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내가 만난 재벌 총수

김현거사 2016. 9. 29. 12:43

 

 

내가 만난 재벌 총수/1

 

  최근에 <국제시장>이란 영화를 봤는데, 첫 장면이 현인의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 가사 그대로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메었던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1.4 이후 나홀로 왔다.'

  1950년 12월12월, 눈보라가 휘날리는 흥남 부두에서 철수하는 미국 군함에 승선하려고 개미떼처럼 밀린 9만8천명 피난민. 그 속에 가족의 손을 놓쳐버리고 발버둥치고 울부짖는 사람들, 그들을 배에 태워 달라고 호소하는 통역관 현봉학, 배에 실은 폭약과 장비를 내리게 하고 대신 피난민을 태운 아먼드 소장 모습이 인상깊었다. 

 노래 2절은 국제시장이 배경이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싶구나 고향 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영화 <국제시장>은 어떤 의미인가. 5천만이 사는 나라에서 그 영화에 천만 관객이 몰렸으니 인구 다섯명 중 한 명 꼴로 그 영화를 본 셈이다.

 

 영화에 재벌도 나온다. 현대건설 정주영 회장 얼굴도 보이고, 앙드레김도 보인다.

정주영은 학벌은 없지만, 사변통에 뱃장 좋게 돈 벌어 재벌된 사람이다. 간뗑이 큰 사람으로 정주영이 아마 최고일 것이다.

그는 1952년 2월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이 UN묘지를 방문할 때, 그 겨울에 푸른 잔디밭을 만들면 돈을 세배 준다니, 보리밭을 몽땅 사서 잔디처럼 입혀놓고 돈 타간 사람이다. 조선소 만들려고 영국 버클레이 은행장을 만나서 거북선 그려진 5백원 짜리 지폐 한 장 보여주며, ‘우리는 4백년 전에 철갑선을 만들었소’하고 차관을 얻어온 사람이다. 그는 1983년 서산방조제 물막이 마지막 공사 때 아무리 돌을 쏟아부어도 세찬 물살로 모두 떠나려가자, 해체해서 고철로 쓰려고 사다놓은 길이 322미터 스웨덴제 대형 유조선을 거기 쳐박아 물을 막아버린 사람이다. 그는 1998년 소떼 1000마리를 트럭 백 대에 싣고 판문점을 통해 이북에 갔던 사람이다.

현대전자 시절 반도체라인 증설을 위해 담당자가 보고를 하러 들어갔다. 테스크포스 팀에서 준비한 몇백 쪽짜리 보고서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딱 한가지만 물었다고 한다.

‘삼성은 어떻게 한 대?’

‘삼성은 설비를 늘리기도 했습니다.’

‘그럼 됐어 삼성이 오죽 잘 검토해서 투자키로 결정했겠나? 우리도 설비를 늘려! 내일 당장 공사 착수토록해!’했습니다."

​ 그는 이런 사람이다. 몇 십억도 아니고 몇백억 몇조까지 드는 반도체라인 증설을 이런 뱃장으로 한 사람이다.

본명이 김봉남인 앙드레김도 그 사람 웃기는 서투른 외국어로 패션계 톱스타 자리를 차지한 사람이다. 

따지고보면 난세에 영웅이 탄생한다. 지금은 너무나 회사가 비대해서 서민들이 그들 보기엔 아득한 존재지만, 현대 삼성 금성은 사변 통에 성장한 기업이다.

사변 틈에 돈 번 사람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한마듸로 하면 ‘간뗑이가 큰’ 사람들이다. '간뗑이가 그냥 큰 것이 아니라 사람들 놀래 나자빠질만치 크다.'

나는 이것을 한 새끼재벌 비서실에 20년 근무하면서 똑똑히 보았다.

 

 그에게 추풍령 넘어 김천에 수십만평 땅이 있었다. 그런데 누가 이 땅을 무단점유하고 있으면서 재산세 고지서만 회사로 올려보내고 있었다. 무단점유 했으면 고지서는 보내지 말아야지 이런 고약한 놈이 있나 싶어, 관재과장에게 물어보았다. ‘조열승이 어떤 사람이냐?’

그가 자세히 설명했다. 조열승은 <야인시대>란 드라마에도 나온 자유당 때 깡패 보스다. 그는 동대문시장을 장악하고 있었고, 임화수 이정재 유자광과 함께 자유당 정권이 보호한 깡패의 보스다.

그때 나는 조열승이란 이름에 흥미가 부쩍 솟았다. 그는 동네 술집에서 사이다병 깨고 인상 쓰는 흔히 보는 그런 깡패가 아니다. 기차 안에서 지팽이 짚고 장님처럼 까만 색안경 쓰고 물건 강매하는 상이군인하고 다르다. 족보 있는 최고 주먹이다. 동네 깡패들이 하루강아지라면 그는 범이다. 

  그 조열승을 만나고 싶었다. 나는 대학시절에 미식축구를 했다. 종로 2가 ‘디세네’라는 음악실에서 ‘알디라’ ‘카튼필드’를 부르다가 심심하면 출입구로 나가서 두 발 떡 버티고 앉아, 계집애처럼 인물 잘생긴 Y대 뺏지 단 친구가 여대생과 들어오면, 시비를 걸곤하던 사람이다.

‘어이! 니는 눈이 없나? 애먼 남의 구두는 왜 밟고가노?’

이렇게 여학생 보는 앞에서 Y대생이 손수건 꺼내 한번도 약칠 해본적 없는 웍화 딲아주고 나서야 통과시킨 사람이다. 신상사파니 하는 조직이 있던 명동에 미식축구 동료들과 술에 취해 막걸리 찬가를 부르며 활보한 사람이다.

옳치 싶었다. 조열승 좀 만나보자. 덩치는 얼마큼 크고, 주먹은 어찌 생겼는지 보고 싶었다. 주먹은 더 큰 주먹이 보고싶기 마련이다.

 

 그래 회장실에 들어가 조열승 만나, 재산세를 받던지, 내보내던지, 양단간 결단을 내고오겠다고 말하니, 노회장이 얼굴에 만면에 흡족한 웃음을 띄운다. 그동안 그룹 전체에서 한 사람도 그를 만나 담판을 짓겠다는 자가 없었다. 신문기자였던 니가 조열승을 어떻게 다루나 한번 보자는 심보였을 것이다.

 관재과장 데리고 추풍령을 넘어가며 머리를 굴려보았다.

‘자유당 때 깡패라면 지금은 늙었다. 환갑 지난 깡패가 무슨 힘이 있겠는가.’

내 친구 중에 '타이거'란 이름으로 꽤 알려진 레슬링 선수가 부산에 있었다. 그가 외항선을 몇 년 타다가 돌아와보니 권투도장을 채리고 싶은데 채릴 돈이 없다고 내게 하소한 적이 있다. 그를 거기 보낼 생각이었다. 이이제이(以夷制夷)란 말 있다. 주먹으로 주먹을 제압할 생각이었다.   

 물어물어 추풍령 밑의 그 동네를 찾아가보니, 동네는 이집 저집 감나무가 많은데, 별을 네개나 달았던 참모총장 정승화 장군보다 어릴 때부터 조열승이 더 유명했다고 한다.

그에게 재산세를 받으러 왔다고 하니 사람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엄두도 내지말라고 당부한다.

겨우 위치를 물어 손으로 가르킨 방향으로 산을 올라가니, 거기 양지 바른 능선에 수만평 배밭이 펼쳐져 있다. 누구나 욕심낼 좋은 땅이다. 배밭 옆에 아담한 호수가 있고, 호수엔 한가로운 보트가 뜨있다. 호수 옆엔 작은 원두막이 있고, 위는 작은 복숭아 밭이 있다. 그 밭머리에 한 노인이 비탈길 올라오는 우릴 내려다보고 있었다.

 '실장님! 저 사람이 조열승인 갑습니다. 우짜까요?'

 박과장은 잔뜩 긴장해서 목소리를 낮춰 소근거렸다.

'우짜긴 뭘 우째! 자네 혼자 저사람과 인사라도 드릴라꼬? 그냥 가자.'

 빤히 쳐다보는데 못본체 지나감은 그를 무시한 것이다. 일단 기싸움 벌인 것이다.

그 위에 덕수궁 대한문 같이 커다란 대문이 있었다. 대문 문짝에 달린 둥그런 놋쇠고리가 자전거 바퀴만 하다. 이 집은 기왓장 한 장 한 장 서울의 어떤 유서 깊은 집 한옥의 기와를 뜯어온 것이라 한다. 기둥과 문짝도 다 그런 것이고, 심지어 마당에 깔린 넓적한 박석(薄石)까지 다 옮겨온 것이라 한다. 역시 조열승답구나. 담대한 스케일이 맘에 들었다.

대문 놋쇠고리를 큰소리 나게 두드리니,

'누구세요?'

안에서 일하는 아줌마가 묻는다.

'여기 조열승씨가 살지요?'

그러자

'저 아래 복숭아밭에 계실낀데요.'

하고 알려준다.

이제 조열승을 만날 차례였다. 그래 둘이 일부러 잡담을 해가며 느릿느릿하게 내려가니, 우리가 그의 옆에 가도 조열승은 아는체를 않는다. 도진개진 피장파장이다. 니들이 무시했으니, 나도 무시한다 였다.

'조열승씨 맞습니까?'

이렇게 그를 만났다. 그러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우릴 바라보는데, 역시 조열승은 조열승이다. 눈빛이 마치 자동차 헤트라이트 불 같다. 범의 눈빛 같다. 너무나 강열하고 힘이 있다.

‘아! 이래서 그랬구나. 그래서 그가 한 때 서울 장안을 주름잡았구나.’

싶다. 그는 키도 덩치도 적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문제 아니었다. 그 눈빛 보니 알만 하였다.

<장자>란 책에 싸움 닭 이야기가 나온다.

주나라 기성자라는 사람이 싸움 닭을 길렀는데, 훈련을 받고난 그 닭은 옆에 다른 닭이 다가와도 눈길 한번 건네지않고, 상대가 높은 소리도 울어도, 마치 나무로 만든 닭은 대하듯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한다. 이미 무심의 경지에 든 것이다.

조열승의 눈빛이 그랬다. 동요도 없고 적의도 없다. 그냥 고요하다. 마치 그 쌈닭 같았다.

'그러면 그렇지!'

 나는 속으로 반가움이 치미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짜릿짜릿 신이 났다. 다음 준비한 수작을 건네보았다.

'내가 이 땅을 새로 샀습니다.'

그리곤 뜸을 들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응을 보자는 것이다.

그 말을 듣고 그가 한참 침묵 하더니 혼자 중얼거렸다.

'서울 김ㅇㅇ한테서 이 땅을 샀다고....'

그 말 뿐이다. 원래 고수는 말을 아끼는 법이다.

'그럼 저기 원두막으로 올라갑시다.'

 얼마 후 조열승이 운을 뗀다. 머리가 비상하게 빠르다. 새로 땅 산 땅 주인과 다툴 일이 무엇인가.

 ‘저기 저 호수 속에 보이는 보트도 노인장이 사다가 띄워놓은 겁니까?’

원두막으로 올라가며 내가 물어본 것은 순전히 노인의 비웟장을 한번 건드려 본 수작이다. 곧 쫒겨날 한옥과 원두막과 보트는 그걸 얼마나 만든다고 애쓴 물건들이겠는가.

원두막에 올라가자 그는 한참 침묵 하다가 입을 떼었다.

‘김00가 자유당 국회의원일 때, 내가 그 사람 일을 봐주곤 했소,’

 짐작되는 이야기였다. 자유당 시절에 사례 받고 주먹이 해줄 일 많았을 것이다.

4.19로 감방에 들어가자, 그는 돈 받고 못해준 일 대신에, 자기 부동산 목록을 내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회장이 정릉 집 천여평과 김천 수십만평 과수원까지 가져갔다 한다. 그는 글을 모르는 문맹이라 백지위임장에 손도장을 찍어주었다가 당한 것이다. 임화수 형님한테 호소했더니, ‘'김00 한테 얽혔으면 자네 큰 일 났구먼' 하더란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그를 등쳐먹은 우리 회장이 무서운 분인걸 새삼 깨달았다. 벤츠 타는 재벌이 깡패보다 더 무섭다는 알았다. 그들은 깡패보다 냉혹하고, 간이 더 크다. 

 ‘나야 그런 사정 알 필요 없습니다. 지금 부산 가는데 시간이 없으니, 여기 계속 살 뜻이 있으시면 도지 금액을 저한테 알려주시고, 아니면 이사갈 준비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끊어버리고, 총총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박과장과 희심의 미소를 교환하며 과수원을 내려올 때다.

'여보시오, 젊은 양반!'

 그가 우릴 부르며 급히 내려왔다.

'먼 데서 온 손님인데, 그냥 보낼 수 없고...'

 아래 동네에 가서 막걸리를 사겠다는 것이다. 경우는 있었다.

 동네 구멍가게에서 막걸리 주전자를 비우면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술 들어가면 상대가 누구던 술술 말 잘하는 사람이다. 주거니 받거니 잔 돌리며 그와 꽤 많은 이야길 나누었다.

 

 조열승은 글 모르는 문맹인 대신 기억력은 비상했다. 모년 모일 모처에서 누구와 무슨 이야길 했고, 그때 무슨 이권을 어떤 조건부로 누구에게 받았고, 정치권 누가 관여되었는지를 녹음기 풀듯 줄줄 풀었다.

개인사 이야기도 곁들였는데, 4.19로 감방에 가자 아내는 이혼을 해주었다고 한다. 세상이 바뀌었으니, 과거 가진 자신은 음지에 숨고 아내와 자식은 양지에 살도록 조처한 것이다. 부인은 현재 동대문 모 여학교 재단 이사장이고, 아들은 모 재벌회사 임원이라 했다.

나는 이런 사람 존경한다. 사나이다운 통쾌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래 형님같이 느껴져 이것저것 한참 수다를 떨다가,

'형님! 부산 가는 기차 놓치겠소. 그만 일어납시다'

하는 박과장 말에 일어섰다. 그는 옆에서 맘이 조마조마 했던 모양이다.

 그러고 서울로 올라온 어느 날이다. 수위실에서 전화가 왔다.

'조열승이란 분이 회장님 뵙겠다고 비서실로 올라갈려고 합니다.'

'어? 조열승? 그를 그냥 올려보내면 않돼! 수위실에서 제지해.'

그러자, '우리가 막을 수가 없는데요.'하고 대답한다.

하긴 그렇다. 자유당 때 장안을 주름잡던 그 조열승을 수위실 아저씨가 어이 막으랴.

'그럼 종조실 김전무가 만나라고 하시오.'

 종조실은 그룹 재산 관리하는 곳이다. 관재과 책임자 김전무가 만나면 된다.

그러자 얼마 후 완전 열 받은 김전무 전화가 왔다.

'김실장! 날 더러 조열승을 만나라고?'

'네! 만나세요. 김전무님이 관재부서 책임자 아니십니까?'

'뭐라고? 가만히 있는 호랑이 콧털을 당신이 건드려놓고, 뒷처리를 날더러 하라고?'

'김전무님 반말하지 마세요. 거기가 관재부서 아닙니까. 관재부가 그 땅은 언제 누구에게 팔아버렸다고 말하면 되지 않습니까?'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무슨 말은 무슨 말? 그렇찮아요? 지금 내가 나서면 일이 우습게 됩니다.'

'당신 정말....'

그러는걸 일방적으로 내가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러자 답답한 건 김전무다. 김천 갔던 박과장을 수위실로 내려보내니, 조열승이 누군가. 쎈스가 번개다. 박과장 얼굴을 보자, 두말 않고 가버렸다. 한 시대 주름잡던 암흑가의 보스가 이 장면서 회사가 장난친 걸 모르겠는가.

 조열승이 떠나자, 김전무가 곧바로 회장실로 올라왔다. 회장 앞에서 횡설수설 비서실서 평지풍파 만들었다고 호소한다. 그러자 회장님이 걸작이다.

'김전무 자네도 뱃장이 있어야...같이 김천 다녀왔어야...'

딱 두마디만 하신다. 역시 보스답다. 김천 간다니 빙그레 웃던 회장 얼굴이 새삼 떠올랐다. 김전무는 영문도 모른채 꾸중만 듣고 물러갔다. 나는 그 일로 점수만 땄다. 조열승은 해마다 재산세 고지서만 회사로 올려보냈다.

내가 만난 재벌 총수/ 2

재벌의 첫 번째 특징을 나는 <간뗑이> 큰 사람이라 보았다. 두번째는 <지독한> 사람이라 본다.

 재벌은 지독하다. 먹고 입는 것 모두 지독하다. 사람들은 대개 재벌이라면 자기보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살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정주영씨는 구두 하나를 30년 신었다. 구두가 닳는 걸 막으려고 굽에 징을 박아 다녔다. 그가 살던 청운동 거실 가죽 소파를 20년 썼다. 가죽은 헤져서 허옇고 의자와 테이블의 목재들은 칠이 벗겨져 수리한 자국을 여기저기 있었다. TV는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대형 브라운관이 아닌 17인치 소형이었다.

이건 우리네 평범한 사람 보다 더 지독하다.

초록동색이라고 내가 모신 회장도 그랬다.

 나는 그 양반 자서전을 써줄려고 그 회사로 갔는데, 그가 자서전 메모를 줄 때 맨처음 매우 놀랐다. 메모지를 조석간 신문이 올 때 오는 광고지를 쓰는 것이다. 일부러 절약하고 사는 사람이라는 걸 보여줄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매번 여비서를 시켜 광고지를 네 등분하도록 하여 그걸 메모지로 사용했다. 거기 깨알같이 자신의 자서전 메모를 해서 내게 보냈다.

나는 이걸 원고로 만들고, 그는 평소에 시간까지 아끼는 사람이라 원고를 읽은 후 외출할 때 차 안에서 생각나는대로 흘러간 이야기를 구두로 보태주곤 했다. 그러면 그걸 내가 다시 문장을 만들어 올리곤 했다.

차 이야기 나왔으니 말이지만, 이 양반이 타는 차는 서울 시내에 굴러다니는 보통 외제차가 아니다. 벤츠 중에서도 최고급 벤츠다. 이 놈을 타고 시내에 나가면 서민들은 어찌 그 걸 다들 아는지 모르겠다. 차가 신호등에 걸려 잠시 멈춰 있으면, 이런 차 타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싶어 사람들이 유심히 벤츠 앞자리에 앉은 내 얼굴을 쳐다보곤했다.

나는 수행비서란 걸 하면서 벤츠도 타고 재벌과 식사도 같이 했다. 그러나 모두가 꽝이었다. 벤츠 안에서는 항상 초긴장 해야했고, 식사는 회사원 보다 못한 것만 먹었다. 나는 처음에 재벌의 식사는 호텔이나 요정에서만 하는 줄 알았다. 그래 사뭇 기대가 사뭇 컷었지만 완전 망상이었다. 

 처음 그와 무교동에 갔을 때다. 일제 때부터 하는 추어탕집이 있다고 거길 가자고 한다. 그래서 나는 거기가 유서깊은 곳인줄 알았다. 그러나 달랑 추어탕 한그릇에 김치쪽 몇쪽만 나오는데, 맛도 별 거 아니었다. 값은 당시 곰탕 한그릇 천오백원 하던 시절에 6백원 이었다. 특징이 있다면 값이 싸다는 것이 특징이었다.

두 번째 자주 간 집은 남대문 동방빌딍 지하 국수집이다. 삼성 본사 건물이라 음식도 가게도 깔끔했지만, 모밀국수 한그릇이 설마 얼마 하겠는가. 천원 미만이었다.

 명색이 기자랍시고 나는 전에 곰탕이나 설렁탕도 우습게 보았다가 재벌의 식사에 쇼크를 받았다. 그러나 목구멍이 포도청인데 어쩌랴. 내색도 못하고 따라 댕겼다.

그런데 회장 운전수는 달랐다. 한번은 일주일치 영수증을 가져왔는데, 전부 천오백원 짜리 영수증이다.

'아니 자네는 회장님 보다 더 좋은 걸 먹고 다니나?' 

그렇게 물어보자, 기사는 입을 퉁명하게 동그랗게 부풀리면서 억장이 무너진다는 표정으로,

'높은 분 모시고 온 다른 기사들은 다 곰탕 설렁탕 먹는데, 먹는 것 가지고 우리 회사만 이리 치사하게 나오면 저는 회사 그만두겠습니다'

한다. 하긴 그렇다. 운전수끼리도 체면이 있다. 다른 기사들은 우루루 곰탕집에 가는데 자기만 치사하게 딴 데 못간다. 그래 알았다고 묵인해주었다.

 

그럼 재벌은 손님 초대하면 어떻게 먹는가? 한번은 김모 재무장관을 무교동 <장원>에서 만났다. 여긴 장차관들이 자주 출입한 요정이다.

회장은 방에 들어가면서 나한테 맥주 두 병만 시키라고 한다. 아니 이 양반이 장관을 초청해놓고 쫀쫀하게 왜 이러나 싶었다. 피라미 중소기업 사장이면 이때 최소한 병에 몇십만원 나갈 양주도 시킬 것이다.

 장관이 방에 들어가자 나는 마담에게 시중 드는 아가씨는 특A급을 넣어달라고 부탁했는데, 마담이 그러마고 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차 속에서 문제가 불거졌다. 회장이 식대 영수증 좀 보자더니 세목을 자세히 흝어보고는 팁값이 왜 이리 많으냐고 지적한다. 재무장관 나온 자리라 특 A급 아가씨를 불러서 그렀다고 했더니, 회장이 한참 그 영수증을 들여다보면서 말이 없다. 무슨 그런 철 없는 짓을 했느냐는 질책이다. 그때 나는 깨달았다. 앞으로 왕소금 회장 비서는 그처럼 철저한 왕소금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한번은 신총리를 신라호텔에서 만났다. 초밥을 시켰는데, 식사 끝나고 음식이 좀 남자 회장이 손짓으로 날 불렀다. 주방장에게 남은 건 싸달라고 부탁 하란다. 나는 그런 일은 처음이다. 먹다남은 음식 싸온 적 없다. 회장 지시라 주방장에게 '아마 두 분이 집에 계신 사모님 생각이 나서 그러는 모양이니, 남은 음식은 좀 싸줄 수 있겠소?' 하고 물었더니, 주방장이 의외로 싹싹하다. '네! 알겠습니다.' 시원하게 대답 하더니, 나중에 싸준 도시락을 보니 초밥 몇 개를 더 보충해 아주 새 도시락을 만들어 준다. 아마 신총리가 당시 삼성 이병철씨 고문이라 그랬을 것이다.

 회장은 평소 회사에서 자신은 어떤 음식을 먹는가? 절반은 회사 식당 밥을 먹는다. 만여명 여자 오퍼레이터들이 먹는 회사 식당 밥이란 건 알만하지 않는가? 부장급만 되어도 대개 점심 시간에 삼삼오오 회사 밖에 나가서 외식하고 온다. 자기 아들인 사장은 꼭 워커힐에 가서 먹고온다. 그런데 회장이 그걸 먹는다. 어찌 보면 그런 회장이 더 깊은 뜻이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회사로 지인이 찾아올 때는 어떤 음식을 시키나? 간혹 국회의원 시절 동기가 회사를 찾아온다. 그때 회장은 자주 오는 사람에겐 친하다는 핑계로 회사 식당 밥을 권한다. 간혹 생색을 낼 때는 인근 중국집 짜장면을 시킨다. 한 등급 더 귀한 분이 오면 탕수육도 시킨다.

친구 분이 혹시 어디 워커힐 같은 데로 데리고 갈 것으로 생각하고 왔다면 그건 완전히 오산이다.

 그럼 회장이 집에서는 어떤 식사를 하나? 회장의 밥상에는 밥이 없다. 홍삼 가루 뿌린 배추나 상추 겉저리, 그리고 잣, 땅콩, 대추, 해바라기씨, 홍당무 쥬스, 잔 멸치 한 접시가 나온다. 모두 의사가 시킨대로 몸에 좋다는 것들이다.

한번은 웃지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언젠가부터 회장 안색이 황달병에 걸린듯 노래진 것이다. 아무래도 심상찮아 서울대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검진을 해도 이유를 알수없다고 한참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리고 얼마 후 박장대소를 했다. 몸에 좋다는 홍당무를 너무 많이 섭취해서 얼굴이 노래진 것이다.

 부창부수라 한다. 회장님 사모님 이야기도 해보자.

한번은 사모님 운전수가 사표를 들고왔다. 왜그러냐고 물어보니, ‘사모님이 옛날에 자기가 살던 돈암동 시장엘 다니는데, 사내 자식이 장바구니 옆에 끼고 따라댕기기 챙피해서 그런다는 것이다. ’어이 소기사! 자네 할머니 모시고 시장 간 셈 치지 그게 뭐가 그리 챙피해?‘ 그랬더니 사연이 이렇다.

사모님은 시장을 한번 도는 법이 없다. 이 집 저 집 값을 비교하며 두어번 돈다. 물건은 최상품 골라놓고 값을 에누리한다고 매번 상인들과 싱갱이를 벌린다. 그러니 시장 상인들이 벤츠 타는 사람이 저런다고 사모님만 보면 입을 삐쭉거리며 쑥떡거리니, 명색이 사내란 자식이 그 뒤를 장바구니를 들고 강아지처럼 쫄쫄 따라다니기 챙피해서 그런다는 것이다. 그래 낮 간지러워 못해먹겠다는 소기사를 수당 올려주고 달래느라고 애 좀 먹었다.

그러나 사모님이 이런 면만 있는 건 아니다. 한번은 사모님이 내게 배 한쪽을 권하길래 먹어보니, 그게 보통 배가 아니다. 어디서도 그런 향기롭고 달콤한 배를 먹어본 적 없던 것이다. 그래 내가 좀 애교를 피웠다.

‘어이 미스 조! 이 배를 골라온 사모님 안목은 대학교 조리학과 교수보다 더 높다. 이 배 한쪽은 뭘 모르는 사람이 선물해준 배 한 박스보다 가치가 있다. 배 하나 사는 데도 사모님은 철학이 있다. 언제 어디서 누가 생산한 배가 맛이 좋은지 사모님은 다 알고 계신다. 등록금 내고 대학 다닐 필요없다. 사모님한테 이런 거만 잘 배워도 대학 다니는 것보다 낫다.’

그후 사모님은 내가 댁에 가기만 하면 무조건 뭘 하나 자시고 가라고 권했다. 미스 조 이야기로는 계열사 사장급이 와도 사모님이 그런 적 없다고 했다.

그럼 이 분들은 옷은 어떤 걸 입는가?

한번은 사모님이 안방 장롱에 보관한 옷을 보여준 적 있다. 큰아들이 유치원 다닐 때 입던 옷들이다. 그 아들은 미국서 대학 박사학위 마치고 대학교수 하다가 기업에 투신한 환갑을 지낸 아들이다. 그 옷들은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가면 박물관에 보내거나, TV ‘진품명품’ 프로에 내보낼 그런 옷이었다.

회장은 평소 잠바차림으로 회사에 출근한다. 원래 인물이 미남인데다 수염을 길러 그 인상이 마치 헤밍웨이 같다.

그런데 회장이 입고있는 속옷도 걸작이다. 볼만한 것이다. 회장은 여름에 간혹 전용 서도실에서 붓글씨를 쓴다. 그런데 반도체 공장은 공장 전체가 일정 온도와 일정 습도를 유지하건만, 서도실은 에어컨을 켜지못하게 한다. 이 바람에 한여름에 한 시간 전에 올라가 먹을 갈아야 하는 운전수만 이마에 닭똥같은 땀을 흘리며 골병이 든다. 그러나 회장은 태연하다. 올라오면 빤스 런닝 차림으로 글씨를 쓴다. 내가 그걸 보고 놀래서 뒤로 나자빠져버렸다. 런닝은 입은지 하도 오래라 여기저기 구멍이 쑹쑹 나있고, 빤스는 너덜너덜 여기저기 기워 입었다.

 이 상거지 차림이야말로 좋은 소재감이었다. 옳다구나 싶어 내가 신문기자를 불렀다. 재벌의 희안한 모습을 인터뷰 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 C일보 기자를 초청해서 서도실서 런닝과 빤스 차림 그대로 사진 찍게하고, 댁에 데리고 가서 집 사진도 찍었다. 그 집은 회사옆 시장 골목 안에 있는데 재벌 집이라곤 전혀 믿지못할 허룸한 2층집이다.

그러자 회장이 이건 아니다 싶었던 모양이다. 살짝 날 부르더니 불안한 표정으로 괜찮겠느냐고  묻는다.

'네! 괜찮습니다.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일부러 보여주는 겁니다.'

그래놓고 인터뷰 끝머리에서 내가 기자한테 약간 해설을 해주었다.

'우리 회장님 사는 모습을 잘 보셨지요? 회장님은 이렇게 살지만, 회사 직원들 처우는 괜찮습니다. 그들 월급은 한국의 평균 임금보다 높습니다. 자기는 서도실에 에어컨도 켜지못하게 하지만, 공장 전체는 완벽한 냉난방 시스템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런 공장에서 사원들은 완전 자동화 로붓화 된 기계로 반도체를 생산 합니다. 그 기계 한 대 한 대 가격은 30만불을 넘습니다.

우리 회장은 일본의 마스시타, 미국의 모토롤라, 텍사스인스트루먼트 회장같은 세계적 거물들과 거래합니다. 근검절제하며 자신의 할 일 묵묵히 하는 이런 우리 회장을 어떻게 보십니까?

소비가 미덕이라는 말이 있지요? 우리 회장님은 그건 참으로 생각이 얕은 사람들 이야기라고 합니다. 불과 몇 십년 전에 일제 침략을 당해서 식민지 나라였고, 그 다음에 6,25의 민족 참화를 겪은 우리가 그런 걸 금방 잊어버리고 소비가 미덕이라고 하면 되겠냐고 하십니다. 그걸 경박한 풍조라고 하십니다. 이런 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래놓고 보냈더니 며칠 뒤 C일보에 큼직한 가사가 실렸다. 의도한 그대로 였다.

자동화된 최신식 공장 사진과 시장 골목 안 여관들에 둘러쌓인 허룸한 회장 집사진을 싣고, 자신은 근검절약하면서 사원 복지는 국내 최상급이라느니, 한국의 마쓰시따고노스케 같은 사람이라느니, 이런 분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진정한 귀감이 되는 분이라느니, 맘대로 읊어놓았다.

기사를 스크랩해서 여비서더러 회장실로 가져가 읽어드리라고 지시했더니 금방 반응이 온다. 급히 회장님이 찾는다고 해서 들어가보니, 회장 입이 귀에 걸렸다. 만면의 미소를 띄우며 봄바람처럼 따뜻한 목소리로, ‘그 기자 돌아갈 때 거마비 잘 챙겨주었느냐’고 묻는다.

회장은 여행을 하면 어떻게 하는가? 마쓰시타 일로 일본에 자주 가는데, 숙소는 주로 ‘데이고꾸’ 호텔을 이용한다. 제국(帝國)호텔은 125년의 역사를 가진 곳으로 아무나 들랑거리는 그런 곳이 아니다. 국빈급 인물들 들락거리는 곳이다.

아마 젊어서 회장은 일본에서 자전거 점방 점원 노릇 할 때 한이 맺혀서 그랬지 않나 싶다. 그래 꼭 제국호텔만을 이용했다.

그런데 돌아왔을 때 짐을 정리해보면, 꼭 가져오는 것이 있다. 호텔 방에 있던 면도기, 비누, 빗, 성냥 같은 일회용 용품을 깨끗이 챙겨오는 것이다. 물론 그 물건들은 최고급 호텔 손님에게 제공한 물건이라 품질이 웬만한 시장바닥에선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랬는지, 아니면 호텔비 지불했으니 가져와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회장의 그 속셈은 지금도 알 수 없다.

한번은 미국 여행 다녀와서 왕소금 회장이 비서실 남자들에게 선물을 하나씩 준 적 있다. 아주 작은 것인데. 펼쳐보니 주석으로 만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딍 모형이다. 아마 화와이 기념품 가게서 몇 센트 주고 산 모양이다. 나는 이걸 포장지채 둘둘 말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여비서가 그걸 회장에게 보고했을 것이다. 얼마 후 회장이 나를 불렀다.

‘자네는 입사한지 십년도 넘었고....’

어쩌고 하며 한참 서론을 널어놓더니, ‘집에 전화기가 없지?’ 하고 묻고, 청색전화기나 하나 놓으라며 20만원인가 들었다며 금일봉을 준다.

그래 나는 그 자리서 받을 수 없다고 잘라 버렸다. 지독한 회장 밑에서 10년을 일했는데 그걸 말이라고 하나 싶었던 것이다. 그건 보답이 아니라 사람 깔보는 행동이었다.

‘회장님! 회장님께서 평소 누누이 말씀하시다시피 우리 회사가 반도체 사업 하느라고 얼마나 자금이 어렵고 애로가 많습니까? 저는 그 돈 생각이 없습니다. 받아서 않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딱 짤라버렸다.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면 재벌은 돈 많으니 무조건 부러운 존재다. 그러나 곁에서 보면 불쌍한 존재다. 집에선 딸들이 형제에 대한 분배를 불평하며 아침 밥상머리에 앉아 눈물 찔끔거리지, 회사 나오면 중역이 입으로 온갖 충성을 바치면서 은근히 부정을 저지르지, 노조는 대놓고 악덕기업 운운하지 사면초가다. 그렇다고 재벌이 하루 밥 열끼를 먹나? 찾아오는 사람들은 모두 이권 때문에 찾오고, 돌아가면 입방아 찧는다. 은행장 눈치 봐야지, 청와대 눈치 봐야지, 하다못해 세무서 담당 주사도 명절에 선물해야 한다. 선물 보내는 리스트가 백군데 2백군데도 넘는다. 어느 곳 하나 잘못하면 피해 입는다.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 세상 모두가 상전이다.

그래 내가 한번은 ‘나는 회장 시켜줘도 안한다’고 비서실서 떠든 적 있다.여비서가 보고를 한 모양이다. 회장이 또 나를 불렀다.

‘자네가 회장 시켜줘도 안한다고 했다던데?’

하고 물었다. 속으로는 이리 말한 놈을 어디 좀 보자 싶었을 것이다.

‘네! 그랬읍니다. 제가 회장님을 오래 모시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회장님은 남들이 노인이라고 일을 포기하는 60 나이에 후진국이던 이 나라에다 첨단 반도체 산업을 접목시켜야 되겠다는 사명감으로 회사를 창업하고, 그 어려운 환경을 주야불문 전심전력 혼신의 힘을 기울려 극복하여 이 회사를 만든 것 아닙니까?

저 같은 사람은 그런 사명감도 없고, 초인적 집념도 없지 않습니까? 그 근처에 갈 자격도 없는 놈이라 그리 말한 것입니다.‘

이 놈 참 당돌한 놈이구나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리 주서섬기는 놈을 어쩌겠는가. 나는 월급은 그 밑에서 받지만, 정신은 자유로워야 한다고 늘 생각했다.

 

 아담스미스의 <국부론>을 보면, '보이지 않는 손'이란 말이 있다. 자본주의는 개인의 이익을 창출하려는 개인의 이기적인 동기에서 시작된다. 국가적 부의 원천은, 노동 분업과 시장 경제, 인간의 이기적 욕구에서 나온다. 인간의 이기적 욕구는 나쁜 면도 있지만, 그 행동이 국가를 발전 시키는 원동력이다. 인간의 이기적 행동을 반드시 나쁘게 볼 것 만도 아니다.

  나는 한국 재벌은 역사 속에 등장하다가 사라진 하나의 삐에로라 생각한다. 그들은 6.25라는 시대적 격동기에 나타난 삐에로다. 그러나 그들의 지독한 탐욕은 오늘 우리나라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끌어낸 원동력이다.

재벌이라면 무조건 입에 침을 튀기며 욕만 해서는 않된다. 좋은 점도 있고 나쁜 점도 있다. 그들은 고상한 사람은 아니다. 장부 조작, 탈세, 모략, 임금 착취, 뻔뻔함이 그들의 본모습이다. 그러나 그들의 이런 부정적 요소와 집념과 근검절약의 정신이 세계 경제 10위귄에 진입한 오늘 우리나라 발전의 밑거름인 것이다. 

내가 만난 재벌 총수/3

재벌의 세 번째 특징은 무엇인가? 무식이다. 세상 사람들은 대개 공부 잘해야 출세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무식해야 재벌 될 수 있다. 유식한 사람은 어려운 입사시험 뚫고 남의 회사 들어간다. 거기서 평생 월급쟁이 노릇이나 하는데, 무식한 사람은 궁즉통이라고 제 스스로 회사 만들고 나중에 운 좋으면 재벌이 된다.

  일본 마쓰시타전기산업(松下電器産業)의 창업주 마쓰시타 고노스께(松下幸之助) 옹이 그런 사람이다. 그는 학력이 국졸이다. 일치감치 자영업에 성공하여 나중에 일본에선 그를 경영의 신(神)이라 불렀다. 그는 중국과의 교류를 트기 위해 맨처음 일본 재계 인사들을 대동하고 중국에 들어가 등소평을 만난 안목이 대단한 사람이다.

내가 근무한 회사는 일본 마쓰시타와 칼라 TV 기술을 공유했던 회사다. 국내에서 파나소닉(Panasonic), 내셔널(National) 상표로 칼라TV를 세계에 수출한 회사다. 마쓰시타 사람들과 왕래도 잦았고, 고노스께 옹과 서신 교류도 많았다. 옹은 한국의 6.25 동란으로 일본이 경제적 호황을 누렸다고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며 한국에 칼라TV와 오디오 기술을 이전해준 친한파 인물이다.

나는 옹이 우리 회사로 보낸 친필 서신을 보고 깜짝 놀란 적 있다.

모든 편지는 단 한 장의 종이에 씌여있었다. 호칭, 안부, 본문 그리고 끝나는 인사말과 날자가 군더더기 없이 자로 잰듯 정확히 한 페이지에 적혀 있었다. 편지지도 특이했다. 보통 우리가 접하는 그런 편지지가 아니었다. 군데군데 하얀 은빛 나는 딱나무 섬유가 박힌 화선지였다. 편지지에 그어진 줄도 예사롭지 않았다. 푸른 곡선이 자연스레 그어진 그 편지지는 하나의 예술품 이었다.

그 바람에 내가 수고 좀 했다. 고노스께 옹과 같은 품위 있는 편지지 구하려고 인사동 지업사 않가본 곳 없다. 돈은 얼마던지 줄테니, 이런 편지지 만들어 달라고 지업사 사장 붙들고 부탁도 많이 해보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국은 그런 고급 편지지 시도해볼려는 곳이 없었다.

  어쨌던 나는 국내 방송과 신문사에 마쓰시타를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길을 열다’같은 고노스께 옹의 저술도 소개하고 마쓰시타 회사 근황도 알렸다.

고노스께 옹이 방한했을 때는 우리 회사가 그 안내를 맡았다. 청와대, 전방 시찰, 요정 삼청각, 새마을본부, 전경련 강연, 방송국 방문 스케쥴을 만들었다.

후에 마쓰시타 정경숙(政經塾) 숙생(塾生)들의 방한 때도 그 스케줄을 처리했다. 정경숙은 고노스깨 옹이 일본 차세대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만든 학교이다. 일본 최고학부를 나온 사람을 선별하여 숙생(塾生)으로 만들고 모든 경비를 마쓰시타가 지불하여 차세대 일본 지도자를 양성하던 학교다.

나는 그들을 한국의 대기업 과장 매스컴 기자들과 만나게 주선했다. 한일 엘리트 간의 간담회를 통해 차세대 한일 친선을 위한 대화의 장을 마련했다.

그런데 그들은 특이했다. 귀국하자 대부분 나에게 편지를 보냈다. 우리나라에선 보기 드문 풍조다. 나중에 숙생 중에서 25명의 민주당 의원이 나왔고, 마에하라 세이지(前原誠司) 국토교통상과 하라구치 가즈히로(原口一博) 총무상이 나왔다는 걸 알았다.

어쨌던 이런 엄청난 업적을 이룬 고노스게 옹은 일자무식이다. 국내 재벌도 그 점은 마찬가지다. 한국 최고 재벌 정주영씨도 그랬고, 내가 모신 회장도 그랬다. 그들은 무식했지만 재벌이 되었고, 엄청난 업적까지 남겼다.

내가 모신 회장은 아들 셋이 박사지만 학벌에 대한 컴프렉스가 항상 깔려있었다. 그 세 아들 이름 밑에 항상 박사란 칭호를 부치곤 했다.

그 학벌 컴프렉스가 잘 나타난 곳이 국회의원 동우회 서도전에서다. 한번은 국회 건물 안에서 국회의원동우회 서도전이 열렸는데 거기서 이런 일이 있었다. 우리는 국회의원이라면 막연히 뭘 좀 아는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곁에 가보면 교양이 깡통인 분이 많다.

그날 국회의장 이재형씨와 실세이던 노태우의원이 참석했는데, 모두 윤길중 의원이 쓴 <귀거래사> 병풍을 보자 일제히 고개를 끄떡끄덕하면서 감탄하는 시늉을 보였다. 윤의원은 역대 국회의원 중 최고 명필로 꼽히는데 그날 출품한 글씨는 초서로 휘갈겨 쓴 것이다. 뭐가뭔지 읽기도 어려운데, 그걸 모두 아는체 한 것이 실수였다. 코메디였다. 그 병풍은 표구가 잘못되어 병풍 글씨 두 장이 순서가 바뀌어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대학시절에 도연명의 <귀거래사>를 외운 적 있어 초서는 모르지만, 군데군데 아는 글자가 있어 문맥으로 짚어나가다가 그걸 발견한 것이다. 그래 회장에게 슬쩍 귓속말로 알려드렸는데 회장이 그걸 그냥 지나갈 사람인가?

 '여보시오들! 잠간 이거 좀 보고 갑시다.' 

의기양양하게 큰소리로 사람들 불러세우고는 손가락으로 병풍을 가르키며 표구가 실수한 것 같다고 딱 선언을 한다. 초서를 모르는 사람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나중에 윤의원이 해명을 했다. 동생을 시켜서 작품을 표구했는데, 표구사에서 표구를 바꿔서 잘못했다는 것이다. 이날 우리 회장은 기분이 최고였을 것이다.

돌아오는 차 속에서 나에게 속삭였다. ‘앞으로 서도전은 반드시 자네가 수행을 하게!'

  

 회장은 서도를 2십년 했는데, 한번도 한시(漢詩)를 쓴 적은 없다. 바쁜 시간에 언제 한시나 즐기고 있었겠는가? 돈만 보고 죽기살기 초지일관 했지, 한시 배울 겨를이 있겠는가? 한시는 담 넘어 옆 집 마당에 열린 홍시였다. 그가 빗자루같이 큰 붓으로 화선지 반절지에 죽어라고 쓴 글씨는 불심(佛心) 두 글자다. 그러면 불심(佛心)은 깊은가? 나는 그 분이 절에 가서 기부금이라는 걸 십원 한 장 내는 걸 본 적 없다.

회장의 글씨체 모양은 대충 괜찮은 편이었다. 원래 펜글씨도 달필이었다. 그러나 그 서예 글씨는 페인트공이 페인트 칠하듯 몇번이고 덧칠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돈 밝히는 아첨쟁이 서예선생이 불을 질렀다. ‘회장님 글씨는 천하명필’이라고 칭찬한 것이다. 그 바람에 사단이 생겼다.

 의원 동료인 성균관대학 재단이사장한테 글씨를 보내는데, 회장은 표구를 하지말고 글씨만 그냥 보내란다. 결례라 싶어 내가 표구를 않는지 두번 확인해도 그냥 보내란다. 천하명필은 글씨를 표구 않고 보내야 된다고 착각한 것이다.

동작동 그분 댁에 글씨만 달랑 들고 갔다가 못볼 꼴 보고말았다. 글씨를 본 그 분이 갑자기 얼굴이 확 변하면서, 무언가 불쾌한 몇마디 말을 중얼거리면서, 내가 보는 앞에서 그 글씨를 쓰레기통에 확 던져버린 것이다.

 큰 붓도 문제였다. 한번은 서예 선생이 회장님 글씨가 힘이 있어 좋다고 칭찬한 적이 있다. 그러자 회장은 신이나서 글씨를 힘있게 쓴다고, 먹이 잔득 묻은 그 빗자루 같이 큰 붓으로 힘차게 화선지를 찍어 누르니 화선지가 배겨날 수 있겠는가. 화선지가 찢어지니 벼락을 맞는 것은 서도실 먹 가는 운전수다. 왜 좋은 종이 골라올줄 모르냐고 인상을 쓰며 짜증을 내자 그가 나에게 불평을 했다.

‘그렇게 큰 붓에 먹물을 마구 묻혀서 찍어누르는데 찢어지지 않는 화선지가 어디있습니까?’

내가 그를 데리고 인사동 이 골목 저 골목 지업사들을 찾아가 수소문해보니, 우리가 필요한 그런 화선지 만들 공장도 없거니와 회장의 무식도 들어났다.

‘원래 글씨의 힘이란, 붓의 속도에 있지, 힘차게 찍어누르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화선지는 그 원료가 되는 닥을 많이 쓰면 질겨지지만 질이 거칠어지기 때문에 전문가는 그런 화선지를 쓰지 않는다’

그게 그 일의 결론이었다.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내는 것을 최소비용의 원칙이라 한다. 그런데 회장은 그 점에선 틀림 없다. 마쓰시타는 칼라 TV와 오디오 기술을 한국에 전수해준 대신에 회장은 ‘불심(佛心)’ 글씨 한 장으로 그쪽에 사례했다. 화선지에 먹글씨 몇 자 끄적거려 쓴 것 표구하는데 몇 푼 들겠는가.

글씨 외에 보낸 선물은 수삼이다. 담금주로 담은 수삼을 보낼 때는 선물 옆에 일본어로 씌여진 인삼 해설서를 동봉했다. 처음 이 수삼 선물을 받은 사람은 마쓰시타 창업주 고노스께 옹이다. 

 책자에는 신선같은 백발노인이 인삼 밭에서 방금 캔 수삼을 들고있는 사진이 실려있다. 회장 자신이 사진 모델이다. 포천에 있던 삼밭에 삼 사러 갔을 때 찍은 것이다. 책자를 본 사람들은 회장이 직접 대한민국에서 가장 좋은 삼밭을 마련해 가꾸는 줄 알 것이다. 

 책자에는 동경도립연구소 농학박사 유택문정(柳澤文正)씨 논문과 허준의 동의보감을 인용하였다. 거기 인삼의 효능이 설명되어있다. <본초강목>, <해동기략>도 소개되고, <신농본초경>, <향약집성방>도 언급되어있다. 인삼 복용법과 태양인 태음인 사상의학 체질도 소개되어 있다.

산삼 사진도 첨부되어있다. 천연 산삼의 약통과 뿌리혹, 뇌두에 대한 설명도 있다. 산삼 복용법도 소개되어 있다. 산삼은 반드시 대나무 칼로 잘라야 하며 옹기 그릇에 다려야 한다, 쇠칼이나 쇠그릇에 닿으면 않되기 때문이다. 산삼은 토봉에 하루 담가두었다가 아침 공복에 먹어야 한다.

이 책의 편집은 경희대 한의대 학장과 경동시장 한약방 사장들에게 자문을 구한 내가 했고, 일본어로 번역한 것은 회장 본인이다.

마스시타 중역들은 한국 인삼을 좋아한다. 특히 산삼 해설서 동봉된 우리 회장 수삼을 좋게 생각했다. 은근히 수삼 선물 받기 암시하는 측도 있었다.

그러니 매번 일본에 갈 때마다 죽어나는게 비서실이다. 공항 귀빈실에 열 개도 넘는 수삼 병 나래비 시키고, 비서실 직원은 그걸 검색대로 통과시키려고 담당자에게 로비했고, 그들은 A그룹은 일본에 수삼 장사하러 다니냐며 웃곤 했다. 좌우지간 수삼 병은 폭 15 높이 30센치 크기다. 그런거 열 개를 들고 일본 열도를 끙끙대며 다녀오던 수행자는 고달펐다.

 수삼 선물은 수삼 값, 병 값, 소주값, 몽탕 쳐야 5만원 못미친다. 이 역시 최소비용으로 최대효과를 얻는 것이다. 

 재벌의 직감은 천재에 가깝다. 돈 냄새 나는 일엔 일반인이 꿈에도 미치지 못한다. 거의 귀신의 경지다. 그러나 교양은 어떤가?

한번은 명동에 갔는데, 길바닥에서 유화를 잔뜩 늘어놓고 팔고 있었다. 물레방아, 폭포, 초갓집이 그려진 전형적인 이발소 그림이다.

회장이 그 그림을 보더니 문득 나를 돌아본다. 눈치가 그림이 맘에 든 눈치였다. 한 점 흥정해보라는 눈치다.

재벌이라고 이발소 그림 좋아하지 말란 법은 없다. 그러나 비서는 다르다. 그가 길바닥에서 그런 그림 흥정하는 모습을 누가 알까 챙피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래 황급히 말머리를 돌리면서 그가 그림 옆에서 떨어지게 할려고 진땀을 뺀 적 있다.  

 홍콩 다녀오면서 사온 비단에 그려진 호랑이 자수 그림 넉 점 때문에도 애를 먹었다. 댁으로 오란다해서 가보니 호랑이 자수 넉 점을 보여준다. 이걸 표구해서 하나는 거실에 걸어두고, 세 개는 아들 딸 집에 하나씩 보내란다. 집집이 유치한 그림 걸어두고 떼망신 하겠다 싶었다.

그래 이렇게 말씀드려 막았다.

‘회장님 지금 거실에 걸려있는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의 글씨는 너무나 품격이 높습니다. 그 옆에 이 호랑이 그림을 걸리면 집안 분위기 망칩니다.’

한번은 서울대 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혈액형이 무어냐고 묻자, 회장이 뒤를 돌아보며, ‘어느 것이 좋은 것이냐?’고 묻는다. 혈액형도 좋은 걸로 택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좌우지간 세상은 공평하다. 나는 한국 역대 재벌 중에 창업주가 S대 출신이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다. 무식한 자여 복이 있으라! 그대 이름은 재벌이니라.

요즘 아이들 과외공부 시킨다고 주부들이 희생하는 풍조가 있다. 영어 공부 시킨다고 엄마가 아이 데리고 외국 나가는 바람에 기러기 아빠된 사람 많다. 그러나 보상은 의문이다. 모든 걸 자식에게 쏟는다고, 자식이 반드시 까마귀처럼 반포지효(反哺之孝) 하지 않는다. 나중에 헌신짝처럼 취급받지 않으면 다행이다.

나는 사회에 꼭 이 말은 전하고 싶다. 공부 잘 했다고 다 출세하는 건 아니다. 출세했다고 다 효도하는 건 아니다. 일자무식이 재벌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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