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총장님 자서전

불효자

김현거사 2016. 11. 9. 07:13

39. 땅을 치며 웁니다, 이 불효자

 

  

 내가 서른을 넘겼던(을 때, 의) 어느 설날(, )아버님은(지는) 나에게 선물 두 개를 주셨다. 만년필과 예금통장이(었)다. 낡은 금촉 만년필은 애용하시던 귀중품이었고, 통장은 일제 말엽에 일본 가와사키(川崎, 동경근처) 철공장 노동자로 4~5년간 일하시며 노동 대가를 차곡차곡 저금했다가 처자식 생계비로 보내고 귀국하여 논 두 마지기(400평)을 사고 텅 빈 (비어있는) 통장이(었)다.

 

 내가 초등학생 시절 한번은 아버님이 진주 숙부님 댁에 하숙하고 있던 나를 찾아오신 적 있다. 혐한(嫌韓)사상이 작금의 몇 갑절이나 높던 그 당시 철공장에서 조선옷을 입고 합숙소에서 거처하신다고 하셨다. 어린 나는 그 난국에 무감각하여 예삿일로 생각하고 자랐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일본인들의 차별과 멸시 속에 마음고생이 심했으리라 싶어 가슴이 아파온다. 

 

 나는 아버님의 일본 노동자시절(의) 그 기념품을 독자(獨子)인 이 아들에게 유물로 주신 것이리라 생각하여 오래 보관하고 있다가 손자가 있는 아들에게 넘겨주었다.

(그) 창근이 부부는 그 두 유품을, 훈장 할아버지 붓글씨 책 10여권과 함께 (하나의) 함 속에 넣어 잘 보관하고 있(었)다. (아마) 손자로 또 후손으로 집안의 유품을 문화재처럼 만대에 전해질 것이라 여겨져 기쁘고,(뻤다.) 아들의 그런 마음이 믿음직스럽다.  

 

 아버님(지) 경은공(耕隱公)은 구한말에 서당 훈장의 장남으로 태어나, 신학문이 들어와서 서당 에 학생이 떨어지자 가난을 물려받아 처자식을 굶기지 않으려고 일생 안간힘을 쓰고 사셨다. 고향 농촌에서 열심히 농사짓고 살아오셨지만 언제나 어렵게 사셨다.

 어머님은(니는) 비교적 넉넉한 친정에서 자랐지만 어려운 시집살이에 홀로 된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가사노동에 일생을 바치셨다.

 그 은덕(을) 입고 자란 이 자식은 부모 가신 후 오랜 시간이 흘러 백발이 덮은 뒤에야, 스스로의 불효를 통감하고 가슴앓이와 자괴(自愧)의 눈물을 자주 짓는다. 그냥 우는 것이 아니다. 묘 앞에 엎드려 땅을 치며 울부짖는다. 

 

(그 부모님과) 나는 거의 일생을 부모님과 헤어져 살았(아왔)다. 초등학교 3학년을 마친 10살 때 숙부 댁으로 옮겨 진주시내(에 있는 도시학교) 초등학교 4학년으로 전학가는 바람에 소년시절에 일찍 첫 이별을 하게 된다.

 3년 후 부모 곁으로 돌아와 사범학교 6년간은 장거리 통학을 하면서 함께 살았지만, 20살이 되자 교사 발령을 받아 고향집을 다시 떠났으니(남으로서) 두 번째 이별이다. (을 하게 된다.)

 그 이후 나의 객지생활 70여년, 아버지 별세까지의 20년간을 진주-서울 (사이) 천리 거리에서 부자간 생이별(별리일생)이 되고 만다.

 결국 유년기 10년과 중·고교 6년을 합친 16년간의 철들기 전, 부모 혜택 받는 시기를 빼고는, 월급쟁이 떠돌이 한평생을 따로 산 것이다.

 부모를 모실 책임이 있는 독자(獨子) 외동 아들로서 은공을 갚아야 할 자립기를 별거로 일관하고 만 것이다. (굳이 불효를 변명하자면)이걸 어찌 멀고 바쁜 직장에다 불편한 교통과 전화 없는 시대가 걸림돌이었다고 굳이 변명할 수 있겠는가.(병할 수는 있겠지만… )

 

 어머님 경우는(니는 조금 다르다.) 홀로 되신 후 서울 (자식)집으로 모시고 왔으니,(와서 장수하셨다. 지나고 보니) 효도할 시간이 27년간이나 주어진 셈이다. 그러나 (이) 자식은 깨달아야 할 사오십 대였는데도 공무에 분주했고(한데다가) 무지몽매하여 불효였으니(로 일관하였고), 어머님 80대 말년 10년간은 (어머니의 80대 말년이었는데도) 경기북부(의) 신설대학의 총장 공관으로 다시 떠났으니(남으로서) 이 어찌 세 번째 생이별이 아니었던가?(별리생활을 자초하고 만다.) 불효( 일생)의 연속이었다.

 

 죄스런 마음으로 돌아보니, 진주 부산 서울로 떠돌아다닌 한평생, 몇 년에 한 번 뵈러 가곤 하는 정도로 남남처럼 산 부모와는 이별 한평생이었다. 4남매를 기르며 객지살이 하던 우리 부부는 돈에 쫓기고 일에 휘둘려 언제나 급급하게 사는 바람에 몇 년에 한 번 만나는 부모님에게 용돈이나 선물 한 번 제대로 한 일이 없었다.

 몇 년에 한 번 세배 가면서도 보잘 것 없는 물건 하나 사들고 가곤 한 기억뿐이다. 인물이 고지식해서 년말에 부처 예산이 남으면 반납하여 돌려보내 약싹빠른 사람들 웃음거리가 되었고, (하기야) 부정 안 저지르고 뇌물 절대 거절한 것을 긍지로 여겼으나, 일생(을 산 나로서는) 여윳돈이 없었다는 것은 비록 사실이라 할지(이일지)라도 이것이 어찌 하나의 변명거리 밖에 더 되겠는가.(밖에 더 되는가.) 늘 보고 싶어 하는 손자손녀들도 데리고 가는 배려조차 없었으니, 지금 나 역시 미수(米壽)를 눈 앞에 두고보니 너무나 큰 불효를 한 셈이요(…) 실로 후회스럽다.

 

(그) 아버님(지에게) 임종시에도 큰 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다(마는 일이 생겼다).

 그때만 해도 농촌에서 병이 나면 참고 또 참다가 한약으로 다스리고 넘어가고 병원 진료 받는 일은 전무한 시대였다. (그런데)

 내가 38세로 문교부 총무과장 때에 고향집에 들렸다가 아버지가 속병이 든 것 같다며 배를 쓰다듬는 걸 보고 (왔다.) 속병이란 여러 가지 암의 속칭이어서 나는 병원엘 모셔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생 처음(인 입원을 서둘렀다.) 천리길을 올라오시게 하여 서울대 부속병원에 입원케 하고 진단을 받았다. 간암이라 (했다.) 의사의 진단(지침)대로 전신마취 후 복부를 열고 조직검사용 간세포 추출한(을 했다. 시술) 후 중환자실로 옮겼을 때다.(겨)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에 옆에 있는 나를 보고 “태수야 숨이 가쁘다”하시면서 고통을 호소하시었다.(신다.)

 오랜 세월 천식으로 고생하신 전력이 있어 걱정스러워(웠다.) 간호사와(를 불렀다. 나중에는) 응급실 의사를 불러(도 와서) 인공호흡기로 산소(공기)를 공급하는 것을 지켜보았으나(다), 쉬이 쉬이~ 큰 바람소리가 들리고 간호사가 분주히 드나들고 심폐소생술을 하고 난리를 치더니, “아, 안 된다” 그 말 한마디로 모두가 끝이었다.(고 한다.)

 

 서울대병원은 나라 안의 최고(급) 병원으로 우리 문교부 울타리 안 기관이다.(라,) 믿고 또 믿었지만 할 수 없고,  의사가 원망스러웠으나 싸운다고 해서 생명을 되살릴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이런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있나. 끈 떨어진 만석중 되어 누구를 원망해도 소용없고, 책상을 치고 통곡해도 소용없었다. 가신 분  호흡은 영원히(이) 돌아오지 않으셨다. 

"시경"에 "욕보지덕 호천망극(慾報之德, 昊天罔極)"이라는 말이 있다.

임금이나 부모님 은혜가 높고 넓은 하늘처럼 크고 끝없어 갚을 길이 없음을 의미한다.

 

“얘야, 이번 수술 받고 나가면 10년은 더 살 것 같다”시던 (희망의) 말씀만(이) 빈 유언으로 남고 말았다. 생전에 효도 한번 못한 이 자식이 어쩌다가 효 한번 다한답시고 서울까지 모시고 와서 돌이킬 수 없는 이런 변을 당하시게 하다니… 마지막까지 그냥 불효자로 남을 것이지 이게 무슨 변고인가?  

결국 71세 때 돌아가신 아버님을 3일장으로 마무리한 것이 50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자주 떠올라 가슴 저리고 아프다. 포천 가산(佳山) 가족묘역의 부모님묘 앞에 엎드리면 절로 땅을 치며 속으로 운다.

 

 반포지효(反哺之孝)란 속담이 있다. 까마귀 새끼가 자란뒤 늙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효성을 뜻한다. 그 후 홀로 된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고 와서 함께 살았다.

 어릴 때 떠나고 청년이 되어 또 다시 떠난 이 자식, 하나밖에 없는 이 아들이 어머니에게는 어떤 존재였을까. 그땐 잘 몰랐다. 그런데 문교부 교원공제회, 서울교육대학 등등 눈코 뜰 새 없던 시절이라, 퇴근 후 밤에 밖에 만나지 못하지만 그것도 일상이 되니, 함께 있는 둥 마는 둥 예사롭게 시간을 보냈다.

노래지희(老萊之戱)는 70세에 어린이 옷을 입고, 어린이 작난을 하며 늘은 부모를 위안하는것인데, 애틋한 모자지간의 정을 표현해 본 일이 거의 없는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에 더하여 이 자식은(이) 포천에 있는 대학의 총장 공관으로 옮겨가게 되어 세 번째 이별을 하게 된다. 신설 대학 8년간은 한두 달 만에 한 번 집엘 올동말동하니 모자 상봉은 가뭄에 콩 나듯 하였다.

 

(그 위에) 어머니는 도시생활이 무미건조하고 단조로워서인지, 가족이 있어도 외로워서인지, 그만 치매에 걸려 목동의 이화여대 부속병원에 입원하시게 되었는데, (된다.) 없는 살림에 아이들 뒷바라지에 바쁜 아내도, 포천의(에서) 신설대학 분주한 업무(경영)에 몰입하던 나도, 어쩔 수없이 간병인을 붙여놓고 격주로 문병하는 형편에 이르게 되었다.

(른다.)

 한 2~3년 의식이 왔다갔다하는 시간이 흘렀는데,(다.)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들어 병석에서 “엄마, 나 누군지 알겠어?”하고 물으니 기막힌 대답이 돌아왔다.

“모르겠는 데요”였다. 이게 무슨 청천벽력인가.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모르신단다.( 이럴 수가. )

모자 이별살이를 그렇게 오래 해왔는데 이제 만나기는 했어도 정신은 남남이 된 것이 아닌가? 어머님은 그 한 달쯤 뒤에 93세 연세로 결국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93세였다.)

 나를 잉태했을 때, 과거시험 합격 태몽을 꾸어주신 어머니, 무명베 짜서 검정물 들여 가위질 바느질로 교복바지 만들어 입혀주시던 (그) 어머니, 그 귀하게 생각하시던 외아들을 몰라보고 눈을 감으시었다.(다니…. )

 

자식이 아침 저녘으로 부모의 안부를 물어서 살피는 것을 혼정신성(昏定晨省)이라는데, 부모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그져 하루 이틀 기다리는게 아니라 상시로 확인하는것이라는데, (이) 자식이 있는데도, 그리고 남들이 잘 나가는 자식이라 하는데도, 가난과 외로움이 겹친 일생을 사시고 끝내 불행하게 생을 마치신 우리 부모님께 이 자식은 얼굴을 들 수 없는 불효를 저질렀으니 그 후회 그 원통함을 무엇에다 비기겠는가.

 

 그냥 눈물만 흘릴 일이 아니다. 그냥 한번 울음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땅을 치고 하늘을 우러러 (며칠을) 통곡할 일이 아닌가.

 그것뿐 아니다. 서울과 천리 길 진주에 따로 사는 바람에 두 분이 살아오시면서 쓰시던 도구와 유물 등을 챙겨놓지도 못함으로서 부모님의 흔적을 가문의 유산(문화재)으로 남겨두지 못하고 말았으니 이 또한 비길 데 없는 큰 죄다.

 

 요즘에는 효도관광 효도폰이란 말도 있지만, 부모님 두 분에게 못해드린 것이 너무 많다.

 고급 한복 한 벌 사 드릴 걸, 간혹 외식집에 모실 걸, 명품 하나 사 드릴 걸, 국내여행이나 비행기 타고 외국여행 한두 번 안내할 걸, 정다운 대화 자주 나눌 걸, 약국 병원 자주 들려 백 살 사시도록 도와드릴 걸, 어머니 구순(九旬)잔치 번듯하게 할 걸... ...

수많은 후회는 산을 덮고 바다를 메운다.

 

 (… )결국(엔) 가신 후에 두 분의 합폄(合窆) 묘 앞에 산수유 한 그루 심고 참회의 시비 하나 세워 영원한 사죄의 글을 바쳤으나(치기는 했어도) 불효자의 멍에는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산수유 한 그루

 

아버지 어머니

그 땐 정말 몰랐습니다

넓은 세상 찾아 나선 나그네 외아들

보살핌 소홀하고 외롬 드린 죄

터 잡고 눈 떠보니 늦었습니다.

뒤늦은 깨달음이 노란 꽃 되어

새 봄 마다 어김없이 바치오리니

불효자 마음 받아 용서하소서.

 

2002. 3. 31

불효자 태수 재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