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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 무엇일까'

김현거사 2016. 4. 6. 11:25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이 무엇일까'

 

 선시(禪詩)나 조사들 종게(臨終偈)를 보면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구절들이 많다. 

 

 백운(白雲)·나옹(懶翁)과 함께 여말3가(麗末三家)로 불린 태고보우(太古普愚)는 종게에서 '사람 목숨은 물거품처럼 빈 것이어서 팔십여년이 봄 날 꿈 속 같았네. 죽음에 다달아 이제 가죽 푸대 버리노니, 붉은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네.' 라 했고, '태고암가(太古庵)'에서 '하늘과 땅을 덮개 삼아 앞뒤가 없고, 동남북 어디라도 머물지 않네. 구슬 누각, 백옥 전각 비할 바 아니고, 소림사의 풍습과 규정도 따르지 않는다. 팔만 사천 번뇌문을 다 부수니, 저 구름 밖 청산이 푸르구나.' 하였다.

 

  무학대사의 스승이며 고려 공민왕의 왕사(王師)였던 나옹(懶翁)은 '토굴가(土窟歌)'에서 '교교(皎皎)한 야월(夜月) 하에 원각산정(圓覺山頂) 선 듯 올라, 무공적(無孔笛)을 빗겨 불고 몰현금(沒絃琴)을 높이 타니, 무위자성진실락(無爲自性眞實樂)이 이 중에 갖췄더라. 석호(石虎)는 무영(無詠)하고 송풍(松風)은 화답(和答)할제, 무착영(無着嶺) 올라서서 불지촌(佛地村)을 굽어보니, 각수(覺樹)에 담화(曇花)는 난만개(爛慢開)하였더라.'고 읊었다.

또 '문이 없다(無門)'는 시에서 '眼耳原來自沒從( 눈과 귀는 원래 자취가 없거늘), 個中誰得悟圓通 (누가 그 가운데서 원통을 깨우칠 것인가). 空非想處飜身轉 (텅 비어 형상 없는 그곳에다 몸을 굴리니), 犬吠驢鳴身豁通 (개 짓고 나귀 우는 울음 모두가 활통하거니).' 하고 읊었다.  

 

 서산대사의 스승인 보우(普雨)는 '산과 나를 다 잊는다(山我兩忘)'는 시에서 '내가 산이고 산이 나인 이치 사이에 빈틈이 없으니, 누가 산(山)이며 누가 나인가. 내가 산과 다르다고 집착하면 아상(我相)에 떨어지고, 산은 알고 내가 없으면 미망(未忘)에 떨어지리. 곧바로 알음알이 던져버리고, 근본 우주가 하나임을 보아라. 내 눈에 가득 들어오는 모든 것, 동쪽 숲 봄에 흠뻑 취해 선(禪) 삼매에 빠져 있다.' 하였고, '후배스님에게 공부하는 법을 보인다(示小師等做工勉力)'는 시에서 '선방에 물뿌리고 청소하는 이는 이 도를 알고자 하는가, 구하는 것이 일찍이 다른 데에 있지 않네. 동쪽 울타리에 국화 심고 밭둑에 채소 심으며개울에 적삼 빨아 푸른 등넝쿨에 걸어 말리네. 추우면 화로불에 다가가 고요한 선실에서 졸고, 더우면 맑은 물 찾아가 푸른 물에 목욕하네. 어리석은 사람은 이런 자신이 천진불인줄 모르고, 이 몸 밖에서 부질없이 부처님을 찾네.' 하였다.

 임종게(臨終揭)에서는 '허깨비가 고향에 찾아와서, 오십여년 미친 놀음 하다가, 인간 영욕사 다 마치고, 중의 허물 벗고 창창한 하늘로 가노라.' 하였다.

 

 또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을 지휘한 서산대사(西山大師)는 '삼몽사(三夢詞)'란 시에서 '주인은 손에게 꿈을 이야기 하고, 손은 주인에게 꿈을 말하네. 지금 꿈을 이야기 하는 두 사람, 그 모두 꿈 속의 사람들이지.'라고 읊었고, '천계만사(千計萬思)'란 시에서 '천 가지 만 가지 생각 모두가, 숯불 위에 내리는 한 점 눈송이네. 진흙 소가 물 위로 가니, 천지와 허공이 갈라지는구나.'하고 읊었다.

 또 임종게(臨終揭)에서 '삶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짐이라. 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으니, 죽고 살고 오고 감이 모두 그러하다.'고 읊었다. 

 

 이 밖에 근대 한국불교 중흥조인 경허(鏡虛)는 오도송에서 '홀연히 사람에게서 고삐 뚫을 구멍(無鼻孔) 없다는 말 듣고, 삼천 대천 세계가 이 내 집임을 몰록 깨달았네.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들 사람 일이 없어 태평가를 부르네. 라고 읊었다.

 또 한용운과 함께 3.1운동 민족대표 33인에 불교 대표로 참가했던 용성(龍城) 스님은 '부채'라는 시에서 '종이에 종이 없고, 대에 대가 없는데, 맑은 바람은 어디서 나오는가? 종이가 공(空)한, 대도 공(空)한, 그곳에 맑은 바람이 스스로 오고가네.'라 읊었다.

 통도사 조실 구하(九河)스님은 오도송에서 '空山理氣古今外 (빈 산의 이치가 옛과 지금 밖이니), 白雲淸風自去來 ( 구름 맑은 바람 예부터 스스로 왔도다). 何事達摩越西天 (달마대사는 무슨 일로 서천을 넘어왔는가), 鷄鳴丑時寅日出 (닭은 축시에 울고 해는 인시에 뜨는구나). 라 읊었다.

 

 여기서 가죽푸대는 무엇이며, 구멍 없는 피리 무공적(無孔笛)과 줄 없는 거문고 몰현금(沒絃琴)은 무엇인가. 돌호랑이 석호(石虎)는 무엇이며, 숯불 위에 내리는 한 점 눈송이나 물 속을 걸어가는 진흙 소는 무엇인가.

 스님 중에 한 나라 임금의 스승도 있고, 병란에 나라를 구한 의병장, 일세에 문장을 떨친 선지식도 있다. 

 그들 모두 말장난만 하고 간 것일까. 속인이 선어(禪語)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럴까? 마치 실밥 한 끄트머리를 당기면 제대로 주루룩 풀어지는 그런 해법은 없는가.

 필자의 좁은 소견으로는, 조계종의 소의경전(所依經典)인 금강경(金剛經)과 ​반야심경(般若心經)을 제대로 이해하면 가능하다 싶다.

 

 ​우선 공(空)이라는 개념의 이해가 필요하다.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이 반야바라밀다(深般若波羅密多)의 사상을 깊이 수행할 때, 오온(五蘊)이 모두 공(空) 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모든 고액(苦厄)과 고통을 넘어갈 수 있었다.)

 
 오온이란 무엇인가, 유형의 현상계와 물질을 총칭하는 색(色), 감각작용을 뜻하는 수(受), 지각(知覺)을 뜻하는 상(想), 행위를 뜻하는 행(行), 식별을 뜻하는 식(識), 다섯가지를 말한다.

 사람의 육체와 정신, 오온(五蘊)이 왜 공한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몸도 마음도 하루, 한 시간, 일초마다 변한다. 어제 내 몸 오늘 내 몸이 아니고, 잠시 전 내 생각이 잠시 후 내 생각 아니다. 변화 그 자체다. 나라는 것이 원래 없다. 그래 제법무아(諸法無我)다. 말이 닿지 않고, 말이 끊어진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심전심으로만 이해되는 것이 우리의 본래 모습이다. 우리 본래 모습이 제법무아일뿐 아니라, 우리 주변, 예를 들면 태양과 지구도 제행무상(諸行無常) 속에 있다. 어느 하나 일정한 것 없다. 변한다. 그래 부득이 제법무아(諸法無我) 제행무상(諸行無常)을 공(空)이라 부르고 불립문자(不立文字)로 표현한다.

 공(空)이란 무엇인가? 공은 우리 언어로서 설명할 수 없다. 유(有)의 반대인 무(無)도 아니고, 실제 존재하는 실체에 반대되는 가공의 허상도 아니다. 불확실한 우리 오관(五官)에 포착되는 그런 부정확한 것은 더군다나 아니다. 생주이멸(生住異滅)을 떠난 실상이다. 프라톤의 '이데아' 비슷한 개념이다.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불(舍利 佛)이여, 깨닫고 보면, 물질 현상계인 색은 실상인 공과 다르지 않고, 반대로 실상인 공은 현상계인 색과 다르지 않으며, 물질적 현상이 곧 본질인 공이며, 공이 곧 물질적 현상이니라.

그러므로 중생의 마음에 새겨진 감각작용, 지각작용, 의지적 충동, 식별작용 같은 수상행식(受想行識)이 곧 여래(如來)의 마음에 새겨진 공(空)이요, 여래의 공(空)이 곧 깨닫지 못한 이의 색(色)과 같으니라.)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불이여, 이 우주(十方世界)에 존재하는 유무형의 모든 존재와 현상과 법칙이 원래는 헛된 상이니, 이 모든 현상계는 관세음보살의 차원에서는, 새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죽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더러운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니고, 증가하는 것도 아니고, 감소하여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 이것이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현대 물리학의 근원인 '에너지 불멸의 법칙'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서산대사의 시, '생자일편부운기(生者 一片浮雲起), 사자일편부운멸(死者 一片浮雲 滅)'. 즉 '태어남은 한조각 뜬구름이 일어남이요, 죽음은 한조각 뜬구름이 없어지는' 이치가 이해될 것이다.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생주이멸(生住異滅)을 떠난 실상의 세계인 공(空)에서는, 우리의 불확실한 오관에 포착되는 물질계의 모든 것은 없는 것이다. 육진(六塵)이라 불리는 눈, 코, 귀, 혀, 몸, 의지 같은 감각 기능도 원래는 없고, 이 감각 기능을 통해서 들어오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사유작용 같은 육식(六識)도 원래 없다. 한마디로 우리의 불확실한 안계(眼界)나 의식계를 통해서 인식된 것은 다 오류요, 원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돌호랑이 석호(石虎)나 진흙 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실상인 공의 세계에서는 모두 같은 것이다. 진흙 소가 물에 들어가면 풀어지듯이 사람 육신도 시간이 지나면 풀어 흩어지는 존재이다. 숯불 위에 내리는 한 점 눈송이요, 물 속에서 흩어지는 진흙 소인 것이다.

 

 *신실재론(新實在論)

 칸트의 인식론(認識論)과 버트란드 러셀의 신실재론(新實在論)을 참고하자.

 이 세상에는 여러 대상들이 있는데 이러한 대상의 실존, 다시 말해 그것이 우리에게 지각되는 바대로 실제로 존재하고 있음을 아무 비판 없이 받아들이려고 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태도를 '소박한 실재론'의 입장이라고 한다.

 '자연적 실재론(natural realism)'이라고도 불려지는 이 '소박한 실재론(naive realism)'은 인식의 감각적 단계를 인식과정 전체와 동일시하는 태도이다. 객관적 실재가 지각을 통해 완전히 우리에게 인식되는 것으로 본 입장이다.

 이 소박한 실재론은 시간적, 공간적 규정과 감각적 성질까지도 객관적 사물의 구성요소로 본다. 그런 태도는 지각의 대상이 그 지각을 갖는 그 어떤 주관으로부터 독립하여 실재함을 의심치 않는다. 이것이 일반인들의 견해이다. 

 그러나 학문적으로 거론되는 '실재론'은, 좀 더 정교한 이론으로서, 이를 과학적 반성에 의해 도출되었다고 하여 '반성적 실재론'이라고 한다.

 '과학적 실재론'은 상식적인 지각의 세계가 곧 실재의 세계라 보는 '소박한 실재론'을 비판한다.

 실재와 지각이 다른 것으로 구분한다. 예를 들어, 색은 시각(視覺)에 나타나는 것처럼 존재하지 않고 에테르(ether)의 진동으로 비롯된 것이며, 소리 역시 색과 마찬가지로 주관적 감각에 불과하다. 맛이나 냄새도 객관적으로 밖에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소박한 실재론은 비록 상식에는 부합되지만, 과학을 통해 볼 때 수정이 불가피하다.

 과학적 실재론은 '우리의 감각이나 지각과 상이한 에테르나 양자 같은 것들로 실재하고, 이것들이 우리의 감각을 어떤 형태로든 자극하여 지각내용을 구성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

(공의 세계에서는 무명도 없고, 무명의 소멸도 없으며, 늙고 죽음도 없고, 늙고 죽음의 소멸도 없다.)

 

 대승의 중심사상이 공과 불성이므로, 무명의 문제도 공과 불성에 두고 설명한다.

 공을 체달하지 못하여 자신의 본래 마음이 부처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 무명이라는 것이다. 무명을 실체로 보지 않고 도리어 이를 불성과 진여의 한 작용으로 본다. 중생에게 무명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지만, 그 무명은 본래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본질은 부처님 마음과 똑같은 광명의 성질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마치 물이 오염되어 흐리고 바람이 불어 파도가 치지만 물의 본래 성질은 맑고 고요한 하나인 것처럼(水不離波, 波不離水), 중생의 마음이 무명에 물들어 갖가지 번뇌가 일어난다 해도, 그 실상은 맑고 고요한 부처의 마음과 같다는 것이다. .

 

無苦集滅道 

(공의 세계에서는 태어남으로 해서 생기는 사성제(四聖諦), 즉 고집멸도(苦集滅道)도 없다.)

 

 사성제는 고제(苦諦), 집제(集諦), 멸제(滅諦), 도제(道諦) 네 개로 구성되어 있다.

 '고제(苦諦)'는 생·노·병·사의 4고(苦)와, 원증회고(怨憎會苦)·애별리고(愛別離苦)·구부득고(求不得苦)·오온성고(五蘊盛苦) 4고(四苦)를 말한다.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고요, 싫은 사람 만나고 함께 산다는 것이 고요,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하는 것이 고요, 구하는데 얻지못하는 것이 고요, 앞의 일곱 가지를 개괄한 오온(五蘊)에 대한 자기 중심적인 집착이 고라는 것이다. 존재는 괴로움(dukkha)이라는 것이 고성제이다.

'집제(集諦)'는, 집기(集起), 즉 사물이 모여 일어나기 쉬운 무명(無明)과 갈애(渴愛)를 고의 원인으로 본다. 고통의 원인인 탐욕(貪)·분노(瞋)·어리석음(癡)의 삼독(三毒)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괴로움에는 원인(samudaya)이 있다. 즐거움을 탐하고 추구하는 갈애, 살아남으려고 하는 갈애가 바로 그 원인이라고 한다.

'멸제(滅諦)'는, 깨달음의 목표, 곧 이상향인 열반(涅槃)의 세계를 말한다. 번뇌를 일으키는 갈애를 남김없이 멸함으로써 청정무구(淸淨無垢)한 해탈을 얻는다고 한다. 괴로움은 완전히 멸할 수 있으며 괴로움을 없앤 상태가 해탈이라고 본다.

'도제(道諦)'는  이상향 열반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팔정도(八正道)라는 여덟가지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다.  바르게 보고(正見), 바르게 생각하고(正思惟) 바르게 말하고(正語), 바르게 행동하고(正業), 바른 수단으로 목숨을 유지하고(正命), 바르게 노력하고(正精進), 바른 신념을 가지며(正念), 바르게 마음을 안정시키는(正定) 수행법이다.

 

* 절에 가서 사성제만 듣고 그 부분을 진리라고 고집하는 보살들이 많다. 반야심경의 '사성제(四聖諦)도 없다'는 이 無苦集滅道 라는 구절을 입으로는 늘상 외우면서 깜빡 잊어먹은 것이다. 

 

無智 亦無得 以無所得故

(일체개공(一切皆空)이라 본래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니, 안다고 생각하는 지혜도 없고, 버리고 얻는다는 범부(凡夫)의  취사지심(取捨之心)도 없나니, 그래서 잃고 얻는 것이 없으므로,)

 

菩提薩陀 依般若波羅密多 故心無

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제법(諸法)을 다 깨친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므로 공포와 두려움이 없고, 뒤바뀐 잘못된 생각, 잘못된 몽상을 멀리 떠나 마침내 구경의 열반에 들었으며,)  

三世諸佛依般若波羅密多 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전생, 현생, 내생의 모든 부처님도 오온이 다 공하다는 도리, 즉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최상의 깨달음인 아뇩다라 삼먁 삼보리의 반야지(般若智,완전한 깨달음)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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