수확기에 접어들었다. 나는 밖에서 즐거운 갖가지 학교소식을 접할 때마다 흐뭇할 뿐 아니라, 사랑하는 대진대학교의 한없는 웅비를 기원하곤 한다.

끝으로 나로 하여금 개교 9년간에 걸친 대진대학교의 기반구축에 생애 최후의 봉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박한경 설립자와 정대진 이사장의 은혜를 잊을 수 없으며, 성원해 주신 종단간부와 교수 직원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붓을놓는다. ^ ^^ (2002. 2. 28)

이 글은 「대진대학교 10년사」(제10편 제2장 회고담 p.480)에 게재된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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