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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뜰한 당신'

김현거사 2016. 11. 28. 10:07

  

'알뜰한 당신'

 

'울고 왔다 울고 가는 설운 사정을 당신이 몰라주면 누가 알아 주나요

알뜰한 당신은 알뜰한 당신은 무슨 까닭에 모른체 하십니까요'

 

 어릴 때 진주극장 유성기에서 듣던 이 노래는 홍난파 선생에게 바이올린 배우고  21세 때 이애리수가 부른 '황성 옛터' 작곡한 전수린 작곡이다. 가수는 '조선악극단'과 '백조악극단' 극장무대에서 마이크 쓰지 않고 육성 고집했을 만큼 목소리 뛰어나서 '꾀꼬리의 여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운 고복수 부인 황금심 이다.

 

 일흔 넘어 그동안 꺼적거린 미완성 원고 뭉치들 추려 없애다보니, 그 속에 잊지못할 사람이 있다. 그래 그걸 쓰레기통에 던져버릴 수야 없잖는가. 지나간 내 인생의 '알뜰한 당신'이기 때문이다.

 

 권창은 친구는 강원도 횡성서 서울로 올라와서 동국대 불교학과서 고대 철학과로 편입 온 친구다. 그는 찢어지게 가난하여 돈이 없었다. 홀어머니가 도봉산 밑에 이주한 청계천 피복노조 전태일 집 옆 토굴에 살았는데, 항상 주머니에 버스 토큰 두개, '백양' 열 가치, 김 열 장과 멸치 볶음 조금, 그리고 병 김치가 든 도시락 하나가 전부였다. 나 역시 입주 가정교사로 숙식 해결하던 터라 궁한 건 오십보 백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우리는 청춘이기에 고고하게 사회 나가서 써먹을 법학 상학 공부하는 학생들은 속물로 여겼다. 둘이 만나기만 하면 칸트 헤겔 노자 장자 공자가 주제였다. 딴 건 별로 해본 적 없고, 간혹 청량리 588, 하월곡동 색주가 이야긴 했다. 그러면 그는 그 방면 선배인 척 경험담을 들려주었지만, 실제는 창작 이었다.

 그 실례가 나는 안양에 살았는데, 밤 10시 30분에 안암동 도서관에서 나가면 버스가 시청 앞을 거쳐 가고, 거기서 술집 아가씨들이 탄다. 만원 버스라 서로 허벅지 궁둥이가 닿는 경우도 있는데, 매일 그러다보니 낮익은 아가씨도 있었다. 아가씨들은 호랭이 뺏지 단 대학생에게 호감 느꼊을 것이다. 목례 주고받은 사이도 있었는데, 이걸 권에게 어떻게 결론 보느냐고 묻곤했고, 권은 종점에 내려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지침을 주었지만, 한 번도 성공한 적 없다.

 

 어쨌던 그는 '백양' 꽁초에 불 붙이고 손까락이 뜨거울 때까지 빨아마시며 노가리 풀었고, 우리는 청량리 불빛 보이는 도서관 잔디밭에 이슬 내릴 때까지 철학 이야기에 심취했다. 간혹 둘이 별러서 포장마차에 가면, 쏘주 한 잔 꼬치 하나 시켜놓고, 주인이 장사 끝날 때까지 칸트 헤겔 노자 장자에 열 올렸다.

 

 그런데 그가 먼저 졸업하는데, 취직이 문제였다. 궁여지책으로 서해 어느 섬 공사장에 일하는 형님 찾아 섬으로 가더니, 얼마 후 새우젖 한 드럼 사가지고 장사 하겠다고 서울로 왔지만, 장사는 아무나 하나?

 그래 그가 내게 상의 하길래,

'아무래도 자네는 조물주가 좀 특별하게 만든 놈이야. 머리는 알대머리 고수머리지, 눈알은 툭 튀어나왔지, 체격 초라하지, 잘 하는 건 논리 따지는 거, 자존심 강한 거, 반항심 밖에 없잖아?

 취직이나 출세 쪽은 만사휴의. 조물주가 사회 꼴등 작품으로 내보낸 물건이야.

그러니 일찌감치 미련 끊고 대학원 가서 교수 바지가랑이 붙잡고 늘어져. 치사하지만 돈 없다고 애걸도 좀 하고. 거지도 학교 안 거지는 괜찮아. 안면 철판 깔고 네 학기 마치고 철학 박사 되는게 네 운명인 거 같다.'

한 적 있다.

 

 그는 내 말대로 새우젖 판 돈으로 대학원 첫학기 등록한 후 장학금을 받았고, 얼마 후 희랍으로 날랐다. 그때 영문과 다니던 경기여고 출신 미인 아가씨 하나 데리고 같이 갔는데, 10년 후 하나는 아테네 희랍 철학박사, 하나는 희랍 문학박사를 받아 귀국했다. 둘 다 한국 최초 희랍 철학박사, 문학박사였다. 알다시피 희랍 철학과 문학이 서구 문명의 기초라 그건 서양 석학들도 알아주는 학위다. 후에 부인은 '자랑스런 경기여고인' 표창패도 받았다.

 그러나 둘다 거기서 가난을 신물나게 겪으며 꿈만 먹고 살았던 모양이다. 동거할 공간이 없어 그랬던지, 공부 전념한다고 그랬던지, 결혼식도 못하고 귀국 직전 거기서 결혼하고 왔는데, 그때 만나보니, 거의 빨갱이가 되어있었다. 체제에 대한 비판, 가진 자에 대한 불만 가득했다. 이런 사상 가지면 평생 잘 살긴 글렀다. 대학서 강의 얻기 어렵다. 

 그래 신문기자로 월말이면 먹는 쌀 바닥나 같은 철학과 출신 아내 눈에 이슬 맺히던 시절이지만, 내가 '모교에서 자네 연락처나 알아야 연락이 올거 아닌가' 하면서 백색전화 한 대 값을 준 적 있다.

그리고 그 뒤 둘 다 고대서 강의를 얻었다길래, 이젠 니들도 살게되었구나 잘 살아라고 축원 해준 적 있다.

 

 그런데 '젊어 고생 사서도 한다'는 말 말짱 헛말이다. 10년 지난 98년 봄에 권이 악성 뇌종양이라는 소식이 들렸다. 젊은 시절 지나친 고생과 스트레스가 이리 불거진 것이다. 죽 쒀서 개 준다는 말 생각났다.

 박사 된지 10년만에 간다 생각하니 너무나 허망해서, 죽기 전에 먹고싶은 거나 사먹으라고 친구들에게 5만원씩 추렴해서 봉투에 넣어 가봤더니, 집은 상계동 열 몇 평 좁은 아파트인데, 엉뎅이 겨우 비비고 앉을 자리 밖에 없었다. 가구는 없고 희랍서 가져온 기념품 몇개 초라하게 책상 위에 놓여있다.

 서울대 병원서 퇴원해 상황버섯에 의지하고 사는데, 부인이 갑자기 내놓을게 없으니, 오리브 열매 몇 알과 시든 과일 몇 알 내놓고 부끄러워서 얼굴 빨개진다. 강의는 어떡했느냐 물어보니, 권박사가 정교수 되면서 그만 두고 희랍 비극들 번역으로 생계 유지한다고 한다. 당시 국내는 희랍어에서 영역하고 영역을 한국어로 번역한 것만 나돌아 희랍어 직역은 드문 것이다.

 

 그 뒤 또 친구들한테 부의금 쪼로 돈을 거둬 '이승에서 먹고 싶은 거나 사먹고 가거라'며 봉투를 건네 준 적 있다.

 한번은 내가 동기 모임에서 철학과는 궁상만 떨다가 끝이 비참하다고 하자, 한 친구가,.

'원대연이 알지? 그가 삼성 중에서 간판기업인 삼성물산 대표이사인데...'

한다.

하긴 그렇다. 대연이는 인물 깔끔하고 인사성 밝다.

'김판곤이는 현대 계열 현대산업 부사장 지냈고, 민군식이는 우리나라 재활원 중 제일 큰 삼육재활원 이사장을 지냈고....'

한다.

'그럼 권박사는 운빨이 나빠서 그런거야? 고집이 세서 그런거야?'

 묻자, 누가 대답한다.

'인생사 다 새옹지마(塞翁之馬)일세. 내가 참모총장한 도일규 장군하고 같이 골프도 치고, 동부인해서 점심도 먹고 그랬는데, 그 친구 며칠 전 만나니 골치 아픈 일 생겼더라고. 어깨에 별 네 개 달고 폼 잡던 사람이 물러나자말자, 무슨 병무 비린가 하는 것이 뒷다리 콱 물어.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지금 기분이 어떻겠어? 세상 명예란게 다 뜬구름이지.'

 

허망한 선고 받기 전에 가난뱅이라도 친구라도 만나 정 나누는게 제일이다. 돈 없어도 의리가 뭔지 아는게 제일이다. 한번 살다가는 인생 아부나 눈치 보며 살다가면 헛 일 이다.

 

 권박사는 타계 하기전에 두어번 더 만났다. 마지막 그가 죽음을 맞는 대목은 지금도 인상 깊다. 사실 그는 골수암이 이미 깊어 회복할 기미가 없자, 인생을 터득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임종시의 자세를 나에게 가르켜 주고 떠난 선생이다. 

 

 서울대 병원은 골수암 환자가 골수암에 치명적인 담배를 피우자 그를 쫒아냈다. 그래 고대 병원에 입원했는데, 그 병원 의사들은 후배들이라 한번은 내게 이런 말 해준 적 있다.

'권박사님은 이미 시한이 지났는데 오래 연명하는 이유를 검토해보니, 생명에 대한 미련과 애착을 끊은 게 그 이유인 것 같습니다. 객관적 판단을 이해하고, 생에 대한 애착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전혀 없습니다. 보통 그게 병과 죽음을 재촉하는데, 전혀 그런 스트레스 없는 것이 임종이 평화롭게 서서히 오는 이유인 거 같습니다.'

 나는 그말을 듣고 느낀 게 많다. 어차피 오는 것이 죽음이다. 그렇다면 평화롭게 맞아야 한다. 살아온 날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

 

 한번은 권박사가 나에게 담배를 하나 달라고 했다.

'아니 이 사람아 골수암인데...'

내가 거절하자.

'골수암이 지금 치료하고 낫는가? 글쎄 하나 줘.'

한다.

 그 뜻 알만했다. 밤 늦은 도서관 앞 잔디밭에서, 학교 앞 포장마차에서 그와 나는 담배를 피우며 얼마나 정을 나눳던가? 마지막으로 한 대 같이 피우고 싶던 것이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다. 퀀디션 좋으니 술 한 잔 사겠다는 것이다.

'이 친구야. 같이 술 먹고 내가 무슨 욕 뒤집어 쓰라고?'

'아닐세! 내가 자네한테 술 한 잔 사고 싶어 그러네.' 

그 뜻 알만했다. 그래 둘은 잔을 나눈 적 있다. 권은 딱 한 잔만 마셨다. 자기가 계산했다.

 

 그리고 며칠 뒤 부인 연락 받았다. 이미 사경에 들어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부인으로서는 차마 호홉기 떼라는 말을 입에 담지 못했을 것이다.

'알았습니다. 마지막 순간은 육체는 정지해도 의식은 뚜렷하다 합니다.'

그렇게 설명하고 나는 권에게 말했다.

'권박사! 지금 자네는 마지막 고통을 당하고 있네. 무척 괴로울 걸세. 그 고통 견디면 다시 소생할 가능성 있으면 모를까 이건 무익한 고통일세. 그를 바라보는 자네 부인도 고통스럽고, 나도 괴롭네. 차라리 고통 시간 줄이는게 합리적이라 생각되네. 잘 가게. 이 다음 저승에서 만나세. '

그리고 의사 불러 호홉기를 떼었다. 그는 두어번 숨을 쉬다가 금방 멎었다. 생명은 그처럼 허망했다.

 장례는 파주 근처 희랍정교회 묘지에서 치렀다. 지금도 장엄하고 아름답던 정교회 장례 미사음악과 우리가 영화에서 보던 검은 수사복 차림의 백발 성성한 희랍정교회 신부님 모습 생각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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