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총장님 자서전

저서전 31-35(158페이지)

김현거사 2016. 12. 17. 08:09

31. 공개감사장

 

 

2014년 6월 나는 문교부 퇴직자 모임인 문우회 회지 <文友會報>에 <공개감사장을 드립니다>란 제목으로 문교부 23년 동안에 선후배분들로 부터 입은 은혜에 감사하는 공개 감사장을 쓴 적 있다.

미수(米壽)를 바라보며 이제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빚만 잔뜩지고 말 없이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통산해보니 나의 일생 84년은, 유소년기 20년, 교단과 학력 보충기 10년, 문교부 23년, 학계로의 과도기 8년, 대학인 10년, 시조시인 10년으로 요약된다.

(*되네요. 돌아오지 않는 것은 세월만이 아닙니다. 놓쳐버린 기회, 입 밖으로 나간 말, 돌아가신 부모도 다시 오진 않지요. 재능보다 중요한 건 끈기라 되새기면서 혼자서 애쓰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그동안 걸어온 굽이마다 수많은 은인들의 도움이 끌어주고 받쳐주고 있었다.

(는 사실을 실감하고 또 절감하면서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인생은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늦게야 깨달았(습니)다. 어항→연못→강으로, 노는 물이 커지면 몸길이도, 손가락→한뼘→한팔 크기로 따라 크는 물고기 ‘코이’처럼, 나(저)도 교단→문교부→대학으로 ‘교육일생’의 한 우물을 파면서, 진주→부산→서울로 노는 물이 달라지면서, 제 몸도 커지는 ‘코이의 법칙’의 적용을 받고 살아왔다.(네요.)

관상어 중 코이라는 물고기가 있다. 코는 작은 어항에 넣어두면 5~8cm 밖에 자라지 않는다. 하지만 커다란 수족관이나 연못에 넣어두면 15~20cm 까지, 강물에 방류하면 90~120cm까지 성장한다.

 (마시는 물도 달라졌지요. 개울물→강물→우물물→수돗물로, 지금은 정수기 물도 끓여 먹지요.)

 이러한 굽이치는 개인사의 모통이 마다 손잡아 주신 여러 은인이 있어 떳떳한 명함을 내밀면서 살 수 있었고(습니다.) 묘비에도 괜찮은 단어들을 남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유년 때부터 많은 은혜 입었고,(습니다.) 3생의 인연을 살려 내세에서나마 그 은혜의 일부라도 갚고 싶고,(습니다.) 무릎 꿇고 큰 절 올리며 깊은 감사를 드리고 싶다.

(립니다. )

그 고마운 은혜들을 하나하나 간추려본다.

 

 맨 먼저 나를 생명으로 태어나게 해 주신 아버님, 초등학교 취학도 반수 밖에 못하던 농촌에서 자라던 나를, 의무교육제도가 없던 식민지 한반도에서, 지수(智水)소학교에 입학시켜주신 부모님 은혜에 새삼 감사드리며, 그 다음 10살 짜리 장조카인 나를 가문의 기둥이 되라고 월아산 아래 금산이란 작은 시골 마을에서 큰물에서 키워야겠다고 가난하게 사시면서도 진주의 당신이 살던 집에 데려와 봉래초등학교 4학년으로 전학시킨 숙부(鄭錫宙)님의 은공을 말씀드리고 싶다.

 

겨우겨우 풀칠하며 읍내 살던 숙부님이

산골 초3 이 조카, 도시 전학 데려가니

그 길이 갈림길이었네 열 살짜리 진주 유학.

 

처음 탄 버스 기차 처음 맛본 잔치국수

톡 쏘는 후추 향이 넓은 세상 새 맛인가

가리킨 그 날의 북극성 내 일생의 전조등.

 

  그날의 첫 도시진출이 없었더라면, 요즘의 1류대학보다 귀했던 진주사범하교 진학이라는 관문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며, 그 뒤를 이은 부산과 서울로의 큰 물살도 타지 못했을 것이 명약관화하다.

 얼마 전 부산 백운묘지의 숙부 숙모 산소에 큰 절 올리고 “그때 따뜻하신 손길이 제 일생의 새출발선이었습니다” “그 후 일생의 성과를 보고드립니다”라는 요지의 고유문을 읽어 올린 적 있지만, 선대 두 분의 은공은 이로써 마음 가벼워질 수는 없다.

 

 다음으로는 진주사범학교에 진학하여 만난 김성봉(金性奉) 박해권(朴海權) 두 은사님의 은혜이다.

 김성봉 은사님은 일제 때 진주 유지들이 '나라가 망한 것은 우리 민족이 배우지 못한 탓'이라 통탄하여 장학생으로 뽑아 동경유학을 보낸 분이다. 해방 후 강단에 서서 젊은이에게 민족 정기를 일깨우기 위한 화랑도 연구서인 <花郞傳記>란 책을 1946년 저술하셨다. 화랑이란 이름의 명칭, 화랑도의 업적, 특히 쇠퇴 부분의 화랑과 풍월(風月), 향도(香徒), 남무(男巫), 사당, 남사당(男寺堂), 화랑녀(花郞女), 굿중패(乞粒), 광대(廣大), 향도군(香徒軍), 상두군(喪頭軍)등 명칭의 변화를 고려사나 이조실록 등에서 추적하여 자세히 남겼다. 그 당시 화랑에 대한 단독 저술을 남긴 분은 사학자 단재 신채효 선생과 김성봉 선생 두 분이다.

 

 

 

*참고

 

다음 글은 나의 진주사범 선배이자 사시 출제위원과 서울시립대 총장을 역임한 제자 정희채씨 글이다.


 1945년 10월 이승만 박사의 지방 순회 때 일 이다.

진주는 청년단, 부녀단, 공무원, 진주사범, 진주농고, 진주고, 진주여고, 인근의 군민까지 전부 길에 나가 환영했다. 그러다 진사와 진농의 행열이 서로 얽혀 싸움이 벌어졌다. 진농 학생 천여명이 진사로 몰려왔다. 진주사범 교장은 교기를 앞세우고, 전 교직원과 학생을 데리고 진농에 와서 사죄하라는 것 이었다.

 해방 후, 시대는 좌우익 싸움에 백주에 테러가 자행되고, 사람 목슴이 파리 목슴과도 같던 극도의 치안부재 시대였다. 싸움이 벌어지면 피차 수백명의 사상자가 예상되었다. 쌍방은 대창과 칼, 삽, 쇠스랑등으로 무장하고 벼르고 있었다.

 진사 학생들은 그런 수모를 당하느니 차라리 일전을 하고 죽자고 결정했다. 강당에 모여, 손에 붕대를 감고, 죽창을 다듬었다.

 사태가 험악하자, 약산(若山) 김성봉(金性奉) 선생님이 나섰다. 제자들 생명이 중요하니, 세번이나 진사에 쳐들어와 굴욕적 사죄를 요구하는 진농에, 당신이 목슴을 걸고, 화의사절로 가겠다는 것 이다. 선생님이 이렇게 나서자, 선생님을 모시고, 함께 가서 죽겠다며, 학생 대표도 나섰다. 박근(朴槿.전 U.N.대사), 강갑수(姜甲秀), 정구현(鄭九鉉. 교육자)과 나(정희채) 였다.

 진농에 도착하니, 진농학생들은 젊은 혈기에 전원이 손에 무기를 들고, 운동장에 집합하여, 총공격을 기다리는 살벌한 분위기 였다.

 선생님은 태연자약 조회대 단상에 오르셨다. 적의에 가득한 눈들이 선생님을 응시하고 있었다. 취하시는 태도가 조금이라도 못마땅하면, 당장 밟아죽이겠다는 것 이다.

 이때 선생님의 현하 웅변이 터져 나온 것 이다.
"친애하는 진농의 건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죽이겠다고 이렇게 모여 있는가? 여러 피끓는 젊음이, 정작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할, 왜놈들은 현해탄 너머로 사라져 버렸는데, 그 불구대천의 적은 고스라니 노쳐버리고, 이제 그대들은 내동포, 내형제를 때려죽이겠다고 이렇게 모였단 말인가.

 이것이 광주 학생의거같은 목슴을 걸고 싸워야 할 의로운 일입니까? 목슴을 걸고 조국 해방을 맞고, 그 첫번째 일이 겨우 이것 입니까. 이것이 사내로서 꼭 하지 않으면 않될 일입니까? 진사 학생들도 약세지만, 결사대를 조직해 죽기로 작정하고, 명예를 지킬려고 하고 있읍니다.

 여러분의 스승으로서, 나는 이 더러운 꼴을 내눈에 담지않고, 심혈을 기울러 키운 내 제자의 목슴을 하나라도 건지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빌다가 죽기 위해서 이자리에 왔읍니다. 싸움의 주원인은, 시장이 대열의 순서를 정해준 것을 어기고, 진농이 진사의 후미대열을 끊은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의 이 꼴을 보고는 사과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할말을 다 했읍니다. 바라는 것은 여러분의 지성 입니다. 자 이 김성봉이를 때려 죽이고, 스승의 시체를 넘어 진주 사범을 공격하시오."

선생님은 팔장을 낀채 단 위에 서 있었다. 미쳐 날띄던 천여명 학생이 숨을 죽였다. 폭풍 전야의 그 무시무시한 고요였다.

그 때 진농 학생 대표는 생각이 깊은 사람 이었다. 간단한 숙의가 끝나자, 학생들을 조회대형으로 정렬 시켰다.

"일동! 선생님에게 경례"

 힘차게 외쳤다.

"선생님! 우리들은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싸우려 했읍니다. 그러나 선생님 말씀을 듣고 잘못을 깨달았기 때문에 물러서겠읍니다. 선생님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훌륭하신 김성봉 스승님께 만세 삼창으로 진농의 의기도 보여드립시다!  만세!  만세!  만세!’

진농 교정 안은 봇물처럼 터진 만세 삼창 소리로 뒤덮혔다. 선생님은 단 위에서 울고 계셨다.

그 후 진농 대표가 오히려 진주사범에 사과하러 가서, 그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나는 이런 훌륭한 선생님이 국사공부에 진한 흥미를 심어주시어 제 일생의 든든한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 국사공부 취미가 동양사 서양사에 까지 넓혀져 문교부 시행의 고등학교 교원자격검정시험 역사과에 합격하였고, 그 후에도 국사과목이 시험과목에 포함되어있었던 당시의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는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아마 과락을 겨우 면한 답안 점수를 국사 점수가 메꾸어 합격된 것 아닌가싶기도 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저의 모든 글에는 언제나 역사의식이 늘 깔려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전에 찾아뵙지도 못하고 늙어버린 무례한 이 제자를 관용하시기 바랍니다.

 잇따라 이 두 고시에 함께 공부하면서 연습답안도 비교 토론하며 함께 응시 합격하신 선배이며 동료교사였던 김경호(金庚鎬)선생님에게도 당시의 지도와 동행에 감사드립니다.

 다음으로 박해권 은사님은 해방되던 해 중2의 국어시간에 시조를 가르쳐주셨습니다. 하여가(何如歌), 단심가(丹心歌), 황진이의 사랑가 등 고시조를 전수해 주셨지요. 그 재미를 오래 읊조리고 가족묘지의 망처(亡妻)묘 앞에 사모 시조비도 세우고 했는데, 나중에 서울교대에서 인연을 맺은 강경호(姜慶鎬)교수의 안내로 퇴직 후에 현대시조를 다시 익혀 시조시단에 올라 한 10여 년간 시조시인으로서 즐거운 여경(餘慶)을 보내고 있으면서 시조집 3권도 냈지요. 감사드립니다.

 

스승이 가리키신 북극성

 

해방이 된 해는 (되었다.) 열다섯 살이던가(기의) 사범학교 2학년 때였다. 여러 과목의 조선말 수업이 시작되었는데(다.) 그때에 새로운 여러 과목들을 만난다.

(그러나) 그 중에 나의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친 (설계용으로 밀착되어온) 두 교과목이 있었으니,(다.) 하나는 ‘국어’라는 과목이며 다른 하나는 ‘국사’라는 과목이었다. (*모두 처음 듣는 신기한 새 지식이었다.) 국어시간에는 박해권 선생님으로부터 한글과 옛 시조를 배웠고 역사시간에는 김성봉 선생님으로부터 한국 고대·중세·근세사를 들었다. 이 두 과목은 그 뒤의 내 일생에 밀착하여 나를 만들어준 교과목으로 자리잡게 되고 나의 흔적까지 남겨주는 귀한 보물이 되어주었다. 지금까지도 그 두 선생님을 잊지 못하고 감사하고 살아가고 있다.

그 앞의 일제 강점기 교육에서는 ‘국어’(하는) 과목에서 일본어문을 배우고 ‘국사’라는 이름으로 일본사를 배웠다. 다만, 초등하교 1학년 때에 ‘조선어’라는 과목이 있어 초보를 배운 일이 있었으나 곧 폐지되어버렸고, 한국사는 아예 접한 일이 없었(을 뿐이었)다.

 ‘국사’시간에는 하늘에서 구름을 헤치고 아마데리스 오오마카미(天照大神)이 내려와 일본을 건국했다는 가공된 그들의 국사를 배웠었다. 조선의 역사는 아예 일본사의 일부분으로 인식시키고 들먹이지도 않았었다. 그래서 새로운 국사에 몰입하고 열심히 귀를 기울였다. 김 선생님은 아주 재미있게 그리고 열정을 다해 가르치셨다. 국사에 관한 참고서적도 구하기 힘든 시대라 우리는 오로지 선생님 (오로지) 강의에 몰두하였다.

 

 나는 진주사범 졸업 후 교사로 취업한 후, 한 5년 뒤에 김 선생님과 재회했다. 그때 선생님은 (나는) 진양군 교육감이셨고 나는(과) 문산초등학교 교사였다. 선생님은 내 반의 연구수업에 참석하시자, '참으로 훌륭했다'고 칭찬하셨고,(로 재회하였고 연구수업에서 칭찬받고) 이에 용기를 얻어 나는 그 후에 교육청엘 찾아가서 대망의 부산 전출을 부탁드렸고 선생님이 흔쾌히 수락,( 이 일이 성사되어) 대도시 부산으로 진출하였다. 이때(의) 선생님의 배려 덕분으로 나는 또다시 진주라는 소도시에에서 부산이란 큰 물로 나가 두번째 도약을 하게 하게 되었지만, 아직까지  (사건이잔영으로 새겨지고) 감사 인사도 드리지 못한 것이 후회로 남아 있다.

후(리하여) 부산에서 공부 좋아하는 선배 한 분을 만나 고교 국사과 교원 검정고시에 응시하기로 하고 한2년 함께 공부하고 이에 합격하여 2급 정교사 자격증을 받았는데, 그때도(다. 이때에 김) 선생님이 가르친 국사(에) 동양사 서양사가 큰 보탬이 되었다.(까지 보태져서 나의 역사적 시야가 넓어지기도 하였다.)

그 후 (두 번째 계기가 왔다.) 그 국사 과목을 고리로 삼아 고등고시 행정과 4부(교육행정)에 응시하기로 공부 친구끼리 합의하였다.(한 것이다.) 국사에 교육학 헌법 행정법을 더 공부하면 되기에 만용을 부린셈이다. 친구는 2년 만에 나는 3년 걸려 이에 합격하였다. 애초에 국사 과목이 없었으면 응시의 꿈조차 꾸지 않았을 것이다. 결과를 알아보니 국사 점수가 높아 다른 과목의 부족한 점수를 보완한 결과였다.

 

 김성봉 선생님의 은혜를 20대 후반에 크게 세 번이나 입은 것이다. ①부산 진출 ②검정고시 합격 ③고등고시 합격이 그 것 이다(수확이었다). 일생을 너무 분주하게 살다 보니 그 은혜를 미쳐 깨닫지 못하다가 나이 들어 눈떠보니 (그) 은사님은(는) 작고하신(한) 뒤였다.( *몹쓸 제자가 되고 말았으니…)

 선생님의(그) 가르침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염치없이 자랑 삼아 말해본다면, 나에게 학문을 모두 역사적 시각에서 보는 눈이 생겼다고나 할까. 즉 역사적 시각(視角)이 생긴 것이다. 그뿐 아니다. 인생 자체를 역사적 시야(視野)에 넣어 모든 사물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를 총체적으로 말하면 역사적 시좌(視座)가 설정된 것이다(인생을 사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또 있다. 나는 (그 국사) 스승이 가르치신 ‘국사’를 쫓아갔더니 그 주위엔 (더 많은 역사의 별이 나타났다.) 한 무리의 성좌(星座)가 있었다. 이를 크게 확장해보니 동양사 서양사 인류사 지구사 우주사를 만나게 되고 작게 축소하여 파고드니 가문사 개인사(정태수사)에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국사 스승이 가리킨 북극성을 쫓아가 봤더니 그 주위에 북두칠성이 함께 있었다. 그리하여 먼저 동양사 서양사를 주워 담아 검정고시를 수확하고, 국사를 다시 파서 고등고시를 캐어 담았다.

 은퇴한 후에는 (고, 나이 들어서는) 국어 스승이 가르치신 시조의 세계에 침잠하여(를 곁들여 문학작품을 시도해본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에 집어 먹혀 멸종 위기에 몰린 북해도의 소수민족 아이누의 역사를 읊은(어) 시조집 「불씨를 살려라 아이누여」를 출간하였고, 또한 우주의 역사를 더듬고 그 속의 인류사를 곁들여 제2시조집 「어디서 내가 왔나」를 속간한 바 있었다. 이 모두 서정시조가 아니라 서사 시조집이니 국사로 출발한 수확물이 아니던가.

 그 뿐 아니다. 나는 선조들의 걸어온 길을 밝혀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내사사랑 치사랑」이란 가제목으로 가문사를 엮고 있으며, 「태산도 오르면 된다」라는 제목으로 이(*나 개인의) 회고록(*자서전)으로 개인사를 만들고 있는 중이다.

이 모두 국사를 가르킨 김성봉, 시조를 가르킨 박해권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선물이다.(받은 국사수업에서 얻은 풍부한 추수인 셈이다.)

시조를 배워주신 박해권 선생님에게는 앞(별항)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진주사범(모교) 교장으로, 다시 진주교대(그) 학장으로 영달을 해드려 작으(응)나마 은혜를 갚았지만, 더 큰 빛을 주신 역사스승 김성봉 선생님께는 감사하다는 말씀조차 드리지 못하거 헤어지고 말았으니 애통 죄송 두 감정만 남아있다.

 

 (김성봉 선생님이) 해방 직후 15세 소년(에게)은 김성봉 선생님이 손가락으로 가리키신 그 북극성 쫓아 따라가다 (때때로) 크게 눈 떠보니, 그 둘레에 북두칠성이 떼 지어 빛나고 있었다. 이제야 밤하늘의 많은 별을 보고 인생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구나 하고 되뇌이며(니 감사하기 그지없다.) 언제 한번 묘소를 찾아 큰절 한번 올리려고 마음먹고 있다.

 

32. 시조로 문학상(大賞)을 받다

 

저희 신인(新人) 5사람이 새로 태어났기에 인사드립니다. 선배 여러분의 사랑과 지도를 바랍니다. 저희 다섯 사람들의 등단작(登壇作)이 어찌 내놓을만한 시(詩)라 할 수 있었겠습니까마는 후진(*後進)을 길러야겠다는 넓은 마음으로 뽑아주신 데 대하여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큰 문학상(*文學賞)에는 뒤진다 하지만 저희로서는 신인상(新人賞)이 더 기쁩니다. 이제 겨우 눈을 떴으니 앞으로 부끄럽지 않은 후배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저희 신인(新人) 다섯 사람은, 시조생활지(時調生活誌)가 없었다면 출생(*出生)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상(*賞)을 받으면서 시조생활지(時調生活誌)를 창설하신 시천(柴川) 유성규(柳聖圭) 선생(* 先生)의 거룩한 출발(*出發)과 희생적 노력(*犧牲的 努力)에 대하여 다시 한번 경의(敬意)를 표하는 바입니다. 작금(昨今) “어느 동호지(同好誌)에 등단(*登壇)했느냐”고 묻는 문학인(*文學人)들이 더러 있어, 시저생활지(*時調生活誌)라고 대답했더니, 유(柳) 박사(*博士)를 들먹이면서 저보고 “그 잡지에서 등단했으면 실력((雜誌에 登壇했으면 實力)이 있는 분이시네요” 또는 “잘 쓰시나 봐요” 하는, 여러 사람으로 부터 뜻밖의 칭송을 들은 일이 있습니다.

 알고 보니 그 과분한 칭찬은 저를 보고 한 것이 아니었음은 물론입니다. 아무튼 그 때 저는 시조생활지(*時調生活誌)에 대한 문학계(*文學界)의 높은 평판(*評判)을 알 수 있었고 오래 기억(*記憶)에 남는 사건이 되었습니다. 엄격한 심사로 수준(*水準)을 높여온 지도층 여러분과, 오로지 작품(*作品)으로만 승부를 걸어온 선배 여러분에게 늦게나마 감사드리는 바입니다.

 저는 비전공자(非專攻者)로서, 이 시조모임의 신입생(*新入生)이 된 후, 짧은 기간에 느낀 것 한 가지만, 오늘 만당(滿堂)하신 새 손님 여러분에게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다 아는 일입니다마는 시천(柴川) 유성규 선생(*先生)은 유복(裕福)한 일생을 누릴 수 있는 한의사(韓醫師) 개업을 마다하시고, 오직 시조(時調) 일생(* 一生)을 걸어 오셨습니다. 그리하고도 문학계(*文學界)의 임원(任員) 벼슬도 속세(俗世)의 일이라며 이를 피하시면서, 동호회(同好會)와 동인지(同人誌)를 일구어 시조시인(時調詩人) 등용문(*登龍門)을 여셨습니다. 이 문을 통하여 수많은 신예(*新銳) 시인(* 詩人)을 배출하고, 문학상(*文學賞)을 만들어 격려하는 한편, 긴 안목으로 초(初)․ 중(中). 고(高) ․대(大) 청소년(* 靑少年)을 위한 시조백일장(時調白日場)을 펼치시고, 전(全) 민족시조생활화 운동본부(民族 時調 生活化 運動本部)를 만들어 행동으로 시조 보급(*時調普及)을 줄기차게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밖으로 눈을 돌려 우리 민족(*民族) 유일(*唯一)의 정형시(定型詩)를 온 인류(*人類)의 정서순화에 접목(*接木)하려는 시조(時調)의 세계화(*世界化)에 발돋움하고 계십니다. 이 일이 어찌 대학(大學) 하나를 만든 것과 같다 하겠습니까?

교육(욱)(*敎育) 일생(*一生)을 걸어온 저로서도 이곳에 와서 보고 애국애족(*愛國愛族)하고 인류(*人類) 공영(共榮) 하는 길이 이런 길도 있었구나 하고 감동했습니다. 시천(柴川) 선생(*先生)의 건강(健康)을 빌어마지 않습니다. 우리 삼연회(三然會)도 이러한 유(柳) 박사(*博士)의 뜻을 공유(共有)하는 모임이어서, 여기에 참여하게 된 저희 신인(新人)들은 참으로 긍지롭게 생각합니다.

 끝으로 개인적(*個人的)인 말씀 한 가지만 드리겠습니다. 이번에 제가 첫 시집(詩集)을 만들어 여러분에게 드리게 되었습니다. 다소 의외(意外)로 받아들이실지 모르지만 저로서는 말년(末年)의 큰 기쁨입니다. 한 30년간 모아온 자(우)형(自由型) 영사시(詠史詩)를, 작년 가을 등단(*登壇)후에 333 수(首)의 시조(*時調)로 옮겨 이번의 신인문학상(新人文學賞)을 계기삼아 출간한 것입니다. 저로서는 새 물을 대기 위해서 고인 옛 물을 창고정리(倉庫整理) 한 셈입니다. 관대하게 받아 주시고 일독(一讀)해 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인연을 아름답다>

 

(*김창현) 다음 글은 은사 김성봉 선생님(의) 자제분으로 남강문학회 부회장인 김창현 수필가가 회지에 올린 글 이다. (아들)

 

 세월은 물처럼 한번 흘러가면 다시 오지 않는 것이지만, 사람에게 물 속의 진주처럼 아름다운 인연을 남겨놓고(맺아주고) 간다.

 어제 정태수 총장님 전화를 받았다. 익일 여의도 국회 헌정회관에서 세종문학상 대상 수상과, 본인의 세번째 시조집 <산이 벙긋 웃는다>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 참석해줘서 고맙다는 인사 전화였다. 

 총장님은 문학상 수상소감에서 시조를 하게 된 동기를 이렇게 설명했다. 학창시절에 시조를 가르치신 국어 선생님 한 분이 계셨다. 그 분 덕택으로 정몽주의 <단심가>, 이방원의 <하여가>, 황진이의 <청산리 벽계수야> 같은 시조를 두루 외웠다고 한다. 그 뒤 문교부 차관, 서울교육대 총장, 대진대 총장 등 공직에 있으면서도 시조 사랑의 끈을 놓지 않아, 이번에 세 번째 시조집을 내게된 것 같다는 설명이었다.

  총장님은 나와의 통화에서, 그날 수상소감이 길어질까봐 한가지 정말 하고싶었던(은) 이야기를 뺀 것이 아쉽다고 했다. 정작 본인에게 역사의식을 심어준 김성봉 선생님 이야기다. 그 아버님 덕분에 첫 번째 시조집 <불씨를 살려라 아이누여>와 두 번째 시조집 <어디서 내가 왔나>를 썼다고 했다.

 첫 번째는 아이누의 역사를 대서사시로 읊은 것이고, 두 번째는 한걸음 더 나아가 방대한 우주의 역사 속에서 내 존재 위치를 읊은 것이다. 모두 역사의식에서 출발한 시조다. 총장님은 아버님의 명강의에 이끌려 역사를 좋아했고, 그 때문에 이 첫 번째 두 번째 시조집을 낸 것이라고 했다.

 그뿐 아니라 행정고시 당시 역사과목에서 거의 만점 성적을 얻어 합격하신 것도 아버님 덕이라 했다. 그냥 은사가 아니라 일생의 은인이라 했다.

 “선생님 저 정태수가 시골에 묻혀 살아서야 되겠습니까? 부산으로 옮겨주십시요”

 진양군 교육감이시던 아버님은 학생시절부터 아끼던 제자여서 당시 흔쾌히 부산으로 발령 내 드렸다고 한(하)다. 그후 부산서 고시에 합격한 정총장은 상경하여 문교부로 들어가 세칭 문교부 내 <진주마피아의 대부>가 된 것이다. 그런데 문교부 인사담당 시절에, 과거 국어를 가르치신 은사님은 진주 교대 초대 학장으로 임명하여 은공을 갚았는데, 막상 김성봉 선생님께는 도리를 못해드렸다며 아쉬워하신다.

 나 역시 아버님 생존시에 정태수 총장, 정희채 차관, 박창남 우르과이 대사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교육자로 평생을 보내신 아버님이 가장 아끼시던(의) 자랑스런 제자들이다.

 정희채 차관은 그림에 조예가 깊어 고성국민학교 재직시 아버님 초상화를 직접 그려보낸 적 있다. 정 차관님은 진사 제자들이 헌증한 아버님 자서전에서, 해방 직후 진사와 진농의 살벌한 학교 싸움을 말리기 위해 죽창과 쇠스랑으로 무장한 진농 교정에 가서 웅변으로 학생들을 설득하여, 오히려 진농 대표가 진사로 찾아서 사죄하여 마무리 시킨 무용담을 쓴 적 있다.

 당시 목슴 걸고 아버님을 수행한 학생은 정희채 정구현 두분 이다. 현재 진주 노인대학 학장인 정구현 선생님은 행동파다. 아버님이 안양에 은거해 계실 때, 동창들 성금을 모아 몇 번인가 찾아오시기도 했다. 그 밖에 엘지 회장 구자경, 경향신문 편집국장 김경래, 외교관 박근 님도 아버님이 아끼던 제자다.  간혹 전화를 하고 만나시기도 했다.

 그런데 내가 수지로 이사 와서 남강문학회 고문으로 곁에 사시는 정태수 총장님을 점심에 초대한 적 있다. 그러나 미금역에서 식사 끝나고 내가 계산을 하려고 카운터가 가보니 (만난) 이날 식사대는 정총장님이 내셨다.

'선생님께서 제가 모신 자리에서 어떻게 먼저 계산을 하십니까?'

 내가 이렇게 묻자, 선생님은  “내가 오늘 김창현을 대접한 것이 아니고, 내 평생 가장 존경하는 은인의 아드님을 대접한 것이니 양해하시오.” 이리 말씀하셨다.(정총장님 말씀이다.)

 이런 인연으로 나는 두 분 남강문학회 회원과 일년에 네번 정총장님과 정기적으로 만나 식사하는 모임을 계속하고 있다.

 현재 총장님은 시조를 쓰고 나는 수필을 쓴다. 그래서 남강문학회 막둥이 회원으로 십년이나 연하인 나를 글벗이라 불러 준다. 총장님과 사모님, 그리고 우리 부부는 욕지도를 거쳐, 쌍계사와 거기 차를 만드는 시인의 <달빛초당>이란 곳을 여행(을) 한 적 있다.

 욕지도와 지리산에서 교장으로 은퇴한 선생님 제자 분을 만나, 지리산 산채와 욕지도 생선, 말 그대로 산해진미를 대접 받기도 했다. 나는 세월 속에 더 청청하고 푸르시라고 소나무 분재 한 그루를 총장님 거실에 놓아드린 적 있다.

 이 어찌 속절없이 사라지는 세월의 물흐름 속에 남겨진 진주처럼 (그려진 한) 아름다운 인연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2013, '남강문학')

33. 귀한 동요 한 곡

 

우리 땅 한반도는

세계의 3대 초강대국 (중국 일본 러시아)에 둘러싸여 있다.

옛날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작사: 정 태 수

작곡: 이 재 석

1. 4.

언제부터 우리 땅 반도국이 됐나 나라 잃기 일 년 전 간도협약은

대륙과 한반도가 우리의 무대 간도와 만주철도 바꾼 일본이

중국의 역사침략 ‛동북공정ʼ에 주인 빼고 맺은 조약 원천무효다

고구려와 발해를 굳게 지키자. 때가 오면 찾아야 할 조선족 간도.

2. 5.

백두산은 우리 겨레 조상 산이다 제주도 남쪽 멀리 바다 가운데

삼백 년 전 청국이 정계비 세워 파도에 살짝 묻힌 우리 이어도

천지(天池)물 갈라지고 산도 두 동강 과학기지 헬기장 한국의 거점

그 아픔을 잊지 말고 그 산 보듬자. 중국이 넘보지만 내가 지킨다.

3. 6.

연해주를 차지한 러시아 힘에 신라의 해가 뜨던 동해의 첫 섬

청나라가 넘겨준 우리 녹둔도 누가 감히 독도를 집적거리나

본래가 우리 섬 두만강 대문 일본의 그 앙탈은 터무니없다

못 잊을 흔적들과 우리 옛 성터. 우기고 떼쓰지만 안 되지, 안 돼.

2013. 8. 25

 

  

34. 공개감사장을 드립니다

-생각나는 은인들-

          

이번에 문우회 전덕생 본부장으로부터 원고청탁을 받고, “옳지! 기회가 왔구나, 80 중턱에 이른 자로서, 내 평생에서 그처럼 중요했던 ‘문교부(교육부) 23년’ 동안의 많은 인연과 선후배로부터 입은 은혜에 감사하는 마지막 인사를, 감사장 쓰듯 글로 써서 그것도 공개적으로 드려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이는 돌발이 아니라 한 10년 전부터 품어온 숙제였기 때문입니다. 다만 ‘공개’란 단어만은 이번 전화를 받은 뒤에 돌출한 것입니다.

  구만리장천도 지척이라더니, 한 인생도 남은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는데, 빚만 잔뜩 진 사람으로서 말없이 떠날 수는 없습니다. 이미 타계하신 분도 계시고 한 하늘 아래 살면서도 한 분 한 분 찾아뵙기도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런 기회가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조바심도 있고 해서, 황급히 펜을 듭니다.

Ⅰ. 문교부 초기시절의 은인

첫 단계로, 빛바랜 이력서를 훑어보며「나의 문교부 시절」을 반추하면서, 굽이 마다 이른 바 관운을 열어주신 분들을 더듬어봅니다, 숨겨두었던 이면담까지 생각나는 대로 다 뒤져내고, 가릴 것 없이 솔직하게, 또 체면 생략하고 실명 거명하면서, 마지막 감사인사를 드리기로 합니다. 아주 간추리는 바람에 빠지고 조리 없고설명이 부족하더라도 그러려니 하고 포용해주시기 바랍니다. 간혹 시조 한 수 씩 곁들이겠습니다.

하루살이

단 하루 살다가는 목숨 하나 있습니다

기고 날고 대를 잇고 무리 춤도 마치니

짧다고 아쉽다 말라 몫을 다한 하루였다.

  맨 처음 인사는 55년 전으로 갑니다. 입사 1년밖에 안 된 풋내기 이 후배에게, 총무과 인사계장이란 빛을 안겨줌으로써, 문교부에서의 저의 첫 존재감을 굳혀주신 김강현(金康鉉) 선배와, 이를 들어주신 정윤진(丁允鎭) 총무과장님, 그리고 이승우 차관님(제13대)과 김상협 장관님(제11대)께 감사드립니다.

 당시 1961년은 제가 고시 제4부(교육행정)에 혼자 합격한(*붙은) 해로,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총리, 그리고 미군정 문교부장을 지낸 오천석 문교장관(제8대)의 제2공화국 말년이었습니다. 

 저는 총무처 발령의「수습행정관」으로 문교부에 들어섰지만, 바로 두 달 후에 5.16혁명이 일어나 큰 변동기를 맞고 어리둥절하던 시기였습니다. 바로 그 이듬해에 김강현 선배님이 저를 추천함으로서 이런 기적 같은 첫 출발이 있게 된 것이지요. 죽어 석 잔 술이 살아 한 잔 술만 못하다지만, 하늘에서나마 네 분께서 한참 늦은 저의 절을 받아주십시오. 

 

  두 번째 감사인사는 윤천주(15대) 문홍주(17대) 두 장관님과 장인숙(張仁淑) 선배차관님께 올립니다. 윤 장관님 때에 사무관 4년만에 서기관으로 승진되고, 문 장관님께서 그 말년(1968.3)에 저를 총무과장이란 중책에 기용해 주신 일 모두.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나듯 사기가 올랐지요. 두 장관님의 은혜, 늘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호사다마(魔)라고 좋은 흔히 시샘하는 듯이 좋은 일들도 있었습니다.

 제가 그 총무과장 두 달 되던 날, 권오병 장관(18대)이 두 번째 부임하자, 새 총무과장을 발령하고 저를 편수과장으로 옮기는 찬바람을 맞았지요. 이 정도는 인사권자의 재량사항일 뿐이지요. 그러나 불과 그 5개월 뒤에 마른하늘에 날벼락 치는 일이 닥쳐왔습니다. 즉 저를 경북대 부속병원 서무과장으로 멀리 쫓아낸 것입니다. 권 장관에 의한 연이은 두 번째 수난이었습니다. 영문도 모르거니와 하도 억울해서 사표를 각오하고 장관 댁을 항의 차 방문했지만 문을 열어주지 않기에, 대문만 발로 여러 번 걷어차며 고함치고 돌아와, 절치부심하며 대구로 내려갔었지요. 

  상심에 찬 이 대구시기에 버팀목이 되어준 김태진(金太鎭) 동료의 배려를 잊을 수 없습니다. 뒤에 들으니 당시 권 장관의 민망한 한 소문을 누군가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투서한 일로 인해 청와대에 불려가 수모를 당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 오해를 제가 받은 사실을 알고 참으로 원통해 했지요. 결국 투서자 모(某)를 늦게야 알게 되었다고 들려오기는 했지만, 결자해지 해주지 않고 가버려 제 일생의 한으로 굳었지요. 마음의 상처에는 바르는 약도 없습니다. 저승에서라도 사과를 받아야할 숙제로 남아있습니다.

 

복기(復碁)

 

끝내기만 남았다 복기 한번 해보자

귀살이 터를 잡고 천원(天元)으로 세를 몰아

네모난 세상을 돌며 바둑 한 판 두었구나.

 

한판승 꿈을 꾸며 무던히도 애썼지

패착(敗着)도 일수불퇴 아쉬워라 속수무책

계가(計家)는 해서 뭣하나 지팡이 가져오렴.

 

  그러나 이 모든 억울함(원한)은 장인숙 선배님이 회복시켜주셨습니다. 장 선배님은, 쫓겨 간 그 뒷사정을 뒤에 알고, 전직 인연이 있던 다음 19대 홍종철 장관 때에 저를 대구 15개월 만에 다시 문교부로 불러올려 주셨지요. 저의 일생 단 한 번의 (*억울한) 귀양살이의 한을 풀어주신 겁니다. 40여 년 전인 1970년 초의 일이었지요. 그 뿐 아닙니다. 장 선배께서는 그 뒤 대학국장 재임 당시에 저를 부이사관 승진과 동시에 같은 국 내 학사담당관으로 직접 데려다 쓰신 그 은덕은 또 어찌 잊겠습니까.

 이런 인연의 연결인지 홍 장관 사후 1987년에 한글대장경 등 317권의 장서를 그 부인 기정자(奇靜子)여사의 뜻으로 문교부 국장을 지내신 각별하셨던 이효석(李孝錫)선생이 서울교대에 기증해 주셨다. 나는 그 인연을 회상하면서 도서관에「홍 장관 코너」를 만들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장인숙 총장은 80을 넘은 지금까지도 마음으로(을) 형님처럼 모시고 살고 있습니다.(산다.) 그런 의미를 담고, 늦게나마 윤 장관님 문 장관님과 장 선배님께 깊은 감사 올립니다.

 

Ⅱ. 문교부 중반의 은인

 

  세 번째 감사인사는 저를 대학교육과장으로 안내해주신 권종복(權宗複)님과 당시의 오성식(吳聖植) 대학국장님께 드립니다.

 저도 다음과 같은 그 이면담을 문교부를 졸업한 지 30년이 지난 최근에야 우연히 그 연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즉, 대학교육과장이 공석일 당시에 오성식 대학국장께서 대학교육과 주무사사무관이었던 권 선생을 불러 과장 물색상담을 나누었을 때, 권 선생께서 서슴없이 이 정태수를 추천하시어, 오 국장님이 즉석 수긍하시고, 바로 민관식 장관님(20대)을 뵙고 허락을 받아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권 선배는 제가 수습행정관으로 문교부에 첫발디딘 의무교육과에서 처음 만난 선연을 되살린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일로 제가 과학교육국에서 대학교육과장으로 옮기게 되어 대학행정을 처음 맡아보게 되었는데, 이 문이 저의 고가도로 입구인 줄은 미처 몰랐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 때의 경위를 모른 채, ‘인정 받았나보다’하는 착각과 ‘고시출신 값인가’하는 건방으로 거들먹거렸으니, 지금도 얼굴 붉혀집니다. 어떻든 이때의 입문 이후 12년간을 대학학사담당관, 산업교육국장, 사회교육국장을 경유한 후, 이규호 문교장관(25대)이 오시자(마자 일어난 인사이동에서) 대학교육국장이란 중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늦게나마 이 모든 분들에게 깊은 감사 드립니다.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고 “모든 인간사는 ‘인과관계’로 일어나며, 이는 ‘계기성(繼起性)의 원리’를 갖는다“는 선인들이 말한 이치를 제 스스로가 실감했습니다.

앞에서 감사드린 장 선배님의 ‘대구 구출’이 없었더라면, 그 다음의 권종복 동지와 오 국장님으로 인한 저의 ‘대학행정 진입’이 없었을 것이며, 또한 두 분의 이 ‘쌍무지개’가 뜨지 않았더라면, 그 뒤의 이규호 장관의 손길에 따른 저의 대학국장 보직이란 산뜻한 새벽이 열리지 못했을 것이며, 그 뒤의 국보위 발탁과 차관 등판이라는 아침 햇살, 또한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일생일대의 은혜의 연결이었습니다. 이 행운을 열어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 올립니다.

 

율의 일생

도레미파 솔라시도 숨 가쁘게 달렸지

도시라솔 파미레도 율을 붙여 걸었지

인생은 오르내리는 한 옥타브 산행 길.

한때는 상승기류 바람타고 도미솔도

된서리를 만나서 낙엽으로 도솔미도

그 풍상 화음이 되어 오늘의 시조 한 수.

Ⅲ. 문교부 마무리 기간의 은인

  네 번째 감사의 절은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께 올립니다. 그리고 또한 그 디딤돌을 놓아주신 이기백(李基百) 장군과 조력하신 김득수(金得洙) 과장에게도 감사드립니다.

 제가 대학국장으로 일하던 1980년 6월4일, 막 퇴근준비 중인 오후 6시에 “내일부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로 출근하라”는 국보위 문공분과 김상준 대령의 엉뚱한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더군다나 “장관은 아직 모르니 가서 말씀드리라”하니 놀랄 수밖에요.

 퇴근을 멈추고 급히 달려가 장·차관에게 보고하니 어리둥절들 하셨지요. 대학국장 일을 맡은 지 얼마 안 된 저는 문교부만 천직이라 생각하여 다른 사람으로 바꿔달라고 해봤지만 그분들로서는 달리 변경할 방안이 없었어요. 당시 상황으로 보아 역부족이었나 봅니다. 뾰족한 방도가 없자 “그러면 내일 국보위로 일단 출근하겠다” 하고 물러나왔습니다.

 익일 6월5일, 첫 출근 후 국립묘지 참배, 국보위 현판식, 사령장 수여 등으로 삼청동 업무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실상의 대통령부(府)였습니다. 그때 전두환 위원장님을 처음 뵈었지요. 국보위 문공분과는 위원장 오자복 장군, 총괄 김상준 대령, 문교업무는 이화여대 김행자 교수와 저가 맡고, 공보업무는 허문도 허만일 염길정 안병규 네 분이 분담하였고, 그 밖의 전문위원들로 구성되어 있었지요. 아마 교육개혁, 특히 대학 개혁을 위한 목적으로 문교부 사람 하나를 찾다보니, 관련업무인 대학국장 자리에 있는 저를 불러들인(드린) 것 같습니다. 국보위 오픈 하루 전에 다급하게 지명한 것은 문교공보위원회를 ‘문공위’로 약칭하기 때문에 문공부 사람들만으로 충원했다가 개원 허루 전에 ‘문교’ 분야 충원이 빠진 것을 알고, 다급히 1인만 찾아 메꾼 것이, 그날의 퇴근시간에야 겨우 저에게 “내일 출근”이라는 급통지를 하게 된 연유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국보위에 참여한 저는, KEDI의 지원을 받아 7.30교육개혁안을 성안 브리핑하는 등 전두환 위원장을 직접 보좌하고, 나중에 오자복 분과위원장의 군 복귀 후에는 그 후임 위원장을 맡았으며, 대통령으로 가신 후에도 폐지되었던 교육세의 부활을 건의하여 결재를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이어 국가보위입법회의 구성 이후에는 여의도 의사당에 출근하여 문공분과 간사의원으로서 교육입법을 주관하기에 이르렀지요. 문교부 소속 신분으로서 차출되어 파견근무한 이 삼청동·여의도에서의 제5공화국 태동기의 개혁 참여 10개월은 저(제)에게는 돌출경험이라 기억이 하도 뚜렷하여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사이 저는 문교부의 관리관으로 승진되어 중앙교육연수원장을 겸직하였는데, 1981년 4월 14일, 느닷없이 문교부 차관 발령을 받았습니다. 일생동안 승진·영전 운동을 해본 적이 없는 저에게는 뜻밖의 영광이었는데, 이 행운은 저와 국보위와의 인연 여덕이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그 때 저는 4월 10일(금)에 입법회의 폐회식, 전두환 대통령 초청 청와대 만찬. 11일(토)에 차기 11대 국회 개원식. 12일(일)엔 옛 국보위 위원장들 송별모임 등의 일정으로, 저의 모든 국보위 일정을 마무리하는 중이었지요.

 뒤에 알았지만, 전두환 위원장이 대통령으로 옮긴 이후의 국보위와 입법회의 기간의 후계 대표자는 운영위원장 이기백 장군(뒤에 국방장관)이었는데, 이 무렵에 대통령께 국보위 위원장들의 정부 복귀시의 마무리 인사(주로 장관직으로) 협의를 한 바 있어, 저도 그 유의대상 중의 한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4월 13일(월) 그 날 이규호 문교장관이 제시한 8~9 명의 ‘차관 후보 결재안’ 중간쯤에 정태수 후보 이름이 적혀 있었지요. 이는 첫 초안에는 없던 것으로, 김득수 총무과장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몇 사람이 추가된 최종안이었지요. 그 중의 제 이름에 대통령께서 줄을 긋고 결재 싸인 하셨지요. 저를 당시 새 정부 제5공화국의 7.30교육개혁안의 입안자로서 그 집행에도 단 한 사람의 적임자로 여기고 계신 대통령이었기에, 만약 그 내신안에 제가 빠져있었더라도, 제 이름을 써넣고 결재하셨으리라 여겨집니다.

이리하여 당시로서는 문교관료로서는 최종직으로 인식되던 문교차관직에 부임하여, 교육개혁을 추진하는 한편, 초중등 시책으로는「중앙청·교육청에서 교실로」교육행정의 초점을 옮기는「학생중심, 교단위주, 교실개혁, ‘교사들’에서 ‘선생님’으로의 존칭 상례화 등의 교육현장중심의 교육행정」으로 눈을 돌리는 단초를 열고, 대학교육협의회 창립을 주장하여 대학행정도「관치에서 대학자치로」의 전환에 시동을 걸었지요.

 그러나 대학의 학력저조와 졸업장 남발방지용 졸업정원제가 대학의 저항을 받아오다 당시 민정당의 폐지 방침으로 굳어져 청와대에 건의되고, 그 덤터기를 제가 쓰게 되고 말았습니다. 이 제도는 당시의 여론에 기초한 KEDI의 안을 수용하여 개혁안에 포함된 항목이었지만 개혁안 주무자로서의 부득이한 제 책임이 되었지요. 이리하여 23년의 문교부 삶을 떠가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전 대통령으로 인하여 입은 은혜에는 감사드립니다.

Ⅳ. 대학개혁의 지뢰를 밟다

 여기서 잠시 차관 퇴임의 변을 늘어놓고자 합니다. 제가 차관직을 의원면직 당한 것은「대학졸업정원제」때문이었습니다. 다 아시다시피 그 당시 우리나라는 고교까지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공부 열심히 하지만, 우심한 입시경쟁을 치르고 나서 일단 대학에만 들어가면, 데모와 술과 연애에만 젊은 정열을 쏟아 붓고 연구를 게을리 해도 누구나 다 졸업할 수 있는 대학이었지요. 대학의 교실은 강의실이라 부르며, 교수는 책 뒤적여 얽어온 교재와 교안(敎案)으로 한 시간을 일방적으로 전달하고 학생은 빈 노트만 들고 수업에 참여하는 수동적 후진형 수업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였습니다.

 7. 30 교육개혁(1980)은 20년 뒤에 다가올 21세기의 선진조국 준비를 목표로 하는 대학의 면학분위기 일신을 위하여, 입학 정원을 30%를 더 늘려주고 1년에 10%씩 1,2,3년에 걸쳐 3회 중도 탈락시켜, 졸업인원을 원래 정원만큼 배출하는 의욕적인 개혁안이었지요. 당시의 학계의 공론을 KEDI에서 조합하여 건의한 안을, 저가 대학개혁 항목으로 채택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주입식 강의 일변도의 대학수업에서 학생의 질문과 토론이 주류를 이루는 자주학습으로 전환하는 대학의 교실개혁안이었으며 혁신적 대학 선진화플랜이었지요. 부산대학에서 82년에 실험실시한 결과 일단 출석률 100%라는 성과를 거두어(경향신문 1983.2.8자) 학생은 이 고비를 넘길 수 있었으나 도리어 교수들의 반발은 하늘을 찔렀어요. 교수·학생 공히 미리 수업준비를 하고, 예습해온 학생의 질의에 대응하는 토론식 수업의 어려움은, 강연식 수업에다 형식적 정실적 all A 학점권을 구사하면서 놀고먹던 교수들이, 해마다 10% 정도의 낙제생 배출의 난점에 부딪힌 그 어려움은 짐작하고도 남을만한 일이었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부산대 총장과 문교부 장관을 지내신 문홍주(文鴻柱)박사는 당시 신문기고에서 우심한 국제경쟁에서 살아남는 길은 졸업정원제를 성공시키는 길밖에 없다는 논리를 주장한 바 있습니다. 또한 우리 문교부는「83년은 교실개혁의 해」로 정하고 각급학교 수업 선진화를 독려하였습니다. 청와대 문교부 교육청 학교장은 지배권을 내려놓고 교실현장을 지원해주는 기관으로 탈바꿈하자는 게 (*저)가 밀고나갔던 현장주의 교육개혁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때에 정치의 계절이 들이닥쳤습니다. 민정당이 생기고 야당도 만들어 선거와 국회가 화두로 급등장했었지요. 조용하던 대학가에도 계절풍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종업정원제에 대한 일부 교수들의 불만은 정치계를 옥죄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학부모들도 가세했습니다. 30%씩 잘려나가는 고통은 상상만 해도 싫은 데다, 내 자식 공부 안해도 수월수월 졸업하게 해달라는 것이지요.「대충대충 대학」은 이미 대학가와 모든 국민의 뼛속까지 관성화된 뒤였습니다. 이 큰 세력에게 메스를 들이댄 것이 나의 일생일대의 실수였던지 모릅니다.( 것이지요.)

 만약 12‧12체제가 10년 이상 지속됐다면, 그리하여 새 제도가 민도를 순치하여 법치와 관습의 경지에 이르게 되어버린다면 성공할 정책이었던 셈이지요. 지나고보니 애국애족심 하나만으로는 어림도 없는 족탈불급의 과제였다 생각 되기도(평가되기도) 합니다.

 어떻든 당은 표심을 의식했고 다급해진 권익현(權翊鉉) 사무총장은 부득이 졸정제 폐지에 기울어져, 이규호(李奎浩) 문교장관에게 그 폐지를 협의했고 저를 만나고 돌아간(온) 장관은 “이 제도는 정태수 차관이 전두한(全斗漢)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등장한 7.30교육개혁안의 주요항목이며, 그는「민족의 장래를 위한다면 그 폐지는 어렵고, 개선은 가하다」라 고집하니 난들 어쩌겠소”라는 답을 내놓기에 이르렀지요.

 그리하여 정치인들이 득표 전략 상 급기야「정 차관 퇴출」에 합의하고 전두환대통령에게 그 경질을 건의하기에 이르렀지(대)요. 7.30개혁을 줄기차게 추진하라고 저에게 낙점하신 전 대통령도 정치폭풍 앞에 백기를 들고 만 셈이지요.

 이리하여 7.30 개혁안 중의 중등부문에서의 고교 내신 반영과 대입 본고사 폐지안은 성공했으나 과외 폐지안은 일시적인 개선에 그쳤고, 대학부문에서의 교육대학 4년제화는 성공했으나 졸업정원제는 원상복귀 되고 말았어요.

 사실 긴 안목으로 보면 정치인들이 실수한 것 입니다. 종업정원제가 지켜졌다면 대학생들은 학업에 전념하느라 가두로 나와 데모할 시간이 없고 학원 소요도 근본적으로 없었을 것 입니다. 호미로 막을 가래로 막는다.’고, 결국 근시안적인 안목으로 제 발등 제가 찍은 셈 입니다. (*모든 개혁은 행정부가 주도하더라도 민심 민도와 정치 경제의 뒷받침이 필수요건이라 깊이 뉘우쳤습니다.)

 

 제가 의원면직한 것은 그해 7월 19일의 일이었고, 차관 재직 2년 4개월만이었습니다. 제딴에는 국운을 개척한답시고 욕먹을 일을 저지른다고는 생각했으나, 이렇게 그 희생물이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교실 경험을 쌓은 후에 중앙의 정책부서에 온 저로서는, 큰 과제로 삼고 밀어붙여오던「교실개혁」과「교단 중심의 문교행정」이란 깃발도, 동시에 내려놓게 되었지요, 후임에는 진주사범 2년 선배로 부산대 총장을 역임한 정희채(鄭熙彩)박사가 취임하셨지요.

차를 끓이며

싱겁다, 조급하여 덜 우려 따랐구나

떫구나, 요량 없이 때를 놓쳐버렸네

설익은 녹차 한 잔이 지난 삶을 꾸짖는다.

 

3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그 때 내가 깊은 관심을 보였던 (눈독을 드렸던) 대학의 교실은「그 강의 그대로」변함없이 이어가고 있다 합니다. 토론식 수업은 아직 요원하다지요? 다만, 해마다 취업점수를 매겨 학과의 존폐를 정하는 정부정책이 학교현장을 두들기니, 취업용 공부 열심히 하는 학생이 늘어나고 있을 정도는 되어가고 있다 합니다. 그러나 대학 교실의 진화는 백년하청이랍니다. 고된 일이지만 수업개혁 없이는 대학 선진화는 어렵다할 수 있겠죠.

이규호 장관은 이때의 마음의 빚을 갚으려고, 단국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수로 취직해있는 저를, 석 달 뒤에 한국교직원공제회 이사장으로(에 내리꽂는) 낙하산 인사를 단행하셨습니다. 그 해 10월 5일에 대통령 재가를 받아 이사회 통과라는 형식적 절차를 거쳐, 10월 27일에 취임함으로서 나는 뜻밖의 양다리를 걸치게 되었었지요.

 

  제2단계(로) 문교부(를) 퇴직한 이후의 많은 도움을 잊을 수 없습니다. 퇴임 후의 이 시기는 관계(官界)에서 학계(學界)로 건너가는 과도기 단계였지요.

 첫 감사는 모교인 단국대학교 장충식(張忠植)총장님과 신방현(申邦鉉) 교수(뒤에 부총장)에게 올립니다.

 문교부를 나오자마자 장 총장님으로부터 교육대학원 교육법학 담당교수직 임용이란 큰 선물이 도착했는데, 문교부에 드나들던 신 교수와의 협의로 이뤄진 것으로 짐작됩니다. 위에 이미 언급했음(*한편 모시고 지내던 이규호 장관께서도 저를 불러 대한교직원공제회 이사장으로 보내주셨지요.) 그 후 서명원 장관(28대) 때에는 비서실장을 맡고 있던 이원우(李元雨)과장(현 꽃동네대 총장)의 건의로 국정교과서(주) 이사장에 보직된 행운도 있었습니다. 모두 뜻하지 않은 큰 선물로서 퇴직자에게 내린 대복이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그런 중에도 저는 한편으로는 ‘직학(職學) 쌍곡선’의 노력을 계속하였습니다.

 문교부 재직 중에도 주경야독으로 석사학위(연세대 경영대학원)를 받았었지만, 퇴임 후에 닥친 문교부시절 동료들의 애정 어린 은덕이 겹쳐왔습니다. 그(리하여) 두 번째 인사는 다음 두 분에게 드립니다. 이강희(李康熙) 주일 교토(京都) 교육관의 뜻밖의 주선으로 대만 국립 중흥대학의 명예법학박사를 받게 된 일과, 또 연이어 주일 손상철(孫相喆) 교육관의 주선으로, 일본 국립 쓰쿠바(筑波)대학의 연구교수로 인연을 맺게 되었지요. 이는 그 대학 한국인 교수인 박성우(朴聖雨)선생의 특별한 배려(케어)에 힘입은 결과였습니다. (더구나)

 여기에서 ‘한국 교육기본법의 성립과정 연구’라는 논문으로 교육학박사 학위를 받은 일은 또 하나의 출발선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돌아와 대한교육법학회를 창립(1986년)하고,「교육법학 연구」라는 학회지를 창간하여 그 창간사를 쓰기도 하였습니다. 이 학회는 올해로 28년째 활발히 활동 중이며 저도 명예회장으로 지금도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교육법관계 저서도 여러 권 낸 것 역시 모두 그 여덕이였지요. 늦게나마 두 분 후배의 은혜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Ⅵ. 학계에서의 은인

 

세 번째로 손성식(孫成植) 연배동료에게 다소 이색적인 감사를 드립니다. 저의 공제회 이사장 임기가 아직 남아있을  때였는데, 갑자기 서울교대 학장(지금의 총장) 취임 권유가 오고 임용된 것입니다. 권이혁 장관(26대)의 신임을 받고 있던 손성식 기획관리실장이 제 후임으로 취임한 것으로 보아, 짐작컨대 손 실장이 자기 자리를 만들면서, 저를 배려하는 마음에서, 저의 학경력을 감안하여 마침 공석 중인 서울교대 학장 자리로 인도한 것 아닌가 싶습니다. 참 면밀하고 감사한 성찰이셨다는 생각입니다. 이 작은 배려가 저에게는 본래의 직장, 교육 현장으로의 환고향(還故鄕) (*과 대전환)의 계기로 작동하였습니다.

 즉, 교육대학 전신인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초등교단을 경험하고, 문교부에 와서는 그 사범학교가 2년제 교육대학(1961)으로 다시 4년제(1981)로 승격되는 입법과정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쓰쿠바대학(일정시의 동경고등사범학교)에서 교육학 학위를 받은 저로서는, 제자리를 찾아 돌아온 쾌사였습니다. 그 때 3류 인식으로 풀이 죽어 있던 교대 학생들 앞에 “나는 영광스런 초등교단인이 된다”는 플래카드를 걸고 “박사 초등교사가 되자”고 긍지 살리는데 힘을 쏟았었지요. 그러나 교대생의 출생적 자괴감에 보태어진 민주화의 다소 오도된 물결에 저의 개혁은 이른바 문제 학생들의 반발을 받기도 하였지요. 다만 이 교대 학장 경력이 저에게는 그 뒤의 대진대학교 총장직으로 연결되는 다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설 대진대 총장 취임은(으로의 저로서의 등극은) 족숙 정대진(鄭大珍)선생이 족질 정종환(鄭宗煥)선생의 협의를 받아 이뤄지고 박한경(朴漢慶) 이사장에 의하여 받아드려진 쾌사로, 초대 2대 8년간이라는, 저의 득의의 마지막 공직 봉사였지요. 문교부 23년의 경륜, 특히 대학행정의 지식과 경험을 다 쏟아 저의 교육일생의 결산서를 썼습니다. 그리하여 저의 모든 공직을 70살에 이르러 마무리 짓는 행복을 누리게 된 거지요. 세 분에게 네 번째의 큰 감사를 드립니다.

발자국

가다가 돌아보니 내 발자국 다 보인다

후회되는 일에다가 숨어서 한 일까지

갈 길이 아직 남았는데 걸어가기 두렵네.

 

  다섯 번째 감사인사는 우리 시조시인 문우회와의 인연에 드립니다. 허종갑(許鐘甲) 전 사학재단 이사장으로 부터의 연락을 받고 나가봤더니, 문우회 회장 감투를 씌우는 것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가 주역으로서 박준열 김영희 등 여러 동료들과 의논하고, 영향력이 있던 조규향 총장(현 회장)과도 협의하여, 저를 제5대 회장으로 맞아들인 것이었습니다. 후배들이 안겨준 늘그막의 빛이었지요.

 1998년부터 2003년까지 두 세기에 걸친 5년간을 함께 했습니다. 기억에 남는 것은「문우회보」를 창간(1999)한 일로, 창간사를 썼던 그 손으로, 이 34호에 ‘감사장’이란 이 글을 쓰고 있으니 감회가 남다릅니다. 이에 더하여 저도 후배들로부터「생각나는 사람」으로 남고 싶지만 그런 홍복을 누릴 보시를 베풀지 못한 것이 후회됩니다. 우리 문우회는 해마다 나오는 ‘문우회 수첩’으로 그리운 이름들을 차례차례 짚으면서 옛 추억을 떠올리며 흐뭇한 행복감에 젖을 수 있는 떠나온 자의 마음의 고향이지요. 

 

 이상(다만,) 위에 이름이 올려져있지 않은 많은 은인들에 대하여 미안함과 감사함을 표합니다. 말없이 뒤에서 도움주신 분, 제가 맡은 일을 성공으로 이끌어 주신 분, 제 영전 영진을 발의하거나 찬성하신 분, 도움 주시고도 표시 안하고 지나가신 분, 승진이나 영달 안의 중간결재란에 사인하신 분, 저를 해치고자하는 자에게 저를 변호해 주신 분, 저를 충고하고 고쳐주신 분 등, 날씨와 같은 제 인생에서 흐리거나 눈비 내릴 때 뒤에서 남모르게 도와주시고도 이 글에서 빠진 은인들이 더러 계실 겁니다.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제가 둔하여 까맣게 잊고 있는 분에게는 사죄드립니다. 이후라도 귀띔해 주시면 개고하거나 따로 회고록에라도 남기겠습니다.

 

 지나고 보니 저의 ‘문교부 삶’은 첨부터 마지막까지 산업화시대였습니다. 청와대 주인은 장면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세 분이였습니다. 즉「박정희 전두환시대」였지요.

 단군 이래 민족중흥 시동기의 교육 재건 중추 공무원으로 산 셈이지요. 이 시대를 만나 오로지「민족과 국가」만을 위한 온통 불꽃 튀기는 삶을 살았어요. 간간이 민주화 물결이 일기도 하는 성장통도 있었고요. 더러는 그 물이 그 불을 끄려고, 또는 그 불이 그 물을 말리려고 서로가 「물불 못 가리는 시간」도 있었습니다. 그 시대를 건너 온 저는 일제식민지기에 일본 식민지의 황국신민 신분으로 태어나, 배고프게 자라 작은 키에 가무잡잡하고 깡마른 꼬챙이로, 시쳇말로 대꼬챙이 벼슬아치였죠. 그래서 토요 일요 휴일도 없이 뼈 빠지게 일만 했습니다. 오로지 애국애족 일념에서였습니다. 그 가운데 군데군데 은인 여러분이 있어 교육발전을 위해 힘을 더할 수 있는 보람찬 제 삶이 있었습니다.

 

지게 -신문 기사를 읽고-

 

아버지의 지게로 자라온 한 아들이

오늘은 그 지게로 아버지를 업고서

금강산 구경 갔다네. 아, 나는 불효자.

 

 

다음의 전체 글은 앞 부분으로 보냄

 

(*Ⅶ. 출생과 유년의 은인

이왕 감사장을 드리는 김에 ‘저의 문교부 이전’ 단계의 유소년기에 입은 큰 은혜를 빠뜨릴 수 없습니다. 저를 생명으로 태어나게 해 주시고, 의무교육제도가 일본 본토에는 있었지만 식민지 한반도에는 없어, 초등학교 취학도 반수 밖에 못하던 농촌에서 자라던 저를, 지수(智水)소학교에 입학시켜주신 부모님 은혜에 새삼 감사드리며, 그 큰 은혜에도 불구하고 평생 객지에 떠돌면서 눈곱마한 효도도 다하지 못한 불효자식이 저승에서 어찌 부모님을 대할까 저어됩니다. 또 가난하게 살면서도 사는 곳이 진주 읍내라는 이유만으로, 큰집 독자 장조카를 큰물에서 키워야겠다는 일념으로, 10살짜리 어린 이 조카를 진주봉래소학교 4학년에 전학시켜서 자진하여 데려다 키워주신 숙부(鄭錫宙)님의 은혜에 특별한 감사를 드립니다. 그날의 첫 도시진출이 없었더라면, 요즘의 1류대학보다 귀했던 진주사범하교 진학이라는 관문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며, 그 뒤를 이은 부산과 서울로의 큰 물살도 타지 못했을 것이 명약관화합니다. 얼마 전 부산 백운묘지의 숙부 숙모 산소를 참배하고 “그때 따뜻하신 손길이 제 일생의 새출발선이었습니다” “그 후 일생의 성과를 보고드립니다”라는 요지의 고유문을 읽어 올리고 나니 한결 마음 가벼워졌습니다. 선대 두 어른과 두 내외분께 다시 큰 절 올립니다.

진주(晋州) 유학

겨우겨우 풀칠하며 읍내 살던 숙부님이

산골 초3 이 조카, 도시 전학 데려가니

그 길이 갈림길이었네 열 살짜리 진주 유학.

처음 탄 버스 기차 처음 맛본 잔치국수

톡 쏘는 후추 향이 넓은 세상 새 맛인가

가리킨 그 날의 북극성 내 일생의 전조등.

다음으로, 사범학교(지금의 중고) 학생 시절의 김성봉(金性奉) 박해권(朴海權) 두 은사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김성봉 은사님은 국사공부에 진한 흥미를 심어주시어 제 일생의 든든한 바탕이 되었습니다. 그 국사공부 취미가 동양사 서양사에 까지 넓혀져 문교부 시행의 고등학교 교원자격검정시험 역사과에 합격하였고, 그 후에도 국사과목이 시험과목에 포함되어있었던 당시의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는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아마 과락을 겨우 면한 답안 점수를 국사 점수가 메꾸어 합격된 것 아닌가싶기도 합니다. 그뿐 아닙니다. 저의 모든 글에는 언제나 역사의식이 늘 깔려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전에 찾아뵙지도 못하고 늙어버린 무례한 이 제자를 관용하시기 바랍니다. 잇따라 이 두 고시에 함께 공부하면서 연습답안도 비교토론하며 함께 응시 합격하신 선배이며 동료교사였던 김경호(金庚鎬)선생님에게도 당시의 지도와 동행에 감사드립니다. 다음으로 박해권 은사님은 해방되던 해 중2의 국어시간에 시조를 가르쳐주셨습니다. 하여가(何如歌)에 단심가(丹心歌), 황진이의 사랑가 등 고시조를 전수해 주셨지요. 그 재미를 오래 읊조리고 가족묘지의 망처(亡妻)묘 앞에 사모시조비도 세우고 했는데, 나중에 서울교대에서 인연을 맺은 강경호(姜慶鎬)교수의 안내로 퇴직 후에 현대시조를 다시 익혀 시조시단에 올라 한 10여 년간 시조시인으로서 즐거운 여경(餘慶)을 보내고 있으면서 시조집 3권도 냈지요. 감사드립니다.)

 

파파로(皤皤老)의 반란

누군 나를 쓰다 남은 개숫물로 안다지만

나는야 지심(地心)에서 새로 뿜는 샘물이다

늦게야 심층수 솟아 생수 맛을 이제 낸다.

백발의 파파로라 수군거린다지만

늦가을에 한들한들 새하얀 억새꽃이

이제야 제철을 만나 오지게 피고 있다.

 

(*〖 맺는 말 〗----전체를 맨 앞으로 보냄

이렇게 통산해보니 저의 일생 84년은, 유소년기 20년, 교단과 학력 보충기 10년, 문교부 23년, 학계로의 과도기 8년, 대학인 10년, 시조시인 10년으로 요약되네요. 돌아오지 않는 것은 세월만이 아닙니다. 놓쳐버린 기회, 입 밖으로 나간 말, 돌아가신 부모도 다시 오진 않지요. 재능보다 중요한 건 끈기라 되새기면서 혼자서 애쓰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걸어온 굽이마다 수많은 은인들의 도움이 끌어주고 받쳐주고 있었다는 사실을 실감하고 또 절감하면서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인생은 누구를 만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늦게야 깨달았습니다. 어항→연못→강으로, 노는 물이 커지면 몸길이도, 손가락→한뼘→한팔 크기로 따라 크는 물고기 ‘코이’처럼, 저도 교단→문교부→대학으로 ‘교육일생’의 한 우물을 파면서, 진주→부산→서울로 노는 물이 달라지면서, 제 몸도 커지는 ‘코이의 법칙’의 적용을 받고 살아왔네요. 마시는 물도 달라졌지요. 개울물→강물→우물물→수돗물로, 지금은 정수기 물도 끓여 먹지요. 이러한 굽이치는 개인사의 모통이 마다 손잡아 주신 여러 은인이 있어 떳떳한 명함을 내밀면서 살 수 있었습니다. 묘비에 괜찮은 단어들을 남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로 많은 은혜 입었습니다. 3생의 인연을 살려 내세에서나마 그 은혜의 일부라도 갚고 싶습니다. 무릎 꿇고 큰 절 올리며 깊은 감사 드립니다. )

 

 

숙제 하나

 

거슬러 올라가서 내 몸을 알고 보니

별에서 터진 원료 지구까지 날아와

선조의 염원을 입어 어렵사리 뭉친 한 알.

 

한 백 년 빌렸더니 돌려줄 날 다가온다

아뿔싸, 내 것인 양 임차료를 잊었구나

원재료 돌려줄 그 날 무엇으로 갚을까.

 

 사실 (이러한) 모든 인간사는 더 근원적인 감사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가깝게는 해방과 대한민국의 건국과 이승만, 6.25 남침에 UN군 참전의 첫 결심(을)한 미 트루먼 대통령, 삶의 터전을 닦은 박정희시대. 연금 받고 살면서 더 간절히 느끼는 공통관념 아닌가요. 거슬러 올라 이름을 남긴 선조, 이름 모르는 상대 조상들, 수십만 대의 동물 선조, 첫 생명 박테리아, 탄소 산소 칼슘 미네랄 등 생명 원소, 지구, 태양계, 은하계, 끝내는 138억 년 전의 우주의 탄생까지. 제 생명의 원초적인 뿌리에 마음으로부터의 감사를 올리면서 감사의 글을 맺습니다. (2014. 4. 6)

* 이 글은 교육부 퇴직자 모임인 문우회의 회지 문우회보(文友會報) 제34호(2014. 6. 30)에 기고 게재된 글임.

 

35. 泰山에 올라(의 밤에)

一.

한반도여

나, 잠시 너를 떠나

중국인의 성산 泰山에 와서

너를 바라다 본다

아시아의 동쪽

대륙과 섬 사이

아늑한 內海에

남으로 밀고나온 3면 바다 한반도

좌청룡 우백호 명당자리 앉았구나.

나, 이 생을

네게서 얻어 네게로 돌아갈 것이기에

져버릴 수 없어

나, 너를 지극히 사랑하노니

또 오늘은 애타게 걱정하노니.

二.

한반도

좀 더 크게 태어나지 그랬나.

연해주 만주땅 요동벌을 다 버리고

왜 반도에 갇혀 작아졌느냐.

그런데 또 무슨 연유로

네 몸이 두 동강이 났느냐

왜 두 색깔이냐

네가 그렸느냐 남이 칠해주었느냐.

네 주인 한민족

주인 몫 제대로 다 하더냐

다른 종족 말발굽 소리 몇 번이더냐

북녘 세력 쳐 내려와

처녀 아낙 묶여가는 통곡 행렬 못 보았느냐.

3남 지방 장정들 倭船에 실려

이베리아 반도에 팔려가는 울부짖음 너도 들었지

그 배 노예 무역선 아니더냐.

잊지 마라 한반도여.

네 이웃은 누구누구냐

동쪽에 해양세력 일본

서북쪽을 휘감은 대륙세력 중국

늦게야 나타난 북극세력 러시아

힘센 세 나라에 둘러싸였구나.

강한 친구 또 하나, 멀고도 가까운 나라 미국

결국 세계 최강 1 2 3 4등 네 나라가 이웃집 되니.

몸도 약한데 조각까지 난 두 한반도여

4강 새 끼어서 고생되겠구나.

三.

후회로다 한반도여.

산업혁명으로 巨人된 西勢가 물밀 듯 東漸했을 때

그 물결 너에게 천지개벽 몰고 왔는데

옛 틀에 갇혀서 새 기운 거절했었지.

차라리 美․佛 두 번 洋擾 물리치지말걸 그랬나.

검은 철선에 놀라 문 연 일본이

당할 때 배운 대로 군함으로 조선의 빗장 연 그 때

너의 주인 어둡고 힘없어

네 색깔 시꺼멓게 변해버렸지.

그 후 치욕의 반세기

너는 죽은 땅 아니었더냐.

칼의 나라 일본이

붓의 나라 조선을 강탈할 무렵.

아세아의 盟主니 征韓論이니 脫亞入歐니 교만한 구호 외치며

청나라․러시아 차례로 꺾어 타이완 사할린 챙겨 넣고

시베리아 출병하여 바이칼 이동을 4년간 유린

철도회사 진출하여 만주와 요동벌을 꿀꺽 삼키고

中日 전쟁 일으켜 중원을 짓밟더니.

그 망나니 골목대장

급기야 큰길가에 나가 英美에 태평양 전쟁.

끝내 연합국의 몰매를 맞아

大東亞 제국 건설 야심을 꺾고

빼앗은 것 다 토해내고

섬나라 자기 땅에 주저앉았지.

四.

2차 대전 후

미국 소련 두 체제의 대치

패자 일본, 미국 따라 우향우

승자 중국, 소련 따라 좌향좌.

그러나 이게 웬 일

진 자 일본, 줄 잘 서서 뜻 밖에 선두로

이긴 자 중국, 줄 잘못 서 도리어 낙오.

이긴 자 잘 못살고, 굴복한 자 더 잘 사니

禍와 福이 뒤바뀌었구나.

그 후

러시아는 붉은 세월 70년 다 청산하고

중국, 정치는 左에 두고 경제만 半 우향우

개방 10여년에 질풍같이 달려왔는데

그 붉은 새 좌우 두 날개가 따로 따로 노니

앞으로의 고공비행 큰 숙제 남았구나.

「새마을」을 배우자 구호 아래

중국 각지 세웠던 「발전한국연구소」

썩은 정치 투쟁 사회 전염될까봐

더 배울 것 없다며 이제 모두 문 닫았다네.

그 견본, 우리는 뭐라 했나.

「개발독재」라 빈정댔던가.

五.

해방된 한반도는 무얼 이루었나.

두 동강에 좌우 대립 骨肉 싸움까지.

누가 먼저 싸움 걸었나

금수강산 백성살림 쑥대밭이 되었지.

칼부림 원수끼리 화해하자면

두 世代는 지나야 뜸이나 돌지

그 총질, 남북통일 반세기나 더 늦춘 원인되었네.

그 후의 갈림길

南은 경제 재건 北은 군사 재건

그리하여 한쪽은 돈의 나라 또 한쪽은 총의 나라

한쪽은 왕이 사천만 또 한쪽은 대왕이 하나

한쪽은 한 사람이 작은 컴퓨터 한 대씩

또 한쪽은 중앙에 거대 컴퓨터 한 대

한쪽은 사람마다 내 돈 네 돈

또 한쪽은 큰 한 주머니에서 돈 배급하고

하나부터 열까지 서로 다르니

험하고도 멀구나 하나 되는 길.

죠센징(朝鮮人) 한또징(半島人)

나 어릴 적, 일본인이 우리를 묘멸하던 낱말

그런데 한 20년 전

러․중 두 나라 대문 열려 여행 갔을 때

멸시 대신 사람대접 제법 받아

안개 낀 이 가슴도 한번 개였지.

그 대접, 한번 반짝 끝나는 건 아니겠지

후손들도 그 대접 받고 살게 될까.

한반도여.

그런데 최근 들어

또 다시 東은 물론 西도 北도 다 높아져

3高山에 둘러싸인 골짜기에 너 다시 빠져든 듯

근심 되네 한반도여

六.

우리 이웃 인심들 어디까지 왔나.

前科者 일본은 뉘우침 없고

이웃나라 反日감정 아직도 팽팽

중국은 기다린다 회초리 들 날.

일본도 假想敵 1호가 중국

경제는 가까워지나 정치와 군사는 멀어져만 가네.

갈라진 한반도여

통일이란 이름으로 만약 불꽃 올린다면

청룡과 백호가 좌우에서 뛰어들고

북극곰이 등 뒤에서 달려들어

온 누리 合縱連橫 일어나는 날

어찌 감당할꼬.

우선은 집안 문제 급선무로다

내부정리 끝내야 밖으로 뛰지.

걱정 되네 너의 앞 날.

색깔 다른 두 한반도여.

七.

한반도여

바깥바람 감당 어찌해야 하나.

그 옛날 중원의 남북 쟁투 어찌 대응했으며

중화시대 우리 선인 어떤 자세 취했나.

대륙과 해양 상쟁 어찌 대했으며

일본 패권시대엔 우리 어찌되었나.

미․소 양강 시대 어찌 살았으며

팍스 아메리카나엔 어찌하고 있나.

미국 一極체제 시간이 흘러

미․중이 겨루면 그땐 어찌 대처하려나.

한반도여

4강이 지켜보고 있다

수판 알 굴리면서…

바로 옆집 2강이 노려보고 있다

얕잡아 보는 눈으로…

오늘은 어찌하여

근심만 번져 가는가.

오!

사랑하는 한반도여.

2002. 7. 2

(*태산에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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