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총장님 자서전

14. 애송이 인사계장, 사은(師恩)을 갚다(50-103페이지)

김현거사 2016. 11. 13. 06:57

14. 애송이 인사계장, 사은(師恩)을 갚다

 

 문교부에 입문한지 두 달 만인(*에 5.16 군사정변을 겪는 가운데 1년 동안의 수습기간을 지나고,) 이듬해 1962년 4월에 행정 사무관이 되면서 벼락감투를 둘러쓰게 되었다. 문교부 총무과의 인사계장을 맡은 것이다. 그 자리는 전국의 각급학교 교장 장학관까지 인사권을 행사하는 자리다. 물론 각 도의 내신이야 받지만 모두 직접 권력을 행사하는 막강한 자리다. 인사계장 자리는 긴긴 사무관 경력을 마치고 과장 승진을 코앞에 둔 노장이 앉는 자리다. 거기에 애송이 초임 사무관을 앉혔으니 자타가 놀랄 일이었다 .

 

차차 알고 보니 고등고시 선배 김강현 과장의 추천에 의한 돌발사건 이었다.

(*인사계장 자리는 긴긴 사무관 경력을 마치고 과장 승진을 코앞에 둔 노장이 앉는 자리에 애송이 초임 사무관을 앉혔으니 자타가 놀랄 일이었다.)

당시 상관은 정윤진(丁允鎭) 총무과장, 이승우 차관, 김상협 장관이었는데, 김강현 선배가 더 윗 고시 선배인 정 과장에게 이 후배를 추천한 것이다. 말하자면 고시동지끼리 짜고 친 고오스톱이었다.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는 소위 5.16 혁명 직후라 권고사직 징계와 감원 바람이 불어 사람이 모자라는 상황이었고,

(*지만, 그렇다 해도)

(*고시동지끼리 짜고 친 고오스톱이었던 것이다. )

 그 당시의 인사업무량은 엄청났(었)다.

(*지방 위임 없이 전국의 각급학교 교장 장학관까지 인사권을 행사하는 자리였다. 물론 각 도의 내신이야 받지만 모두 직접 권력을 행사하는 막강한 자리였다.)

와중에  때마침 모교 진주사범학교 교장 자리가 하나 비었다. 최장기 재임하신 정진환 교장이 퇴임한 빈자리였다. 그래  내가 잘 아는 진주사범학교 동창들과 교직 동료들을 떠올려 보았으나, 그들은 모두 교직경력 10여년에 불과한 평교사 수준이고 인사권도 시·도에 위임되어 있어 내가 손 댈 입지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범학교 시절 은사 층을 달랐다. 먼저 두 분의 은사님이 떠올랐는데, 두 분 다 소식 끊어진지 10여년이 된 분이다. 한 분은 교직을 이미 떠난 상태고, 나머지 한 분은 수소문 하니 경남 김해농업고등학교 교장으로 계셨다.

 해방 직후 우리 2학년 갑 반 담임과 국어를 맡아 우리 시조를 처음 가르친 박해권 선생님 이다. 출석부를 보지도 않고 “이정우. 정태수. 성재록…” 하고 부르시던 정다운 국어 선생님이다. 황진이의 사랑가, 정몽주의 단심가, 이방원의 하여가 등등을 신나게 가르치며 인상에 깊이 남은 스승이다. 

  그래 아무도 청탁 못하던 그 혁명기에 부탁도 없이 가만히 계시는 분에게 내 스스로 나서서 ‘영전하시겠습니까?’ ‘어디로 옮기고 싶습니까?’ 하고 물어서 일을 벌여야 할 상황도 아니어서,

  

(*간혹 한가한 시간이면 사범학교 동창들과 스승들이 떠올랐다. 교직 동료들도 생각났다. 그러나 은사 층을 빼면 모두 교직경력 10여년에 불과한 평교사 수준이 대부분이어서 인사권이 시·도에 위임되어 있어 내가 손 댈 입지는 아니었다. 그리하여 은사들이 많이 떠올랐다.)

 

 (*아무도 청탁 못하던 혁명기인지라 부탁하는 사람 없이 가만히 있는 분을 내 스스로가 나서서 ‘영전하시겠습니까?’ ‘어디로 옮기고 싶습니까?’ 하고 물어서 일을 벌여야 할 상황이었다. 오직 은사 한 분만이라도 도와드리고 싶었다.)

(* 때마침 모교 진주사범학교 교장 자리가 비었다. 최장기 재임하신 정진환 교장이 퇴임한 빈자리였다. 사범학교 시절 은사 두 분이 떠올랐다. 다 소식 끊어진지 10여년이 된 분들이지만, 한 분은 교직을 이미 떠난 상태라 나머지 한 분은 수소문 하니 경남 김해농업고등학교 교장으로 계셨다. 해방 직후 우리 2학년 갑 반 담임과 국어를 맡아 우리 시조를 처음 가르친 박해권 선생이었다. 출석부를 보지도 않고 “이정우 정태수 성재록…” 출석 부르던 정다운 국어 선생님이었다. 황진이의 사랑가, 정몽주의 단심가, 이방원의 하여가 등등을 신나게 가르치며 인상에 깊이 남은 스승이었다. )

 

 바로 경남 이윤근 교육감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해권 교장을 진주사범 교장으로 임면코자 하니 내신서(를) 써 올려 보내주십시오”

했더니, 

 “안되는데요. 무슨 잘못이 있어 그리로 좌천된 분인데 옮긴지 채 1년도 안됐습니다”

한다. 그래

 “뭐요? 공립에서 국립으로 옮긴다는데 그래도 안됩니까?”

하였더니,  

 “영전이니 곤란합니다”

한다.

 솔직히 그때는 혈기방창하던 때다. 문교부 인사계장 자리는 막강한 자리다. 그래

 (*나는)

 화난 목소리로 “알았어요” 하고 수화기 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탁 끊었다.

그리고 한 10분이나 시간이 흘렀을까. 전화기 벨소리가 울려 들어보니 이 교육감이(*었)다.

“화나셨습니까? 아까 정 계장님 부탁 말씀, 그대로 내신해 올리겠습니다”

이렇게 (하여) 내신서가 올라오고 서류 들고 다니면서 과장 차관 장관 결재 얻어 사범교장 발령장과 인사처리 통지서가 발송되어 모든 일이 (*깔끔히) 끝났다. 

그런데  얼마 후 문교부 장학실의 정회근 장학관이 인사계장석으로 방문차 들리셨다( 왔다.) 그분은(는) 진주사범 은사시(이)면서 우리 집안으로는 거꾸로 조카뻘이었다.

 환담 끝에 진주엘 가서 친구 박해권 교장을 만났더니 영전 이야기를 하면서 “아마 사천 출신 아무개 국회의원 덕분인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신다.

(* 하였다. 아니 이럴수가… 나는)

 제자가 스승 도와드린 일은 생색을 내서도 자랑해서도 인되는 것이라 여겨 때가 되면 아시겠지 하고 , 협의도 통보도 없이 혼자 처리했지만, 아니 이럴수가…

(* “원래 제자가 스승 도와드린 일은 생색을 내서도 자랑해서도 인되는 것이라 여겨, 때가 되면 아시겠지 하고 넘겼었는데 이렇게 오해하도록 까지 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고 생각을 되돌려)

 

그래  그 사연을 정 장학관에게 고했더니(다. 그는) 그 분은  바로 그 자리에서 전화

(*로 그 진실을 알려야겠다 하였고 그 자리에서)

통화 한 번으로 모든 상황을 박교장님께  (정 장학관이 모두) 설명 완료 하시었다.

(*완하였다.)

 박교장 선생은 내가 제자인지도 (*내가) 문교부 인사계장인줄도(을) 모르고 계셨다.

 (*하신다있었다 하였다. 그런) 설명을 다 듣고는 나를 떠올리고 고맙다는 인사 교환을 했다.(으로 총정리 엇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이 은사님과 (*박 선생과는) 생애 첫 통화로 (한) 15년 만의 대화였다.

 

 박해권 선생과 제2막 이야기로 넘어가자.

 그 해(1962)에 혁명정부는 국가재건 최고회의 입법으로 전국의 ‘사범학교를 2년제 교육대학으로 승격’시켰다.

 진주사범학교는 1923년에 경상남도 공립 사범학교 설립, 1940년에 관립 진주사범학교로, 해방 정부수립 6.25, 1~2공화국 5.16을 거친 뒤 1962년 1월 1일에 이르러 초급대학이 된 것이다.

진주사범은 관립 사범학교 시대 20 년간에, 심상과 463명, 강습과 45명, 특설강습과 200명, 초등교원 양성소 243명을 배출하여 경남 초등교육을 이끌어온 전통을 지닌 명망 높은 학교이다.

2년제 교육대학이 되었으니 학장을 선임해야 한다. 그래 나는 인사 실무 책임자로 당연히 은사 박해권 현 교장을 자동 승진 임명할려고 안을(될 것으로) 상정하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상부에서 전혀 엉뚱한 지시가 내려왔다.

(다. 문제는 화급히 다가왔다.)

충남대 조ㅇㅇ 교수를 진주교대 학장으로 임명하는 결재서류를 만들어 올리라는 지시였다

(*가 내려왔다.)

(* 나는 즉시 반발했다.)

 지금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분이 자격이 단단한 분이고 나에게는 스승인데 이럴 수가 있는가? 그교수가( 아무개는) 누구냐고 배후를 물어보니 (? 하고 따졌더니,) 이면 스토리가 있다.

(*를 다 말해 주었다. )

분은(는) 진주사범 교사직을 거쳐 지금 충남대 교수로 재직중이며 하동 출신의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김상협 장관에게 부탁을 해와서 이를 들어주기로 한 것이니 두 말 말고 지시대로 이행하라는 것이(었)다.

그래 나는 “과장님,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고 물러나와 (왔다. 나는) 즉시 허선간 보통교육국장에게 달려가 (갔다.) 자초지종을 고하고 중정부장을 설득해 달라 부탁했는데, 마침 (다.

 중앙정보부장도 허(이) 국장도 하동 동향인이었다.

고시 선배 허국장님은 열심히 일하는 젊은 인사계장을 좋게 생각하셨던 것 같다.( 고추를 불다가)

( 마지못해) 허 국장님이 어렵사리 내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여(였다.) 그날 밤 (고시 선배 허 국장님이) 중정부장을 찾아가 (간곡히) 설득하고 그것이 주효하여 중정부장이 김상협 장관에게 전화하여 그 청탁을 취소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가슴을 쓸어내리고 박해권 학장 임명 서류를 급히 만들어 결재를 얻어 임명장을 교부하였다.

 

 그리하여 1963년 3월 8일, 2년제 진주교대 개교식, 교문에 새 간판 달기. 학장 취임식에 참석하여(을 마쳤다. 나도) 박 학장과 나란히 마주 서서 「진주교육대학」 현판을 걸었다.

이렇게 나는 (*마음 먹은 대로) 은사님께 사은(을) 한적 있는데, (갚은 것이다. 나는) 지금 내가 등단 12년(째)의 시조시인이지만(다.) 그것은 다 사범학교 재학 시절  박 선생님의 시조수업 덕택이다.

 한가지 다행한 일은 (그리고) 그때 양보한 그 분은 곧 제2대 진주 교대 학장으로 부임하여 한 파수 늦게 뜻을 이루게 해드린 일이다(되어 다행이었다.)

 

 

15. 1970년대, 사회교육과 산업교육의 혁신

 

 나는 70년대에 사회교육국, 다음엔 산업교육국 국장을 거쳤다.

(*먼저 사회교육국, 다음엔 산업교육국이었다.)

그때는  박정희 정부 제3공화국 성숙기에 해당되는데,(된다.) 남북 간의 개인별 GNP가 뒤바뀐 때고, 그 시대적 배경이 대외적 발돋움으로 교육정책에 투영되고, 이른바 산업화 시대의 산업교육국장의 임무도 긴박도를 더해간 시기다.(의 중책이 내 어깨를 눌렀다. 무거웠다.)

 사회교육국은(에는) 학교교육 이외에(의 분야와) 해외유학업무, 그리고 재외국민과 교포교육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나는 (그리하여 그 중에도) 먼저 국비유학 제도를 창설하기로 (정책적) 뜻을 굳혔다. 그때까지는 해외 유학은 오로지 개인의 자유와 그 재력과 (에 맡겨져 있었다. 그 밖에는) 장학재단이나 종교단체의 지원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때는 해방 후 6. 25 내전을 겪으면서 남한의 국부나 개인경제가 송두리째 무너져 있던 때다. 북한은 70년대 까지 쌀이 남아 돌아서 버리지 못 해 먹었던 때고, 남한은 보릿고개를 못 넘겨서 굶어 죽는 사람이 나돌던 시절이다. 북한인의 1인당 GNP가 남한인의 거의 1.5배로, 
 (1인당 국민소득(GNP)이)

줄곧 남저북고(南低北高)현상을 보여 왔

(다. 1960년에 남은 $494 북은 $136이던?)

 

1인당 평균소득이 줄곧 70년대 중반까지 그 패턴으로 이어오다가, 1975년에 이르러 남고북저로 역전된 것이다. 즉 그해 남 $535 북 $467로 뒤바뀌게 된다. 그 이후는 그 격차가 자꾸 자꾸 더해져서 2015년에는 남은 북의 45배로 격차를 이루게 된다.

 

 나는 (그 이듬해) 1976에 이제는 국민의 세금을 재원으로 가난한 청년도 해외유학을 갈수 있도록 국가가 책임지는 제도를 도입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장관의 결재를 얻어 박 대통령에게 국비해외유학제도 창설 계획서를 앙재 하였다. 모두들 고추 먹은 소리를 들으면서 협조 결재와 최종결재를 받았지만, 의외로 청와대는 아무 질문도 없이 쉽게 결재가 내려왔다. 이 결재는 중요한 것이다. (이) 대통령 재가는 경제기획원 예산국을 기속하기 때문이다.

 

 나는 바로 예산을 확보하고 1977년 제1회 국비유학생 모집 공고(와 PR을) 하고 제1회 국비유학생 모집 시험을 치르고 12명을 각자 희망국의 희망대학에 유학 가도록 조치를 끝냈다.

 (그리하여)

 그리고 해마다 그 수를 늘려나가(갔다.) 1978년엔 50명, 79년엔 89명에 이르렀다. 이공계를 주류로 하되 경영계 사회계로 범위(버뮈)를 확대했다. 이에 따라 국비예산도 점증하고 청년층의 관심도도 높아갔다.

(나의 1인당 남북 GNP 역전 기념사업은 성공이었다. 그 일)

 이후 40여년이 지났으니 그동안 나랏돈으로 (공짜) 해외 유학한 청년의 수는 얼마나 될까? 어느 분야 어느 직종으로 취업하여 국가에 봉사하고 있을까? 교수가 되어 후진을 양성하는 일꾼은 또 얼마일까?  생각만 해도 흐뭇하기만 하다.

 

그 다음 취한 정책은 (다음으로) 중동과 아프리카의 언어개발정책이다. 국세가 뻗어나가자 아구미(亞歐美) 3대륙에의 진출과 (에 더하여,) 그 중간지대인 중동(中東)지구와 아프리카 진출을 하게 되었다.

(의 국운을 맞게 되었다.)

그래 아프리카어 공통어인 스와힐리어와 중동지역의 체코어 등의 학과를 처음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에 개설한 바 있다. 마침 문교부 정책 자문교수로 자주 만나는 오한진 교수와의 간담에서 얻은 수확이(었)다.

한국외대에서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아프리카 문제연구소 개설, 스와힐리어과 신확충(뒤에 아프리카어학부로 확대), 현지 대학과의 자매결연과 교류 등을(이) 추진했다(되었다.)

 처음엔 담당교수를 구하지 못해 영국 유학(하)생을 유치하고 다음(은)에는 외대 출신 학생을 유학 보내서 그를 기다려 임명하는 바쁜 걸음을 쳤었다.

 80년대에 들어 전두환 대통령(의) 아프리카 순방시에 현지에서(를 돌며) 한국외대의 이 개설을 선견지명이라 칭찬하였다 들었다.

 상기 학과를 졸업한 졸업생들은 아프리카 진출, 정계 언론계 학계 진출, 기타 많은 부문에 역할하고 있다( 한다.) 한국외대에서는 2010년에 아프리카학부 개설 30주년을 맞아 나와 오한진 교수에게 감사패를 전달해왔었고, (다.) 2013년말에는 한국외대 김성환 동유럽대학장 명의의 감사패도 직접 전달 받았다. 모두 새로운 감회를 맛보게 한 일들이다.(에 젖기도 하였다.)

 

1978에는 (다음에는) 산업교육국장으로 옮겨가서 각급 실업학교의 지향점과 체질개선에 착수했다.

 (*졌다(1978).)

 박정희 정부의 산업화 시대에 걸맞게(의) 산업교육국 실업계 학교의 현실적인 변신을 꾀한 것이다. 

( 은 남다른 시기적 각박감이 있었다. 실업계 고등학교와 과학계 고교담당관이다.)

 (각급 실업학교의 지향점과 체질개선에 착수하게 된다.)

 그 때까지는 실과계 학교이면서도 실제로는 졸업생들을 직장 월급쟁이 만드는 학교 체질에 젖어 있었다. 가령 농업고교를 나오면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면서기 군청서기로, 상고 나오면 장사하는 것이 아니라 은행이나 회사에 가서 월급 받는 것이 주류를 이루는 관행이 짙었다.

 

나는 (그리하여) 첫째로 농고는 oo자영 농업고등학교로, 아니면 자영농과 설치를 권장하여 그 교육과정도 씨앗 뿌리고 경작하고 신품종 재배 축산물 경영 등등 농사실무를 가르쳐 농촌에 농민으로 정착하는 주인공을 양성하도록 행정 조치하였다.

 교육감 회의와 전국 농고 교장회의를 열고 내가 직접 강사로 나서 역설하기도 하였다.

 경기도의 여주농고에서 자영농과 설치 운영 수업 참관과 세미나도 열었다. 그 땐 경기도 교육감간부들도 대거 참여하였고(다.) 이 정책은 곧 전국으로 확산되고 큰 호응을 얻었다.

 최근에 보니 도마다 학교마다 「자영농과 동창회」가 조직되어 친목을 도모하기도 하고. 시장 군수가 격려하고 공비 보조도 하는 것을 보고 흐뭇하기 한량없다. 품종 개량 새 작물 재배와 농업경영자라는 독자적 영역이 개척된 것을 보았다.(고) 농업 현장 발전을 기원 드린다.

 

 둘째로 상업고교 문제인데 (이다.) 앞에도 언급했다시피 상고는 회사원 양성소로 인식 되어 있었다. 나는 상고만 나와도 월급쟁이가 아니라 자기가 직접 회사를 창업하거나 인수합병 등으로 회사를 만들어 상업을 직접 하는 경영자를 만드는 학교로 변신하도록 하기 위하여 「상업고교」라는 명칭을 「ㅇㅇ경영고등학교」로 바꾸게 하였다. 큰 호응을 얻었고 학과도 그에 걸맞도록 다양하게 개설하게 하였는데, (다.) 그 결과 상고의 자긍심이 높아진 것을 느낄 수 있어 만족스러웠다.

 

 셋째로 공고문제인데,(다.) 공고는 별로 손댈 것이 없었다. 다만 한 가지, 공고를 명칭 변경하든지 새 학교를 만들어 「과학고등학교」를 창설하게 제도화하였다.

 제3공화국은 1966년에 KIST를 개교하고 1971년에는 한국과학원법을 만들어 대학원 과정의 KAIST를 설립하고 석사과정(1973)과 박사과정(1975)를 개설하였다.

 이에 발맞추어 문교부에서도 실무공고에서 순수과학 고교로 전환하거나 새 과학고를 탄생시킨 것이다. 물리 화학 생물 지구과학 우주과학 등이 부각되어 기초과학 진흥의 일꾼을 길러내도록 이목을 끌게 하여(였다. 이에는) 각 시·도가 경쟁하는 양상까지 벌어지기도 하였다.

 

 넷째로 전문학교의 사기진작정책이었다. 4년제 대학이 우후죽순처럼 생기자(벌자), 전문학교는 그 명칭부터 위축 받고 있었다. 이공계 실무 책임진을 양성하는 고등교육기관이 숨죽이고 살아서야 되겠는가? 그래 (리하여) 과감하게 「전문대학」으로 호칭을 바꾸도록 입법하였다. 그 결과 사기는 올라갔고(다.) 「교장」이 「학장」으로 바뀌었다. 최근에 보니 나 뒤에도 이 방향에 더욱 박차를 가하여 「전문대학교」로 또 「총장」으로 바뀐 것을 보고 4년제와 2년 3년제를 차별하지 않는 동일 지향성을 느끼고 잘 이어져가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한다. (는 정책감각을 느꼈다.)

 

 

16. 1980년대. 운명의 전화 한 통화 

 

 

(*를 만난 나의 숙명)

 

 (*--운명의 전화 한 통화--)

 

나의 인생 중(의) 관직 23년간의 골든타임은 1980년대 인데, (에 밀려왔다.)

 이 시기에 나에게 돌발사건이 일어났다.

(는 나의 관업 20년째로 마지막 4년간(만 3년간)을 맞이하고 만다. 그 시작은)

 

대학교육국장으로 전보된 1980년 5월27일, (이었다. 그런데) 그 1주일 만인(*에 돌발사건이난다.)

 

1980년 6월 4일 오후 6시 30분경, 장관실에서 결재를 마치고 집무실(*대학교육국장실)로 들어서는 순간, 여비서가 (비서실에서) 이제 막 걸려와 있던 나(저자)를 찾는 전화수화기를 넘겨주었다.

(여비서로부터 받아 들었다.)

 상대방은 자기의 신분계급을 김상준(金相駿) 대령이라고 밝힌 뒤, 나(필자)의 직책과 성명을 확인하고 나서 "국장님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국보위) 문교공보분과위원회의 ‘문교위원’으로 근무하게 결정되었으니, 내일 오전 8시에 출근하기 바란다”는 일방적 통보를 해왔다.

 

 퇴근시간이 지난 이후에 이러한 전화를 받은 나는 몹시 당황하였으나(고) 몇 가지 의문을 질문하였다. '그곳 장소는 어디냐? 분과위원이란 것이 상근이냐 비상근이냐? 문교부 현직국장으로 근무하면(명)서 (수시)회의만 수시 참석하는 자문기구냐( 아니냐)? 나는 아직 위원 사령장을 못 받았고 장관으로 부터도 위촉 등의 지시를 받은 바가 없는데 어떻게 하느냐?'

 등등이었다.

그는 '발령장은 추후 주어질 것이고 상설기구로 상근해야 하며, 현재의 직책은 명목만 그대로 유지한다는 것과, 장관도 (?정모라고) 구체적으로는 아직 모르고 있을지 모르지만, 누구든지 그 부처에서 차출명령이 나면 곧 파견근무케 하라는 일반 명령이 각 장관에게 시달되어 있으니, 바로(지금 가서) 이 사실을 장관께 보고하고 내일 8시에 출근해야 한다'는, 온유한 말투지만 확실한 전달을 한 후 전화를 끊었다.

 

 이 전화 한 통화는 내가 원하지도 기다리지도 않은 운명의 외래 전화였다. 사주팔자에 예정되어있던 불가역(不可逆)사건이었고 일대호기(一大好機)였는지 모른다.

 어찌 그 시간 그 장소, 즉 긴박한 80년 6월에 대학교육국장이란 자리에 (어찌) 내가 앉아있었던지(고.) 지금(에 와서) 생각해봐도 하나의 숙명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고 여겨진다.)

 이렇게하여 (대변환기 80년대는 나에게 우명적으로 닦아왔다. 이후 차출근무 1년이란 생소한 세월을 맞게 된다.) 5.16 혁명기의 국가재건최고회의와 같은 초정부기관에 1년 차출근무를 하게 된다.

 그 명칭은 하나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이며, 그 다른 하나는 「국가보위입법회의」다.

 

 전화를 끊은 나는, 급한 나머지 장관실로 뛰어갔다. 장관실 문을 나오고 있던 이상규 차관에게 급한 일이 생겼으니 도로 들어가자고 밀어붙이면서 이규호 장관실로 들어갔다. 셋이 앉은 자리에서 전후 사정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장관실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 날은 이규호 장관이 취임한 지 보름째이며 내가 대학교육국장에 부임한 지 열흘 되는 날이다. (갓 새 출발의 시점이었다.) 신임 이 장관이(의) 첫 인사(조직)에서 나를 발탁하여 대학행정을 맡겼기에 나도 의욕을 가지고 한참 업무파악과 많은 구상들을 나름대로 불태우고 있던 때다.(라,) 나는  그 직책을 떠나기 싫었고, 또 ‘국보위’라는 미지의 세계로 옮겨가는 것이 불안하기도하여, 장·차관 두 분에게 이대로 남아 있게 해달라고 간청하였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쓴웃음 나올 어린애 같은 짓이지만(었다.고 생각되지만,) 그때(의) 나는 진지한 심정이었다(으로,) 장관에게 “전두환 장군(대통령 전이었다)에게 전화를 걸어 정태수는 대학교육국장이라는 중책을 맡겼으니 다른 사람으로 교체해 달라고 요청해 달라”고 간청하는 한편, 차관에게는 “저가 옮기지 않도록 백방으로 노력해달라”고 간청하였다.

그 말에 두 분 다 묵묵부답. 묘안이 있을리 없다. 한참 후 ( 묘안이 안 떠오르는지 나의 제안에 해답이 없다가) 차관이 “그러면 이주운 국장을 대신 보내는 게 어떻겠습니까?”하고 제안했다.

그러나 장관은 역시 한참 묵묵부답으로 있다가

“차출근무가 있을 것이란 예고는 있었고 구체적 사실은 통보 받은 바 없지만...”

이것이 (가 이) 장관의 답이었다. 장관(나로서)도 어찌할 방도가 없다는 태도를 암시한(하는) 것이(었)다.

나는 (답답하면서도) 아무 성과 없이 장관실을 물러 나와(왔다.) 퇴근하면서( 후에도 급박하게 다가온) 「내일 8시 출근」을 어찌할 것인가로 (가 미결상태로 남아) 머리가 무거웠다(를 무겁게 하였다.)

 

돌이켜보면 1980년은 극심한 사회혼란과 국정의 급박성이 깊은 함수관계에 놓인 해였다. 제4공화정이 끝나고 제5공화정으로의 이행과정이었던 1980년은, 4월~5월에 걸친 거센 학원가의 격랑이 있었다.

( 속에서 이루어져 나갔다.)

80년 초 당시의 김옥길 장관 때는 (은 영일이 없었다.) 연이은 대학생의 성토·시위·규탄·화형식·가두진출·사립대학 분규와 부정폭로·대학 감사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혼란이 연속되다가, 5월 13일에는 대학생 3천여 명이 광화문과 종로에 대거 진출하고 지방대학생의 대도시(의) 도심 진출 사태까지 확산되었다.

14일에는 광화문에 3만여 명이 진출한 후 15일 16일 17일에 대혼란이 더욱 가중되자, 17일 밤 긴급 국무회의에서 전 대학 휴교령이 의결 공포되었다.

 

 한편으로는  김재규 사형, 정치인 연행, 내각 개편, 광주사태, 국보위 설치 등 정치적(로) 급류가 흐르고 있었다.

문교부도 이규호 장관이 부임(5.24)하고, 실·국장 개편으로 나(필자)는 5월 27일자로 대학교육국장으로 전보되었다. 나는 새 장관께서 이러한 중대한 임무를 (새 장관께서) 맡겨주어(었고,) 어려운 시국이지만 대학교육문제에 나름대로의 포부와 의욕을(도) 펼쳐(펴)보려는 마음가짐을(도) 굳히고 막 출범한 시점에(이었다. 이러한 때에) 잘 알려지지도 않은 기관에서 갑작스럽게 오라고 하니 우선 허탈감과 불안감이 먼저 겹쳐졌다.(, 이와 같은 반응이 일어난 것이었다고 회상된다.)

 

그래서 그날 밤, 평소에 친분이 있는 국보위 분과 위원장 (공표되지는 않았으나 며칠 전 희미하게 복사된 명단을 문교부 실·국장들이 돌려 본 일이 있었다) 두 분에게 전화를 걸어, 내 문제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정관용 국보위 총무처장(당시 총무처 국장 겸임, 나중에 총무처 장관 및 내무부 장관)과 이규효 위원장(당시 건설부 기획관리실장 겸 국보위 건설분과위원장, 뒤에 건설부장관)에게, 나의 심정을 솔직히 토로하고 대처방안을 물었다.

 당시 그 두 분은 막 차출되어 국보위 분과위원장을 각각 맡아 출근 중이라며, 도리어 반기며 먼저 격려부터 해주었다.(해왔다. 그) 두 분의 조언 요지는 대략 이러했다.(은)

 “대학교육국장은 중요하고 국보위 위원을 덜 중요하다고 오해 받을 말을 할 수 있(주장이 성립되)겠느냐?”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장관이 파견 못하겠다고 어떻게 말하겠느냐?”며,  “각의의결을 거쳐 발령된 셈인데 공무원이 이를 거부한다는 것은 곧 사직을 의미하는 것 아니냐?”

 “문교부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국보위는 지금 전체 국가 (이 시국) 형편상 더 긴급한 것이 아니겠나?” 등등 이었다.(의 조언을 해주었다. )

 

나는 두 분의 조언을 들은 후  불가항력임을 깨닫고(이라고 단정 짓고,) 대학교육국장직의 미련을 털어버린 후 (리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밤 12시가 가까웠지만 문교부의 장·차관 두 분 댁에 전화를 걸었다. (어) 두 위원장의 조언내용과 나(필자)의 결심을 밝히고(말씀드리고,) 내일 아침에는 문교부가 아닌 국보위로 바로 출근하겠으니 허가해 달라고 말씀드렸다.

(*는 요지의 진언을 하였다. 이는 그날 오후 7시경에 있었던 문교부 장관실에서의 잔류요청을 철회하고 새 발령에 순응하겠다고 하는 나의 번의 요청이었으며, 〮)

장·차관 두 분은 어제 오후 장관실에서 문교부에 그냥 있겠다던 나의 잔류 요청이 바뀌자 어려운 난제 하나가 해결되었다는 정도로 생각하여 그냥 구두허가를 해 주었다.

 

 지나고 보니, 이날의 전두환 국보위의  전화 한 통화는 (그 뒤의) 내 운명에 큰 영향을 끼친 대 사건이었(던 셈이)다. 그 뒤 나의 대학교육국장(2급) 겸 국보위 문교공보위원, 나중에 중앙교육연수원장(1급) 겸 문공분과위원장, 입법회의 의원 겸 문공분과 간사의원, 문교부 차관, 그리고 50대 초반의 조기 퇴직으로 이어지는 그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런(러한) 신분변동에는 새 (인연의) 은인들, 즉 훗날의 전두환 대통령, 이기백 장군(국방부장관), 이규호 장관의 도움(과 은덕)이 지대하였다.

 

17. 차출 근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김 대령의 전화를 받은 이튿날(*인) 1980년 6월 5일 8시에 국보위 사무실(당시 삼청동 소재, 문교부 소속 중앙교육연구소를 쓰고 있었다)로 출근하게 되었다. 그날부터 필자는 문교부를 떠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위원(끝 무렵에는 위원장)으로서, 그 해 10월 초순까지 약 4개월여에 걸쳐 초 정부기관에서 과도기적 교육정책 수립과 수행이라는 특수한 새 직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국보위 상임위원회 위원장은(에는) 전두환 장군이었다. (그리하여)

 업무개시 (그) 첫날 국보위 전원이 국립묘지 참배(8:40) 현판식(10:00) 사령장 수여(10:40)의 절차를 거쳐 (차출)근무를 시작하였다. 우리 분과는 당일 제1차로 문공부 측의 부처 부리핑(17:00)으로 업무가 개시되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유신정권이 붕괴된 후에 등장한 이른바 신군부가, 통치권 확립 차원에서 설치한 기관이다. 1980년 5월 31일의 국보위설치령에 따라 신설된 이 국보위는 위원장에 최규하 대통령, 상임위원회 위원장에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중앙정보부장서리, 위원은 총리 부총리 각부장관 등10인으로 구성되었다. 이 (상위) 위원회는 명목상의 상위기구이며 그 실질적 권능은 그 하부조직인 여러 분과로 조직된 상임위원회의 몫이었다.

(그)

 상임위원회는 전두환 위원장과 13개 분과위원장으로 구성되었(하)는데, 그 안에 분과위원을 여럿 두어 분야별 소관사항에 관한 기획·조정·통제업무를 관장하였다.

나는 문공분과의 문교 담당 분과위원으로 차출되어 참여하였다(한 셈이었다.)

국보위 위원 명단

(당연직) 대통령 최규하(위원장). 국무총리 서리 박충훈. 부총리겸경제장관 김원기. 외무부장관 박동진. 내무부장관 김종환. 법무부장관 오택근. 국방부장관 주영복. 문교부장관 이규호. 문공부장관 이광표 중정부장서리 전두환. 대통령비서실장 최광수.계엄사령관 이희성. 합동참모부의장 유병현. 육군참모총장 이희성. 해군참모총장 김종곤. 공군참모총장 윤자중. 국군보안사령관 전두환.

(임명직) 백석주 (육군 대장) 김경원 (대통령 특보) 진종채 (육군 중장) 유학성 (육군 중장) 윤성민 (육군 중장) 황영시 (육군 중장) 차규헌 (육군 중장) 김정호 (해병 중장) 노태우 (육군 소장) 정호용 (육군 소장)

국보위 상임위원회 명단

(임명직 16명) 전두환 (위원장). 이희근 공군중장. 신현수 육군중장. 정원민 해군중장. 강영식 육군중장. 박노영 육군중장. 김윤호 육군중장. 권영각 육군소장. 김홍한 육군소장. 노태우 육군소장. 김인기 공군소장. 안치순 정무비서관. 민해영 경제비서관. 최재호 민정비서관. 신현수 사정비서관

분과위원장 14명 (13분과위원장과 사무처장) 국방위원장 이기백(육군 소장). 법사위원장 문상익(대검찰청 검사). 외무위원장 노재원(외무부 기획실장). 내무위원장 이광노(육군소장). 경과위원장 김재익(기획원 기획국장). 재무위원장 심유선(육군소장). 문공위원장 오자복(육군소장). ----- 정태수(오자복원(워)장 전출후의 후임)

농수산위원장 박종문(농림부 국장).( ?)교통위원장 이우재 (육군준장). 건설위원장 이규효(건설부기획실장). 사무총장 정관용 (공무원교육원장).

각 분과에는 분과위원 5~6명과 전문위원 4~5명 배치되었다.

문교공보분과위원회의 경우는

위원장; 오자복 소장(뒤에 대장, 국방부장관),

간사위원; 김상준 대령(뒤에 중장, 1군사령관),

문화공보부 팀;

위원; 허문도(뒤에 공보부 차관·장관) 염길정(뒤에 국회의원)

허만일(문공부국장 뒤에 문화부차관)

전문위원;

김한규(뒤에 국회의원) 유창기(뒤에 한양대 교목실장)

문교부 팀;

위원; 정태수(문교부 대학교육국장)

김행자(당시 이화여대 정치학 교수, 뒤에 국회의원)

청소년팀; 안병규(기자, 뒤에 국회의원)

연락관; 이중환 대령(뒤에 준장)

이러한 조직은 처음부터가 아니고 내가 발령된 뒤에 재조정된 조직이었다.

그 경위는 이렇다. 당초, ‘문공위원회’란 약칭을 보고 ‘문공부 업무’만을 담당한 분과로 인식하여 문공부 즉 문화공보부 관련 위원만으로 충원하였다 한다. 나를 제외한 전 위원이 문화공보 관련자였다. 심지어 김행자 교수까지도 정치학자(PR전공)로 구성되었었다.

그러다가 국보위 개원이 임박한 시기에 도달한 뒤에 늦게야 ‘문공분과위원회’가 ‘문교 공보 분과위원회’의 약칭이며, 문교업무가 포함되어있다는 새 사실을 발견한 후에 개회 하루 전에 부랴부랴(불야불야) 나 한 사람을 추가발령하였던 것이다. 그래도 인원부족하여(으로) 김행자 교수를 공보팀에서 문교팀으로 내부 이동배치하여 문교팀 2인을 겨우 짠 것이었다.

 

나는 이번 차출에서 인연이나 지면 있는 분이 아무도 없(었)다. 알고보니 당시 국보위의 당면과제 중 제일 중요한 문제가(의 큰 하나는) ‘데모하는 대학을 공부하는 대학으로’ 안정시키는 일이었으므로, 시간에 쫓긴 국보위가(로서는) 대학교육국장 자리에 있는 나에게 퇴근시간을 넘긴 늦은 시간에 급한 전화로 “국보위로 내일 출근하라”는 차출명령을 전달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수일 후 나의 건의로 문교팀에는 문교부에서 성기훈 연구관(뒤에 중앙교육연수원 기획부장)과 김홍원 사무관(뒤에 총리실파견 교육부국장)을 추가 차출하게 하여 문교 실무를 담당하도록 보강(하게) 하였다.

 그 결과, 오자복 장(잔)군 휘하의 우리 교육팀은 두 위원(김행자 정태수)과 두 전문위원(성기훈 김용원)으로 최종 구성 되어(디었다. 기리고) 대학교육개혁이라는 막중한 개혁임무를 맡았다(가 부과되게 된다.)

지금(에 와서) 회상해 보면, 문교공보위원회는 오자복 위원장(육군소장) 밑에 공보팀과 문교팀으로 대분되어 활동했는데, 그 주관자는 허문도와 정태수였다고 여겨진다.

 허문도는 조선일보 기자출신으로, 최서면 동경 한국연구원장이 발굴한 북관대첩비(나의 11대조 관북의병장 정문부선생)를 도쿄특파원 재직시에 이를 국내에 처음으로 보도한 사람이다. 그때 나는 사회교육국장으로 재직할 때인데, (하면서 매우 고무된 기억이 있다.) 그것이 그와 나의 첫 인연이(었)다.

런 인연을 가진 (러한) 두 사람이 한 위원회에서 만나 각각 개혁기의 큰 임무를 분담수행하게 된 것이(었)다.

(즉) 허 위원은 부패하고 혼란했던 당시의 언론통폐합 개혁을, 나는 헝클어진 대학 학사개혁(7.30교육개혁)을 분담한 것이다.

 허 위원은 전국 64개 언론사를 신문사 14개. 방송사 3개, 통신사 1개로 통합한 일대개혁을 밀어붙였(었)다. 그와 나는 동향(경남의 고성과 진주)인데(*의 인연인데다,)   뒤에 (그는) 문공부 차관과 장관을 역임하였고, 나는 문교부 차관과 대학총장으로 길을 달리 하였다.

(지만 좋은 인연이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국보위는 과도기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분야에 걸친 여러 난제들에 대하여 단기간에 많은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중, 교육분야에서는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이라는 제목으로 「7.30 교육개혁」(1980.7.30.)이 발표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 항에서 보기로 하겠다.

나는 국보위 근무 4개월 후(여의 말기에) 문교공보분과위원장 발령을 받게 되었다. 함께 일하던 오자복 문공위원장이 중장으로 승진과 동시에 새 임지로 떠나게 되어, 느닷없이 그 후임을 맡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의 그 위원장 자리는 겨우 14일간에 불과했다.

(고 국보위의 종말 기간이어서 위원장 역할을 할 일도 없는 마무리단계였다. 다만)

 그 2주일 후에 갑자기 국가보위 입법회의가 발족되면서, 국보위는 해산되었다.(고 그) 각 분과위원장들 전원이 새 입법회의의 각 분과의 간사의원으로 임명되

(었다. 그리하여)

나의 근무지는 여의도(의) 국회 의사당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때 만약 내가 위원장 자리에 있지 않고 평 위원으로 있었다면 입법의원의 간사 의원이 아니라 문공분과 전문위원으로 발령되었을 것이다(참이었다.) 명목뿐인 위원장 감투 때문에 (가 전문위원  아니라) 입법의원 (하고도) 문교공보분과(의) 간사직을 맡았다.(.을 선물한 셈이다.)

국보위는 총 5개월간(1080.6.5.~10.27) 활동한 후에 그해 10월 27일에 국가보위입법회의로 개편된다. 즉, 전두환 국보위상임위원장이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11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총투표자 2,525명, 찬성 2,524표, 기권 1표), 개정 헌법이 10월 23일 확정(투표율 95.5%, 찬성률 91.6%)된다. 이와 같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와 이를 이은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제5공화국 출범을 위한 모든 조처를 마련한 후 11대 국회의 개원과 더불어 해산된다. 두 조직이(번의 모임이) 제5공화국을 열고 임무를 끝내게 된 것이다.

18. 초 정부적 긴급처방 「7.30 교육개혁」

(*내가 국보위에 차출근무하게 된 사건은,)

 

나는 사람의 운명 ⇛ (자기 탓) ± (그 시대) ± (만난 사람)의 도식으로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는 운명론을 실감한 돌발사였다.)

 즉 사주±시운±인덕, 이 도식의 합작품이라 생각한다.

내가 국보위에 차출된 사건은, (즉) 나에게 인연의 소중함을 깨닫게 한(하는) 일생일대의 돌발(대)사건이었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문공위원회 업무에 ‘문교’업무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늦게 발견된 것도, 교육부문 담당자 물색의 급박함도, 내가 마침 대학국장 자리에 있었던 것도, 7.30교육개혁 항목 속에 대학졸업정원제가 채택된 것도, 이 모두가 나의 다음 운세와 직결되고 만다.

 (그 결과는 시간이 다 흐른 뒤에야 알게 된다.)

당초에 국보위 문교팀에 부과된 가장 큰 명제는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근원인 ‘대학의 면학분위기 회복을 위한 혁명적 개혁’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데모하는 대학을 공부하는 대학으로의 획기적 개혁’이었다. 그래서 대학 국장인 나를 급히 합류시킨 것이(었)다.

그 결과 4인팀이 구성되었고 자동적으로 내가 주동이 된(하는) 조직으로 짜여지고 만 것이었다.

처음 내가 합류했을 때는 오자복 (오) 위원장과 (은 이미 먼저 임명되고) 공보팀에서 문교팀으로 옮겨온 (놓은 국보위의 홍일점,) 김행자 위원(이화대 정치학 교수) 뿐이었다.

(를 업무 주관자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두 분 다 교육정책(이라는 새로운) 분야는 암흑지대라, 늦게 온 나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딱한) 처지라(에 몰려,) 자동적으로 나의 안내를 받아야 되었다.

(게 된다. 나는 평소대로 새 과업에 열성을 다했다.)

그런데 나는 문교부(의) 대학 국장이지만 대학 업무를 전담한지 일천하여 대학문제에 관한 전문가적 자신이 없었다. 다만 국보위가(에) 당면과제와 관련된 사안을 산업교육국장 당시에 접한 경험이 있어 이를 상기하고 문교부(의) 사람과 일을 연결시켜 주기로 방향을 정했다.

( 그리하여 내 경험을 총동원하여 국보위 문교팀과 문교부, 그리고 한국교육개발원을 연결시키기 시작했다.)

 문교부(의) 대학국장을 ?겸직하던 나는 (인 내가) 장학실장(이준해), 기획관리실장, 교육개발원(KEDI) 원장(이영덕)을 소개하고, 내가 산업국장 당시 문교부 국장회의에서 상정 토론된 바 있는 KEDI의 「과외 금지 해소 대책」을 떠올리고 결국 KEDI 윤정일, 김영철 부장(들)까지 ?영입했다.

(직결하게 된다. 이 뒤에는 내가 산업국장 당시에 문교부 국장회의에서 상정 토론된 바 있는 KEDI의 「과외 금지 해소 대책」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 (개요와) 경위를 일별해보자.

(1) 그 반년 전부터 문교부와 KEDI가 씨름하고 있던 과제는 「과외 해소대책」이었다. 1980년 초에 KEDI는 「과열 과외공부 해소대책」을 문서화했다.(2. 13) 그 속에는 고교생의 과열과외, 사교육비, 교실의 침체 뿐 아니라, 대학입시 개혁과 졸업정원제도 포함되어 있었다.

(2) 이어 3월에는 문교부에서도 「과열 과외 해소대책 연구추진 계획」을 작성, 차관을 위원장으로 하는 장학실 소속 작업전담반 구성과 KEDI 연구팀 구성으로 1년간(3.1~12.31) 연구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2달 만에 단기대책 7개항과 장기대책 3개항에 사회대책 2개항을 공표했다. 그 속에도 대학문제가 주류를 이루고 졸업정원제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국보위의 「대학개혁 과제」와 문교부의 「과외해소 대책」은 그 명제는 서로 다르다. 전자는 주로 고등학생 문제이며 후자는 주로 대학생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동일 선상으로(에) 연결된 뿐 아니라 둘 다 같은 교육개혁 과제여서 긴밀히 결부되고 만다.

내가 발의한 (나의) 국보위·문교부·교육개발원 연결구상이 추진되고, 여러 번의 만남과 토의 끝에 국보위 문공위원장(문교팀)은 한국교육개발원에 그 추진계획을 제출하도록 정해졌다.(지시하였고,) 그리고 한 달도 걸리지 않고 「학교교육 정상화를 위한 과열과외공부 해소대책 연구」(1980.7.4.)라는 장문의 결과물을 제출받았다.

 이 문서가 7.30 교육개혁의 기초 제안서로 굳어져 갔다. KEDI로서는 연구를 시작한지 5개월만의 결과물이었다. 이를 우리는 「7.4 보고서」라 불렀다.

이에는 ① 대입시험제도를 대학별 필답고사제를 폐지하고 고교내신 성적과 면접시험으로 전환한다. ②대학 입학정원에 일정비율의 예비학생을 수용한다(졸업정원제의 싹눈)는 대학입시 개혁이 주류를 이루었었다.

이 7.4 보고서를 출발점으로 여름 한 달에 걸쳐 급진전을 거듭하여 마무리에 들어가게 된다.

 국보위 내부 토론회(7.11세미나)가 열리고 이어서 사회각계와 공개 토론하는 공청회(7.22 시민회관)가 열렸다. 그리하여 그 7월 29일 오전 9시 부터는 교육개혁안 최종 브리핑이 열렸다.

 여기에는 전두환 상임위원장, 오자복 문교공보분과 위원장을 비롯한 13개 분과위원장, 그리고 나를 포함한 문교팀 전원 참석으로 김행자 위원의 브리핑이 열렸다.

여기에서(는) 당면 교육정책 8개항이 열거되었다. 전두환 상임위원장의 지침발언 15개항도 있었다.[이상 모두 정태수 저 「7.30교육개혁(1991.10.31)에 수록되어있음].

교육사업 7개항도 제안되었다.

1. 교육목적세 신설 

2.교원처우 개선

 3.대학시설 확충

4.대학의 표준 교육과정과 교과서 개발

5.지방대학 육성

6.특수교육 진흥

7.대학평가의 표준화(였)다.

세칭 7.30 교육개혁이다.

이 회의에서 나는 교육대학의 4년제화 정책을 역설했다. 개편4개년(81~84)계획도 건의했다. 나는 위원장 결재를 얻어 공문으로 문교부 장관 앞( 공문)으로 서류를(문교부에) 이첩하였다.

(7.30교육개혁의 주요항목은 다음과 같다.)

7.30 교육개혁 주요항목

1. 대학 본고사 폐지와 예비고사 성적에 고교 내신성적 반영

2. 초중고교 교과목과 교육과정의 축소 조정

3. 대학 입학정원을 50% 늘리고 졸업정원제로 그 50%(를) 중간탈락제

4. 대학의 전일수업제 운영

5. 2년제 방송통신대학에 4년제 학사과정을 신설하고 인원을 확충

6. 교육전용방송 실시

7. 2년제 교육대학을 4년제로 연장(4개년 연차계획으로)

8. 교육재정의 확보(중학의무교육비 교부금 등 1조원 확보, 교육세 신설)

9. 교원의 처우개선(봉급인상, 교직수당, 연구비 확대)

10. 학력평가관리기구 설치운영(예비고사위, 내신제 연구)

11. 사학비리의 쇄신 등 수많은 개선업무 전개

이와 같이 우리세대의 총체적인 산업화과정에서 유행병처럼 만연된 청소년교육기의 병폐를 일소하기 위하여 (정성을 기울여 이 중대과업을 수행하고자) 진력하였다. 그리하여 국보위와 문교부와 한국교육개발원을 하나로 묶어 3기관을 포갬으로서 결국 7.30교육(욱)개혁안을 도출하게 하였다.

결론삼아 정리하자면, 7.30교육개혁안은 국보위가 결정한 새 정책안이지만, 당초(1980 연초)에 문교부가 과제를 결정하고, 그 위촉에 따라 한국교육개발원이 이를 성안하고 설왕설래 중이던 정책안(3~6월)을, 국보위가 이를 받아(6월중순) 재심삼심으로 심의 검토 절차를 다시 밟고(6~7월) 대통령 재가(7.29)를 받아 공표(7.30)한 정책이다.

이를 전후좌우로 중개한 사람이 (자는) 대학국장 재임 중이던 나였으며(정태수 위원이며), 이 작품의 실무 작업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교육개발원이었다.

 그 11개 항목 중, 졸업정원제를 빼고는 모든 정책이 정착되어 국가와 만족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본다. 이 노고가(를) 인정되어(함인지) 나는 그해 10월에 전두환 대통령 명의의 보국훈장 국선장을 받았(는)다.

19. 졸업정원제의 정책화과정과 그 지뢰

1980년대 초까지의 우리나라 대학생들은, 고등학교까지는 다른 나라같이, 또는 다른 나라 이상으로 열심히 공부하지만, 치열한 입시경쟁을 뚫고 일단 대학에 들어오기만 하면, 후유 한숨 길게 쉬며 그 때 부터는 술과 낭만과 데모에 정열을 쏟고, 공부는 게을리 해도, 누구나 다 졸업할 수 있는 탐구열이 식은 대학이었다. 강의실에서의 교수는 준비해온 교재를 일방적으로 강연하고, 학생은 아무 준비 없이 빈 노트만 들고 수업에 참가하여, 질문 하나 없는 수동형수업이 주류여서, 우리 대학은 세계에서 제일 공부 안하고 질 낮은 대학인 셈이었다.

이런 때에 초정부(超政府)기구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國保委)에서 발표한 1980년의 7.30 교육개혁안 속에는 「대학 졸업정원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20년 뒤에 다가올 21세기에 선진국 대열에 진입할 것을 목표로, 대학에만 맡겨둘 수 없는 면학정책을 법령으로 외부강제하는 제도로, 현재의 입학 정원을 학과 마다 30%씩 더 늘려뽑게 하고, 학년말 마다 중도 탈락시켜, 결국 원래 정원만큼 졸업생을 배출하는, 아주 의욕적인 개혁안이었다. 당시 우리사회의 적극론과 미국 대학의 학(하)습법과 엄격한 학사제도를 본뜬 한국교육개발원(KEDI)의 건의안을, 국가의 개혁항목으로 채택한 것이었다.

 

대학의 「졸업정원제」란 정책은 세계에 유례가 없는 사안일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인간으로서 억압받고 의식주에 허덕이던 우리 민족이, 해방과 건국과 산업화과정을 지나자 신분상승 의욕과 자녀들의 학력 경쟁에 불이 붙어 대학 진학경쟁이 심화되었다.

 높아지는 이러한 학력수요에 대응한 공급현상으로 대학수 학생수 교수 숫자(수)가 늘어나면서, 어느새 부정입학 부실수업 불실학점 학점청탁 졸속졸업, 나중에는 위조졸업증과 가짜 외국학위까지 나돌아 사회문제로 비화하는 일도 점증하고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나라와 살림살이가 융성하기 시작한 산업화시대가 선물한 사회적 부작용이 과열과외이며, 이것이 대학에 미친 쓰나미가 이러한 부작용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안팎 병리현상이 고조되어 일대 수술을 가한 시기가 (할 시기까지 온 것이다. 이것이) 박정희 시대가 지나고 전두환 시대가 열리는 1980년(을 만난 것)이다.

당시(이때의) 문교부는 오래 전부터 스스로 고등학교의 「과열과외현상 해소」 란 과제를 안고 씨름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대학학사개혁」이란 과제가 절로 따라붙게 된다. 그리하여 문교부는 그 싱크탱크인 한국교육개발원(KEDI)에 이 과제를 부과하여 연구 중에 있었다. 그 KEDI가 드디어 1980년 2월 13일의 「과열과외공부 해소대책」을 발간하면서 그 속에 「대학입학정원 확대와 졸업정원제의 연구 검토」라는 조항을 끼워놓은 것이다.(이 끼어들게 된다. )

흔히 세인들과 언론은(도) 「대학 졸업정원제도」는 전두환 정권(특히 국보위)에 의하여 창안된 정치적 행위였다고 단정 지우고(워지고) 비난하는 경우를 많았다(이 보아왔다).

그러나 여기서 명백히 할 것은 이 정책은 전두환 정권 이전에 연구과제로 출발한 사안으로, 「과열과외 해소방안」의 한 과제로서의 대학개혁의 한 내용으로 부각된 것이었으며, 그 시작도 국보위가 아니라 문교부 산하 연구기관인 한국교육개발원이었고, 국보위가 출발한 후에 문교부를 통하여 얻어간 정책이(었)다. 그 발상도 정부가 아니라 현장의 교수였으며, 위에서 지시된 항목이 아니라 교수끼리의 토의과정에서 도출된 항목인(이었다는) 점을 밝혀둔다.

즉, 이 제도는 대학현장에서 학점의 자의성 권력성 부패성을 잘 경험한 현장(의) 교수의 첫 발상으로 시작 되고, 그 참신성이 인정되어 KEDI의 개혁안에 포함된 조항이(었)다.

학습에 과열하는 고등학(하)생에 대비되는 학습을 기피하는 한국 대학생을 독려하여 공부하는 대학생을 만드는데 대한 현장 교수의 시각에서 창출된 교육정책이었던 것이다. 결국 각 대학의 손실감 없게 입학정원을 몇%쯤 늘려주고 해마다 중간 탈락시켜 4년 뒤에는 본래 정원수만큼 졸업시키자는 순수하고 간단한 정책발상이었다.

그러나 만만찮은 부작용과 반항도 예상되어 정부로서도 단단한 각오 없이는 시행이 쉽지 않은 정책이었다. 정의감과 애국심으로 발상 창안되었고, 주장한 교육 관련 인사(인)들도 그 때의 군사정부의 추진력을 믿고, 그 당시의 사회분위기의 바람을 타면서 용감하게 제안했던 것이다(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제도가 실시되면(될 경우,) 대학의 학점 남발이 억제되어 학생은 학업 열중이 불가피해지고, 교수의 「멋대로 함부로 학점」은 절제되는 효과가 생기겠지만, 이 제도가 성공하는 데는 학생의 자유방종과 데모를 만끽하고 있던 대학가(로서)는 각고의 인내와 고통이 따르게 되어있었다(마련이었다.)

이 안은 장기간의 KEDI 연구를 마무리 짓고 「과열과외 해소방안」이란 이름으로 1980년 3월에 문교부 실국장회의 부의자료로 올라와 문교부 간부회의에서 토의되었는데(다.), 그 때 KEDI에선 정책연구실장 김영철박사가 수고한 겻으로 기억된다.

그 후 이 자료는(가) 7월 4일자로 연구서로 발간되었는데, 마침 초정부 기관이었던 국가보위위원회의 요구로 동 문건이 그 소속 문교공보분과에 넘겨졌다. 그리하여 준비된 완성품이 교육개혁안으로 쉽게 채택되고, 7월 11일에는 시민회관에서 열린 국보위 주최 공청회에도 부의 토론되고, 결국 국보위의 「7.30교육개혁안」에 포함되어 공포 시행되었다.

그 개혁안 속에는 대학졸업정원제도도 빠짐없이 들어가 있었다. 대학교수의 멋대로 채점과 제멋대로 학점 남발권을 옥죄는 쇠사슬이 제도화된 것이다.

 

국보위에서는 말 많은 대학교육에 일대개혁을 가하기 위한 업무를 문교공보분과 위원회의 김행자 위원에게 맡겨졌다. 그는 현직 이화여대 정치학 교수로 국보위의 홍일점이어서 전두환 위원장과 오자복 분과위원장의 주목을 받은 인물이(었)다. 관리 보다는 교수를 더 믿었던 군인들은 처음에는 (필자가 아닌) 김행자 교수에게 주무를 맡기고 나는 그 공동보조자로 역할하게 하였으나 나중에는 나에게 전 개혁업무를 넘겼다(가 넘어오게 된다. )

 

KEDI의 졸업정원제 안은 현행 대학별 학과별 입학정원에 50%를 더 선발하여 입학시킨 후, 1 2 3학년 매 학년마다 3회에 걸쳐 학점미달(F)처분하고, 4학년 말에는 당초 입학정원만큼의 수효를 최종 졸업시킨다는 혹독한 제도였다. 가령 입학정원 100여명인 학과는 150명을 뽑아 3년간 해마다 15명 내외를 중도 탈락시키고 100명만 졸업시킨다는 학사제도인 셈이다. 대학의 학점과 졸업이 얼마나 불신을 받았으면 이런 형벌이 발상되었겠나 싶기도 하였다.

나는 부득이한 제도라지만 지나치게 가혹하니 「150% 모집 50% 도태 안」을 「130%모집에 30%도태」로 완화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수정안은 수용되지 않고 최종발표안에는 시행 첫 해만 나의 완화안인 130%모집(30% 탈락)으로 수정해주고 2차년도 부터는 본래안대로 150%모집(50% 탈락)으로 발표되고 만다.

 

그 후 내가 문교부차관으로 부임한 해는 졸업정원제가 공(고)표된 이듬해, 즉 시행 첫해인 1981년으로, 전년도 1980년 7월에 공포된 7.30교육개혁안이 그해 3월부터 30% 증모되고 F학점 기피에 안간 힘을 막 쏟기 시작한 그 한 달 후인 4월이다(에 부임하였었다.)

나는 국장회의와 장관의 결심을 얻어, 대담하게 당초의 국보위 안에 완화 수정(을 가)했다(하고 말았다. 당초의 내 주장대로 150%모집안을 매년 130%모집으로 하향 수정한 시행공문을 시달하여(함으로써,) 개혁안 중의 1차년도와 같은 완화 안을 (전 연도용으로) 강행했다.(하고 말았다.) 결국 국보위 7.30교육개혁안 중의 졸업정원제는 내 고집대로 일관되게 수정 시행한( 해버린) 것이다.

(*이리하여 국보위 안은 새 문교부안으로 수정되고 만다.)

 

(이 위에) 내가 차관으로 부임한 뒤에 또하나 내세운 정책은(이) 「교실개혁론」이다.

 이는 주입식 강의 일변도의 수업에서, 미리 예습해온 학생의 질문과 토론이 주류를 이루는 자주학습으로 전환하게 하는 것이 그 요체(였)다.

(우리) 문교부는 1982년을 「교실개혁의 해」로 정하고 각급학교 수업 선진화를 독려하였다. (한편,) 이러한 과제를 성공으로 이끌기 위해 내놓은 나의 새 교육행정정책이 「교실위주행정론」이(었)다.

문교부‧교육청‧학교장 등 각급교육행정기관은 권위적 행정중심적 구태를 내려놓고, 제자와 스승이 만나는 교육현장인 『교실』을 행정의 중심에 두고 관청은 이를 지원하는 후원자로 탈바꿈하자는 것이었다. 이상(과 같이) 초‧중‧고‧대의 각급 학교와 각급 교육행정기관에 개혁바람이 휘몰아친 때가 (이른바) 80년대 초였다.

81년 82년 83년 3년간(의) 대학 면학분위기는 일변되었다(하였다). F학전 3회에 퇴교되니 결석학생, 건성건성 공부, 데모학생은 자취를 감추고 학업에 열중하는 대학으로 돌변하는 분위기였다. 결과론이지만 80년부터 86년까지는 대학 소요가 없었다가 졸업정원제가 풀린 1987년에야 6.3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는가.

 

한편, 입학정원 폭증으로 등록금 수입이 늘어 대학운영층은 환영이었고, 대학을 드나드는 문교부 직원들의 매일 보고를 접한 우리(들)도 희색만면하였다. 민족의 전도에 새 희망이 보였다.

이를 주도한 나는 한편으론 개선장군이 되기도 하였지만(다.그러나) 반발도 만만찮았다.

대학측과 학부모측의 반발도 만만찮았고(을 만난 것이다.) 교수들(의) 불만도(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예습해온 학생의 질의에 대응하는 토론식 수업의 부담과 이에 대한 거부감에다, A학점 난발권 대신 F학점 부(보)과 필수 부담감이 괴롭고 마뜩찮았던 것이다.

 마음대로 결정하던 학점, 선심 학점,(도) 올A학점(도) 멋대로 줄 재량권이 없어지고, 엄격한 상대평가 학점을 강요당하는데 대한 불평불만이 점차 높아져갔다.

A학점 5% B학점 20% 등(으로) 5단계 비율 학점, 반드시 일정비율의 F학점 내기 등 구속과 불(부)안감이 높아지고(져) 새 제도에 심한 압박감(을) 느끼는 층이 급증해갔다.

결국 나중에는 다수 교수의 여론으로 뭉쳐지기 시작하기도 했지만, 반대로 문교부 정책에(였다.) 용기를 주는 주장도 나왔다.

부산대 총장과 문교부 장관을 지내신 문홍주(文鴻柱) 박사였는데, 문박사는 당시 신문기고문에서 “우심한 국제경쟁에서 나라가 살아남는 길은 졸업정원제를 성공시키는 길밖에 없다”는 요지의 논리를 편 바 있었고, 이에 동의하는 분위기도 점차 익어갔다.

가장 인상적인 (첫) 사건은 부산대학교에서 1982년에 실험한 결과, 학생들은 중도탈락을 크게 의식하고 일단 “출석률 매일 100%”라는 성과를 거두어 경향신문 83년 2월 8일자로 보도된 사건이다. (이 제도에 적응하고 고비를 넘길 수 있었음을 보여줬다. )

 

그런데 1983년 중반이 되

(었다. 하필이면 이때에 정치의 계절이 들이닥쳤다. 한)

 3년간의 비상시국과 제5공화국 초기가 지나가고 정당정치가 회복되자 여당 야당이 생겼다.

(고) 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은 (까지 생겨났다. 정당은) 득표를 위하여( 준비가 필요했고) 민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했고, (할 계절이 도래했다.) 야당도 마찬가지 였다.(만들어져 선거와 국회가 화두로 급등장했다.)

졸정제(卒定制)로 긴장했던 대학가는 잠재했던 불만이 표출되기 시작했다.(하고,) 일부 교수들은 정치계를 옥죄기 시작했고,(다. )여기에 학부모들도 가세했다.

 30%에 잘려나가는 내 자식은 상상도 하기 싫은 데다, 내 자식만은 수월수월 학위를 받게 돼야 한다는 (옛) 타성이 여론으로 모아진 것이다. 「모든 학생이 경쟁하여 사생결단하는 고통스런 신 대학」 보다는 「모두가 쉬엄쉬엄해도 다 졸업하는 구 대학」으로 돌아가자는 여론이 그것이다(거였다.)

 40년간 길들여진 「공부에 숨넘어가는 고등학교」와 맹탕 놀고도 학사학위증을 받는 「건성건성 대학」은 이미 대학가와 모든 국민의 뼛속까지 관성화된 뒤였(으니까 말이)다.

이 큰 물결에(만목덩어리에) 80년대 강성분위기를 믿고 메스를 들이댄 것이 실책이었는지도 모른다. 가령 12‧12체제가 10년 이상 지속됐다면, 그리하여 새 제도가 민심을 순치하여 생리화되어 버렸(린)다면 성공할 개연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백년대계를 위한 (지만, 애국애족) 일념만으로는, 더구나 한 두 해의 단기간에는 이룰 수 없는 과제였다고 생각되기도 한다.

마침 교수 층과 대학의 졸업정원제에 대한 원망의 소리는 민정당의 귀청을 두드리는 첫 포성이 울렸다. 여당 민정당 자문교수들의 힘도 커졌다. 이 소리는 당에 큰 압력으로 작용했다. 민정당의 권익현(權翊鉉) 2대 사무총장은 이 대학 측의 한을 풀어주지 않으면 득표가 불가능하다고 독단하기에 이르고 이를 풀어주기로 작정한다. 이규호(李奎浩) 문교부 장관에 압력을 넣어 대학 졸업정원제를 전면 철회 해제하라고 요구했다. 이 장관은 본래 안인 50%증모 50%탈락이란 제도를 30%로 낮춰 완화했다고 변명했으나 권 총장은 거듭 전면 폐지를 고집했다.

궁지에 몰린 이 장관은 당시 차관인 나에게 의논해 왔다. 나는 “시행된 지 2~3년 밖에 되지 않았는데 아직 폐지는 이르다” “폐지되어서는 국가의 장래가 없으니 그 고통을 덜기 위해 30%선을 또다시 10%선으로 낮추고 경쟁률을 완화하는 방법이 어떨까?”라는 답을 드렸다. 백지화하기에는 책무감이 허용치 않고 나라의 장래가 없으며 보물 하나를 버린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뒤에 한 번 더 사무총장·장관의 양자 간에 타협이 있을 것으로 여겼다. 나는 토의나 세미나 같은 숙고과정이 있겠지 하고 느슨하게 대처하고 있었다. 그러나 앞의 그 대화가 끝이 되고 대결구도로 치닫고 만다. 군인의 상명하복 돌격정신을 만난 것이다. 권익현 사무총장은 졸정제 폐지로 확고하게 기울고, 이규호 장관에게 이를 더욱 강하게 밀어붙이게 된다.

이 장관은 권 사무총장에게 “나는 좋지만, 이 제도는 당초 국보위에서 정 차관이 전두한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등장시킨 7.30교육개혁안의 주요항목인데, 차관이 「폐지 불가, 완화는 가」라 고집하니 난들 어찌 하겠소”라는 답을 내놓기에 이른다. 난국을 피하며서 차관에게 미룬 대답이었다. 이리하여 내가 감지하지도 못한 사이에 은연중 그 책임을 차관인 내가 도맡게 되고 만다. 결국엔 행정부나 대학과의 아무런 상호협의 없이, 국민적 의견수렴과정도 없이, 단지 득표전략 상의 이유만으로 한 정당의 독단으로 급기야 「졸정제 폐지」를 전두환 대통령에게 이를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장관도 내 작품이 아니라는 수동적 자세와 정책의 책임의지 없이 정당인과 동행하여 대통령을 면담하고 끄덕이기만 했다. 내 의중을 전하거나 들을 기회도 없이, 또 교육이 아니라 정치적 득표의 필요상 국가대사가 급히 변경되고 만 사건이었다. 독선이 춤을 추고 나라의 대사를 순식간에 말아먹는 단견으로밖에 치부될 길이 없는 어이없는 사건이었다고 회상된다.

그 결과 7.30개혁을 최종결재하고 졸업정원제 총책임자로서, 이를 잘 추진하라고 나를 차관으로 낙점한 바 있는 전 대통령도, 선거철을 만나 이러한 두 사람의 건의를 받아 너무나 쉽게 마음을 바꿔 정책의 수정을 승낙하게 되고, 그 잘못을 차관 한 사람에게 돌리도록 암묵적 합의를 이룬다. 차관 유책론은 이규호 장관의 건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왜냐하면 편소 차관이 고분고분하지만은 않고 독자적인 정책 건의를 자주 하는데다 대학자치를 지향한답시고 그해 1983년도 문교부 업무계획에다 「대학교육협의회」 창설조항을 넣어 연초에 청와대에 부리핑 한 일로 불만스런 일이 있은 후 차관 경질을 마음먹고 있었는데, 이번이 호기라 여긴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대통령으로서도 2년을 훌쩍 넘긴 최장수 차관이니 교체해도 섭섭하지는 않을 거란 생각에 이른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하여 그 경질이 합의 된 듯하다.

이후 졸업정원제는 해마다 후퇴 수정되고 대학자율화란 호도과정을 거쳐, 유명무실화되더니, 3년 후 1987년에 폐지되고 만다. 「공부 안해도 모두 졸업하는 원래 대학」으로 완전 복귀한 것이다. 지금까지 30년간이나 우리 대학은 놀고 있다. 규제 없는 학점은 춤을 추고, 「운동권」이란 삐딱한 정치인만 양산하여 우리 사회를 휘젓고 있기도 하다.

 

 

 

20. 지방교육교부금제도와 교육세의 부활

21. 갑작스런 입법 의원, 國家保衛立法會議

나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국보위)의 문공분과위원 차출근무 5개월간(1980.6.5.~10.26)은 2주간의 문교공보분과위원장 직을 끝으로 마감되고, 국가보위입법회의(약칭; 입법회의) 의원이란 새 신분으로 6개월(150일)동안(1980.10.28~1981.4.10) 문교공보분과위원회의 간사의원 근무를 하게 되었다. 근무지도 삼청동에서 여의도 국회 의사당으로 옮겨 출근하게 되어졌다.

이번의 새 임무는 생소한 영역이었다. 행정인으로서 행정의 연장선상에 있는 국보위에서 일하는 것은 특이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입법회의라 이름 붙은 입법부에서 일하는 일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뜻밖의 정치계 입문이 아닌가. 일터도 청와대 앞의 중앙청 건물이 아닌 여의도의 국회의사당. 박 대통령 시절에 지은 새 건물, 그것도 한국을 대표하는 대학의 총장님들을 위시한 학계의 중진들과 언론계의 저명인사들이 모인 문교공보분과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간사 직, 즉 주무역을 수행하라니 벅차기 한량없는 대사건이 닥친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되었지만 나는 어릴 때부터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시골에서 자라면서 본 것 들은 것 중에 오직 선생님 밖에 더 훌륭한 것을 본 적이 없었고 단 하나의 동경 대상이었던 셈이다. 행정인으로 옮겼지만 오직 교육행정인이었기에 즐거웠다. 국보위도 교육분과이기에 영광으로 여겼었다. 그러나 이번은 다르다. 정치를 맡은 셈이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가 제5공화국을 출범시키기 위한 정치적 정지작업기구였다면, 국가보위입법회의는 5공화국의 출범 이후 전개될 정치의 틀을 재조정 창조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과도입법기구였다. 국보위의 우리 일행이 입법회의 문공분과의 모든 실무를 이어 맡았다. 국보위 문공분과의 위원장인 내가 입법회의 문공분과의 간사를 맡고, 국보위에서 함께 일하던 문공위원들은 전문위원에 임명되었다. 강병규 김한규 허만일 염길정 여러분으로 생각된다.

입법회의 설치의 법적 근거는 제5공화국 헌법(1980.10.27 공포) 부칙 제6조에 따라서 제정된 국가보위입법회의법으로, 새 국회가 구성될 때까지 국회의 권한을 대행한 입법기관이다. 입법회의와 같은 입법기관 설치의 선례로는 60년대 초의 국가재건회고회의(1961.5.19.~63.12.16)가 있다. 이번의 입법회의 의원은 10월 28일,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81명이었고 의장은 이호(李澔), 부의장은 채문식(蔡汶植)이었다.

입법회의는 그 권한과 기능은 국회와 같은 입법기관으로, 약 6개월 동안 총 118건의 법률안과 동의안을 처리하였다.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법,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개정안, 언론기본법, 공정거래법, 중앙정보부법, 대통령선거법, 노동조합법, 형사소송법 개정안, 국가보안법 개정안, 정당법 개정안, 정치자금법 개정안, 농어촌후계자 육성기금법, 등 주요법안을 가결하였다. 제5공화국의 법적 제도적 근거들을 대부분 구축한 셈이다.

국가보위입법회의 참여인사 명단(81명)

정계(20명)

정래혁(제10대 국회의원 민주공화당) 손세일(전 동아일보 논설위원)

박명근(제10대 국회의원 민주공화당) 남재희(제10대 국회의원 민주공화당)

정석모(제10대 국회의원 민주공화당) 장승태(제10대 국회의원 민주공화당)

채문식(제10대 국회의원 신민당) 한영수(제10대 국회의원 신민당)

고재청(제10대 국회의원 신민당) 유한열(제10대 국회의원 신민당)

오세응(제10대 국회의원 신민당) 권중돈(전 국방부장관 신민당)

유옥우(전 신민당 의원) 김윤환(제10대 국회의원 유정회)

신상초(제10대 국회의원 유정회) 이종률(제10대 국회의원 유정회)

김 철(구 통일사회당) 이태구(구 통일당)

조종호(윤보선 전 대통령 비서실장) 진의종(전 보건사회부 장관)

경제계(3명)

정수창(대한상공회의소 소장) 박태준(한국철강협회 회장) 유기정(중소기협 회장)

학계 (13명)

권이혁(서울대총장) 김상협(고려대총장) 안세희(연세대총장) 정의숙(이화여대총장) 서명원(충남대총장) 김대환(이화여대교수) 박봉식(서울대교수) 박승재(한양대교수) 김만제(한국개발원장) 한기춘(전연대교수) 박일경(명지대교수) 윤근식(성균관대교수) 나창주(안보연구원장)

법조계(8명)

정희택(변호사) 김사용(변호사) 이태청(변호사) 이병호(변호사)

이진우(변호사) 이범렬(변호사) 윤길중(변호사) 임영득(변호사)

종교계(8명)

강신명(목사) 이병주(성균관재단이사장) 조향록(목사) 이영복(천도교 교령) 서경보(불교) 김봉학(YMCA이사장) 이종흥(신부) 전달출(신부 매일신문사장)

여성계(4명)

김정례(여성유권자연맹 회장) 안목단(군경미망인회 회장) 김행자(이화여대교수) 이경숙(숙명여대교수)

노동계(1명)

정한주(노총 위원장)

문화·사회계(9명)

이효(대한적십자사 총재) 권정달(예비역 장성) 송지영(문예진흥원장)

박윤종(전 광주시장) 정범석(대한교련 회장) 이정식(실업인)

박인각(이북5도 대표) 이종찬(전 주영참사관) 김준(새마을연수원장)

언론계(3명)

방우영(조선일보사 사장) 이진희(문화·경향 사장) 이원경(합동통신사 회장)

향군대표(2명)

이맹기(재향군인회 회장) 이형근(반공연맹 이사장)

국보위 대표(10명)

이광노(전 내무위원장) 김영균(전 법사위원장) 이기백(전 운영위원장)

노재원(전 외무위원장) 심유선(전 재무위원장) 박종문(전 농수산위원장)

조영길(전 보사위원장) 이우재(전 교통위원장) 서동렬(전 국방연락실장)

정태수(전 문공위원장)

 

입법회의 본회의 심의 가결 의안

개회식(1980년10월28일) 국민의례, 의원선서, 폐회사

제1차(1980년10월29일)

1. 사무총장 보고 2. 의장·부의장 선거 3. 의장(이호)당선인사

4. 부의장(정래혁·채문식)당선인사

5. 국가보위입법회의운영규칙안기초특별위원회구성의건

6. 국가보위입법회의운영규칙안(김영균의원 발의)

제2차(1980년10월30일)

1. 각상임위원장인사 2. 국가보위입법회의사무처장(최평욱)인사

3. 국무총리·감사원장및국무위원·정부위원인사

4. 1981년도예산안에대한정부의시정연설

5. 1980년도제1회추가경정예산 정부의시정연설

6. 예산결산특별위원회구성에관한결의안

제3차(1980년11월03일)

1. 국무위원인사 2. 1980년도제1회추가경정예산안

3. 농어민후계자육성기금법안 4. 정치풍토쇄신을위한특별조치법안

제4차(1980년11월08일)

1. 선거법등정치관계법특별위원회구성에관한결의안

제5차(1980년11월19일)

1. 정당법중개정법률안 2.선거관리위원회법중개정법률안

제6차(1980년11월26일)

1. 병역법중개정법률안 2. 군인사법중개정법률안

3. 국군간호사관학교설치법중개정법률안

4. 군인자녀교육보호법중개정법률안

제7차(1980년11월29일)

1. 형의실효등에관한법률안 2. 폭력행위등처벌에관한법률중개정법률안

3.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중개정법률안 4.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안

5.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중개정법률안 6. 축산업협동조합법안

7. 축산업협동조합임원임면에관한임시조치법안 8. 소득세법중개정법률안(2건) 9. 법인세법중개정법률 10. 부가가치세법중개정법률안

11. 조세감면규제법중개정법률안(2건) 12. 1979년도세입세출결산

13. 1979년도예비비지법안 14. 1981년도예산안

제8차(1980년12월05일)

1. 사회보호법안 2. 각급법원판사정원법중개정법률안

3. 검사정원법중개정법률안 5. 형사소송법중개정법률안

4. 재외국민취적·호적정정및호적정리에관한임시특례법중개정법률안

6. 국정자문회의법안 7. 「유엔」공업개발기구헌장비준동의안

8. 관세및무역에관한일반협정에대한「제네바」(1979)의정서에대한추가의정서의수 락동의안

9. 관세및무역에관한일반협정제7조의시행에관한협정및동의정서수락동의안

10. 대한민국정부와「싱가폴」공화국정부간의소득에대한조세의이중과세회피와탈세방지를위한협약비준동의안

11. 대한민국정부와「스위스」연방정부간의소득에대한조세의이중과세회피를위한 협약비준동의안

12. 1980년도발행토지개발채권원리금상환에대한국가보증동의중변경동의안

13. 1981년도발행토지개발채권원리금상환에대한국가보증동의안

14. 1981년도발행국민주택채권원리금상환에대한국가보증동의안

15. 1981년도발행주택채권원리금상환에대한국가보증동의안

16. 1981년도국민투자채권발행동의안

17. 1981년도산업금융채권발행및동원리금상환에대한국가보증동의안

18. 1981년도발행전력채권원리금상환에대한국가보증동의안

19. 1981년도비료계정의한국은행차입원리금상환에대한국가보증동의안

제9차(1980년12월12일)

1. 행형법중개정법률안 2. 전투경찰대설치법중개정법률안

3. 전기공사업법중개정법률안 4. 석탄수급조정에관한임시조치법중개정법률안

5. 관광사업법중개정법률안 6. 군사원호보상법중개정법률안

7. 군사원호보상급여금법중개정법률안 8. 국가유공자등특별원호법중개정법률안

9. 월남귀순용사특별보상법중개정법률안

제10차(1980년12월16일)

1. 한국전력공사법안 2. 대한석탄공사법중개정법률안

3. 대한광업진흥공사법중개정법률안 4. 한국과학기술원법안

5. 한국원자력연구소법중개정법률안 6. 한국기술개발주식회사법안

7. 택지개발촉진등에관한특례법안 8. 해외건설촉진법개정법률안

9. 도로운송차량법중개정법률안 10. 전파관리법중개정법률안

11. 정치자금에관한법률개정법률안 12. 공공차관도입계획에대한동의안

제11차(1980년12월19일)

1. 중소기업은행법중개정법률안 2. 농림수산업자신용보증법중개정법률안

3. 한국방송공사법중개정법률안 4. 한국방송광고공사법안

제12차(1980년12월23일)

1. 군인보수법중개정법률안 2. 중앙정보부법개정법률안

3. 중앙정보부직원법개정법률안 4. 주민등록법중개정법률안

5. 경범죄처벌법중개정법률안 6. 독점규제및공정거래에관한법률안

7. 주식회사의외부감사에관한법률안 8. 농업협동조합법중개정법률안

9. 농업협동조합임원임면에관한임시조치법중개정법률안

10. 수산업협동조합법중개정법률안 12. 농약관리법개정법률안

11. 수산업협동조합임원임면에관한임시조치법중개정법률안

13. 양곡관리법중개정법률안 14. 특허법중개정법률안

15. 실용신안법중개정법률안 16. 의장법중개정법률안 17. 상표법중개정법률안

제13차(1980년12월26일)

1. 언론기본법안 3. 군속인사법개정법률안 4. 향토예비군설치법중개정법률안

2. 각급법원의설치와관할구역에관한법률중개정법률안

5. 대한민국재향군인회법중개정법률안 6. 총포화약류단속법개정법률안

7. 인삼및인삼제품규제에관한법률중개정법률안 8. 조세범처벌법중개정법률안

9. 보험업법중개정법안 10. 조선공업진흥법중개정법률안

11. 수출자유지역설치법중개정법률안 12. 광산보안법중개정법률안

13. 사회복지사업기금법안 14. 농어촌보건의료를위한특별조치법안

15. 가정의례에관한법률개정법률안 16. 식품위생법중개정법률안

17. 보건범죄단속에관한특별조치법중개정법률안

18. 독물및극물에관한법률중개정법률안 19. 대통령선거법안

제14차(1980년12월30일)

1.국가보안법개정법률안 2. 도로교통법중개정법률안 3. 근로기준법중개정법률안

4. 노동조합법중개정법률안 5. 노동쟁의조정법중개정법률안

6. 노동위원회법중개정법률안 7. 노사협의회법안

제15차(1981년01월16일)

1. 대통령경호실법중개정법률안 2. 광업법개정법률 3. 해운진흥법중개정법률안

4. 철도소운송업법중개정법률안 5. 학교급식법안

제16차(1981년01월23일)

1. 대통령선거법중개정법률안

제17차(1981년01월24일)

1. 수산물검사법개정법률안 2. 법원조직법중개정법률안

3. 법관징계법중개정법률안 4. 집달리법중개정법률안

5. 소송촉진등에관한특례법안 6. 국회의원선거법안 7. 국회법개정법률안

제18차(1981년01월30일)

1. 국회에서의증언·감정등에관한법률중개정법률안

2. 국회사무처법개정법률안 3. 일반사면령동의안 4. 청원경찰법중개정법률안

5. 용역경비업법중개정법률안 6. 교육법중개정법률안

제19차(1981년02월13일)

1. 국가보위입법회의사무처장(박효진)인사 2. 여권법중개정법률안

3. 전직대통령예우에관한법률중개정법률안4. 온천법안

5. 정부투자기관예산회계법중개정법률안

제20차(1981년02월20일)

1. 주택임대차보호법안 2. 회사정리법중개정법률안

3. 농지의보전및이용에관한법률중개정법률안 4. 축산법중개정법률안

5. 학교보건법중개정법률안 6. 사립학교법중개정법률안

7. 선거법등정치관계법특별위원회제안법률안추가에관한결의안

제21차(1981년02월27일)

1. 사법시설등조성법중개정법률안 2. 사법시설등특별회계법중개정법률안

3. 외무공무원법안 4. 한국해외개발공사법중개정법률안

5. 매장및묘지등에관한법률중개정법률안 6. 한국전기통신공사법안

7. 전기통신법중개정법률안 8.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법안

제22차(1981년03월10일)

1. 양곡관리기금법중개정법률안 2. 사료관리법개정법률안

3. 종묘관리법중개정법률안 4. 농지확대개발촉진법중개정법률안

5. 수산업법중개정법률안 6. 수출보험법중개정법률안 7. 원호기금법안

8. 군사원호대상자정착대부법중개정법률안 9. 군인보험법중개정법률안

10. 사립학교교원연금법중개정법률안

제23차(1981년03월13일)

1. 국무위원·정부위원인사 2. 국회의원수당등에관한법률개정법률안

3. 군인연금법중개정법률안 4. 민방위기본법중개정법률안

5. 특정연구기관육성법중개정법률안 6. 기계공업진흥법중개정법률안

7. 도시계획법중개정법률안 8. 도시재개발법중개정법률안9. 하천법중개정법률안

10. 특정다목적댐법중개정법률안 11. 산업기지개발촉진법중개정법률안

제24차(1981년03월20일)

1. 의장의보고(선거법등정치관계법특별위원회해체의건)

2. 지방자치에관한임시조치법중개정법률안 3. 소방법중개정법률안

4. 인장업단속법중개정법률안 5. 한국보건개발연구원법중개정법률안

6. 의료보험법중개정법률안 7. 공무원및사립학교교직원의료보험법중개정법률안

8. 한국원호복지공단법안 9. 국가유공자등특별원호법중개정법률안

10. 전기통신법중개정법률안 11. 주택건설촉진법중개정법률안

12. 음반에관한법률중개정법률안

제25차(1981년03월31일)

1. 군형법중개정법률안 2. 군법회의법중개정법률안 3. 공증인법중개정법률안

4. 교정시설경비교도대설치법안 5. 검찰청법중개정법률안 6. 계엄법개정법률안

7. 병역의무의특례규제에관한법률중개정법률안 8. 병역법중개정법률안

9. 정부조직법중개정법률안 10. 국가공무원법중개정법률안

11. 공무원연금법중개정법률안 12. 공무원연금특별회계법중개정법률안

13. 인허가등의정비를위한행정서사법등의일부개정법률안

14. 대구직할시및인천직할시설치에관한법률안

15. 광명시등시설치와시·군관할구역및명칭변경에관한법률안

16. 경상남도사무소의소재지변경에관한법률안 17. 지방공무원법중개정법률안

18. 경찰관직무집행법개정법률안 19. 세무대학설치법안

20. 국제금융기구에의가입조치에관한법률중개정법률안

21. 전자공업진흥법개정법률안 22. 아동복리법개정법률안

23. 관광단지개발촉진법중개정법률안 24. 한국청소년연맹육성에관한법률안

25. 사설강습소에관한법률중개정법률안 26. 문화보호법개정법률안

27. 문화보호법개정법률안에대한수정안 28. 국회법중개정법률안

폐회식(1981.4.10) 국민의례, 입법회의 경과보고, 폐회사

입법회의에는 10여개의 상임분과위원회가 있었다. 그 중하나인 우리 문교공보위원회의 구성의원은 다음과 같다.

위원장; 송지영 (문예진흥원장)

간사위원; 정태수 (중앙교육연수원장)

위원; 권이혁 (서울대 총장) 안세희 (연세대 총장) 김상협 (고려대 총장) 정의숙(이화여대 총장) 서명원 (충남대 총장) 정범석 (대한교련 회장) 조향록(목사) 남재희 (전 국회의원) 손세일 (동아 논설위원) 김윤환 (전 국회의원)

문공위원회의 중요 심의안건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한국방송공사법중개정법률안 한국방송광고공사법안 언론기본법안

학교급식법안 교육법중개정법률안 학교보건법중개정법률안

사립학교법중개정법률안 문화보호법개정법률안 청소년연맹육성법률안

사학교원연금법중개정법률안 사설강습소법개정법률안 기 타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인하여 야기된 급박한 시기에 대한민국의 새 틀, 제5공화국의 기초를 짠 위기구제용으로 등장한 이 국가보위입법회의는 바로 앞의 제10대국회(1978~80.10.27)의 의회활동을 인계받아, 약 6개월간(1980.10.28~81.4.10) 많은 일을 함으로서 그 역할을 다한 후, 4월 10일의 폐회식을 끝으로 해산하고, 그 익일인 4월11일에 입법권을 제11대 국회(1981.4.11.~1985)에 넘겨주었다. 내가 참여한 바 있는 그 앞의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와 이를 이은 국가보위입법회의는 과도기의 위기극복을 위한 행정부와 입법부를 대행한 중요한 역할을 완수한 셈이라 자부한다.

 

 

 

 

22. 교단을 거쳐 온 차관의 발자취

나의 문교부차관 2년 4개월(1980.4.14.~83.7.19)은 장수 차관이었다. 보통의 경우는 1년 전후이며 더 짧은 경우도 많다. 나의 장수는 전두환 대통령과 배려와 이규호 장관의 인정으로 인한 결과라 생각된다. 한 분의 장관만을 보좌한 2년여 기간이었다. 차관 재직 중이나 퇴임 후에도 두 분에게 개별인사를 드린 일이 한 번도 없어 마음의 빚을 지고 살고 있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 나는 문교부 23년간 영전 청탁이나 승진 부탁을 위한 개별 인사치레를 단 한 번도 할 일이 없었다. 청빈한 집안 내력이나 밥상머리 교육에서 저절로 체득한 외골수 정신이 아닌가 하여 저어되기도 한 수준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는 솔직한 심정은 만약 그때 그런 처세에 능동적이었으면 장관은 하지 않았을까 하고 자책해보기도 한다.

그 2년여를 되돌아보니 나의 청년 초기에 교단 10년의 교육현장 경험이 문교행정의 전진과 전환에 유용헤 쓰인 느낌이다. 그 교단 경험이 없었으면 그야말로 교육현장을 도외시하고 관료 색채가 농후한 정책 수립에 몰입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사실 장학관 이외의 문교부 근무자의 대부분은 당시만 해도 교원 경력 없이 취업한 분들이어서 대통령과 장·차관의 지휘와 눈짓을 따라 일을 계획 실천하며, 교육현장문제는 잘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그냥 지배복종의 관계로 그저 지도하는 자세를 취하는 경향이 짙다. 이것이 나의 중앙청 살이 20여 년 동안 봐온 나의 시각이다. 이 시기에 교육현장 특히 교실경험을 거쳐 온 차관으로서의 흔적을 요약하여 여기 남기고자 한다.

첫 번째로 모든 교육행정인(문교부·지방교육청·학교장)은 교실에 봉사하는 위치에서 「교실중심의 교육행정」을, 모든 교사에게는 「교실개혁」을 제창하였다. 교육현장을 위한 교육지원행정과 학생을 위한 수업개혁을 외친 것이다. 이를 위해 교육감 회의를 소집하고 공문을 시달하였다. 교육자의 모임이 있으면 직간접적으로 홍보하였다. 일화 하나 떠오른다.

어느 날 문교부 직원조회 시간에 일어난 일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당시에는 월 1회 사무관 이상의 전 직원이 모여 조회 시간을 가졌었다. 장·차관은 전면에서 마주보고, 실·국장은 측면 한 줄로, 그리고 과장과 사무관은 대오를 정렬해 훈시를 듣는다. 그 날 조회가 끝나 이규호 장관을 들어가시게 한 후 차관인 내가 나섰다. 평소에 미흡하다고 느껴온 문교행정의 목표지점을 각인시키기 위한 나의 행동이 시작되었다. “여러분, 우리는 항상 무얼 골대로 생각하면서 공을 찹니까?” 물론 조용. “문교행정의 목표지를 찾아봅시다. 뒤로 돌아 섯” “무엇이 보입니까? 청와대와 대통령이 보입니까? 아니면 장관이 보입니까?”... “교실은 안보입니까? 학생과 교단 교사 말입니다” 물론 묵묵부답. “모두 다시 뒤돌아서세요” 서로 마주보며 말했다. “물론 우리 문교부 직원들은 청와대와 장·차관과 협의하고 지시도 받지만, 문교행정을 펴는 목적지는 「교실」입니다. 거기엔 학생과 선생님이 있지요. 그 교실을 위해서 문교행정을 하는 것 아닙니까? 그 교단 그 교실을 위해서 문교부가 있고 교육청과 학교장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교장을 위해 교사가 있는 것이 아니듯이 학생을 위해 교사가 있고 그 뒤에 교장 교육장 장관이란 지원기관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다 아는 일이겠지만 오늘로 행정이 목표지점을 확실히 응시하면서 행정조치와 재정지원 등 지원행정을 펴 나갑시다. 돈이 중간지대에 머물지 않게 하고 교실 바닥에 톡톡 떨어지도록 지원합시다. 적극적 지원행정 말입니다” 이런 요지의 설명으로 특이한 조회를 마무리한 일이 있었다.

그 후일담 하나. 1983년 7월에 내가 문교부를 물러났다. 내가 편 시책들은 오유화 되는 걸로 알고 허무감을 느꼈다. 몇 년이 흐른 후 우연한 기회에 놀랄 일을 발견했다. 문교부의 「대학교육과」가 「대학지원과」로 시·군 교육청의 간판이 「교육지원청」으로 「지원」 이란 새 단어가 묻어 있는 것이었다. 나는 기뻤다. ‘나의 교육행정의 목표지설이 후배들에게 똑바로 전수되어 이와 같은 행태로 이어지고 있었구나’하며 흐뭇하기 한량없었다. 당연한 사실이지만 확실하게 각인된 셈이니 말이다.

두 번째, 스승의 날 부활이다. 스승의 날의 명멸을 보자. 처음에 적십자회에서 1963년에 5월 26일을 스승의 날로 정하여 사은행사를 시작한 일이 있었다. 2년 뒤 1965년에 교직단체들이 이를 5월 15일로 변경하여 기념행사를 함으로써 교원의 사기진작에 기여한 바 있었다. 그러나 1973년에 정부의 서정쇄신 차원의 행사 간소화 정책에 따라 스승의 날이 폐지되고 말았다.

나는 이를 애통하게 여겨오다가 차관 임무를 맡자 이를 부활코자 노력하였다. 장관의 양해를 구하여 1982년에 차관회의 안건으로 긴급 상정하여 이를 전격 통과시켰다. 간소화 간소화를 외치는 시기여서 몇몇 차관에게는 미리 전화와 면담으로 협조를 구했다. 아버지나 아내가 교직자인 차관들은 환영하며 찬동 발언으로 가세해 주었다. 그리하여 장관들의 국무회의도 무난히 통과하여 10년 만에 「스승의 날」이 부활되어 오늘날 까지 잘 이어져 오고 있다.

세 번째는 「수석교사제도」의 발상과 제창이다. 초·중·고교에서 교장 교감으로의 행정직 진출을 원하지 않고 한 평생을 교단교사로서 마치고자 하는 교사에게 주는 특전을 구상하는 가운데 이를 직명화 하고 교장 교감에 준하는 대우를 하는 새 직종을 신설하고자 하는 나의 구상이었다. 교단인 출신이 아니면 또한 교장 출신이었으면 발상도 하기 어려운 사안이었다. 당시의 어느 누구도 언급한 일이 없는 나만의 골똘한 생각의 산물이었다. 처음에 혼자서 “성(聖)교사” “원로교사”라는 명칭을 붙였다. 구체적으로 연구된 연구서로 나와야 하겠기에 한국교육개발원(KEDI)에 연구과제로 맡겼다. 한 두 달 뒤에 회보가 왔다.

그 결과물이 「수석교사」제로 만들어져 보고 되어왔다. 생소한 돌발사안이라 논의가 계속되었다. 필요성이 적고 옥상옥이라는 이유로 교장들의 반대가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의 발의는 1981년이었으나 찬반 논의가 무성하여 내가 퇴임한 1983년까지도 입법에 이르지 못하고 흘러가고 말았다.

이 제도는 그 후에도 논란이 계속되면서 명맥을 이어오다가 내가 퇴임한지 25년이 지난 2008년에야 처음으로 실험과 공식운영에 들어가고 결국 제도로 안착되었다. 중간에 헌법소원도 일어나 2015년 6월 25일, 헌법재판소 판결에 의하여 관리직(교장 교감)과 같은 급으로 해석 안착되었다. 수석교사는 수업은 반으로 줄이고 원 40만원의 연구 활동비를 받아 동료교사들을 지원하고 연구수업을 이끈다. 현재 전국 각급학교에 1800여명이 임명되어 있다. 끝까지 사제동행으로 교단교사로 일하다가 교단에서 정년을 맞는 평교사제일주의의 제도화였다. 강산이 몇 번 변한 세월을 보내고도 뜻이 같은 후배들에 의하여 기어이 성취되고 말았구나 하고 생각하니 고맙기 그지없다.

네 번째, 평교사의 부담감소정책이다. 박정희·전두환 정부시절은 일이 많아 시달 보고용 공문도 많았다. 고사들이 보고서 만드느라 수업에 차질이 오고 학생도 자습시간이 잦아졌다는 말도 들려왔다. 그래서 결단하였다. 필요불가결한 것 이외에는 발송공문을 작성 말라는 엄명을 내리고 만다. 시·도에도 시달되었다. 거기에 학교 숙직은 직원에게 전담시키고 「고사 숙직」은 전면 폐지해버렸다. 이 두 시책은 환영 받기도 했거니와 눈에 뜨이게 성과가 좋았었다고 회상된다.

다섯 째, 교단교사우대정책이다. 하나는 교직수당을 연차적 인상이었다. 42,000원(1982)을 해마다 올려 10만원(1986)으로 인상하는 5개년계획이었다. 또 하나는 교과지도비 신설이다. 예산국의 협조로 처음이니 교수는 월 2만원, 교사는 월 15,000원으로 교섭 결정되었다.

여섯 째, 초중등 교원 봉급통합문제다. 당시까지는 교사양성기관이 초등교사는 2년제 초급대학에서, 중등교사는 4년제 대학에서 양성되는 차등사회였다. 이 격차가 해소된 것은 7.30 교육개혁(1980)으로 교육대학이 2년제에서 4년제로 바뀌면서 처음으로 동일화된 것이다. 이 학제개편을 계기로 두 개의 호봉제도를 하나로 묶을 계기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초중등교원 단일호봉제가 탄생한다.

초등교원양성기관은 5.16(1961)군사혁명 후 국가재건최고회의 결의로 고등하교급인 사범학교에서 2년제대학으로 1차 격상되고, 20년 만에 이른바 신군부의 국가보위비상대책회의의 7.30교육개혁(1980)으로 4년제교육대학으로 2차 격상됨으로서 중등교사양성기관과 동급으로 된 것이 아니던가. 두 번 다 비상시 군사정권의 용단이 아니었으면 좀처럼 이룰 수 없는 결단이었다고 회상된다. 나는 사범학교 출신으로서 이 두 번의 기회를 직접 관여하는 기쁨을 누린 사람이다. 1차 격상은 문교부 진출 초기인 수습행정관 때였고, 2차는 문교부 근무 말기인 국장시절에 직접 관여하였으니 말이다. 우스개소리지만 모든 초등교원과 교육대학 교직원들은 이 두 군사정부에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되는 것 아닌지.

일곱 째, 교원경시풍조의 불식과 교원의 자긍심 되살리기 시책이다. 역설적이지만 일제시대 교원의 긍지는 높았다. 그보다 더 좋은 직업은 잘 생각이 안날 정도였다. 오죽했으면 나의 장래 희망이 오로지 그것이었을까. 그런데 해방과 건국, 자본주의 시장경제시대가 오고 산업화시대에 접어들자 새 직업군과 일거리가 폭발하여 교원의 사회적 지위는 상대적으로 추락일로를 걸어왔다. 이를 만회한답시고 1982년을 ‘교권확립의 해’로 정하고 정부 각부처에 홍보하고 사회적 분위기를 깨워나갔다. 교직단체인 대한교련은 회장을 필두로 교원윤리강령을 공표하고 큰 활동을 벌였다. 정부의 모든 집회에는 교원대표를 상좌에 앉히고 교육자의 위상을 높이도록하는 전두환 대통령의 훈시도 있었다. 뜻대로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다음을 위한 진일보였다고 생각된다.

여덟 째, 복수교감제도 창설이다. 초·중·고등학교에 복수의 교감제를 신설하였다. 교무담당 교감과 생활지도 담당의 두 교감을 임명하는 제도다. 처음이어서 43학급 이상의 큰 규모의 학교에만 두기로 방침을 정했다. 그 결과 초등에 573명 중학교에 50명 고등학교에 20명을 배정하여 각시·도로 하여금 임명하도록 조치하였다.

아홉 째, 영재교육 진흥책이다. 주로 과학 어학 예능에 중점을 두고 우수한 학생에게 월반제와 속진제를 적용하도록 시달되었다.

열 째, 7.30교육개혁으로 확정된 4년제 교육대학 출범에 관하여 그 연차계획을 수립하였다. 매년 3개교씩 4년에 걸쳐서 승격하는 계획을 확정지웠다. 1981년 3개교(서울 부산 광주) 1982년 3개교(대구 인천 공주) 1983년 3개교(춘천 전주 진주) 1984년 2개교(청주 제주)로 총 11개 교육대학이 4년제로 개편완료하는 계획이 수립시행되었다.

열한 번째, 한국교원대학교의 창설이다. 이 정책만은 이 장관이 주도하고 차관이 보좌한 대표적인 정책이다. 일제강점기의 초등교원 양성기관 경성사범학교가 새로 개교한 서울대학교의 한 단과대학으로 통합되자, 수도 서울의 초등교원 양성기관이 없어, 경기사범학교를 1946년에 용산에 개교하였다. 뒤에 경기도와 서울시가 분리되는 바람에 교명을 서울사범학교로 변경하였다. 그 결과 서울대 사대는 중고교 교사 양성기관이기는 하나 문리대화 하기 시작한데다가 초중등교사 통합 양성기관의 필요성이 생기게 되는 분위기였다. 거기다가 1991년으로 예정된 중학교 의무교육 전면 실시를 대비하여 새 형태의 교원 양성기관의 필요성이 일어나게 되었다.

문교부는 1983년에 초(2·1) 새 교원대학교 설립 기본계획을 수립하고 그 7월 5일에는 그 명칭을 「한국교원대학교」로 정하였다. 또 다음해 3월 15일자로 「한국교원대학교 설치령」을 공포하고, 초대에 이규호 총장(2대 권이혁, 3·4대 신극범)을 임명하고 1985년 3월, 첫 입학식을 열었다. 그리하여 이 학교는 초등교원 중학교원 고교교원을 양성 배출하고 현직 교원의 재교육도 담당하게 된다. 충북 청주시 강내면에 통합형 교원양성 대학과 대학원이 운영되고 있다. 교원대학교가 설립된 지 20여년이 흐른 후 2009년10월에 권재술 총장이 나를 방문하고 개교25주년 기념이라며 한국교원대학교 설립공로패를 전달해왔다. 감회가 새로웠다.

열두 번째, 대학원중심대학제도의 창설이다. 종래에는 대학원이 반드시 대학에 부설되어 있었다. 새 제도는 대학과는 별도로 대학원만 따로 독립하여 존립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리하여 ㅇㅇ대학원대학이란 간판을 달고 대학원과정 만의 교육과정을 운영하고 석사 박사를 배출할 수 있도록 제도화한 것이다.

이상 모두 교단인 출신 장관과 차관이 만나지 아니했으면 마음 맞춰 추진할 수 없는 정책들이었다. 국·과장처럼 고유업무에 억매이지 않으면서 교육 전반을 이끌어가는 직종인 나의 문교부차관 시절은 그런대로 평소에 축적된 뜻을 펴고 많은 것을 이룬 좋은 기회였다고 자평하고 싶다.

23. 대학교육협의회의 발상과 창립

이규호 장관 취임 6일 만에 나는 대학교육국장으로 전임되었다. 이 중임은 나로 하여금 많은 번민과 여러 정책 구상을 하게 하였다. 당시의 우리 대학은 문제덩어리였다. 초·중·고교를 열심히 공부하다가도 대학입학만 하고나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놀고 즐기고 데모하고 헛된 시간만 보내는 우리나라 대학, 그래도 4년간만 지나면 무사히 졸업하는 대학. 열심히 가르치기야 하지만 학점 부여에 방만한 일부 교수들, 그래도 무사제일주의로 끌고 가는 총·학장과 재단 책임자. 전부는 아니지만 이러한 대학의 행태는 국가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반드시 크게 개혁되어야 한다는 굳은 각오를 하며 다짐하였었다. 마침 그 이전에 대학교육과장과 대학학사담당관 경험을 겪었기 때문에 이러한 대학의 일상사는 익히 터득하고 있는 처지이기는 하였었다.

기이하게도 부임 10일 만에 한 통의 전화를 받고 급히 그 자리를 떠나 문교부의 장관이 아니라 실질적인 국가 최고 통치자인 전두환 상임위원장(뒤에 대통령)의 보좌 기관인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의 교육팀으로 옮기게 된다. 대학 개혁을 위해서는 더 큰 힘을 지닌 초정부적 최고기관이 아니던가. 그리하여 대학의 방만한 입시제도와 학사관리 제도를 획기적으로 개혁하는 7.30 교육개혁에 참여하게 된다. 이는 문교부 대학 담당 국장의 힘이나 장관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이루어낼 수 없는 강력한 혁신안이었다. 나는 평소에 마음 다져온 대학 개혁의 작은 망치를 버리고 큰 쇠망치를 들게 되고 만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국보위의 획기적인 대학개혁이 이루어져 방만했던 우리나라의 모든 대학은 국가 권력의 개입을 받아 뿌리째 타율적 개혁을 강제 받게 되어 충격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다른 한편으로 양식 있고 건전한 대학교육을 바라고 일하는 대학인들의 고민도 모르는 바 아닌 문교행정인으로서 자책과 동정심 뿐 아니라, 대학 본연의 모습을 되찾는 일도 병행되어야 한다는 의지는 마음속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결국엔 새 대학으로 굳건히 일어서서 전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7.30 교육개혁 조치가 공표 시행된 후, 나는 중앙교육연수원장 겸 입법의원을 겸직하다가, 교육개혁 실시 1년차인 1981년 봄에 차관이 되어 문교부로 돌아왔다. 교육개혁을 효과 있게 잘 추진하라는 전두환 대통령의 무언의 지침이 느껴졌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1979.10.26.) 이후 혼란을 수습하고 최규하 대통령 하에서 실질적 통치를 하고 있던 전 위원장이 대통령으로 취임(80,9)한 반 년 넘은 시기였다. 나는 7.30 교육개혁을 힘차게 밀고 나가기로 결심하고 이를 추진하면서도 압박감에 짓눌린 대학인들과 동행하는 심정으로 임무를 수행하기로 마음을 다지고 있었다. 그 동행이란 타율대학을 자율대학으로 정착시키는 나의 새 임무감으로 발현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차관 부임 다음 해 정초에, 청와대 브리핑용 1982년도 문교업무계획 초안에 「대학교육협의회(가칭) 구성 연구 검토」라는 조심스러운 제목 하나를 포함시켰다. 대학끼리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면서 성공적인 대학개혁을 해나가자는 취지였다. 그 기본방침으로는 ①대학의 자치 능력 배양 ②대학의 자율성 신장 ③공동문제 협의 처리 등 3개항을 목표로 하고, 협의 대상은 ①학적관리 ②대학평가 업무 ③대학 간 학점 인정 ④교수 교류 ⑤예산 결산의 분석 평가 ⑥납입금 책정 협의 ⑦교직원 부수 수준 협의 등으로 하고 이 기구 구성을 연구 검토하겠다는 대통령 앞 계획 보고였다.

담당 국장의 의견을 수용하여 협의업무는 ‘비 정책적 실무업무’에 한정한다는 단서를 달아 주었다. 장관에게 사전 브리핑하였더니 조금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셨지만 나는 더욱 역설하였다. 청와대에서 대통령에게 브리핑 하는 중에 그 기구 신설 이유를 물어왔다. 그 당시에는 범정부적으로 정부기구와 수많은 각종위원회 정비 축소를 일제히 강행하던 시기인데도 문교부가 이에 역행하여 새 기구를 신설한다니 의아해 하신 것이었다. 장관은 피하고 차관이 나서 대학자율 자치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대통령의 수긍을 얻어냈다. 이리하여 확정된 92년도 문교 업무계획에 따라 「대학교육협의회」 창립안을 시달하고 홍보했다. 이에 따라 대학국 명의의 「대학교육협의회 구성 발족 추진계획안(1982.3.2.)」이 만들어져 장관의 결재도 받아 확정지웠다.

나는 곧 장관과의 면담으로 대학교육협의회 발족 문제를 협의하였다. 이 협의회는 대학 총장들의 모임이니 회장 선출로 발족할 수 있겠지만, 아직은 수동적이니 문교부에서 주동적으로 추진해야 창설과정이 원만할 것이라는 것과, 이를 위해서는 그 사무총장 적재를 먼저 임명하여 그 분으로 하여금 문교부와의 긴밀한 협력으로 조속이 이 기구를 신설할 수 있겠기에 장관께서 사무총장 적재를 지명해 주시면 나와 대학국장이 그와 협의해서 그 창설을 서두르겠다고 진언하였다. 장관은 수동적인 자세로 “누가 하고자 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정 차관이 물색해 보세요”라 답하였다. 나는 어렵사리 “그러면 제가 물색해 보겠습니다” 하고 1차 회담이 끝났다.

물러나온 나는 중요임무란 생각 끝에 퇴근 후에 당시 사학연금공단에 재임 중이던 전임 차관 출신인 장인숙 이사장을 방문하였다. 그 분은 설명과 권유를 듣고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수일 후 전화하고 또 재방문 설득으로 어렵사리 승낙을 받았다. 삼고초려의 결과였다. 제2후보자도 생각해 두었었으나 그에 까지는 이르지 않고 해결된 셈이었다.

그리하여 신임 초대 사무총장의 적극적인 참여와 노력으로 문교부로서는 큰 어려움 없이 그해 4월 2일에 여의도 사무실에서 「대교협」 발족이 이루어지고 초대 회장으로는 원광대학교 박길진 총장이 선출되어 사상초유의 대학자치기관이 출범하게 되었다. 그날이 있어 오늘날까지 35년간 대학자치 협의 기구로 큰 역할을 수행함으로서 우리나라 대학 발전에 큰 역할을 수행하고 있어 발의자인 나로서는 남모르는 즐거움으로 삼고 있다. 역대 회장과 사무총장을 열거해 두기로 한다.

회장:초대 박길진(원광대) 2대 장충식(단국대) 3대 권영진(건국대)

4대 김치선(숭실대) 5대 조완규(서울대) 6대 박영식(연세대)

7대 김희집(고려대) 8대 정덕기(충남대) 9대 김민하(중앙대)

10대 현승일(국민대) 11대 윤형원(충남대) 12대 박영식(광운대)

13대 김병묵(경희대) 14대 권영건(안동대) 15대 손병두(서강대)

16대 이배용(이화대) 17대 이기수(고려대) 18대 김영길(한동대)

19대 함인석(경북대) 20대 서거석(전북대) 21대 김준영(성균관대)

22대 부구욱(영산대) 23대 허향진

문교부로서는 그 다음해(1983)의 청와대 연구보고에서 대교협 육성과 대학의 자율성 신장을 위해 그 지원육성법과 기구를 정비하고 문교부의 대학업무의 일부를 이양하겠다는 것을 대통령에게 보고한 바 있다. 나는 대교협이 발행하는 「대학교육」이란 기관지에 ‘대학의 자치와 대학교육협의회를 생각한다’는 권두언을 기고함으로서 그 임무를 종료한 바 있다. 거기에는 대교협이 대학연합 자치구구로서 또한 ‘제2의 문교부’로서 우리나라 대학 문화 창달의 도약대가 되어주기 바란다는 축사를 한 바 있다. 문교부 출입기자 한 분은 대교협 기사에서 발상은 당시 정태수 문교차관이며 실행준비는 장인숙 전 차관이 도맡았다. 그는 정 차관의 권유를 몇차례 뿌리쳤으나 집에까지 찾아와 강권하므로 물리치지 못했던 비화는 지금도 여러 사람이 기억하고 있다”라고 썼다.

24. 문교부 23년을 마감한 그 하루

나의 문교부차관 퇴임 얘기를 되돌아보고자 한다. 30여 년 전의 기억들이다. 내가 문교부의 차관직을 맡은 것은 운명적으로 「7.30교육개혁」의 주역노릇을 맡은 때문이며, 이 자리를 의원면직 당한 것도 역시 운명적으로 그 개혁항목 중의 하나인 「대학졸업정원제」의 철회를 요구하는 정치세력에 순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떻든 나는 교육개혁이란 무거운 짐을 지고 교육개혁과 함께 흥망성쇠를 겪는 사주팔자를 타고 난 사람인 모양새다. 그리하여 그 개혁항목 중의 하나인 졸업정원제의 지뢰를 밟은 것이었다.

정부의 장·차관직은 풍전등화 같은 자리다. 언제든지 바람이 불면 한 마디의 대꾸도 없이 내려앉는 의자인 것이다. 신분보장이 단단한 직업공무원이 아니라 정무직이기 때문이다. 직업공무원을 쫓아낼 때는 이유를 밝히고 절차를 거친다. 그 이유에 불만이 있으면 불평하기도 저항하기도 한다. 문교부도 실·국장 이하는 그렇다. 그러나 장관과 차관은 대통령의 말만 떨어지면 그만이다. 그 사유를 말하거나 밝히지 않아도 되는 것이 상례다. 다만 상황판단과 짐작만 할 뿐인 것이다. 적어도 내 경우는 그러했다.

1983년 7월 19일의 일이다. 이규호 장관이 옆방에서 불러 만났더니 “대통령의 지시입니다. 차관님의 후임에 정희채 의원이 오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참 수고 많았습니다” 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예?” “아아, 예” 두 마디를 하고 우물쭈물 차관실로 돌아와 김성동 비서실장(뒤에 대학총장)을 불러 이를 알리고 보따리를 쌌다. 매일 차관실에서 열리던 국장회의도, 각부처 차관회의도 끝내는 날이었다. 그날 일찍 퇴근하고 다음날 이임식을 마치고 오랫동안 정든 중앙청을 떠났다. 문교부 23년간, 그 중, 차관직 2년 4개월의 총청산이었으며 실업자의 시작이었다. 53세였으니까 조금 이른 퇴직이었다. 얼마 후 총무처에서 퇴임기념패 하나를 전달 받았다.

집에 은거하니 여기저기서 위로와 안부전화도 오고 만나기도 하였더니 차관 퇴임사유가 「졸업정원제」 때문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수긍이 갔다. 그 당시 대학인들의 공통 불만이 정치를 만나 그 뜻을 이룬 결말이었다. 그 이유 같으면 변명이나 항변이라도 할만도 한데 하고 느끼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런 짓은 안하는 것이 내 위치에 알맞은 대응방식이라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다만 회고록으로 남길 일이라 여겨 여기에 밝혀두고자 한다.

당시에 이 장관은 “졸업정원제는 정태수 차관이 국보위 근무 당시 입안된 7.30교육개혁안 중의 한 항목으로서, 그 차관이 그 취소는 안 된다는데 난들 어떡합니까?” 하고 모든 책임을 나에게 미룬 모양이었다. 그 결과는 권익현 사무총장(전 대통령과 육사 동기로 중장 출신)의 분노를 샀고, 이 장관은 스스로를 피신시키면서, 두 사람이 함께 전두환 대통령에게 졸업정원제 폐지를 직보하고, 정 차관 퇴출 결정까지 보게 된 것이었다.

그 결과가 이규호장관이 1983년 7월 19일에 나를 불러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라면서 차관 퇴임을 통고한 오직 하나의 이유였던 것이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이 제도는 내가 국보위에 추출근무 당시 학국교육개발원의 연구하고 문교부 국장회의를 통과한 안을, 내가 주선하여 국보위에 운반하여 7.30교육개혁안(1980. 7. 30.공표)에 포함시킨 사항이어서, 죄가 된다면 내가 채택죄를 둘러써야 할 사안이었다.

학점 난발이 우리나라 대학이 망국현상인 「입학 즉 졸업」이라는 경지에서 구출하기 위한 입법이었으니, 굳이 변호하자면 「애국애족적 채택죄」라 할 일이었다. 그러므로 이에 반대하는 교수와 학부모들은 집단적 이기주의자들이라 해도 되지 않나 싶다. 그 불만을 풀어주면 교수는 학점 주고 말고를 마음 내끼는대로 하는 자유방종으로 회귀하고, 학부모는 내 자식은 대학에의 입학 즉 졸업이라는 무임승차 타성을 만끽하게 되고, 나라와 민족의 미래를 망치는 망쪼가 닥치고 있다고 생각되기도 하였던 기억이 난다. 거기에 가세하고 망동한 세력은 정치욕에 사로잡힌 정당이었으니, 나로서는 꼭 지우고 싶은 사안이었던 것이다. 우리 문교부는 이러한 사방의 적에게 둘로싸인 포로가 되고 만 것이다.

투표와 선거를 위해 탄생한 정당이 민심을 위반하고 선거를 망칠 거으로 짐작되는 마귀같은 존재를 용납하고 공생하겠는가? 7.30교육개혁안을 만들고 그 폐지를 반대하는 대표자인 차관을 가만 두겠는가? 민정당 권익현 사무총장이 이규호 문교부장관을 조르고, 장관은 차관의 찬동을 구했으나 불가를 주장하고, 장관은 권 사무총장에 이를 회보하고, 결국엔 이를 호기로 삼은 장관은 대통령에게 차관 경질을 건의하고, 전두환 대통령은 이에 부득이 동의하여, 「정태수 차관 경질」 이라는 결정에 도달하게 된다. 이규호 장관으로서는 졸업정원제와 무관하고 자유롭다는 것을 널리 증명하는 정치적 효과를 과시한 행사였다 할 것이다.

이리하여 결국 7.30 교육개혁안은 그 중의 대입 본고사 폐지와 고교 내신성적 반영안은 성공했으나, 과외 폐지안은 부분 개선에 그쳤고, 2년제 교육대학의 4년제화는 성취했으나, 오직 대학의 졸업정원제 만은 없던 일로 되고 말았다.

내가 의원면직한 날은 그해 여름 7월 19일로, 차관 재임 2년 4개월만의 일이었다. 이 사건으로 이규호 장관은 나에게 마음의 빚을 하나 지게 된 모양이었다. 나의 퇴임 3개월 후, 나를 불러 대한교직원공제회 이사장 취임을 권유해왔다. 그 절차를 밟고 있는 중에 무슨 일인지 이 장관 자신도 경질되고 말았다.

내가 정부를 떠남으로서 졸업정원제와 함께 밀어붙인 「교단 중심의 교육행정」과 「교실개혁」이란 새 깃발도, 동시에 다 내려놓게 된 것은 매우 아쉬운 점이였다,

그런데 한 10년 세월이 흐른 뒤에 내 눈에 뜨인 것이 있었다. 「교육청」이 「교육지원청」으로, 「대학교육국」이 「대학지원국」으로, 관청명칭에 「지원」이란 단어를 넣은 교육부와 지방교육청의 바꿔진 간판들을 보고, 나의 퇴진으로 다 지워진 줄로 알았던 「교실중심주의 현장위주의 교육행정관(敎育行政觀)」이, 나와 뜻이 같은 후배들에 이어져 살아남아 이어지고 있었구나 하고 감격했던 그날의 행복감만은 흐뭇하게 여기면서 오늘을 살고 있다.

한편, 30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그 때의 그 자의적 학점대학은 그대로 굴러가고 있다. 눈독을 드렸던 대학 교실은 아무 변화 없이 「강의식 수업 그대로」 이어오고 있어, 나는 다음같이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다. 즉, 군인 출신의 국보위 고위층이 대학을 잘 모르고 너무 가혹하고 강하게 밀어붙여 고집한 그 50%제도를, 또 그 30%를, 내가 강력히 고집 부려 처음부터 6%나 3% 수준으로 팍 낮춰 잡았더라면, 졸업정원제를 정착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거기에다 개혁선도대학 세미나와 국고보조, 공로교수 표창과 특별연구비 지원 까지 제도화했더라면, 또한 언론매체를 통한 홍보에 조직적으로 힘썼더라면 혹시 성공하지 않았을까? 그랬더라면 다툴 명분이 약화되어 고통을 감내했을 것이고, 권 사무총장도 도리어 문교부를 도와 방패막이가 돼줬을 것 아니겠는가? 경국지대업(經國之大業)을 자칫 남가일몽(南柯一夢)으로 끝내고 말았구나 하고...

그날 이후 35년이 지난 지금이라도 주입식 수업, 자의적 학점제, 학점 로비, A학점 난발, 올A학점, 데모 대학을 개혁하기 위하여, 다시 졸정제를 「학점미달 벌점제」등의 새 이름을 지어 대학인의 중의를 모으고, 가벼운 3% 탈락제를 도입하면 안 될까? 내가 못다 이룬 꿈, 대학 교실의 획기적 진화가 지금도 아쉬운 꿈으로 아련히 남아있다. 회한의 시조 한 수 읊어본다.

차를 끓이며

싱겁다, 조급하여 덜 우려 따랐구나

떫구나, 요량 없이 때를 놓쳐버렸네

설익은 녹차 한 잔이 지난 삶을 꾸짖는다.

25. 차관 진퇴의 이면담과 잔념

1980년 6월 5일의 나의 국보위 출근은 그 뒤의 나의 운세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80고개를 넘고 난 뒤에 차근차근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전에까지는 국정에 골몰하거나 대학 경영에 몰두하는 등 일상에 바빠 미처 챙겨보지도 상도하지도 않던 이면사이기에 묻어두고 살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제 일대기를 회고록으로 정리하자니 이 부분이 스르르 부각되기에 붓을 고쳐 들고 이 글을 써 본다.

국보위 문공위 문교팀의 실질적인 조력자로서 김행자 위원과 오자복 위원장을 도와 과단성 있게 일하기도 했거니와 교육재정 분야와 2년제 교육대학의 4년제화 분야는 내가 직접 입안하고 전두환 위원장에게 브리핑하고 기안서류를 들고 들어가 전 위원장의 결재를 얻기도 하였다. 그때 받은 인상은 그분이 사람을 한 번 믿으면 끝까지 믿는 곧고 솔직하고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임을 느낀 바 있었다. 그때마다 전 위원장의 지침록을 기록해 두었다가 저서에 남기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국보위 말기에 오자복 위원장이 중장으로 승진하여 새 임무를 맡아 군에 복귀함으로서 문공분과위원장이 공석이 되었을 때, 차석인 김 대령과 선임자인 김행자 위원이나 공보팀의 허문도 같은 높은 신임도있는 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를 그 후임 위원장으로 지목하고 발령장을 받았다. 이에는 상임위원장의 대표역 이기백 위원장의 도움도 작용하였었다. 불과 2주 동안의 빈 감투일 뿐, 아무런 안건처리도 없이 자리를 지켰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빈 감투로 인한 나의 위상 변화는 바로 그 뒤에 이어진 입법회의 조직에 반영되어, 나는 입법의원이 되어 입법회의 문공분과 위원회 간사를 맡게 된다. 함께 일한 우리 문공분과 동료들은 모두가 같은 위원회의 전문위원으로 배정 받기에 된다. 큰 위상변화였다. 이렇게 하여 입법회의 6개월간 문공분과의 저명한 인사들의 안내자로서 실질적으로는 대표자 노릇을 하게 된다. 당시의 국보위 분과위원장 13인이 똑 같이 전두환상임위원장으로 부터 입은 중용이며 배려의 결과였다.

이러한 인간관계는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에도 지속되었다. 김판영 문교 차관의 퇴임으로 공석일 때 이규호 문교부 장관은 다음 차관 후보자 명단을 만들어 청와대에 들어가 그 선정을 받는데, 그 속에 나도 들어 있었다. 그런데 전 대통령은 이 명단을 일별하고는 자세히 보지도 묻지도 않고 정태수 이름을 찍어 결재하고 말았다 한다. 장관의 의중을 물었더라면 그 중 권 아무개를 낙점할 뻔 한 상항이었다. 왜냐하면 뒤에 확인된 일이지만 그때 이 장관은 장학실장 재직 중인 진주고등학교 동창인 권순찬씨를 우선순위 1위로 점찍고 청와대에 갔었다 한다. 그런데 대통령이 뒤집어 최종적인 낙점을 한 것이다.

전 대통령의 생각 속에는 옛 분과위원장 13인 중의 한 사람인 정태수를 버릴 수 없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들은 5공화국을 열고 대통령 만들기 밑거름이 되어 준 국보위 위원장들이며 입법회의 각 분과 간사를 맡아 큰일을 치른 최측근 동지로 치부하고 그들을 모두 챙겨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 덕을 입은 셈이었다. 그 결과 나는 2년 3개월이라는 장기간 차관으로 재임하게 된 것이다. 그 기간 중에도 왜 파고드는 자가 없었겠냐마는 그때 마다 전 대통령이 고개를 젓고 나를 보호해준 결과 장기간 차관으로 머물면서 하고 싶었던 많은 일을 하기에 이른 것이 아닌가 짐작해본다.

그러나 이규호 장관의 입장과 시각, 그리고 감정은 조금 달랐다. 처음부터 대통령의 힘에 눌려 타의로 정 차관으로 결정된 데다가 한 번도 집을 방문하거나 아부해오는 경우가 전무할 뿐 아니라, 장관을 제쳐놓고 스스로 정책을 끌어내고 장관 결심을 요구하는가 하면, 차관 단독 지방 순회를 하는데다 교장회의를 단독 소집하여 특강하는 등 단독 행진을 하는 일이 잦아, 장관 스스로 마음 걸리는 일도 있어 불만이었던 것이다.

그런 때에 부내 어느 국장 한 사람이 부부동반 자택방문도 하고 그 내자는 장관 부인에게 빈번이 찾아와 심부름과 가사일 돕기까지 한다는 설이 밖으로 유포된 일이 있었다. 그 국장의 목적은 차관직 쟁취여서 매우 적극적이었다는 소문도 돌았었다.

나는 정반대였다. 장관과 특별한 친분을 쌓는 그런 조짐도 보이지 않고 담담한데다, 도리어 나는 장관에게 이로운 충고를 한답시고 장관과 점심을 나누면서 “사모님이 문교부 인사에 관여한다는 설이 밖으로 자자하니 장관께서 이를 주의해 주십시오”하고 말한 일이 있었는데, 그런 사실 없다며 당황하신 일도 있어 소원해진 것 아니냐는 생각도 들었다. 그 후 내가 서울대학병원에 며칠간 입원한 일이 있었는데, 어느 직원의 귀띔에 의하면 장관이 사람을 시켜 뒷조사를 했단다. 입원비 치료비 검사비 등을 무료로 또는 감면 받지 않았는지 조사보고를 받았다 한다. 이는 차관 해임 구실을 작만하기 위한 작업이었다는 것이었다. 그 조사결과는 전액 부담했기에 다행이지 혹시 공짜 입원 예외대우를 받았었다면 생사문제가 걸릴 뻔 했다는 것이었다. 그 일이 사실이라면 만정이 떨어질 일이었다고 여긴 일이 있었다.

그러한 시기인 차관 말기인 1983년에 대학교육협의회 출범을 구상하고 그 항목을 1983년도 업무계획에 넣어 청와대 연두브리핑 자료를 작성하여 장관에게 브리핑을 할때였다. 그 조항에 대하여 뜻밖에도 이 장관이 이견과 반대표명을 한 일이 있었다. 알고보니 그 배후에 그 국장이 미리 장관에게 고자질함으로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문교부가 직접 처리하는 대학업무가 대교협에 위임되면 자기들 권력이 줄어들고 그 단체의 압박이 올까봐 이를 반대하는 의견을 장관에게 미리 고한 결과였던 것이다. 차관으로서는 창의적으로 일한다는 것이 장관 입장에서는 장관을 도외시하고 차관 단독 플레이 하는 것으로 치부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였다.

또한 이 장관 영전설이 있을 때 마다 차관의 장관 승진설이 생기니 불쾌한 상황까지 이르게 되기도 하였다 한다. 낭설이겠지만 그 횟수가 4회라는 설이 들려오기도 하였다. 차관 승진운동하는 국장도 있었다 한다. 그리하여 장관으로서는 차관 경질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 기회가 급히 도래하였다. 앞에 본 바와 같이 1983 정치의 계절에 민정당이 생기자 7.30교육개혁 조항 중 졸업정원제에 대하여 특히 일류 대학의 교수들이 사무총장에게 작용한 그 폐지운동이 장관에게까지 미쳤었다. 이때 장관의 나에게 대처방안을 물어왔었다. 나는 폐지는 불가하다며 입학 정원 인하책을 제시한 일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 사안의 책임을 차관에게 씌울 수 있게 되고 만 것이다. 그 맘목덩어리를 장관은 민정당의 후원까지 얻어서 7.30 교육개혁안 성립에 참여한 차관에게 둘러씌워 차관교체를 합의하고 대통령에게 건의하게 되고 만다.

만약 내가 장관에게 말랑말랑 나긋나긋하고 사저를 찾아 예를 다하고 새 정책을 입안할 때는 뜸을 들여 구상 때부터 정답게 의논하고 그 공은 전적으로 장관에게 돌려드리고 했었다면, 또한 졸업정원제 폐지에 찬동했더라면 어떤 결말이 돌아왔을까? 타의에 의해 임명되었더라도 퇴임의 고비를 넘길 수 있지 않았을까? 만약 대통령께도 한번이라도 개별 방문으로 정을 쌓고 정책 건의도 하면서 이러한 동향을 미리 알려드렸더라면 그 해임 건의도 중도좌절 되지 않았을까 가정해본다.

이규호 장관은 나의 차관 퇴임 후 후일의 문제를 논의한 일이 있었다. 조금은 억지로 퇴인하게 한 것이 마음의 빚이 되어 나의 의견을 물어온 것이다. 나는 한국교육개발원장을 입에 올렸다. 그 뒤에 보니 거기엔 당시의 김영식 장학실장(뒤에 문교장관)에 주고 나에게는 대한교원공제회 이사장을 선물로 주었다. 교육개발원은 교수 출신에게 주고 관료 출신인 나에게는 공제회를 선물한 셈이다.

나는 일생을 정신적 여유 없이 일과 공부에 파묻혀 살아왔다. 인간관계에 소홀한 것이 사실이다. 이 세상에 독불장군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일 이외에 조금만 더 인간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배려와 처세에 능동적이었더라면 그런 고경도 능히 넘기고 더 큰 인생을 누렸을 텐데 하고 후회하고 있다.

전 대통령의 의리정신은 단단하였다. 세평도 그러하다. 전 대통령은 집권과정에 동행했던 국보위 위원장을 버리지 않고 늘 챙겼으며 13~15명의 위원장들을 나 한사람 빼고는 모두가 장관직을 거치게 하기도 하였다. 나에게 해꼬지한 그때 그 국장은 결국 두어 대 뒤에 차관직을 쟁취하고야 말았다. 끈질긴 차관 지향노력의 결과였다고 생각된다. 내 후임에는 정희채 의원이 임명되었다. 그 분은 진주사범학교 선배로 초등교단을 잠깐 경험하고 미국 유학으로 학위를 받아 부산대학교 교수로 오래 재직하다가 전국구의원으로 있었다. 차관 직은 내가 선임이고 고등학교는 그가 선배인 친근한 사이다. 나는 결국 학계로 건너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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