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내가 만난 高僧大德

김현거사 2016. 10. 3. 10:09

 

 

 

  내가 만난 고승대덕(高僧大德)

 

 나는 한 때 불교신문 기자였다. 앞으로 21세기는 선(禪)이 동서양에서 각광받는 시대가 올걸 예상하고 선 관련 책자들을 모우고, 선에 해박한 스님이 있다면 불원천리 하고 찾아다녔다. 

 

 천축사(天竺寺) 무문관(無門關) 토굴에서 10년 면벽한 경산스님, 춘원 이광수 사촌형 운허스님이 그 중 두 분이다. 경산스님은 무문관에서,  운허노장은 광릉 봉선사서 인터뷰 형식으로 만났다. 운허스님은 역경원장 시절 팔만대장경 한글 번역 사업을 주도한 분이다. 나는 그를 '물 속에 깊이 숨은 용이요, 숲속에 엎드린 범'같은 분이라고 표현한 적 있다.

 경보스님은 불교신문에 자주 찾아와서 뵈었다. 1년에 선(禪) 관련 책자를 세 권이나 내고는 신간안내 부탁한다고 매번 찾아왔기 때문이다.

 포교사로 유명했던 무진장스님은 그 분 책상 위에 놓인 풍난 석부작의 멋을, 쌍계사 백운스님은 춘란의 멋을 내게 일러주신 분이다.

 이젠 전설적 고승이 되었지만 불교신문에서 광덕, 법정, 월주, 설조스님을 아침저녁으로 만난 것은 귀하다면 귀한 인연이다. 결혼식을 조계종 회의실에서 할 때, 총무원장 석주스님한테 반절지에 쓴 '우순풍조(雨順風調)'란 친필 휘호를 받은 것도 복이라면 복이다. 

 

 석주스님은 범어사에서 남전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는데, 중앙승가대학교 초대 학장과 봉은사 칠보사 조실을 지낸 분이다. 세속과 승가의 길이 무엇인가 잘 알던 분이다.

 당시 강남의 봉은사 땅 수십만평을 팔아해치운 승려가 있었다. 종단은 날만 새면 이들을 성토하는 자와 비호하는 자들이 싸움을 벌여 마치 시장바닥 같았다.

 하도 쌈질만 하길래 나는 봉은사 젊은 스님 만나면 '스님들이 돈과 땅을 앞에 놓고 이 무슨 챙피한 모습이냐?'고 비난하곤 했다. 그래도 자주 신문사에 들리길래, 하루는 어찌 이야기가 샛길로 나가 '거기 채소 키울 땅이나 나한테 한 5백평 떼어 줄 수 있소?하고 물은 적 있다. 당시 봉은사는 다리가 없어 뚝섬에서 나룻배 타고 건너다녔다.  주지에게 물어보라고 했는데, 그 뒤 주지 승락이 났다고 하는 걸, 말만 해놓고 차일피일 하던 새에 그만 강남이 개발되고 말았다. 현재 그 땅 가치는 아마 5백억 넘을 것이다.  사람은 일생에 큰 복이 두어번 들어온다고 한다. 승락 받아놓고 등기 못한 그 봉은사 땅이 놓친 첫번째 복인가 싶다. 

 각설하고 석주스님은 이런 시끌벅쩍한 속에 회의가 열리면 중들끼리 삿대질 하는 험악한 회의장 의장석에 앉아서 간혹 하품을 하거나 아예 눈 감고 졸고 있었다. 나는 그걸 보고 그가 고승인 걸 알았다. 수행을 본업으로 하는 수도자에게 돈이나 땅이란 하품의 대상 정도여야 하기 때문이다. 종단 책임자가 그래도 석주당 같은 인물임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불교신문 주간 광덕스님은 용모가 맑고 청초하던 분이다. 구질구질한 세속적 욕심이 없어보여, 내가 속으로 정말 중다운 중이로구나 하고 존경했던 분이다.

 스님은 그의 사형 성철스님과 함께 범어사 동산스님 제자다. 경전공부를 얼마나 많이 했던지, 신문 사설 받으러 가서 곁에서 기다리면서 보면, 어려운 한자도 거침없이 쓱쓱 휘갈겨 쓰곤했다. 이런 스님의 박학강기(博學强記)와는 달리 동국대 교수였던 서정주씨는 '가만있자 이젠 한자가 가물가물 하네. 김기자가 원고를 한문으로 좀 고쳐주소' 하곤 했다. 

 광덕스님은 민족대표 33인의 한 분이던 백용성스님이 활동했던 종로3가 대각사에서 1974년 불광회를 창립하고 월간 '불광'이란 잡지를 창간하여 경전 번역, 찬불가 작시 등을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대중을 일깨우다가 1999년 잠실 불광사에서 입적했다. 불광사에 광덕스님 기념관이 있다.

 

 두번째 주간 월주스님은 고려대 옆 개운사에서 주석하고 있었다. 내가 고대 출신으로 집이 없자 개운사 땅 한쪽 허름한 집에 살아보라고 권하신 분이다. 아내가 겉만 보고 허름하다고 결사반대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백 여평 집 하나 공으로 얻었을 것이다.

 원래 대승불교의 근본은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에 있다. 위로는 진리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다. 그래서그런지 월주스님은 세속에 관심이 많고 항상 매스컴에 나오길 좋아한 분이다. 총무원장 시절 무슨 사회단체의 성명서에 곧잘 이름을 올리고, 청와대 초청이라면 만사불구하던 분이다.  

 

 법정스님은 서운하게 헤어진 분이다. 스님은 신문사 출근하면 맨 처음 함석헌 천관우 씨들과 전화 통화로 일과를 시작했다. 문필로 그들과 교제가 깊었고, 그걸 중요시 하는 눈치였다.

 내가 불교신문에서 내외경제신문으로 옮길 때다. 송별연 회식에서 스님이  '김거사! 그동안 불교신문에서 나와 함께 근무하면서 지낸 느낌을 한마디 하소.'했다.

 내가 할 말이 없어 몇 번 사양했고 스님은 세 번 권했다. 옆에서 법정스님 친구로 불교신문 주필이던 유찬거사도 ' 어디 한 말씀 해보시게. 스님이 궁금해 하지잖아?' 하길래 이렇게 말한 적 있다.

 '굳이 말하라고 말씀하시니 이지만, 스님은 제가 보기엔 스님이라기 보다는 문필가 입니다. 그런데 수행자는 처자식을 버리고 목슴 걸고 구도에 정진하는 것이 본업 아닙니까?'

해버렸다. 이 말 한마디로 좌중의 분위기가 싹 변해버렸다. 스님은 안색이 파랗게 질려버렸다. 곁에 있던 유찬거사가 '이 사람아! 말 하라고해도 그렇지, 그렇게 고지식하게 하면 쓰나?' 하고 급히 나를 꾸짖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지금 생각해도 내가 고지식하긴 했다. 그러나 스님도 문제 있긴 마찬가지다. 중이 중답게 수도에 정진하라는 아랫 사람 말도 틀린 건 아니다. '어허 내가 김기자에게 그렇게 보였나? 앞으론 주의해야겠네!' 했더라면 지금도 아랫 것이 스님을 통 큰 사람으로 기억할 것이다.

  어쨌던 이 바람에 스님과 나는 인연이 끊어졌다. 법정스님 좋아하는 사람들은 스님이 송광사 불일암에 계실적 손수 나무가지를 얶어 만들어 쓰던 의자까지 무슨 보물처럼 생각하고, 요정 대원각을 김영환 마담한테 기증받아 길상사로 만든 걸 찬탄하지만, 나는 서점에 가도 좌판 중앙에 놓인 법정스님 책은 거떨떠 보지 않는다. 물론 내 서가(書架)에 법정스님 책도 없다. 광덕스님이 쓴 <선관책진>, 유찬거사가 동국역경원 책임자 때 편찬한 <불교성전>만  있다.

 사람들은 스님의 '무소유'란 말을 좋아한. 그래 스님이 낸 책은 모두 베스트셀러 되었다. 그러나 나는 스님을 진정 '무소유'를 추구한 사람으로 보진 않는다. 명예나 이름 추구도 재물이나 마찬가지로 소유욕이기 때문이다. 한편으론 세간에 이름 대문짝만하게 내놓고, 한편으론 나는 무소유를 추구했소 함은 이율배반이다.   

 입적할 때 스님은, '그동안 풀어논 말빚을 다음 생에 가져가지 않으려 하니, 내 이름으로 출판한 모든 출판물을 더 이상 출간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그걸 보고 사람들은 스님은 자신의 책마져 애착을 끊었구나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고승도 그런 일은 흔하다. 성철스님도 임종시에   '한평생 무수한 사람들을 속였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가득 차 수미산보다 더 하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 그 한이 만 갈래이니, 한 덩이 붉은 해 푸른 산에 걸려 있다.'고 하셨다.

 어쨌던 스님 유언 따라 책이 절판되자, 몇 년 전 어떤 경매에서 '무소유' 1993년판 중고책이 110만5천원에 낙찰 되었다고 한다. 출판 당시 1500원 하던 책이다.    

 최 최인호씨가 법정스님이 무소유에 너무 집착했다고 조심스레 말한 적 있다. '무소유'에 집착한다는 그 말은 집착을 의미한다.

   

 네번째 주간 설조스님은 공주사대 영문과 출신이다. 신혼 때 우리 부부와 신륵사 갔을 때, 그가 남한강 달빛 아래 띄운 배 위에서 부르던 산타루치아가 지금도 생각난다. 신륵사 주지가 은밀히 감추고 있던 곡차를 나에게 대접한 것은 순전히 설조스님 덕이었다.

 스님은 샌프랜시스코 '여래사' 주지를 하다가 돌아와서 불국사 주지를 역임했다. 지금 법주사에 계신데, 최근 사진을 보고 놀랜 적 있다. 젊을 때 그 다정다감하던 미남 얼굴은 보이지 않고, 인상 험한 늙은 노승 얼굴만 보였기 때문이다. 정의란 무엇인가. 불교 개혁에 집착했던 스님의 높은 뜻은 알지만, 안타까운 생각은 금할 수 없다.

 

 불교신문 기자했던 그것만으로 나는 전생에 불교와 인연이 있었지 싶다. 조계종 총무원 강당식장을 꾸며 수많은 스님을 하객 삼아 장가간 사람은 나 이외 다른 사람은 없다. 어릴 때 내가 철모르고 놀려먹던 스님이 나중에 알고보니 한국 불교계의 큰 별이었던 것도 묘한 인연이다.

 

 최범술 스님은 진주 해인대학 학장 하신 분이다. 고등학생 때 내가 이 분 놀린 생각을 하면 지금도 웃음이 나온다. 나는 해인대학에서 평행봉을 하다가 브로크 에 걸터앉아 지나가던 사람들을 구경하곤 했다. 그러면 스님이 닥아와서, 마치 방앗간 참새 쫒듯 손을 휘저으며 내려가라고 고함을 친다. 이때 나는 어떻게 했는가. 당시 스님은 몸이 뚱뚱하고 얼굴도 뚱뚱하고 키가 작았다. 나도 지금 칠십 넘어 그렇지만 행동도 느렸다. 입은 양복은 몇십년 입었는지 고리삭은 양복이었다. 나는 스님을 무시하여 눈만 깜빡깜빡 하면서 그 얼굴만 쳐다본다. 그러다가 바로 옆에 오셔야 훌쩍 몸을 날려 담 너머로 뛰어내리곤 했다.

 

 내 눈에 웃기던 구식 화상이 그렇게 대단한 분인지는 그 후에사 알았다. 대학시절에 도서관에서 그 분의 저서 '한국의 차도(茶道)'란 책을 발견한 것이다. 그는 초의스님 이래 한국 최고의 차인(茶人)이었다.

 전라도 광주 무등산에 의제 허백련이 있다면, 경상도 곤양 다솔사에 효당 최범술스님이 있었다. 허백련은 화가로 차만 즐겼고, 최범술은 고승으로 차에 대한 이론을 정리한 분이다.

 1975년 보련각(寶蓮閣)에서 펴낸 이 책은 원효스님 이래 한국 불교계의 다선일여(茶禪一如) 사상을 잘 정리해놓은 책이다.

 

 

 스님과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나중에 인사동에서 채원화 보살을 만났다. 그는 나보다 1년 뒤 진주여고 졸업하고 연세대 졸업한 분이다. 다솔사에서 스님 모시고 차를 배운 인연으로, 인사동 허름한 2층 집에서 반야로(般若露)란 차회(茶會)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날 내가 우연히 들러 다 공부하는 여대생들에게 효당 최범술스님을 소개한 적 있다. 

 

 스님은 경남 사천군 서포면 바닷가 마을 밤섬에서 태어났다. 13세인 1916년 1월 12일 다솔사로 출가, 불교에 입문하여 해인사 임환경스님을 은사로 수계했다. 당호는 금봉(錦峰)이며, 효당은 원효스님의 교학 복원에 평생을 바칠 것을 서원하여 스스로 지은 법호(法號)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란 화두로 유명한 성철스님은 건강이 좋지 않아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한 후 지리산 대원사에서 철학서 탐독하며 불교공부를 하던 중 효당 최범술 스님 권유로 해인사에 첫 발을 디뎠다.

 

  일본에서 초대 민단 단장 박열의사, 독립운동가 박흥곤,옥홍균을 만나 단체를 조직 하여 일본천황 암살계획을 돕기위해 상하이에 잠입해 폭탄운반을 돕기도 하였다.

  1930년 귀국하여 다솔사를 중심으로 불교청년들의 항일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을 결성했고, 만당의 당원과 우국지사들이 왕래하면서 다솔사는 항일의 거점이 되었다.

 스님은 다솔사 뒷산에 죽로차 차밭을 조성하고 차를 보급시켰다.

 

  소설가 김동리씨는 다솔사 요사채에 10여년 머물었는데, 여기서 그의 형 범부와 최범술스님 만해스님이 나누는 대화에서 중국의 소신공양(燒身供養) 이야기를 듣고 소설 등신불(等身佛)을 썼다.

당시 다솔사에 한국 최고 지식인들이 모였다.

 

 스님은 초대 제헌국회의원도 역임했고, 1936년 서울에 여성교육기관인 명성여자학교를 설립했고, 1948년에는 신익희씨와 국민대학을 설립하고 재단 이사장에 취임했고, 1952년 해인사 부동산을 담보로 해인대학을 설립했다. 

 나는 해인대학 옆에 살아서 고등학생 시절에 최범술스님을 뵌 적 있다.

 

  대략 이런 이야기였다. 채원화 원장은 이 이야길 들고 여대생들의 반응이 좋자, 날더러 같이 차회(茶會) 운영하자고 제의한 적 있다. 지금 반야로(般若露) 차회(茶會)는 전국적인 조직을 자랑하고 있다.    

 

 

청담(靑潭)스님은 가친과 진주서 초등학교 동창이다. 그때 이미 결혼한 스님이 반장이고, 아버님이 부반장이었다. 스님이 만세운동으로 경찰서에 갇히자 아버님이 경찰서 뜰에서 밤을 새웠다고 한다. 스님은 농고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 불도를 딱았고, 귀국하여 해인사와 도선사 주지를 역임하고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냈다.

총무원장 시절 아버님이 서울 올라오시면 우릴 조계사에 데려가시곤 했다. 스님은 형제가 하나는 서울대 하나는 고대라해서 착하다며 용돈을 주신 적 있다. 날더러 아버님 없어도 혼자라도 찾아오라는 말씀도 하셨는데, 그것도 묘하다. 내가 사는 수지 근처 수원시 우만동에 봉녕사란 절이 있다. 그 절은 청담스님의 따님 묘엄스님이 만든 비구니 절인데, 선원과 강원, 승가대학까지 갖춘 큰 절이다.  도량이 깔끔하고 정갈해서 간혹 들리는데, 그때마다 나와 인연이 전혀 없는 절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선친과 청담스님, 그리고 묘엄스님이나 나, 모두 진주 사람이기 때문이다.

 

 불가에 맹구부목(盲龜浮木)이란 말이 있다. 큰 바다에 눈먼 거북이가 백년마다 한 번 숨을 쉬러 물 위로 올라오는데, 망망대해에 떠다니는 구멍 뚫린 나무판자에 머리를 들이밀고 숨을 쉰다고 한다. 불행히 그 구멍 뚫린 나무를 못 만나면 다시 백년 후에 다시 올라와 숨을 쉬어야 한다고 한다.  

사람으로 태어나는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고 사람으로 태어나도 부처님 세상 만나는 것은 이 보다 더 어렵다고 한다. 수많은 고승대덕을 만난 나는 분명 그 거북이 보다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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