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고전 제 3편

겸애란 무엇인가/ 묵자

김현거사 2016. 2. 21. 11:39

 

  겸애란 무엇인가/ 묵자(墨子)

 

 묵자(墨子)는 기원 전 480-390년 사람으로, 사마천의 '사기(史記)' 끝머리 '맹자순경열전(孟子筍卿列傳)'에 의하면, '묵적(墨翟)은 송나라 대부(大夫)로 성(城)을 방위하는 기술이 뛰어났고, 절용(節用)을 주장하였다. 공자와 같은 시대 사람이라고도 하고, 혹은 공자보다 후세 사람이라고도 한다.'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또 중국의 근대사상가 양계초(梁啓超)는 묵자에 대해서, '그의 집안은 사회 하층계급인 공인(工人)이나 노동자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묵자는 몸소 성을 방위하는데 필요한 기구 제조법에 능통하였고, 나무로 하늘을 나는 솔개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하였다.

 

 *묵자는 고죽국(孤竹國) 사람으로 동이족이라는 설도 있다. 고죽국은 고대 발해만(渤海灣) 북안(北岸) 산해관(山海關) 근처에 있던 나라로 군주는 묵태씨(墨胎氏)이다. 백이 숙제 역시 고죽국 군주의 자손이다. 수서(隋書) 배구전(裵矩傳)에 ‘고려는 본래 고죽국(孤竹國)이다.’ 하였고 사고전서(四庫全書)의 명일통지(明一統志) 5 영평부(永平府)에 따르면, '고죽국은 상() 나라였으며, 주 나라 때는 유주(幽州), 다시 북연 때는 평주(平州) 혹은 낙랑군(樂浪郡)이었다. () 나라에 와서 영평부(永平府)라 하였다오늘날 평주의 노룡에 조선성(朝鮮城)이 있었다' 하였다.

 

 묵자의 겸애설(兼愛說)은 한마디로 아무 조건 없이 모두를 사랑하라는 것이다. 기독교의 박애(博愛)는 신(神)과 이교도를 구별하고, 그들이 섬기는 하나님의 뜻을 어기지 말라는 차별적 사랑이다. 인간적 좌절과 고통을 '사랑'으로 극복 승화시킨 점이 기독교 철학의 장점이긴 하다. 그런데, 묵자는 한차원 더 높은 피아의 구별 없는 '겸애'를 주창하였다. 

 차별은 신분적, 인종적 차별을 의미하고, 그래서 근래에도 이스람 국가와 기독교 국가간의 복수와 테러가 횡행하고 있다. 유대인과 예수의 조상은 이삭이고, 아랍인과 마호메트의 조상은 이스마엘 이다. 같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수천년간 종교전쟁과 문명 충돌을 일으킨 것은 차별적 사랑에 기인한다. 

이런 의미에서 묵자의 겸애사상은 일견 단순한듯 하지만, 그 이론적 기초는 한 없이 깊다.

 

 겸애편(兼愛篇)

 

 일찍이 세상의 혼란이 어디서부터 생겨나고 있는가 살펴 보았는데, 그것은 서로 사랑하지 않는 데서 생겨나고 있었다.

 임금과 신하가, 아버지와 자식이, 형과 아우가 각각 자기 자신만 사랑하고 상대방은 사랑하지 않고 소홀히 하며, 자신만의 이익을 도모하기 때문에 천하에 혼란이 생기는 것이다.

 도적들은 그의 집안만을 사랑하고 다른 집안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집안의 물건을 훔치어 자기 집안을 이롭게 한다. 마찬가지로 대부들과 제후들도 자기만 생각하고 남을 생각하지 않은 데서, 남의 나라를 공격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마치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남을 사랑하는 것이다. 다른 나라를 자신의 나라처럼 보거나, 다른 가족을 자신의 가족처럼 생각하며, 다른 사람을 자신을 보는 것처럼 대하는 것이다.

 그러니 천하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일은 무엇인가? 겸애하고 서로 사랑하는 일이니, 제후가 서로 사랑하면 전쟁이 일어나지 않고, 대부가 서로 사랑하면 약탈하지 않으며,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하면 잔혹하게 해치는 일이 사라진다.

 이 일은 임금이 먼저 좋아하고 행한다면 백성들도 따라 올 수 있는 일이다. 임금의 영향력은 크다.

 옛날 초나라 영왕(靈王)은 선비들의 가는 허리를 좋아했다. 그러자 신하들은 모두 한 끼 밥만 먹고 허리를 조절했고, 숨을 크게 내쉰 다음에야 띠를 매고, 힘이 없어 담에 의지하고서야 일어날 수 있었다. 이런 폐단은  무슨 까닭인가? 임금이 그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남을 비난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에 대한 대안(代案)이 있어야 한다. 만약 남을 비난하면서 대안이 없다면, 마치 불을 가지고 불을 끄려는 것 같아 옳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것으로 분별하는 것을 대신해야 한다.

 만약 여기 두 선비가 있는데, 한 사람은 분별을 주장하고 한 사람은 겸애를 주장한다고 하자. 분별을 주장하는 사람은, 그의 친구가 굶주리는 것을 보고도 먹을 것을 주지않고, 헐벗은 것을 보아도 옷을 주지않고, 병에 걸려도 돌보아 주지않고, 상(喪)을 당하더라도 장사지내 주지 않는다. 반면 겸애를 주장하는 사람은, 굶주린 친구를 먹여주고, 헐벗은 친구를 입혀주고, 병 든 친구를 간호해주고 상(喪)을 당한 친구를 장사 지내 준다.

 감히 묻건대 누가 믿을 수 있는 친구일 것인가?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남도 따라서 그를 사랑하게 되며, 남을 이롭게 하는 사람은 남도 따라서 그를 이롭게 해준다. 남을 미워하거나 해치면 남도 나를 미워하고 해치게 된다.

 

 친사편(親士篇)  

 

 임금에게는 반드시 뜻을 거스르는 신하가 있고, 웃사람에게는 반드시 이론을 따져서 논하는 부하가 있다. 그래서 논쟁이 진지하게 벌어지고 서로 훈계하고 따지므로, 그 임금과 웃사람은 오래도록 살면서 자리를 보존할 수 있다.

 그런데 신하가 그 직위를 잃을까봐 말을 하지 않고 벙어리 노릇 하며 입을 다문다면, 백성들의 고통은 위에 알려지지않아 백성들 마음 속에 원한이 맺히게 될 것이다. 아첨하는 자들만 곁에 있어 좋은 논의가 막혀버린다면, 곧 나라가 위태로워질 것이다.

 걸왕(桀王)과 주왕(紂王)은 천하의 어진 선비를 곁에 두지 못했기에 천하를 잃고 죽지 않았던가?

 좋은 활은 당기긴 어렵지만 높이 갈 수 있고 깊이 들어갈 수 있다(良弓難張). 좋은 말은 타기 어렵지만 무거운 것을 싣고 멀리 갈 수 있다. 훌륭한 인재는 부리기는 어렵지만, 임금을 이끌어 존귀함을 드러낼 수 있다.

 장강(長江)이나 황하(黃河)는 작은 시냇물이 자기에게 가득 차도록 흘러드는 것을 싫어하지 않기 때문에 커질 수가 있는 것이다. 성인은 일을 함에 사양함이 있고, 물건에 대하여 어긋나는 것이 없으므로 천하의 그릇이 될 수 있다. 장강이나 황하 물은 한 근원에서 나온 물이 아니며. 갖옷은 여우 한마리에서 나온 털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러니 어찌 반드시 자기와 뜻이나 방식이 같은 사람만 취하여 쓰겠는가? 이것은 세상을 다스리는 큰 임금의 도(道)가 아닌 것이다.

 

 수신편(修身篇)

 

 군자는 전쟁을 함에 있어서 포진법(布陣法)이 있지만 용기를 근본으로 삼는다. 상(喪)을 치룸에 예의가 있다고는 하지만 슬품을 근본으로 삼는다. 선비에게 학문이 있다고 하지만 실천을 근본으로 삼는다.

 근본이 안정되지 않는 사람이면서 말단적인 결과를 풍성히 하려 들어서는 안된다. 가까운 사람과 친하지 않으면서 먼 사람들과 가까이 하려 애써서는 안된다. 친척들이 따르지 않는다면 밖의 사람들과 사귀려고 애써서는 안된다. 하는 일이 밑도 끝도 없이 정리가 안되어 있는 사람이 많은 일을 하려고 애써도 안된다.

 그러므로 옛 임금들은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서, 반드시 가까운 것을 잘 살핀 다음 멀리 있는 것을 가까이 하였던 것이다. 군자란 가까운 것을 잘 살피고 가까운 것부터 닦아나가는 사람이며, 수양이 되지 않은 행동이나 비난 받을 행동을 보고, 반드시 자신도 반성하는 버릇을 가진 사람이다.

 

 절용편(節用篇)

 

 성인이 정치를하면, 천하의 부(富)가 배로 늘어난다. 그가 부(富)를 배로 늘리는 것은, 전쟁을 해서 남의 땅을 뺏음으로써 늘리는 것이 아니다. 쓸데없는 비용을 없앰으로써 부를 두 배로 늘리는 것이다.

 성인이 의복을 입는 목적은 무엇인가? 겨울에는 추위를 막고 여름에는 더위를 막을 뿐이다. 화려하기만 하고 불편한 것은 피한다. 성인이 집은 무엇을 위해 지었는가? 겨울에는 바람과 추위를 막고, 여름에는 더위와 비를 막으며, 도적을 막기 위해 튼튼히 짓는다. 화려하기만 하고 불필요한 것은 없애버린다.

 그러므로 재물의 사용에 낭비가 없었고, 백성들의 생활은 수고롭지 않았으며, 그로 인한 이익이 더 많았던 것이다. 이것이 성왕(聖王)의 법(法)인 것이다.

 옛날 성왕들은 먹고 마시는 법을 제정하여 선언하였다. 배고품을 채우고 기운을 차리며, 팔다리를 강하게 하고, 귀와 눈을 분명하고 밝게 하기에 충분한 정도에서 그치고, 다섯 가지 맛의 조화와 향기로움의 조화를 원하지 않았고, 먼 나라의 진기하고 특이한 물건을 쓰지 않았다.

 옛날 요(堯) 임금이 곡식을 아낀 정도로 말하면, 두 종류의 국을 들지 않았고, 고기 반찬을 두 가지씩 장만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토기(土器)에 밥과 국을 담았다. 성왕들은 쓸데없이 몸을 굽혔다 폈다하면서 인사차 왔다갔다 하며 형식적인 예(禮)를 채리지 않았다.

 그런데 유가(儒家)에서는 장례절차를 논의할 때 성대히 지냄을 주장한다. 관(棺)과 덧관을 반드시 여러 겹으로 만들고, 매장할 땅을 크게 파며, 사자(死者)의 옷과 이불도 많이 하며, 신분에 따라서 금(金)과 옥(玉), 수레와 말, 솥과 북, 창과 칼도 곁들여 많이 매장해야 만족한다. 

 복상(服喪, 상복 입는) 하는 법은 어떤가? 곡(哭)을 함에 소리내어 흐느끼는 방법이 보통과 다르며, 거친 삼베옷과 거친 삼베띠를 머리와 허리에 두르고 눈물을 흘리며, 움막에 거처하면서 거적자리 위에서 흙덩이를 베고 잔다. 억지로 먹지 않고 굶주리며, 얇은 옷을 입고 추위에 떨어 얼굴이 앙상하게 야위고 얼굴빛이 검어지며, 귀와 눈은 흐릿하며, 손발은 쓰지 못하여 반드시 부축해야 일어서고, 지팡이를 짚어야만 다닐 수 있을 정도로 3년 동안 복상해야 공경히 지낸 것이라 한다.

 이것은 모아놓은 재물을 한꺼번에 묻어버린 셈이며, 가족이 3년 동안 일을 금지당한 꼴이다. 이렇게 하고서도 부유해지기를 바랄 것인가? 이것은 가난을 벗게하고, 위태로운 시국을 안정시켜 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짊(仁)도 아니고, 의로움(義)도 아니며, 효자로서 할 일도 아니며, 남을 위해 일하는 것도 아니다.

 마땅히 장사 지내는 관은 2-3치로 하고, 옷과 이불은 세 벌로 하고, 매장할 때 아래로는 지하수에 닿지 않도록 깊이 묻지 않고, 땅 위로 냄새가 샐 정도로 얕게 묻지 않으며, 봉분(封墳)은 세번 간 밭이랑 정도로 만들어 그 장소를 다시 찾은 표지가 될 정도면 충분하다. 곡을 하며 상을 치르되 돌아와서는 생산에 종사하여야 하고, 제사는 적절히 지내어 어버이에 효성을 다함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