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고전 제 3편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순자의 성악설

김현거사 2016. 2. 23. 07:25

 

 인간의 본성은 무엇인가/ 순자(荀子)의 성악설(性惡說)

 

 

 맹자(孟子)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하고, 순자(荀子)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했다. 맹자는 '사람은 태어나면서 악을 거부하고 선을 실행하려는 마음씨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반대로 순자는 '사람은 누구나 다 관능적 욕망과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게 된다'고 하였다.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도 성악설 이다. 그는 그의 저서 '리바이어던(Leviathan)'에서 자연 상태의 삶은 고독하고 불결하며 야만적이고 부족하다. 자연 상태란 '만인(萬人)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이다'라고 주장했다.

 

 순자의 이름은 황(況)이며 기원 전 315년에 조(趙)나라에서 태어났다. 공자의 제자 자하(子夏)와 자유(子游)의 학통을 전승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초(楚)나라 재상 춘신군(春申君)에 기용되어 만년에 난릉 령(蘭陵 令)을 지냈고, 진시황의 천하 통일 뒤까지 살았다.

순자의 제자는 한비자와 이사(李斯)가 있는데, 한비자는 법가(法家)였고, 이사는 진시황의 측근으로 소전(小篆) 글씨체의 창시자다. 

 그의 사상은 <순자(荀子)> 32편에 실려있는데, 권학(勸學), 수신(修身), 비상(非相), 중니(仲尼), 군도(君道), 신도(臣道), 천론(天論), 성악(性惡) 등이 있다.

 

  성악설(性惡說)

 

 사람의 본성은 악(惡)하다. 착하지 않다. 착하게 보이는 것은 인위적으로 꾸민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나면서부터 이익을 좋아한다. 이익을 따르기 때문에 싸우고 빼앗는 일이 일어나고 사양하는 마음이 없어진다. 나면서부터 미워하는 마음이 있어, 이를 따르기 때문에 잔악한 사건이 생겨나고 일이 진실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나면서부터 눈과 귀의 욕심이 있어 좋은 색과 소리를 좋아한다. 이를 따르기 때문에 음란한 일이 생겨나고 예의와 교양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사람의 본성과 감정에 따르면, 분수를 어기고 도리를 지키지 못하여, 반드시 싸우고 빼앗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사회가 혼란해지고 난폭해진다. 반드시 스승의 교화와 예의의 인도가 있은 연후에 안정으로 돌아간다.

 굽은 나무는 반드시 그것을 바르게 하는 도지개(틈이 가거나 뒤틀린 활을 바로잡는 틀)에 대거나 찜 쪄서 교정해야 반듯하게 되고, 잘 들지 않는 칼은 반드시 숫돌에 간 다음에야 예리하게 되는데, 이처럼 인간의 본성은 스승의 교육을 배운 연후에 잘 다스려 진다.

 요 임금이 순(舜)에게

'인간의 성정은 어떠한 것인가?'

물었더니, 순이 대답하기를,

'인간의 성정은 심히 불미스럽습니다. 장가 들어서 처자가 생기면 효도가 쇠퇴하며, 물질적인 것이 충족되면 친구에의 신의가 쇠퇴하고, 지위나 봉록이 높아지면 임금에 대한 충성이 쇠퇴합니다. 인간의 성정은 불미스럽습니다. 오직 현인만이 그렇지 않을 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은 착한 것인데, 그 본성을 잃어버리기 때문에 악하게 되는 것'이라 하나, 이는 잘못이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과 후천적인 인위(人爲)와의 구별을 잘 살피지 못한 것이다.

 본성이라는 것은, 하늘이 내놓은 그대로 자연적인 것이므로 후천적으로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니고, 노력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반면 인위라는 것은 예의나 학문처럼 배우고 노력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본성과 인위의 구별이다. 인간이 착한 것은 인위의 결과이며, 본성은 원래 악한 것이 분명하다.

 

  권학편(勸學篇)

 

 쇠는 숫돌에 갈면 날카로워지고, 군자는 널리 배우고 날마다 반성하면 지혜가 명석해지고 행동에 과오가 없게 된다. 높은 산에 올라가 보지 않으면 하늘의 높음을 알지 못하고, 깊은 골짜기에 가 보지 않으면 땅의 두터움을 알지 못하며, 고대의 성왕(聖王)이 남긴 훌륭한 말을 듣지 않으면 학문의 광대함을 알지 못한다.

 수레나 말을 잘 이용하면 다리가 약해도 천리를 갈 수 있고, 배와 노를 잘 이용하면 헤엄을 칠 줄 몰라도 강과 바다를 건널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군자는 학문을 배울 때 주변을 잘 가려야 하나니, 거처함에는 반드시 마을을 잘 가리고, 공부함에는 반드시 훌륭한 사람을 가려서 배운다.

 군자의 학문은 자기 몸을 훌륭하게 하고, 소인의 학문은 남의 기분에 들기 위한 것이다. 묻지 않는데 대꾸하는 것은 오(傲, 경솔하고 거만함)라 하고, 하나 물었는데 둘을 대답하는 것은 말이 많다 하고, 말할 처지인데 말하지 않는 것은 은(隱, 숨김)이라 하고, 상대의 기색을 살피지 않는 것을 장님이라 한다. 군자는 거만하지 않고, 말이 많지 않고, 숨기지 않고, 상대의 기색을 잘 살피어 근신한다.

 화살 백 발 가운데 한 발이 실패하더라도 훌륭한 사수라 하기에 부족하고, 천리 길에서 반걸음 미치지 못해도 훌륭한 어자(御者, 마차 부리는 사람)라 하기에 부족하다.

 마찬가지로 인의의 문제를 추구함에도, 그 예법이 정해지지 않은 곳까지 유추하여 전일(全一)하게 통하지 못한다면, 그를 훌륭한 학자라고 하기에 부족하다. 학문이란 도(道)에 전일함이니, 들락날락 무상함은 길거리의 평범한 사람이나 할 일이다.

 학문이란 중지하지 말아야 한다. 푸른색은 쪽(藍, 마디풀과의 일년 생 초본)에서 나오지만 쪽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이 얼어서 된 것이지만 물보다 더 차다.

*여기서 청출어람(靑出於藍) 고사가 나온다.

 남북조 시대 북조(北朝)의 공번(孔磻)이란 선비에게 이밀(李謐)이란 제자가 있었는데, 이밀의 실력이 일취월장(日就月將)하여 몇 년 지나 공번은 이밀이 자기를 앞서자. 스스로 그의 제자가 되었다는 실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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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륜편(天倫篇)

 

 하늘의 운행은 사람의 일과 관계없이 일정한 움직임을 가지고 있다. 요(堯) 임금 때문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걸(桀) 임금 때문에 없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늘의 운행에 잘 맞추어서 잘 다스리면 길하고, 잘 다스리지 못하면 흉하다.

 농업과 같은 근본적인 산업에 힘쓰고, 쓰는 것을 절약하면, 하늘도 그를 가난하게 할 수 없다. 봄이 오면 여름이 올 것을 대비하여 여름 준비를 하고, 여름이 되면 가을 준비를 하는 것처럼, 미리 준비하여 때 맞추어 움직이면, 하늘이 그를 병들게 할 수 없다.

 자연의 운행을 미리 예측하여 인간이 해야 할 일을 잘 챙겨서 일관되게 대비하면 하늘이 그에게 화를 줄 수 없다. 그러므로 홍수나 가뭄이 그를 굶주리거나 목마르게 할 수 없고, 추위와 더위가 그를 병들게 할 수 없으며, 요괴가 그를 흉하게 할 수 없다.

 농업과 양잠 같은 근본 산업이 황폐해지고 쓰임이 사치스러워지면 하늘도 그를 온전하게 할 수 없으며,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인간의 일을 어기고 함부로 행하면, 하늘도 그를 길하게 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홍수나 가뭄이 이르지 아니해도 굶주리게 되고, 추위와 더위가 다가오지 아니해도 병들게 되며, 요괴가 이르지 아니해도 흉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늘과 사람의 경계에 분명히 해야 최고의 사람이다. 하지 않고도 이루어지고 구하지 않고도 얻어지는 것은 하늘의 직분이다. 이러한 하늘의 직분은 심오하다. 고로 사람은 하늘과 더불어 직분을 다투지 않는다.

 하늘은 스스로 운행질서를 가지고 있고, 땅은 스스로 재물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은 스스로 해야 할 도리가 있다. 이와 같이 각각 일을 하는 것이 전체적으로 어울리는 방법이다. 이를 모르고 하늘과 같아지려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수신편(修身篇)

 

 군자는 나를 그르다고 충고해 준 사람을 스승으로 존경하고, 옳다고 격려해주는 사람은 친구로 친애하며, 아첨하는 사람은 적이라 생각하고 미워한다. 그러면 진보하지 않으려 해도 진보하지 않을 수 없다.

 소인은 반대로, 극도로 난폭하게 행동하고서도 남이 나를 비방하면 증오하고, 극도로 어리석은 일을 하고서도 남이 나를 현명하다고 하길 바란다. 마음이 호랑이나 이리처럼 잔혹하고, 행동이 금수처럼 못됐으면서 남이 자기를 적으로 여김을 원망하며, 아첨하는 사람을 가까이 하고, 힘써 간(諫)하는 사람을 멀리하며, 올바른 사람을 웃음거리로 알고, 성실한 사람을 적이라 한다. 그래서 망하지 않을려야 망하지 않을 수 없다.

 뜻이 잘 닦여 바르게 되면 부귀에 굴하지 않고, 도덕이 중후하면 왕공(王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도덕을 중시하는 사람은 때로 외계의 사물도 경시 할 수 있다. 옛말에 군자는 주체성을 지녀 외물을 마음대로 부리고, 소인은 주체성이 없어 외물에 부림을 당한다고 한 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훌륭한 농부는 어쩌다 홍수나 한발이 있다해서 경작을 그만두지 아니하며, 훌륭한 상인은 어쩌다 손해를 본다해도 그 때문에 장사를 그만두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군자는 빈궁하다 해서 정도(正道)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태도가 공경스럽고 마음이 성실하며, 법도가 예의에 맞고 감정이 인애로우면, 이런 사람은 이적(夷狄)의 땅에 가더라도, 이적이 감화되어 그를 존경한다.

 괴롭고 수고스런 일에 맨 먼저 나서고, 즐거움 많은 일은 남에게 양보하며, 성실하고 정직하고 맡은 바 직분에 세밀하면, 이런 사람은 이적의 땅에 가더라도 이적이 감화되어 그를 신뢰한다.

 반면 오만하고 속임수가 많으며, 예를 지키지 않고 감정이 잡박하고 천하면, 이런 사람은 천하를 구석구석 돌아다녀도 사람이 모두 그를 천하게 여긴다.

 괴롭고 수고스런 일은 남에게 밀어붙이고 자기는 빠지고, 즐거운 일은 재빠르게 차지하여 남에게 양보하지 않으며, 사악하고 성실치 않고 적당히 일하는 사람은 비록 천하의 구석구석에 가더라도 모든 사람이 다 그를 버린다.

 군자는 빈궁하더라도 뜻이 광대하고, 부귀하더라도 태도가 공손하며, 고달플 때도 용모를 구차하게 흐트르뜨리지 않으며, 싫다고 지나치게 뺏지 않고, 좋아한다고 지나치게 주지 않는다.  

 

 비상편(非相篇)

 

  요 임금은 장신인데 순 임금은 단신이고, 문왕(文王)은 장신인데 주공(周公)은 단신이었다.

 위나라 공손여(公孫呂)는 얼굴이 매우 길어 석 자(약 90센티) 였고, 폭은 매우 좁아 세 치(9센티) 밖에 안 되고, 그 속에 눈, 코, 귀가 갖추어진 기형이었으나, 대단한 인물로 천하에 이름을 날렸다.

 초나라 손숙오(孫叔鰲)는 툭 튀어나온 대머리에 왼발이 더 길고 기형이었으나, 초나라를 패자가 되게 하였다. 초나라 섭공자고(葉公子高)는 수척하고 작은 단구척신(短軀瘠身)으로, 걸어다니는데 옷의 무게를 이겨내지 못할 것 같은 약골이었으나, 백공(白公)의 반란이 일어나자, 재상이던 자서(子西)나 사마(司馬, 국방상)였던 자기(子期)는 반란군에 살해되었으나, 서울로 들어가 백공을 벌하고 초나라 권세를 장악하여 나라를 안정시켰다.

 공자의 모습은 키가 장신인데다 얼굴이 마귀 쫒는데 쓰는 가면처럼 우습게 생겼고, 주공의 형상은 고목이나 꼽추 같았고, 고요(皐陶)의 형상은 안색이 껍질 벗겨낸 오이처럼 청록색이고, 굉요(閎夭)의 형상은 얼굴에 온통 털이 나서 살결을 볼 수 없었으며, 이윤(伊尹)은 얼굴에 수염과 눈섶이 없었고, 우 임금은 절룸발이처럼 뛰어다녔으며, 탕 임금은 반신불수였지만, 모두가 마음이 바르고 덕이 높았기 때문에 후세에까지 존숭되고 있다.

 반면에 걸(桀)과 주(紂)는 모습이 장대한 천하의 호남이었고, 근력은 백 사람에 필적하는 자들이었지만, 후세 사람들은 그들을 악의 표본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용모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견문이 좁고 논의가 비열한 데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니 학문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형상을 취하는 것과 뜻을 취하는 것 중 어느 것을 취함이 옳겠는가?

 사람의 상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옛 성인이 무시한 바이고, 학문하는 사람이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용모와 골격을 보고 점치는 것은 마음을 논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마음을 논하는 것은 실천의 근거가 되는 학술을 선택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학술이 올바르고 마음이 종순하면, 형상이 비록 추악하다 해도 군자라 해도 무방하다. 형상이 비록 잘생겼다 해도 마음 가짐과 학술이 약하면, 소인이라 해도 무방하다. 

 *이 비상편(非相篇)을 요즘 관상학 하는 사람들이 자주 인용한다. 그러나 비상편을 자세히 읽어보면, 관상 보다 심상(心相)을 강조하고, 심상 보다 학문의 선택을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