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총장님 자서전

6. 비봉산의 새 아침을 맞다

김현거사 2016. 11. 3. 14:53

 

6. 비봉산의 새 아침을 맞다

 

 

 새장에 갖힌 새가 밖으로 나오고, 못에 갇힌 고기가 바다로 나간 셈이다. 1941년 4월 초 나는 숙부님 손을 잡고 나는 진주제2소학교(곧 봉래심상소학교로 변경) 4학년에 전입하였다. 산촌에서 (산촌 학교에서) 진주라는 서부경남 제1의 큰 도시로 진출한 것이다.

 진주는 고색찬연한 도시다. 가야의 옛 땅으로 신라 때는 청주(菁州) 혹은 강주(慷州)로 불리웠고, 고려 태조 때 진주(晉州)로 개명되어 성종 때(983) 전국 12목중 하나인 진주목으로 승격되었다. 그후 조선 태조 때(1319) 진양대도호부로 정해졌고, 1896년 경상도가 남북으로 분할될 때 경남도청 소재지가 된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가 벌어진 곳이며, 당시 내성과 외성, 절벽과 해자, 남강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였다.

진주는 영산 지리산에서 발원한 남강을 따라 형성된 비옥한 충적평야가 있고, 사천 삼천포 바다와 인접해 있어서 각종 물산이 풍부한 천혜의 자연환경과 전라도 경상도 사이의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입지조건 때문에 경상도 최고의 도시다.

 

  *삭제(우리 민족의 영산인 지리산이 서쪽에 자리하며 여기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남강이 되어 비옥한 농토를 제공해 준다.

 

        또한 천혜의 자연환경과 풍부한 어족자원을 가진 남해와 닿아 있어 일찍부터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였다.)

 

 비록 일제 때 조선의 물자를 실어가기 위해서 진주에 철도를 깔아주고 도청을 부산으로 옮겨갔지만, 경남 문화 예술의 중심이고 유서 깊은 교육도시였다.

 

 나는 작은 집에서 5년간 학교를 다니면서 눈이 좀 커지고 넓어지고 멀리 보게 되었다. 사람들이 갑자기 많아져 귀도 바빠지게 변해갔다. 옛 공자를 모신 사당이 있어 간혹 들리기도 했고, 촉석루에 가서 임진왜란 당시 역사 이야기도 알게 되었다.

 같은 지리산 줄기지만, 태어난 월아산에서 지리산에 더 가까운 비봉산 밑으로 간 것이고, 같은 남강이지만 더 상류로 옮아간 것이다.

 

 진주시의 진산 비봉산(飛鳳山)은 옛날에는 대봉산(大鳳山)이라 불렀다. 진양지의 월아산조에 이르기를 "산 동쪽에는 비봉의 형국이 있어 예부터 정승이 나고, 산 서쪽에는 천마의 형국이 있어 장수가 날 것" 이라고 하였다. 

 촉석루 쪽에서 바라보면 큰 대봉이 날개를 펴고 진주로 내려앉는 모습인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고려 때 진주 강씨들 집안에서 뛰어난 인물이 많이 나고 대봉산 밑에 웅거하여 권세를 부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대봉산 위에 봉암이 있기 때문이라고 일컬었다. 이에 조정에서 몰래 사람을 보내어 봉암을 깨어 없애고 봉은 이미 날아가 버렸다고 비봉산이라 부르니, 진주 사람들이 날아간 봉을 다시 부르려면 알자리가 있어야 한다고  가야시대의 고분 자리인 지금 상봉동 위치에 봉이 알을 낳는 형국의 "봉알자리"를 만들고, 남강변에 봉이 즐겨먹는 먹이인 죽실(竹實)이 열리라고 대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현재 비봉산 서쪽에 가마못이 있으며 산을 중심으로 비봉 공원이 형성되어 있고 산 동쪽에 의곡사, 연화사 등이 있으며 산 서쪽 기슭에는 비봉루가 있다.

 
 *삭제(이로부터 작은집에서의 하숙 통학 생활은 한 5년간이나 지속되었다.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6km를 걸어 등교하던 지수학교와는 달리 한 1km로 줄었다. 오가는 도중에 옛 공자를 모신 사당이 있어 간혹 들리기도 한 기억이 남아있다.

같은 지리산 줄기지만, 태어난 월아산에서 조금 가까운 비봉산으로, 같은 남강이지만 더 상류로 옮아온 것이다. 임진왜란 등 촉석루에 얽힌 역사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나의 눈이 좀 커지고 넓어지고 멀리 보게도 되었다. 사람들이 갑자기 많아져 귀도 바빠지게 변해갔다.)

 

 진주는 초등학교 둘이 있어 교류하고 경쟁하는 마음도 생겼다. 제1소학교 제2소학교로 불리던 두 학교는 5학년 때 쯤에 바뀌었다.

 제1소학교는 요시노(吉野)소학교로 변경되었는데, 이는 진주 복판에 위치하고 일본인과 조선인이 섞여 공부하는 곳이었으며, 우리 제2소학교는 호오라이(蓬萊)소학교로 교명변경 되었는데 이는 약간 변두리 비봉산 밑에 위치하는 순 조선인 (취학의) 학교였다.

 5년제의 중학교 넷 있었는데,

 

*삭제(라는 학교가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네 개나 있었다.)

 

진주사범학교 진주중학교 진주농업학교 진주일신여학교가 그것이다. 그 당시는 아직 대학은 없었지만, 유서 깊은 교육도시라 부르기에 충분하였다.

 

*삭제(이곳을 교육도시라 불리는 것은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알았다. 아직 대학은 없었다.)

 

 세상이 한 층 높아지고 하늘도 높아진 그곳에서

 

*삭제(졌다. 하늘도 넓어졌다.)

 

나는 봉래초등학교에서 4.5.6학년을 다녔다.

봉래초등학교는  조선인과 일본인 선생님이 가르치는 (곳)은 지수초등과 같지만 한 학년이 세 반으로 구성되어 나뉘어 있었다.(는데) 적령 아동으로 구성된 1반은 사꾸라 구비(벗꽃반, 櫻組), 2반인 여학생 반은 마쓰구비(소나무반, 松組), 적령을 지난 남아를 수용하는 3반은 우메구미(매화조, 梅組)로 분류되고, 학생은 3년간 고정되어 있었다.

 나는 항상 1반이었는데(다.) 이 학교에 오면서부터 성명이 바뀌었다.

 데이타이슈(정태수,鄭泰秀)가 마쓰하타 오오시게(松圃大靑)으로 창시 개명한 것이다. 그때는 조선인 아라이(新井)선생이 담임이었고, 5,6학년 때에는 일본인 네이 이와오(根井岩雄)선생을 만났다. 교장은 와다(和田)선생이었다.

 4학년 말(1941.12)에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1945년 가을에 패전했으므로(자가 되었으므로,) 나의 봉래 재학시절은 몽땅 전쟁(중의) 시절이었다.

나는 (그리하여) 일본의 패전 1년 전인 1944년 봄에 졸업하였는데, (다.) 살벌한 전투소식을(도) 자주 듣고 자랐다. 군인 만드는 예비훈련으로 (인지 모르지만) 집단 달리기 등 체육시간이 많았고,(아진 인상이 남아있다. 특히) 촉석루 옆 높은 곳(에) 진주 신사(神社)에 매월 초마다 전교생이 손뼉 치고 두 번 절하는 참배(를 열심히) 한 기억이 난다.

 

 숙부님은 친척이던 (중 유력인사였던) 정태기씨 (소유)의 진양당(晉陽堂)이라는 한약국에서 근무하(였기에 나도) 4촌 동생 정태웅과 함께 간혹 찾아가 약이 무엇인지 처음 구경하기도 하였다. 숙모님은 가족 숙식을 도맡아 힘든데도 불구하고 집에서 떡을 만들어 함지에 이고 시장과 가가호호를 돌며 팔았다.

 

*삭제(아 가용에 보태는 노고를 아끼지 않은 부지런한 분이었다.)

 

네 식구의 어려운 살림살이에 조카인 나까지 덧식구가 불었으니 지금 세대 같으면 그 고생과 고심(이 얼마나 컸을까? 지금 세대 같으면) 어림없는 일이다.(조카 기르기였다.)

 

 지금은 의병로 265라 부르지만 그때 봉래동에 있던, 봉래초등학교는 106년의 역사를 지니고 졸업생 3만여 명을 배출한 유서(하였다역사) 깊은 학교였다.

 

*삭제( 지금은 의병로 265라 부르지만 그때는 봉래동이었다.)

 

 위치는 비봉산을 배경으로 높은 대지에 우뚝 선 자태로 시내를 한 눈에 내려다보고 있는 곳이었다. 한일합방 직전인 1910년에 「봉양학교」라는 이름으로 사립학교로 출발하였는데,(다.) 구 한말(의 긴박할 당시) 문씨(文氏)라는 할머니가 자기 돈과 기부금을 모아 출발한 학교다.(학교를 열었다.)

그러나 3.1 운동이 있던 1919년에 (*삭제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공립의 진주 제2보통학교로 흡수해 버렸다. (그 뒤) 내가 5학년 말이( 되)던 1942에 봉래초등학교로 바뀌어 (오래) 지속되다가, 해방과 정부 수립을 거친 후 김영삼 정부 때

(*삭제. 시기)

(1996) 봉래초등학교로 교명이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삭제(오늘날로 106년의 역사를 지니고 졸업생 3만여 명을 배출하였다.)

 

학교장 류봉조 선생에게 부탁하여 얻은 학적부에는 (다음과 같은) 나의 성적표가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수신 국어 산술 국사 지리 이과 실업 도화 수공 창가 체조 조선어 평균

4학년 8 7 7 - - 7 7 7 7 6 7 - 7

5 〃 9 9 9 9 9 9 8 8 7 8 8 8 8

6 〃 9 9 10 10 9 9 8 8 8 8 8 8 9

 

평범한 성적이지만(다. 하지만) 도시진출 첫 해째부터 총점이 7 8 9로 해마다 (점차) 향상돼가는 추세다. 도시 학교생활에 적응해 간 것이다. 지금도 보관하고 있지만, 5학년 때에는 우등상과 개근상을 받았고(다.) 6학년 (에)는 전체 5~6위였다.

 

술 괴자 임 오신다는 속담이 있다. 내가 문교부 차관으로 있을 때다. 1982년 어느 날 봉래학교 사친회장 일행이 모교 지원을 부탁하러 찾아왔다..

 

*삭제(1982년으로 기억된다. 어느 날 봉래학교 사친회장 일행이 문교부 차관실을 찾아왔다. 모교를 위한 지원을 부탁해 왔다.)

 

그래 내가 문교부(의) 연말 예산을 알아보니 그건 이미 바닥이 난 다음이라 경상남도 학무국에 전화 부탁하여 강당 건축 비용을 부탁하였는데,(다.)

일생 처음 있는 일이라 즉각 들어주어 (한) 1주일 만에 예산 배정이 되어 이듬해에 건물 하나를 지었다.

기념으로 강당 이름(간판)글씨를 써 달라(하)기에 한글로 「봉래체육관」이란 붓글씨를 (한 장 선물했다.) 보냈더니, 완공 후에 그 졸필(못쓴 글씨) 다섯 자를 확대하여 석판에 써 붙였었는데, 그후 나의 옛 간판 돌은 학교 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되고, 지금은 황금색 판에 「봉양관」 이란 간판으로 바꿔 달려 있다.

*삭제(그리고 나의 흔적인 옛 간판 돌은 학교 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현재 학교 측에서 체육관 입구에(는 이 건물의 간판) 글씨 (는) 제24회 졸업생인 정태수 문교부 차(찬)관의 글씨라는 요지의 입간판 하나를 세워 주었다.

 

 나는 (또한) 내친 김에 봉래학교의 역사를 캐어 (*삭제. 돌비 하나를 더 세웠다. 그것은) 둥근 돌 조각 속에 검정 흑석으로 비문을 새겨 교내 언덕에 세웠다.(워졌다. 그 내용은) 오른쪽은 이 학교의 시작(의) 내력을 적은 한말 장지연(張志淵)선생이 지은 순 한문의 정부인남평문씨기념비문(貞夫人南平文氏記念碑文)이 (오른쪽에) 자리잡고, 왼쪽에는 순 한글로 쓴 나의 「정부인 남평문씨 현창문」 이라는 졸시를 새긴 돌비가 있다.

 

 3년 재학이라는 짧은 인연이었지만 이런 (큰) 기념물을 세워 남길 수 있어(*었던 이런)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는데,(*어디서 얻겠는가. 이 학교에는 같은) 24회 동기생인 대법관과 법무부장관을 지낸 (경력의) 이정우씨의 기념탑도 (하나) 근년에 세워졌다. (24회 졸업생의 영광이라 하겠다.)

(그 뿐 아니다. 이) 학교 기념관에는 「봉래를 빛낸 사람들」이라는 사진판 속에 (나의 동기로는) 이정우와 정태수 두 동기사진과 (학)경력도 붙어 있어 후배들에게 (항상) 전시되고 있다.

 두 사람 이외에도 (*졸업생이 많이 걸려 있다.) 선배로서는 남인수(12회) 박재석(21회) 김현옥(21회) 김옥진이, 후배로는 하경근(26회) 조익래(27회) 박정윤(28회) 성용욱(29회) 손길승(33회) 김영구(34회) 이갑진(36회) 정강지(36회) 강철수(39회) 김재천(39회) 이연근(43회) 어청수(47회) 조광래(47회) 정종선(57회)등 총 20명이 걸려있다. (*영광스런 풍경이다.)

 

 

7. 해방이 갖다 안긴 4가지 선물

 

14세 (*가 되었다. 그해 봄에 진주) 봉래국민학교를 졸업했는데,( 다.) 두메산골에 그대로 살았으면 진학의 고민도 없이 가난한 농사꾼으로 굳었을 것이다.

 그러나 숙부님 덕택으로 (산골 지수에서) 진주로 나와 초등학교 4.5.6학년을 이수하는 바람에 (게 되자) 좀 더 넓은 사회에 눈뜨게 되 (었음인지) 중학교에 진학할 (안목과) 의욕이 생겼다.(이 생겨났다.)

그 때 진주시는 원래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 (였던 데다) 인구 3만 정도의 도시였다.(로,) 초등학교가 두 셋에다 중학교가 넷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의) 중학교는 5년제로서 지금의 중·고등학교의 복합형이(었)다.( 그 넷은) 진주사범학교 진주중학교 진주농업학교 진주여자중학교가 있었는데,(였다.)

모두 성적은 상위권에 있어야 하고 학비도 만만치 않았다.

(*삭제. 앞의 셋은 남자용 학교였고 뒤의 여중만이 여자학교였으며 남녀공학 중학교는 없었다.)

다만 사범학교만은 등록금도 수업료도 없을 뿐 아니라 기숙사비는(로) 국비보조였고(로) 밥값 실비 밖에 받지 않았다. (그리고) 졸업 후에는 바로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되어 취직 걱정이 전무한 특혜학교였다.

 당시 일제시대는 국민의 80% 이상이 농민인 농업사회였다. 회사란게 별로 없었고, 시장을 맴도는 장사꾼 이외에는 일자리가 눈에 뜨이자 않던 때다. 학교 교원은 그 시대 최고 선망 직업이었다. 사범에 입학하면 그 자체가 사회적 위상이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다음이 면사무소 서기, 금융조합(지금의 은행) 직원이었다. 산업화 사회가 되어 다양한 일자리가 있는 지금 사람들로서는 상상도 안 되는 단조로운 시대였다. 중학교 진학과 교원 취업자의 사회적 위상은 지상최고의 성공자로 인식되던 때였다.

 

 그 당시

나의 입지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부모님이(는 당시) 논밭 두어 마지기, 즉 논 200평 밭 200평 정도의 빈농 이었다.(으로 자식에게도 이를 인계해 줄 요량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중학진학도 고려하거나 권할 처지가 아니었다. 나역시 초등학교 최종학년 성적은 상위권이기는 하나 어중간한 5~6등이라 뛰고 날수 없는 위축상태여서 진학을 공인받고 주장할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그런데 나는 어리고 본 것도 적고 견식이 좁아 내 눈에는 학교 선생님이 이 세상 최고의 직업으로 인식되었다. 그 생각은 유년기나 초등하교 10여년을 통해서 보고 들은 전 지식으로 형성된 인생관인 셈이다. 훌륭한 직업인으로는 선생님 밖에 보이는 것이 없었고 또 그것밖에 본 것도 없었다.

(*게다가 삼시 세끼 해결에 급급한 부모님이 중학 진학을 독려할 형편도 아니었다. 그 결과, 중학 진학은 하고 싶고 학비는 그 출처가 안보이고) (*초등학교 최종학년 성적은 상위권이기는 하나 어중간한 5~6등이니 뛰고 날수 없는 위축상태여서 진학을 공인받고 주장할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내 여건으로 보면 돈이 드는 다른 중학교는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고, 돈이 전혀 안 드는 사범학교 밖에 오직 갈 곳이 없었다. 그 밖의 중학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오로지 사범학교뿐이었다.)

 그러나 그 사범학교는 1~2등 성적 아니면 감히 꿈 꿀 수 없는,(* 학교였다.) 당시에는 수재들만 갈 수 있는 중학교로 인식되어 있었다. 내 성적으로 농업학교는 가능할 것 같기도 했으나 돈이 없어 언감생심이고, 사범은 성적미달이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처지에 그러나 불행하게도 내가 졸업한 봉래초등학교는 남 2개 반 여 1개 반이 졸업했는데 나는 이에 미치지 못하는 처지여서, 감히 응시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중학교 농업학교는 가능할 것 같기도 했으나 돈이 없어 언감생심인 형편이었다. 실로 난감한 고민의 시간에 봉착한 것이다. )

(*전도를 포기할 이 시기에) 그런데 이때 큰 변수 하나가 생겼으니(*겨났다.) 초등학교에 2년제 ‘고등과’ 제도가 생긴 것이다. 당시의 중학교 진학난을 해소하기 위하여 조선총독부에서 도시 초등학교에 2년제 고등과를 신설한 것이다.

 교과목은 잘 생각나지 않으나 당시의 중학교 1~2학년 과정을 소학교에 설치하여 식민지 진학전쟁을 해소하려는 정책이었을 것이다.

(*한숨을 몰아쉬며) 나는 거기에 지망하고 선발되었다. 대리만족처를 얻은 것이다. 그것이 1944년의 학기 초 4월이었다.

 그렇게나마 숨을 겨우 돌(*렸다.)리고  대리만족이 이뤄진 (*것이다.)

그 다음해 여름에 행운이 또 닥쳐왔다.

(*일본이) 제2차 대전(일제는 ‘대동아전쟁’이라 불렀다)이 끝(*났다.) 나고 중일전쟁도 막을 내(*렸다.)린 것이다. 제국주의 일본이 미,영,중의 연합국에 백기를 들고 항복한 것이었다.

 우리 조선인은 8.15해방을 맞았다. 덩달아 나도 개의  큰 횡재수를 만났(*다.)으니,

하나는 이름석자를 되찾(*은 것이다. 한) 아 그동안 3년가량 사용해오던 ‘마쓰하다 오오시게(松圃大靑)’이란 (*나의) 일본식 창씨개명을 버리고 본래의 내 이름 ‘정태수’를 회복한 것이다.

 8.15 이후 즉시 모든 국민은 아무런 지시명령이 없었지만 (*8.15 이후 즉시 모든 국민이)  이름을 되찾았다. 식민지 조?살이로부터 풀려나 떳떳한 하나의 국민으로 돌아온 것이다.이듬해(1946) 10월27일  미군정청이 「조선인 성명복구령」으로 법령조치 하였지만

(*한 것은 이듬해(1946) 10월27일의 「조선인 성명복구령」이었지만,)

그 날까지 기다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두번째는 (*둘은), 진주사범학교에 재학 중이던 일본인 학생들이 모두 본국으로 돌아가(고) 그 자릿수만큼(의) 학생수가 빈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한인과 일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우심한 입학제도가 운영되 (*었느데, 그 )사범학교(고)에서도 일본학(하)생은 지망자 전원을 거의 100% 합격시키고, 식민지 조선 학생은 반 1등 아니면 들어갈 수 없었다(는 중학이었다.) 그 일본인 학생 전원이 그해 9월 말에 (총)철수한 것이다.

 때가 2학기에 접어든 시기였는데(다. 그) 결원을 채우기 위해 학생추가모집이 있었지만(다. )그 시기가 1학기를 마친 시기여서 거기 응모할 사람은 초등학교 부설 고등과 2학년밖에 없었다. 학교 측 소식을 접한 나는 즉각 응모하여(였고) 입학허가를 받았다. 운수대통 천우신조의 호기를 받은 것이다. (*하늘이 내릴 운수대통이었다.)

 

8.15해방은 국운과 민족운만 돌아오게 한 것이 아니라 내 운도 (개인사를) 바꿔놓은 것이다. 나는 (고등과에 다니는 둥 마는 둥 하고) 열망하던 (유일한) 중학과정으로 진주사범학교 2학년에 진학하여(한 셈이어서) 용기 충천하였(었)다.

 80중반을 넘은 지금에 와서 어린 날을 되돌아보니, 일본 마쓰시타 고노스께가 말한대로 모든 것은 '운칠기삼(運七氣三)'이다. 사람은 운명이 7을 차지하고, 노력은 3을 차지한다. 

 (* 그 고등과 1년반의 과정이 새삼 크게 클로즈업된다.)

 

 만약 내가 진주로 진출하지 못했더라면, 또 봉래국민학교를 졸업하지 못했더라면, 그리고 고등과 2년에 재학 중이 아니었더라면 그 뒤는 어찌 되었을까? 더구나 조국해방이 없었더라면 그리하여 사범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더라면 내가 소망하던 학교 교사의 꿈을 이루지 못했을 것 아닌가. 어떻든 이렇게 하여 우여곡절 끝에 염원이 이뤄진 셈이다.

 

세번째는(셋은), 교사 자격증을 얻어 교사가 되어 교단 위에 설 길이 뚫린 것이다.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여덟 살 때부터 꿈꾸어 오던 유일한 직업인이 될 수 있는 길이 훤히 열린 것이다.

 나는 원래 자질이 부족했었지만 지운(地運)을 타고 길지를 옮겨 다녔으며, 인덕을 타고나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으며, 용케도 시운(時運)을 잘 만나, 나의 초년 운세가 잘 요리되고 조화를 이루어 「교사의 꿈길」로 접어들게 되었다(된다.)

 

그 넷은, 늦게야 알게 된 일이지만 병역면제 혜택을 받게 된 것이다.(될 줄이야...) 졸업 후 교사가 된 뒤에 알았지만 초등교원( 만)은 예비역에 편입시켜 모두 병역의무를 면제해 주는 제도가 시행되었다. 교수도 중등교원도 받지 못하는 초등교원만을 위한 특혜였다. 만약 입대하여 교직을 중단했(한)다면, 만약 부상이나 전사라도 (한)다면 (그 뒤의) 지금의 나는(도, 그 위상도) 없었을 것이다.(을 것 아니겠는가?)

 조국해방은 이상 네 가지 큰 선물을 내게 안겨주어 니의 그 뒤의 행운을 확보해 준 셈(인 것)이다.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는 이듬해 1946년11월23일 조선교육심의회를 설치하고 홍익인간이란 교육목적과 미국식 6334학제를 채택을 선포하였다. 이에 따라 진주사범학교도 5년제에서 중학과정 3년과 고등학교과정 3년의 6년제학교로 재출발하게 된다.

 

8. 약관(弱冠)첫 출발, 교단인

 

1950년 5워 5일, 진주사범 6년을 졸업하고, 제2대 백낙준 문교부장관 명의의 초등학교 2급(전?) 교사 자격증을 받고, 징병검사에 갑종판정을 받고도 병역법 제63조 의무교육요원이라는 사유로(였다)제2예비역편입으로 병역이 면제된 채, 6월15일에 진양군 오미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약관(20세)의 나이로(였다. 그 면제사유는 병역법 제63조.의무교육요원이라 사유였다.) 5학년을 담임하였다. 남 24명 여 3명으로 구성된 한 학년에 단 한 학반 뿐이었다. 나중에 6학년으로 연임하여 졸업시키게 된다.

 

그후 부임한 지 10일 후에 북한군 20만의 남침으로 6.25 한국전(50~53)이 발발하였다. 나흘만에 서울을 점령당하고 부산피난정부가 운영된다. 얼마 후 우리 학교도 진주시와 함께 인민군의 점령지로 변하여 무기휴교에 들어가게 되고 만다. 미국 트루만대통령의 6.25 당일 즉각결심으로 미군과 UN군이 참전하게 되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승세를 잡아 3년 뒤에 겨우 휴전에 접어들게 된다. 그 사이 서울 탈환전이 두 번이나 일어난다. 첫 번은 북한군 점령 3개월(1950.6.28~9.28)만에 탈환하고, 두 번째는 중공군 참전으로 2개월간(1951.1.4.~3.14)만에 탈환하였다.

 나는 전란 중에는 줄곳 휴교상태 (였다. 나는) 고향의 본가에 돌아와 피신하고 지냈다.

휴전으로 재 개교되자 열심히 가르(고 배워) 그 학교 역사상 (그 당시로서는) 드물게 보는 양호한 (설)과와 진학률을 이루었다.(이었다고 학생들 스스로가 자평하던 말이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때로서는 잘 안하던 중학(하)교 진학용 과외수업을 사택에서 방과후 무료로 열성을 다한 기억도 남아있(기도 하)다.

 이런 것을 첫사랑이라고 할까? 나(로서)는 (첫) 사제지간의 첫 정을 쏟았고, 그랬기(었기) 때문에 그 제자들에게도 각인되었을 것이다.

(어) 어느 사제 간 보다 돈독한 인간애를 서로 느끼고 있어, (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

서로 헤어지고 분주한 젊은 시절에도 서울까지 찾아와 인사하고 가는 사람도 있었고 지금도 어디서 무얼하(학)며 살고 있다고 전하며 안부를 묻고 이메일을 보내는(물어오는) 제자도 있(었)다.

 모두 80 전후의 고령인데도 산에 사는 제자는 약초를 바다에 사는 제자는 생선을 보내오고, 얼마 전에는 '선생님 저희들 초등학교 시절처럼 동네에 프랭카드를 걸어놓고 선생님을 모셔놓고, 학예회를 한번 열면 어떻겠느냐'고 조르는 제자도 있어, 나는  

(*  농산물이나 특산물을 보내는 제자(사람)도 있어)

그 인정을 체감하면서 노년의 즐거움으로 여기고 감사하게 생각하며 살아간다.

 

 나는 그 곳 재직시에 결혼(1952.4.15)하여 학교 사택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그 후 근무학교 세 곳을 옮겨가면서 첫딸 첫아들 둘째딸을 얻었고 서울에 이사온 뒤에 둘째아들까지 낳아 모두 2남2녀를 두기에 이른다.

오미(五美) 초등학교.

(⇒다섯가지 아름다움 아니던가.)

사랑하는 처와 4남매, 합치면 5미 아닌가. 그 초임지 오미는 나에게 5미를 안겨준 감사의 땅이요(으로 자리 잡은 길시의) 길지라 생각한다.

 나의 사랑하는 첫 제자들의 이름을 나열해 본다.

五美초등학교 제4회 졸업생 (모두 80세 전후) (작성; 이남진) 2016. 7. 3

 

1

김복용

010-3841-3780

진주중,진주고.농업(아들 4선국회의원 김재경 ), 외율거주

2

김용균

011-554-8418

졸업후 토목공사업,상업등(아들 사법고시합격 변호사) 진주거주

3

김정규

011-9344-4526

단성중,진주농고.경찰관으로 진주에서 정년퇴임, 명석 팔미거주

4

문병용

010-3576-2029

진주남중,진주고,광주교대,방송통신대,교장정년퇴임. 통영욕지거주

5

배금용

졸업후 부산에서 버스기사 정년,부산거주 연락안됨

6

심영보

010-7358-8625

진주중,진주고.경상대임학과졸,교원으로정년퇴임(아들대학교수) 진주

7

염경오

010-2883-7977

졸업후 부산에서 버스,택시업 운행 연락안됨 부산거주

8

정달수

010-7196-3986

초졸업후 대평으로 이주후 지금까지 농업에종사

9

조영도

서울 영등포 신길6동 14923 살고 있다고는 들었으나 연락안됨

10

이남진

010-3851-1679

진주남중,진주고,방송통신대, 교장으로정년, 진주거주

11

최남순

010-8951-1408

단성중,서울남강토건회사 퇴직후 농업 고향 외율에거주

12

최영진

010-8701-4047

졸업(어)후 사천 이주후 농업. 현재사천(정동면 고읍)거주

13

최용부

011-567-3935

졸업후 부산에서 회사, 퇴직후 고향에서 농업 외율거주

14

성환필

졸업후 부산,진주등지에서 사업,현재는 충남에서 거주 연락두절

15

김인식

졸업후 부산에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연락안됨

16

김갑용

졸업후 경주에 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연락두절

17

천영화

055-744-3954

졸업후 한학수학후 농업 고향오미?거주

18

황상선

0104004-9948

진주병중,진주고. 해양대. 사업 귀농후 산청거주

19

백오분

010-4331-5510

졸업후 서울거주

20

이영애

졸업후 부산으로 출가 연락두절

21

홍정례

010-9006-0171

졸업후 산청으로 출가, 진주로 이사후 상업, 진주거주

사망자; 신창식. 김태희. 이상복. 노두홍. 한경재. 최명근

 

9. 성장통 앓은 부산, 그 첫 3년

 

일본의 세계적(은) 기업 「내쇼널」의 창업자 마쓰시다는 초등학교 4학년 중퇴가 그의 총 학력이다. 그는 자기가 3가지 하늘의 은혜를 입고 태어났다고 했다.

 1.가난 2.허약 3.못 배움 셋이었다.

성공의 정곡을 찌른 의지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혜안이라 하겠다. 공감이 가기도 한다.

 

나는 (의) 초임 교사 3년차에 오미초등에서, 같은 진양군의 중심학교인 문산초등학교로 영전하게 되었다. 그 끝 무렵의 가을에 군내 교원들을 모은 가운데 연구수업 행사가 열렸다. 거기서도 첫 부임지와 똑 같이 5학년을 맡아 그 반을 이어 6학년 졸업을 시키게 된다.

 

 이 당시 나는 연구수업(이 끝나고) 평가회 때 평생의 은인을 만나게 된다. (가 열렸다.) 그때 진양군 교육감이시던 김성봉 선생님이다. 선생님은(교육감께서) 종합 평가를 하시면서 6학년 1반 담임인 나를 특별 칭찬하셨으니, (다.) 참관자 중의 누군가가 “그 교실에 가보시지요(라). 수업 전개 등 아주 잘하고 있는 모범수업입니다(이더라)”고 해서 와봤다 하시어(* 나도 가봤다시면서…) 나는 후끈 달아오르게 하셨다(올랐다).

 김 교육감님은 나의 사범학교 시절(의) 국사과 은사셨다. (그러나) 특별한 개인적인 관계는 없었지만 나 혼자만은 그 선생님의 국사시간을 기다리며 수업에 감명 받고 존경하고 있던 분이었다.

 당시는 상급지자체인 경상남도는 도지사 밑에 학무국으로 종속되어 있는 체제였지만, 시·군은 교육자치시대로서 진주시와 진양군은 내무행정기관으로부터 독립하여 교육청이 존재하고 그 장을 교육감(교육장이 아님)이라 호칭하던 시기였다.

 

그 칭찬이 나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불러 일으켜(켰다.) 얼마 후 나는 같은 문산읍내에 있는 진양군 교육청(엘 찾아가서) 김 교육감님의 면회를 요청하여 만났다. 선생님은 나를 알아보시고 반갑게 대해주셨다. 들뜬 나는 솔직히 말씀드렸다. “선생님, 저를 부산으로 전출시켜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왜? 무슨 일이 있나?” “그냥 모두가 원하는 것이기에 저도 대도시에 진출해보고 싶습니다” “그러냐? 진양 하면 문산이고 문산 하면 정태수 아니냐? 내가 너를 추천해 줄 테니 가서 기다려라” 나는 큰 절 하고 물러나왔다.

 후술하겠지만 그것이 내가 존경하고 일생의 은인으로 생각하는 김성봉 선생님과의 첫 단독 만남이자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이야.

 

 나는 곧바로 (그리하여) 이듬해 3월에 부산으로 전출되고 대연초등학교 교사로 전출되었다. 세 번째 학교였다.

 그곳은 부산 중심부에서 동쪽 해운대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용호(龍湖)항만에 임한 학교였다. 학교 앞 셋방을 구하여 우리 부부는 첫 딸과 함께 셋이 (*이사하게 되었다) 바다와 수평선을 처음 보았고 갯바람도 처음 만났다.

 부산은 내 고향 진주 보다 큰 도시여서 높은 건물이 특히 나를 압도하였다. 지리산에서 수원을 이루어 동류하는 강, 남강을 따라 출생과 유년을 보내도 기초교육을 받고 동경하던 첫 직장인 교실과 두 곳의 학교를 거쳐 결국 남강(의) 흐름을 따라 동으로 동으로 흘러 낙동강을 만나고 그 끝인 현해탄과 태평양(의) 입구 부산에 도착한 셈이었다.

 나는 거기서 새 세상을 만났다. (느끼고 있었다.) 25세 되던 1955년에 만난 부산은 분주해보였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일어난 6.25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남단으로 몽진한 이승만 정부가 만3년 동안(1950.8~1953.8) 임시수도 노릇을 하느라고 복잡다단한 시기를 이제 막 끝내고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그 당시의 피난민 집결지 부산, 갑자기 붐빈 애환의 국제시장, UN군과 외국군이 드나든 항구도시, 부민동의 피난정부청사, 전국에서 모여든 피난 대학들, 이 모두가 서울로 복귀했거나 아직 남아있던 시기였다. 전란으로 서울이 폐허가 되고 한강 다리도 끊겨 미복구 상태라 미처 옮겨 돌아갈 형편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50만 미만의 항구도시가 인구 100만을 넘는 수도 노릇의 몸살을 격하게 치르고 막 털고 일어난 어려운 때에 그 한 시민으로 참여하게(기) 된 나도 얼떨떨하였다.

 

 부산에 와서 당시(의) 나는 자괴감의 수렁에 빠진 적 있다. (기억이 남아있다.)

 어린 시절의 고향 진양에서는 접해보지 못한 교사 천시 풍조였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견문의 탓이겠지만 나는 「선생님」을 최고의 직업으로 동경하고 사범학교를 택했고 천하제일의 직업이랍시고 교사가 되어 의기양양하게 청년기에 진입했었는데, 이곳 부산에 와보니 높은 건물과 높은 사람도 많아서인지 교사의 존재감은 실로 낮은 것이었다. 알아주는 척 하는 사람은 학생과 학부모에 한정되(괴)고 특히 초등교원 끼리도 ‘우리는 비교열세 직업인이야’ 하는 풍조가 내 눈에 비치기 시작했다. (던 시기를 맞고 말았다. )

 

 뜻 맞는 교사끼리 막걸리라도 걸치는 밤이면 한탄조의 언사를 주고받곤 했었다.

그러던 중, 동료 안 모 교사가 고등학교 교원검정시험에 합격하여 고교교사 자격증을 받았다. 그 일의 자극은 컸다. 자주 회식해오던 동학년 담임인 김경호 선생과 나는 그 사건을 화제(두)로 삼고 부러워했다. 김 선생은 나보다 (에게는) 연상으로 일제 강점기에 평양사범학교를 나와 줄곧 교편을 잡아 월남하여 부산에 정착하여(한데다 나보다) 먼저 이 학교에 와 있던 선배다.(로) 처지가 비슷하여 배울 점이 많았다. 방과 후 두 사람은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눴는데(다.) 그 속에는 초등교사의 한탄과 불안, 안 선생의 돌파에 대한 부러움, 돌파구는 없을까하는 (흔한) 걱정이었다.(까지 주고받는 사이였다.) 친구라기보다는 간격이 좁아진 선후배 사이로 격려를 받는 처지였고, (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혼자가 되면 한탄하고 울부짖었던 기억도 (남아)있다. 부산엘 옮겨오지 않고 고향에 머물렀으면 안 해도 될 고민(이) 아니었나 싶다.

 

김 선생과 나는 (파고드는 방향의 일치를 보았다.) 둘 다 역사과에 대한 관심이 같았다. 결국 고교역사과 교원검정고시를 목표로 함께 독학하기로 합의하였다. 거기엔 사범학교 출신의 자긍심과 자신감도 작용한 것이었다.

 사실 일정시대나 해방직후의 사범학교는 수재들이 모이는 곳으로 알려져 있어 그 속에 선발되면 모두가 지적 우월감을 조금씩은 갖는 것이 그 당시의 현실이어서, 우리 두 사람에게도 그것이 동력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둘이서 책방엘 가서 전공서적(국사 동양사 서양사)을 구입하고 방과 후에 교실에서 함께 읽고 서로 공동출제를 내고 집에서 답안을 작성하여 다시 만나 그걸 토론하고 잘잘못을 지적하고 답안 재작성을 시도하는 등, 두 사람의 공동 수험준비를 해를 넘겨 열의를 다하여 합동독학을 지속(행)해나갔다.

진양군(에서의) 전임 두 학교에(세)서는 5. 6학년만 담임해 오던 나는 부산에서는 학교장에 간청하여 2학년 담임만을 맡았다. 공부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학교에 미안하기도 하였다. 오전 수업만 마치면 오후는 빈 교실에서, 퇴근 후에는 집에서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 덕이었던가 우리는 (한) 2년 후에 문교부 시행의 고교 역사과 교원 검정시험에 단번에 합격하여 준교사 자격증을 쥐게 되었다. 1단계 성공에 이른 것이어서 기쁘기 한량없었다. 그때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겠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가져(쳐)본 기억이 남아있다. 둘 만의 자축 술잔을 주고받았다.

 

 나는 다른 한편으로 친구 김주권의 조언으로 단국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여 야간 수업에 출석하고 있었다. (친구 김주권의 조언과 협조를 받아 이뤄진 성과였다.)

 해방 이전에는 생각해보지 않았던 부분으로 부산에 온 이후 절실하게 느낀 바 있는 기본적 학력부족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당시의 단국대학은 부산 피난대학으로 있다가 서울로 복귀한 후에도 부산에 2부 대학을 계속 운영하고 있었다. 부산 재학생을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이리하여 직장과 야간대학과 검정고시 독학이라는 3중고 속에(를 극복하느라) 쉴 틈 없는 부산생활에 휘말려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는 시기를 보냈다.(냐고비를 겪고 있었다.) 해운대와 광복동과 서울로 바쁘게 달리면서 살았다. 그 덕으로 나는 요긴한 법학사 학위도 받아 부족한 기본학력을 갖추게 되었고, 고등학(하)교로 진출할 기본자격을 얻었다. 부산 진출 3년에 이룬 뜻밖의 수확이었다.

 

10. 서른 살의 빅뱅, 고등고시

 

(*우리는 자신감을 얻었다.) 꿈으로 생각하던 아득한 고등학교 교원 국가 검정고시를 단번에 통과하자 나는 (한 것이) 새로운 자신감을 얻었다. (으로 정착된 것이다.) 김경호 선생과 (나는) 자주 만나 담소하는 가운데 그 분의 새 제안을 들었다.(이 불쑥 나온다.)

 합격한 역사과는 국사 동양사 서양사에 걸쳐 그 범위가 세계사에 걸치지만, 그 중 국사과는 고등고시 행정과에도 걸쳐있는 과목이어서 그것을 살리고, 사범학교에서 (*그) 기초를 다진 교육학을 보완하면, 소정의 법학과목(과)만 더 공부하면 고등고시 행정과 제4부(교육행정부)에 응시할 수 있겠다는 것이었다. 사범 출신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였고 나는 그 새 도전에 크게 맞장구를 치고 말았다.

국사와 교육학 이외에 추가되는 과목은 헌법 행정법 둘이었고 면접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관련된 책을 구입하고 출제경향과 모범답안 등의 공부를 시작하였다. 토론하고 답안을 작성하고 하는 자습 독학 방법은 이미 터득한 터였다. ( 법칙에 따라 몰입하면 되었다.)

그러나 동반자 김 선생은 고등고시 예비시험에 응시, 단번에 합격하여 대졸과 같은 고등고시 응시자격을 땄다. 실로 감탄스러웠다.

그리하여 둘이 함께 제4부에 응시하였는데(다. 그 결과로) 김 선생은 합격하였고 나는 낙방이었다. 나는 한때 낙담하였다. 뒤에 총무처에 편지를 보내(서한을 내어 더) 알아보니 국사과목은 후한 점수를 받았고 법학과목(복)이 아슬아슬한 약간의 점수 차로(이fh) 불합격 된 것이다.(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진주사범에서 역사를 가르킨 김성봉선생님의 덕이 여기까지 미쳤구나 싶었다.(하고 생각기도 하였다.) 다시 이를 악물고 공부를 계속하던 중 (게 되었다.)  전근시기가 다가와 우리 두 사람은 헤어졌다.

 나는 중앙국민학교로 옮겨 초량동으로 이(아)사를 갔고,(가게 된다. 진) 교장선생님을 찾아가 역시 시간을 얻기 위해서 1·2학년 담임을 연거푸 맡았다. (*역시 시간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2년 걸려 고등고시에 합격하여(고 만다.) 면접을 거쳐 1960년 말에 합격통보를 받고 이듬해 초에 중앙청에 (모두) 모여 합격증을 받았다(는다). 반가운 고시 동기 초면(에도) 동기생들도 만났다. (은이라는 친근감이 흘렀다.) 단국대 서울 졸업식에서는(도 불려가 많은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도 장형(? )이사장의 표창장도 받았다.

 

그 해 제12회 고등고시 합격자는 사범과 31명 행정과 20명으로 모두 51명이었다.

 행정과는 1부 행정과 2부 재정과 3부 외교과 4부 교육과 등으로 나누어지는데 4부 교육 행정과에는 나 혼자 합격(*이었다.), 청(靑) 일(*1)점이었다.

  고등고시 동기생들은 (우리들은) 그해 1월 31일에 중앙청에 모여 합격증을 받고 헤어졌으나 그 후 해마다 부부동반 친목모임을 가지고 있다.(졌다.)

 뒷 이야기지만, 그 중 한 분은 나와 사돈이 되었다(된다.) 그 분의 둘째 딸과 내 둘째 아들의 혼인이 이루어져 (나의) 사랑스런 며느리 (가) 지금(었다.) 손자 손녀 남매를 두고 있다.

 

 시인 고은의 「그 꽃」이란 시가 떠오른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그 땐 미처 몰랐다. 여든 고개를 (휙) 넘고 돌아보니 나의 부산시절 6년은 세 개의 꽃봉오리를 맺고 활짝 피운 나의 개화기였다.

첫째로 그때 합격한(오른) 역사과 검정고시는 고교 준교사 자격증 뿐만 아니라 그해 바로 고등고시에 응시하는 한 과목으로 활용되고도 그 뒤에 고등학교 교장자격증을 받는 자료가 되었다. 둘째로 그곳에서 얻은 고등고시 4부 합격으로 문교부(교육부)의 사무관 국. 과장과 원장 차관까지 23년의 봉사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셋째로 그때 받은 학사학위를 기반으로 서울에서 석사를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다 갖추)게 되고, 그 학위가 있어 반백이 넘은 후에 두 대학의 총장직을 (원만히) 수행하게 되기도 하였다.

 실로 나의 부산시대는 (나의) 일생의 방향과 성취를 정해 준 시절이었으니 어찌 꽃이라 아니하리오.

 

흔히 30세를 (흔히 한) 인생(의) 입지(立志)의 계절이라 한다. 이 말은 나에게 정확하게 해당하는 것 같다. 만학으로나마 고등고시 합격한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이듬해 1961년 3월 8일자로 중앙청으로 출근하여 수습행정관이란 이름으로 문교부에 배치되었다.

 그것이 문교부 23년의 시발점이었다. (*기념으로)

 영광스러운 고등고시 제12회 합격자 명단과 그 후의 활동상을 여기 남긴다.

 

행정과 사법과

--국무원사무처 공고18호(1961.1.31) --국무원사무처 공고22호(1961.2.28)

부별 응시번호 이름 최종 직 응시번호 이름 최종 직

(1부) 78 廉普鉉 서울시장,내무장관 121 朴燦鍾 검사,국회의원,변호사

(행정) 174 金榮載 153 金淇春 법무장관,대통령비서실장

264 柳根完 (양과)판사,변호사 168 裵譿鏞 검사,변호사

317 柳滿坤 (양과)변호사,미국유학 225 高泳耈 변호사,국가정보원장

972 姜鉉台 (양과)판사,변호사 255 白亨球 검사,변호사

1000 呂春東 (양과)판사,변호사 353 金在澈 판사,변호사

1549 崔英哲 589 鄭淳學 변호사

(2부)2014 姜慶植 경제기회원장관 609 金仁中 변호사

(재정)2016 金茂龍 화폐공사사장 875 明完植 검사,변호사

2037 朴秀煥 공무원 1408 尹相穆 판사,변호사

2039 徐泳兌 1517 李敏洙 판사,변호사

2043 張德鎭 재무부장관 1684 鄭庚澈 변호사

2050 沈明哲 1702 李英俊 대학교수,변호사

2331 劉俊學 2054 金柱容 변호사

2186 李揆成 재무부장관 2266 黃永善 판사,변호사

2193 李景載 2590 河炅喆 판사,헌법재판관,변호사

2204 河東善 경제기획원차관보, 2623 李亮雨 국회의원,법제처장,변호사

아웅산테러에 순국 2773 沈宜燮 변호사

2245 吳載善 세무대학 교수 2787 朴奉圭 판사,변호사

2254 全哲煥 교수, 한은 총재 2789 金正琪 검사,변호사

(3부) 합격자없음 3022宋泰鎭 변호사 . (외교) 3368 金公植 판사,변호사

(4부)4031 鄭泰秀 문교차관.대학총장 3481 李鍵浩 변호사

(교육) 3500 林恩龍 판사,변호사

3891 林順哲 변호사

4163 黃一根 판사,변호사

4166 孫泰奉 변호사

4176 李鍾南 검사,검찰총장,법무장관

4206 李淳雨 변호사

4486 河一夫 검사.변호사

(계 20명) 4671 玄淳哲 판사,변호사 (계 31명

 

11. 한 번의 인생인데 계단도 많더라

 

 

 80세 산수( 傘壽 )를 지나 88세 미수( 米壽 )를 (인생 90을) 바라보면서 지나온 나의 인생 항로를 되돌아보니,(본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나에게 “먹고살기에 급급한 나를 닮지 말라” “입신양명(立身揚名)하라”고 이르신 말씀이 떠오른다.

 지나고 보니 내 일생은 그 가르침에 철저하지 못하고 어중간하게 대응된 것 같아 송구스럽기도 하다. 인생살이에 이렇게 많은 계단이 있는 줄을 미처 모르고 그저 열심히 살다보니 여러 층계들을 오르내리게 된 것 뿐이(었)다. 빛나고 풍요로운 계단이 더 있는데도 미흡한 발자취만 남긴 것 같기도 하다.

크게 보면 배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공부하는 밤낮없이 달리는 한평생이었다고 생각된다. 감히 나의 교학일생(敎學一生)을 직학병진일생(職學竝進一生)이었다고 요약할 수도 있다 하겠다. 계단으로 치면 인생계단과 공부계단을 밤낮으로 이중으로 걸어온 것이었다. 섞어 뛰어온 경과를 인생계단과 공부계단 두 갈래로 나누어 보면 어떨까. 반면, 오르는 계단 이면에는 험한 낭떠러지 추락계단도 있었다. 이 글은 까불이의 너스레가 아니다. 내가 살아온 사실이며 나의 산 역사다.

 

첫째, 공부계단 10계단이다. 그 10계단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 가 본다.

 

10계단 1986 학회장(교육법학회)

9계단 1986 박사(교육학)

8계단 1982 명예박사(법학)

7계단 1967 석사(경영학)

6계단 1962 고교교장 자격증

5계단 1961 고등고시 합격(행정과 4부, 교육행정)

4계단 1960 학사(법학과)

3계단 1958 고등학교 교사 자격 검정고시 합격(역사과)

2계단 1950 사범학교 6년 졸업. 초등교사 자격증

1계단 1944 소학교 졸업

 

둘째, 일 계단, 18계단이다

 

<은퇴 후 6계단>

 

18계단 2015 자문위원(한국문인협회)

17계단 2014 명예고문(한국시조시인협회)

16계단 2014 문인회 회장(문학신문 문인회)

15계단 2008 명예교수(대진대학교)

14계단 2005 시조시인(등단)

13계단 1999 회장(소종중, 대종친회)

 

<현역 12계단>

 

12계단 1992 대학 총장(대진대학교)

11계단 1985 학장(서울교육대학)

10계단 1983 이사장(교직원공제회, 국정교과서(주)

9계단 1983 교수(단국대학교)

8계단 1981 문교부 차관

7계단 1980 관리관(중앙교육연구(수)원장)

〈겸직〉 (국보위 문공위원위원장, 입법회의 의원)

6계단 1974 이사관(사회교육국장, 산업교육국장, 대학국장, 편수국장)

5계단 1973 부이사관(대학학사담당관)

4계단 1965 행정서기관(문화재관리국서무과장,서울시교위서무과장,

문교부 총무과장, 편수과장, 경북대병원 서무과장,

문교부 과학교육담당관, 교육외자과장, 대학과장)

3계단 1962 행정사무관(문교부 인사계장, 교육지도과, 교육행정과)

2계단 1961 수습행정관(문교부 의무교육과, 총무과, 기획과, 행정과)

1계단 1950 교사(진주,부산)

 

셋째, 귀양살이 참혹한 일도 있었다.( 한 번 가고...)

 

 1568. 5. 21, 제18대 권오병 문교부장관이 부임했다. 나는 그해 3월부터 문교부 총무과장으로 일하고 있을 때였다. 또 6월에는 아버지 경은공(耕隱公)이 별세하신 액운까지 겹쳐 슬픈 해였다. 그 장례 보름 뒤(6월)에 갑자기 편수과장으로 좌천 발령을 받았다. 신임 장관이 오면 자기에게 맞는 새 총무과장을 선택하는 과정에서 흔히 있는 일이라 나는 섭섭하지만 별 불만 없는 당연지사로 인식하고 감내하였다.

그런데 쪽박 쓰고 비 피하는 신세였다. 좌천 4개월이 지나 11월이 되자 갑자기 경북대학교 부속병원 서무과장으로 전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청천벽력이었다. 이번에도(는) 권 장관으로 인해 두 번째 좌천을 영문도 모른 채 당한 것이다. 귀양살이, 아니 형벌을 받은 셈이(었습니)다. 아무 잘못도 없었고 이유 설명도 없었다.   

 박희범 차관을 찾아 그 사유를 따졌으나 그저 위로만 하고 설명에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홧김에 사직하기로 결심하고 항변하기 위해 장관 댁을 찾았다. 집 관리인이 나와 내 이름을 묻고 들어갔다 나오더니 장관이 안 만나겠다하신다며 대문을 쾅 닫아걸어버린다.(고 말았다.) 나는 화가 치밀어 고함치면서 대문을 여러 번 걷어차고는 별 수 없이 되돌아오고 말았다.

 나는 어금니를 악물고 생각을 바꿨다. 살아남아 다시 권토중래하겠다고 다짐하고 대구로 내려가 새 임지에 부임하였다. 귀양살이 하숙생활 만 1년을 살았는데 그 반 년 쯤 뒤에 권장관이 재임 1년 만에 경질되고 말았다.

 분하지만 이유를 들을 수 없었는데 퇴임 후 늦게야 나의 좌천사유가 어슴푸레 들려왔다.

 기가 찰 사건이었다. 전임 문홍주 장관 비서실에 근무하던 박 모 과장이 청와대 대통령에게 투서를 냈다는데, 그 내용이 권 장관의 장관실 추문이었단다. 그걸 보고받은 박정희 대통령께서 대노하여 권 장관을 불러 주의와 경고를 날렸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범인이 권 장관 부임 당시 총무과장으로 장관실을 자주 드나들던 정태수였을 거라고 짐작하고, 또 편수과장으로의 좌천에 분노하여 투서를 한 것으로 추정하고 나를 지방으로 축출시켰다는 거였다.

 추문이어서 좌천 사유도 설명할 수 없이 암묵적으로 처단하고 만 셈이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그 (추문에 대한) 앙갚음의 엉뚱한 희생양에 되어 멀리 귀양살이를 당한 셈이었다. 그럭저럭 나의 대구 유배생활 1년을 경험하게 되었지만 나로서는 억울함의 극치였다.

 그 이듬해(1969) 4월에 권 장관이 해임되고 제19대 홍종철 장관이 부임하였다. 억울한 나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고시 선배 장인숙 국장이 홍 장관에게 나의 구제를 승낙 받고, 1970년 1월에 문교부의 과학교육기획담당관이란 (빈) 새 자리로 복귀하였다.

 1년의 귀양살이, (처음) 지방 좌천근무를 무사히 감내하고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되는 집은 암소가 세마리라 한다. 돌아온 나에게는 줄줄이 행운이 따라왔다. 중도하차하지 않고 역경을 참고 인내하기를 잘한 셈이었다.

 서울복귀 5년 뒤에 나는 이사관으로 승진하여 사회교육국장이 되고, 권 장관은 58세에 불귀의 객이 되고 만다. 고운 일 하면 고운 밥 먹는다는데, 남의 눈에 눈물 나게 한 사람, 자기 눈에서는 피눈물 난다는 속담(이) 생각난다. 나는 그 억울함을 따지고 물어볼 기회를 잃고 말았다.

 

 이제 미수( 米壽 )를 바라보며(끝으로) 인생 역정을 (크게) 뒤돌아보니 가장 오랫동안 머물렀던 곳은 중앙청이(었)다. 나는 문교부(에) 수습행정관으로 들어가 차관까지 23년간(1961~83)을 일했다. (으니 말이다.)

 윤보선대통령과 장면 총리의 민주당시절에 문교부에 입문하자말자 두 달 만에 5.16혁명이 일어 났다.(나고) 새 시대가 열리면서,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는 박정희대통령 시대 20년과 대통령 시해사건에 따른 정변이 있었다. 후의 전두환대통령 초기 4년간의 우리 역사 전환기를 겪으면서 (하게 된다. 그) 격동기를 열심히 지나고나서 퇴임하니 온 몸의 기력이 소진된 느낌이었다.

 

 그러나 이 숨가쁜 시기에 내가 중앙정부에서 23년 간, 7계단의 요직을 거치면서 국가부흥에 종사한 나의 공직일생은 매우 긍지롭게 생각된다.

 한강의 기적이라 일컬어진 이 산업화기간을 지나고, 이른바 민주화 정보화를 거친 우리나라가 세계 최빈국에서 GDP 10위권, 무역 6위권, 대학진학율 최고위권에 진입하고, 원조 받던 나라에서 원조 주는 나라로 위상이 바뀐 첫 삽을 뜨고 기적을 이룬 이 시기에, 나도 정책부서에서 내 몫을 다한 셈이었으니 말이다.

 그 시기가 (날이) 없었으면 우리 민족은 가난과 후진, 미개와 무지 속에 아직도 눈물짓고 있을 것이다.(라 감히 장담한다.) 이 시기에 교육개혁과 학술진흥에 전심전력을 다한 나로서는 민족사의 융흥기에 기여한 무한한 자부심과(으로) 긍지를 느낀다(롭기까지 하다 하겠다.)

 

 그 다음(의 오랜) 장기간 근무한 곳은 (은) 첫 단계의 교단 10년, 마지막 단계의 대학총장 10년으로 도합 20년이다.

 20대초에 초등학교 교단에서 출발하여 70대에 대학총장으로 끝맺은 (교단에서 졸업하는) 기념탑을 세운 셈이다. 이 20년은 ‘선생님’을 꿈꾸던 소년기의 인생 지향점을 충족한 행복한 세월이었고 자랑으로 남아있다. 이상의 두 세월이 퇴임 후 시조시인으로 (의) 문단활동을 하는데 (생활에) 윤활유가 된 것도 (되어) 말년의 행복이라 생각한다.(으로 이어지고 있다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총체적으로는 내 일생은 몹시 숨찬 세월이었다. 다리도 아팠다. 관절염도 생겼다. 그러나 즐겁고 보람 찬 교육자로 일관된 발걸음이었다고 규정짓고 싶다.

 만인의 사표로 불리운 공자님은 제자가 3천인이고, 교육을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로 삼으셨지만, 나는 제자를 몇 명 길러내고, 무엇을 백년지대계로 삼았던가? 

 공자님은 30대에 이미 교육자로 명성이 높았는데나는 그렇지 못했고, 공자님은 자로(子路) ·염유(冉有) · 안회(顔回) · 자공(子貢) ·자하(子夏) ·증자(曾子) 같은  칠십이현(七十二賢)의 뛰어난 제자를 두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으며, 다만 공자님이 춘추시대란 난세를 살아오신 것처럼 나도 해방과 6. 25와 4.19와 5.16과 10, 26같은 격변기에 살아온 것만 동일하다.

 그러나 그 중에서 웃음으로 되돌아보면 문교부 시절 고향 후배들을 챙기고 잘 이끌어 속칭 '문교부 진주 마피아'의 대부로 불리웠던 점이며, 즐거움을 찾는다면 그 후배들이 문교부 요직과 대학총장 등을 거치면서 나보다 더 큰 이 나라의 교육자로서의 길을 걸어간 것이며, 아직도  

  나의 20대 초에 만난 (그) 제자들이, 80고개를 눈앞에 둔 지금도 (그 사랑들이) 천리길을 마다 않고 만나러오고(거나) 안부전화를 걸어오는 것이라 생각한다.

(올 때의 즐거움은 어디 비길 데가 없다 할 것이다.)

 

12. 오천석과 서명원, 첫 장·차관

 

 수습행정관이란 직명으로 문교부에 첫 출근한 날은 1961년 3월 8일이었다. 그날 안내를 받아 부내 인사를 돌며 오천석 장관(제8대, 1960. 8. 23~61. 5. 2, 약7개월간 재임)과 차관 서명원(제11대, 1960. 8. 30~61. 7. 9, 약9개월간 재임)에게도 인사드렸다.

 오장관은 임 미군정기간에 문교차장과 부장(1945∼1948)을 맡아 한국교육을 민주주의 초석 위에 재정립하는 일에 주도적인 구실을 하였고, 교육계 원로들로 구성된 교육위원회를 조직하여 홍익인간의 교육목적 설정, 6·3·3·4제의 기간학제 제정, 국립서울대학교 창설 등을 주도하였고, 민주주의와 아동존중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새교육운동을 추진하였었다. 이후 대한교육연합회장 한국교육학회장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장을 역임한 후에 1960년 제2공화국 민주당정권 때의 문교부장관을 역임했다.(하고 있었다. )

후일담이지만, 서명원차관(1960. 8. 30~61.7. 9, 약10개월 재임)은 그 뒤 26년 뒤에 장관(1987.07.14.~88.02.24)으로 임명됨으로서 문교부의 장·차관을 다 거친 분이다.

 내가 입문한 시기는 박절하게도 두 분은 공히 임기 말엽이어서, 오 장관은 두 달 뒤에, 서 차관과는 4개월 뒤에 나와 헤어지게 된다. 그렇지만 나의 차관 퇴임 후 단국대학교 교육대학원 교수 로 부임해 보니, 문교장관과 충남대학총장을 마치고 당국대에 출강하고 있어 주 1회씩 만나 돈독한 지도를 받아 감사하였다.

 또한 내가 차관을 퇴임하고 서울교대를 나온 후에, 서 장관과 이원우 비서실장의 주선으로 나를 국정교과서 이사장으로 일하게 조치해 주는 배려도 받았다. 그 뿐 아니다. 서 장관은 나의 저서 3권(광복3년,한국교육법제사. 한국교육기본법제성립사. 아동의 권리협약)을 자료로 삼아 나를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 추천(하여 추진)한 일이 있어 일생일대의 영광을 입을 뻔하였다. (그러나)

 여러 인사들과의 경쟁 끝에 서울대 신용하 교수에게 낙착되고 말았지만, (만 일이 있었다.) 인연의 끈은 이렇게도 질긴 것인가를 실감한 바 있었다.

오 장관과(도 재회한 바 있는데) 내가 일본 쓰쿠바대 박사 이후, 대한교육법학회를 창립하기 위해 동분서주할 당시에 자문을 구하기 위해 장관님의 사저를 방문하고 문답을 녹음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뵈온 바 있었다.

 그 분들은 미 군정기에 민주교육제도를 깔고 6334 학제를 갖추는 등 우리나라 교육제도를 창시한 비조였고 (아니던가.) 교육계에서의 존경의 상징적 인물들 이었다.( 아니던가.)

 새까만 이 후배가 두 분의 연분에 감사드린다. ^

 존경하는 마음으로 초기 우리나라 교육계의 큰 별이셨던 오천석 선생의 일생을 요약해본다.

 선생은 소학교에서 신학문을 익히고 소년기에 일본 침탈 비운을 체험하면서 조국애를 키우고 1919년 일본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등부를 졸업하고 도미하여 코넬대학(1925)·노스웨스턴대학(1927)·콜럼비아대학(1931)에서 교육학으로 학사·석사·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32년부터 4년간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강의·강연·논문 등으로 한국민족교육발전을 위하여 힘썼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중국 상해로 피신하였다.

광복과 함께 귀국하여 교육활동을 재개, 앞에서 본 미군정청 문교부 차장·부장(1945∼1948) 교육민주화를 추진하다.

 이때 일본식 동화(同化)교육체제를 물리치고 민주화 민족화 자유화 평등화 권리화라는 우리 교육의 마그나 카르타를 선언하고 제도화하셨(였)다.

 (오천석) 선생이 큰 뜻을 펴는 과정은 8. 15 해방 후 주한미군의 상륙 전후에 선명하게 3단계의 과정을 거쳐 일어난다.

 미국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당시 보성전문학교 교수직에 있던 선생은, 해방 이틀 뒤인 8월 17일에 서울 북아현동의 자택에 하경덕 이묘묵 등 미국유학 친구들을 초청하여 해방의 기쁨을 나누며 민족의 내일에 힘 모아 대비하자는 행동 원칙과 영어를 통한 사회봉사, 그리고 영자(英字)신문 발행이라는 첫 일거리에 뜻을 모았다. 이것이 「오택(吳宅)회의」다. 입지와 그 첫 시동인 셈이다.

 이 모임에 따라 백낙준이 주관하여 9월 5일에 발간된 'Korea Times'는 9월 9일 미군 진주일에 뿌려졌으며, 그 제1면에는 「미군 환영」이라는 큰 표제를 내걸어 겨레의 뜻을 대표해서 전파했다. 그 당시 「번역에는 백낙준, 회화에는 이묘묵」이란 말을 듣고 있던 영어통인 두 분 모두 연희전문 교수였다.

두 번째 발기과정은 미군 진주 직전인 8월 하순의 어느 날, 당시 이화여전 교장 김활란의 우인의 빈 집이었던 서울 서대문구 천연동에서 만난 오천석 김성수 유억겸 백낙준 김활란 등 5인의 모임이다. 이 교육자 모임이 역사적인 「천연동(天然洞)회의」다.

이들은 해방 당시 유일한 대학인 경성제국대학을 제외한 3개 사립전문학교의 교수 또는 교주였고, 미국유학 3인 일본유학 2인으로, 연희 2인 보성 2인 이화 1인으로 구성되었다.

이 무렵, 오키나와를 출발한 주한 미군은 한국을 향하여 항해 중에 있었다. 선생은 이 날을 회상하면서 필자와의 면담에서 「미군이 머지않아 올 것을 예상하면서 장래(할) 한국교육을 설계해 본 회합이었고 새로 세울 학제를 논의하는 자리였는데, 6334학제를 강력히 주장한 사람은 미국 유학생이 아닌 김성수였다는 것은 주목할 일이었다」고 말하고, 「이 사람들은 뒤에 군정청 교육위원회에 모두 함께 참여했으므로 그들의 영향력은 적지 않았다」고 평가하였다.

 이로써 이 모임의 인사들이 해방 3년간의 교육개혁의 핵심 주도세력이었음을 직접 밝힌 것이라 하겠다.

생각컨데 이들은 해외유학 경력자로 친미 내지는 지미파 엘리트들이었고 스스로 변환기의 우리 교육의 운명을 짊어지려는 발심을 한 분들이다. 또한 교육에 관한 정책이나 법제는 물론, 이 나라의 역사와 풍토에도 견문조차 생소한 미국 군인에게만 대사를 맡겨둘 수 없다는 책임의식에서 3개 사립 고등교육기관 대표들이 머리를 맞댄 모임으로, 규모는 작지만 교육자 대표 사전 결사의 성격을 띤 모임이라 볼 수 있다.

세 번째의 등장과정은 미군 진주 당일, 장안에 영어를 아는 사람은 다 모이라는 사발통문을 받고 그 익일인 9월 10일 오후 조선호텔 1층 볼룸에서 열린 「조선인 유지 초청 간담회」였다. 이는 아놀드 군정장관 등 장성 5인과 오천석 조병옥 이춘호 이훈구 최희송 김영희 이동인 황인식 오정수 지용준 등 50여명이 모인 한․미 요인 첫 상견례 자리였다.

오전에는 하지 총사령관이 직접 이묘묵 정일형 최순주만을 따로 만나 한국 현실에 관한 상황청취를 한 바 있는데 그 즉석에서 하지는 이묘묵(李卯)을 주한미군 사령관의 고문관 겸 통역관으로 지명하여 이후 늘 함께 있게 되고, 정일형에 군정청을, 최순주에겐 조선은행을 맡겼다.

뒤에 천원 선생이 미국인 학무국장을 누르고 마음껏 기구신설과 정책결정을 밀어붙이게 된 것도 이묘묵을 통한 하지 사령관의 최고 권력의 음덕이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편 이 날 간담회에 참석한 이들 수십 명은 바로 다음날부터 미 군정청에 출근하게 되었고, 9월 20일에는 미 군정청 9개국의 첫 조직에 미국인 국장을 보좌하는 부국장 자문관 또는 직원으로, 또 얼마 후 이름만 군정이지 한국인 책임자제로 개편된 뒤에는 국장으로 부장으로 일하게 되었다.

천원 선생은 9월 12일에 학무국 책임자 락카드 대위와 첫 대면하고 그 이튿날부터 무보수로 일을 시작하였는데 나중에 문교부장(지금의 장관)에 이르게 된다.

이 첫날의 「라카드․오천석 만남」은 이묘묵의 추천에 의한 하지 사령관의 지시로 이루어진 것으로 신생 한국교육 개혁의 출발점이 되는 사건이었다.

이 12일은 미군 진주 제4일로 조선호텔 간담회 2일 후이고 이묘묵 근무 개시 다음날이었다. 선생은 이 날 학무국장 예정자인 락카드의 초청을 받아 그가 보낸 지프차를 타고 그의 사무실에 나타났다. 두 사람의 만남은 교육자와 군인, 전문가와 비전문가, 주인과 손님의 만남이며 사령관의 힘의 지지를 받은 자와 그것을 알고 있는 사령관의 까마득한 부하와의 해후였다.

 

선생은 타 분야 사람들은 생각조차 못한 한국인 교육자 자치제를 감히 도입하여 명령 일변도의 군정청에 분권적 기구를 만들었다. 즉, 집행기구로서는 7인(나중에 10인)의 한국교육위원회를, 심의의결기구로서는 교육인 50여 명의 조선교육심의회(10개 분과)를 설치 운영한 것이 그것이다. 이는 외국인의 군정하인데도 한국인 교육자 수뇌들을 총동원함으로서 미군의 덜 익은 지시나 간섭을 견제하고 당당한 주인으로서 전통은 계승하고 외래는 취사선택하여 한국교육의 새 설계를 주체적으로 하겠다는 그의 의지의 소산이었다.

 흔히 미국 군인들이 한국에 미국식 교육제도를 일방적으로 강제 이식했다고 하는 이가 있으나 이는 당시의 실상에 대한 무지에서 온 편견이다.

 그리하여 선생은 민주적 자주적으로 실로 많은 신제도를 깔았다. 현재 우리가 보는 교육모델이 거의 완성되어 그 후기인 1948년 이후의 건국기에 그대로 인계된다.

 우리 교육사에서 1948년의 대한민국 헌법상 국민의 교육 받을 권리를 조문화한 유진오 (兪鎭午)선생,「1949년 교육법」을 제정한 안호상(安浩相) 초대 문교장관과 함께, 광복의 새벽에 일찍 일어나 신교육체제를 창건한 오천석 선생은 영원히 존경 받아야 할 우리나라 현대교육사의 위대한 3대 스승 중의 첫 인물이라 하겠다.

 

이 후 주멕시코대사(1964∼1967), 학술원 회원(1977∼1987), 경희대·상명여대·덕성여대 이사를 역임하셨(였)고, 청주대학과 코넬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아호는 천원(天園)이다. 저서로는 『민주주의 교육의 건설』 『민족중흥과 교육』 『발전한국의 교육이념』 『스승』 등 다수가 있으며, 『오천석 교육사상문집』 전 10권이 간행되었다.

 

 임종에 “나는 내 조국의 민주교육을 위하여 살고 일하다 가노라.”라는 말을 남기고 작고하였으며, 한국초유의 교육인장으로 장례하고,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그를 기리기 위해 「천원기념회(회장 정원식)」와 「천원학술상」이 30여년간 운영되고 있다.

 

13. 정권교체기, 입법참여한 수습행정관

 

1961, 3. 8. 나는 수습행정관이란 직명의 국무총리(장면) 발령으로 문교부에 배치되었다. 오천석 장관(60.8.23~5.19) 말기였다. 부내를 돌며 인사를 마치니 의무교육과에 책걸상 하나를 별석으로 만들어 근무하게 하였다. 이재서 과장의 지도를 받게 된다.

내가 문교부의 문턱에 들어선지 두 달여 후에 윤택중 장관(61.5.3~5.19)으로 바뀌었다. 그 윤장관은 2주 만에 뜻밖의 퇴임을 하게 된다. 그 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 민주당 정부가 무너지고 박정희 장군의 국가재건최고회의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윤 장관은 윤보선 대통령·장면 총리가 이끄는 민주당 정부의 마지막 문교부장관이 되고 만다.

나는 불안하고 당황스러웠다. 시대가 격변하니 앞날이 캄캄하여 보이지 않았다. 가족은 아직 부산 초량동에 남겨져 있고 나 홀로 천리 타향 수도 서울에서 격변의 새 시대를 만났으니 말이다.

그 당시, 첫 일거리로 「교원 도서 벽지 수당 규정(안)」 입안의 임무를 부과 받았다. 각시 도의 도서지구 학교와 산골 벽지학교의 명부를 제출받고 직급별 교원 수를 집계하고 개인별 수당을 결정하는 법안이었다. 아마 현장 교원으로 근무하다 왔으니 또 고시출신이니 그 입법에 적합한 사람이라 치부한 모양이었다. 어떻든 그걸 무난히 잘 마쳐 도서 벽지 교원 수당을 지급하게 되어(었다. )내가 받은 것처럼 즐거웠다.

 

 삽화 하나를 첨가하고자 한다. 진양군 내동면의 귀곡국민학교를 억지스럽게 수당지급 대상학교에 끼워 넣은 사실이다. 경남에서 올라온 서류에는 그 곳이 빠져있었다. 도서벽지가 아니라고 본 것이다. 나는 전화해서 그곳을 추가 삽입했다. 그 학교는 까꼬실(貴谷)학교로서 우리 해주 정가 선조들이 인조 때 낙남하여 잡은 터이나, 진양호가 생기면서 섬이 된 동네이기 때문에 도서나 벽지로 대우 받아야 된다는 생각을 한데다가 그 곳에는 우리 종손(정규섭)이 초등교사로 근무 중에 있어 도와주고 싶었던 (마음의) 결과였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온당치 않은 견강부회 입법이었다 생각된다. 문교부에서의 첫 발길이 이런 헛발질을 빚어 후회하고 반성되는 일로 남아있다.

 

나는 그 뒤 5.16 혁명 이후에, 기획조사과로 이동하였다. 기초자치단체인 시·군의 교육자치 위에 그 상급 단체인 시·도에서의 교육자치제를 쟁취하기 위한 내무부와의 교섭 절충을 위해 우리 기획관리실이 나선 일이 있었다. 그 책임자인 이창석 기획실장이 나를 자기 산하로 전근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이 중책을 나에게 맡겨 내무부와의 절충 협의에 진력하게 하였는데(다.) 내무부의 상대역은 고건 사무관(뒤에 국무총리)이었다.

 그는 고시 13회 행정과 합격자로 나보다 한 해 후배였다, 문교부안은 도지사 밑에 속한 학무국을 도 교육위원회로 분리 독립하고 도에 교육감을 두고 현재의 시·군 교육감은 교육장으로 개칭하는 내용과 재정적 독립, 지방의화와의 관계 설정 등을 협의하였다. 그도 위에 과장 국장 장관이 있어 자기 혼자 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나, 무척 친절히 서로 주고받고 자주 만났다.

 그러나 그 결과는 속결되지 않았고 그 일이 성취되기 까지는 수년이 다 걸리고 만다. 그때의 인연으로 그가 총리가 되었을 때 나를 포함한 대학총장들과의 간담회를 열고 그 자리에서 둘이 옛얘기도 나누면서 장시간 소담한 기억이 남아있다.

 

그 후 나의 사무관 과장 시절 10여년은 충실히 배우고 일하는 바쁜 시간을 보낸다. 사람이 태어나고 죽는 시간을 마음대로 택할 수 없듯이, 한 사람이 일하고 봉사하는 시간도 선택이 아니라 그 시대가 주선해 주는 대로 종사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호불호를 정하고 하고안하고를 자기 뜻대로 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간대의 사회환경이 억지로 안겨준다는 뜻이다.

 내 중앙청에 출근을 시작한 때는 1961년, 즉 제2공화국 민주당 정부 당시였지만, 바로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게 되어 제3·4 공화국의 박정희 대통령시대와 연이은 최규하 대통령과 전두환 대통령의 제5공화국시대를 도맡아 일하고 1983년에 물러나오게 된다. 결국 일관되게 이 격동기와 산업화 새대만을 도맡아 봉사하게 된다. 이것은 시대적 운명이며 시대가 떠맡긴 나의 숙명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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