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고전 제 3편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공자의 <논어>

김현거사 2016. 2. 2. 11:18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공자의 논어(論語)

 

 동양철학 강의하시던 은사님이 '이립(而立)에는 노장(老莊)에 심취했으나 불혹(不惑) 넘어서자, <논어>에 끌리게 되더라.'고 하신 적 있다. 필자는 항상 그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

 

  <논어>는 기원 전 450 년 경에 이루어진 책 이다. 공자가 제자들과 나눈 대화를 2세대 제자들이 편찬한 책이다. <논어>는 <불경>과 <성경>처럼 근 2천 년 간 경전으로 읽히었다. 한국에는 3-4세기 한성 백제시대 목간에 공야장(公冶長) 편이 남아있다. 한국 사람이 <논어> 모른다면, 서구 사람이 바이불 모른다는 이야기와 같다.

 

 공자(孔子)는 BC 551 년 주(周) 나라 제후국 노(蘆) 나라 추읍(鄒邑) 태생으로,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다. 아버지 숙량흘(叔粱紇)이 공자의 머리 모양이 펑퍼짐한 언덕같이 생겼다고 구(丘)라 이름 지었다. 부친이 일찍 돌아가서 공자는 창고지기, 가축 기르기 등 잡일 하면서 성장했다. 

 그러나 말년에 '나이 15세에 학문에 뜻을 두었다'(十有五而志于學)고 회고했듯이, 일찌기 학문에 심취하여 6예(六藝=禮·樂·射·御·書·數)에 능통하고, 고전과 역사, 시(詩)에 밝았다. 삼십부터 가르침을 생활수단으로 삼았으니, 원조 교사라 할만 하다. 

  오십 초에 노나라 장관으로 발탁되고, 이어 재판관 중 최고위직인 대사구(大司寇)가 되었다. 그러나 왕의 측근들과 어울리지 못하여 오십 중반에 제자들을 이끌고 노나라를 떠나, 위(衛), 송(宋), 진(陳), 초(楚)를 다니며 유세했다. 그러나 환영 받지 못했고, 생활고에 시달리며 정처없이 떠돌던 그를 사람들은 상갓집 개라고 비꼬았다. 

 

*공자님의 유세는 매우 비참했던 모양이다. 논어 '미자(微子)' 편에 보면, 공자가 강을 건너기 위하여 나루터를 찾다가 밭을 갈고 있는 농부를 만났다. 장저와 걸익이라는 은자였다. 자로를 보내어 나루터를 묻자, 장저는 나루터를 알려주기는커녕 수레에 타고 있는 자가 누구인지 물었다. 공구라고 하자, '저 사람이 노나라 사람 공자란 말인가, 저 사람이라면 나루터 쯤은 알수 있을텐데' 라며 비꼬았다. 걸익에게 묻자, '흙탕물 도도히 흐르는데 사람을 구하는 당신 스승을 따르기 보다 세상을 구하는 우리와 함께 하는 것이 어떤가?' 물었다. 

 자로가 이를 고하니, 공자는 '나마저 새나 짐승 무리와 함께 한다면 누가 사람 무리와 함께 할 것인가(鳥獸不可與同羣 吾非斯人之徒與 而誰與)?' 라며 탄식했다고 한다.

 

  67세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를 가르치며 저술에 몰두했고, BC 479년, 향년 73세 나이로 생을 마쳤다. 

 

  배움에 관한 글

 

 <논어> 첫구절은 학문의 즐거움을 논한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 벗이 멀리서 찾아와 주니 즐겁지 아니한가(有朋 自遠方來 不亦樂乎)? 사람이 알아주지 않아도 원망하지 않으니,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而不殘 不亦君子乎)'

 

*논어 첫구절이 '學而時習之, 不亦說乎'로 된 것이 의미심장하다. 공자의 일생을 압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吾 十有五而志于學) , 서른에 뜻이 확고하게 섰고(三十而立), 마흔에 인생관이 확립되어 마음에 혼란이 없었고(四十而不惑), 쉰 되어 천명을 알게 되었고(五十而知天命), 예순 되어 어떤 말을 들어도 이치를 깨달아 귀가 순했고(六十而耳順), 일흔 되어 마음 대로 행동 하여도 법도를 넘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아침에 도를 들으면(朝聞道), 저녁에 죽어도 좋으니라(夕死 可矣).'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두우며(罔), 생각하고 배우지 아니하면 위태롭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아랫사람에게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아야 한다(不恥下問)'

'옛 것을 되새겨 새 것을 터득하면 남의 스승이 될 수 있다(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유(由)야 너에게 안다는 것을 가르쳐 주마,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知之爲知之),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不知爲不知)이 참으로 아는 것(是知也)' 이다.

 초나라 섭공이 자로에게 공자의 됨됨이를 묻자 자로가 대답을 못했다. 이에 공자께서 이 같이 대답해야지 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 중에 반드시 나의 스승될 만한 사람이 있다(三人行 必有我師焉), 그 착한 점을 골라서 따르고, 나쁜 점은 고쳤다(擇其善者而從 其不善者而改之).'

'후생은 두려워 할만 하다(後生 可畏). 후에 오는 사람이 지금 사람과 같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焉知來者之不如今也). 그러나 사십 오십에도 이름이 들려오지 않으면(四十五十而無聞焉), 그는 무서울 것이 없다(斯亦不足畏也已).'

'나면서 저절로 아는 사람이 상 이고(生而知之者 上也), 배워서 아는 사람이 다음 이요(學而知之者 次也), 막힘이 있으면서 애써 배우는 자는 또 그 다음이다(困而學之 又其次也). 그러나 모르면서 배우지 않는 사람은 하 이다(困而不學 民斯爲下矣).'
'가장 지혜로운 사람과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唯上知與下愚 不移).'
'여자와 소인은 다루기 어렵다(唯女子與小人 爲難養也), 가까이 하면 불손하고, 멀리 하면 원망한다(近之則不孫 遠之則怨).'

 

 인(仁)에 관한 글

 

 중궁(仲弓)이 인을 묻자.'자기 하고 싶지 않은 일 남에게 시키지 말라(己所不欲 勿施於人).'하셨다.
 자장(子張)이 인을 묻자, '공손, 관대, 신용, 민첩, 은혜니라. 공손하면 모욕을 당하지 않고, 관대하면 사람의 지지를 받고, 신용이 있으면 남이 일을 맡기며, 맡은 일 빨리 처리하면 공적을 세우게 되고, 은혜를 베풀면 사람들이 자연이 협력한다.' 하셨다.

 번지(樊遲)가 인을 묻자, '사람 사랑하는 것이다(愛人)' 했고, 앎에 대해서 묻자, '사람 알아보는 것(知人).'이라 했다.

 사마우(司馬牛)가 인을 묻자, '인은 그 사람의 말 이다(仁者 其言也).'라고 하셨다.

 안연(顔淵)이 인(仁)에 대해서 묻자, '자기를 극복하여 예로 돌아감이 인이다(克己復禮 爲仁), 하루 자기를 극복하여 예로 돌아가면, 천하가 인으로 돌아간다(一日克其復禮 天下 歸仁焉).' 하셨다. 안연이 '그 조목을 더 알고 싶습니다.' 하자,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非禮勿視),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非禮勿廳), 예가 아니면 말 하지 말며(非禮勿言),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非禮勿動).' 하셨다.

'유창하게 말 잘하고, 얼굴빛 그럴듯하게 남을 대하는 사람에게는 인(仁)이 드물다.'

 마구간에 불이 난적이 있었는데, 공자님은 조정에서 퇴근하셔어 사람이 다쳤는가만 묻고, 그 당시 상당한 재산으로 치던 말에 대해서는 물어 보지 않으셨다.

 

*공자 사상은 한마디로 인이다. 그러나 제자 따라 이렇게 다르게 표현했다.

 

 군자(君子)에 관한 글

 

 자공(子貢)이 군자에 대하여 묻자, '먼저 하고자 하는 일을 행한 후에 말을 하는 사람이 군자다(先行其言 以後從之).'라 하셨다. '마을 사람들이 다 그를 좋아하면 어떻습니까?' 하였더니, '옳지 않다. 마을의 착한 자가 좋아하고, 악한 자가 미워함만 같지 못하다.' 하셨다.

 자공이 '가난하되 아부하지 않고, 부귀하면서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묻자, '괜찮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난하고도 도를 즐기고, 부귀하면서 예(禮)를 좋아하는 것만 못하다.' 하셨다.

'군자는 남의 좋은 점을 권장하여 이루게 하고, 남의 악한 일은 선도하여 못하게 하지만(成人之美 不成人之惡), 소인은 이와 반대다(小人 反是)'

 '군자는 남과 화합하되 뇌동하지 않으며(和而不同), 소인은 뇌동하되 화합하지 않는다(同而不和).'
'군자는 의(義)에 밝고, 소인은 이(利)에 밝다.'

'군자는 말은 느리되, 실행은 빠르다.'

'군자는 태연하나 교만하지 않고(泰而不驕), 소인은 교만하나 태연하지 못하느니라(驕而不泰).'
'군자는 날마다 위로 나아가며(上達), 소인은 날마다 아래로 내려간다(下達).'

'군자는 곤궁을 견딜 수 있지만, 소인은 곤궁해지면 마구 행동한다.'
'군자는 책임 소재를 자신에서 구하나, 소인은 남에게서 구한다.' 

'군자는 섬기기 쉬우나 기쁘게 하기는 어려우니, 바른 길로 받들지 않으면 기뻐하지 아니하며, 소인은 섬기기는 어렵고 기쁘게 하기는 쉬우니, 비록 바른 길을 꾀하지 않더라도 기뻐하기 때문이다.'

'군자는 사람 쓸 때 그릇과 능력을 가려 일을 맡기고, 소인은 사람 부릴 때 완전한 자격을 요구한다.'

'덕 있는 사람은 반드시 들을만한 말을 하지만, 말이 들을만 하다고 다 덕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인자한 사람은 반드시 용기가 있지만, 용기 있다고 다 인자한 사람은 아니다.' 

'선비가 도에 뜻을 두고 있으면서 남루한 옷을 입는 것과 보잘것없이 먹는 것을 부끄러워 한다면, 그 사람과 서로 이야기 할 가치가 없다.'

 

 자로(子路)가 묻기를, '삼군(三軍)을 거느리신다면 누구와 더불어 하시겠습니까?' 공자 가로되, '맨주먹으로 범에게 달려들고, 맨발로 황해를 건느다가 죽는다해도 후회하지 않는 사람과는 더불어 하지 않으리라. 일에 임하여 반드시 두려워하고 삼가며, 미리 계획을 세워 성공하는 신중한 사람과 더불어 해보겠다.' 하셨다.

 

'어질구나 회(回)여, 한 그릇 밥과 한 표주박 국으로 누추한 곳에 살면서 즐거워하니, 어질구나 회여.'

'가난하면서 원망하지 않기 어렵고(貧而無怨 難), 부유하면서 교만하지 않기 쉽다(富而無驕 易).'

 

'나물밥에 물 마시고 팔베개 하고 누웠어도 즐거움이 그 속에 있다.(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 의롭지 못한 부귀는 나에게는 뜬구름 같다(不義而富且貴 於我 如浮雲).'

'날씨가 추워져야 비로소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알게 된다.'

공자는 신세를 한탄하였지만,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탓하지 않는다(不怨天 不尤人).' 하셨다.

 

'군자가 경계해야 할 세가지가 있다 청년은 혈기가 안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여색을 경계하고, 장년은 혈기 왕성하므로 싸움을 경계해야 하며, 노년은 혈기 쇠잔하므로 욕심을 경계해야 한다.'

'군자에게는 아홉 가지 생각하는 것이 있다. 볼 때는 명백히 보기를 생각하고, 듣는 것은 총명하게 듣기를 생각하며, 용모는 온화하기를 생각하고, 태도는 공손하기를 생각하고, 말은 성실하게 하기를 생각하고, 일에는 신중하기를 생각해야 하고, 의심가는 것에는 묻기를 생각하고, 화가 날 때는 어려운 일을 당할 것을 생각하고, 이익을 보면 의로운가를 생각한다.' 

증자는 '나는 매일 나 자신을 세 번 반성한다(日三省吾身). 남을 위해서 일을 하는데 정성을 다하였는가, 벗들과 사귀는데 신의를 다하였는가, 전수 받은 가르침을 반복하여 익혔는가.' 하였다.

 

'군자는 남에게 은혜 베풀되 낭비하지 않고(惠而不費), 힘든 일 시키되 원망 사지않고(勞而不怨),
욕심 있되 탐욕 내지 않으며(欲而不貪), 태연하되 교만하지 않으며(泰而不驕), 위엄 있되 사납지 않다(威而不猛).'
'군자는 상대편 사람이 많거나 적거나,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 교만없이 평등히 대한다.'
'백성을 가르치지 않고 죽이는 것을 잔학이라 하고, 미리 경계 하지 않고 결과부터 따지는 것을 포악이라 하며, 명령을 소홀히 하고 시일을 재촉하는 것을 괴롭힘이라 하고, 마땅히 나누어 주어야 할 출납에 인색한 것을 유사(有司, 단체 일을 맡은 사람. 여기서는 비난의 뜻으로 씀)라 한다.'

 

 정치에 관한 글

 

 자공(子貢)이 정치에 대해서 묻자, '식량을 풍족히 하며 군비를 충족하게 하면 백성이 믿는다(足食 足兵 民 信之矣). 백성이 믿지 않으면 나라는 존립할 수 없다(民無信不立).' 하셨다.
 제(齊) 경공(景公)이 정치에 대하여 묻자,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君君臣臣父父子子).' 하셨다.

 

*이를 공자의 정명(正名) 사상이라 한다.

 

 자장(子張)이 정치를 묻자, '항상 마음을 국정에 두어서 게을치 말며(居之無倦), 정사를 행할 때는 충실하여라(行之以忠).' 하셨다. 

 자로(子路)가 정치를 묻자, '자신이 바르면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실천이 되고, 자신이 바르지 않으면 비록 명령을 내려도 따르지 않는다.' 하셨다.

 자유(子游)는, '임금을 섬기면서 자주 간하면 욕이 돌아오고(事君數 斯辱矣), 벗을 사귀는데 자주 충고하면 사이가 벌어진다(朋友數 斯疏矣).'고 말했다.
 자하가 읍장이 되어 정치에 대하여 묻자, '일을 빨리 하려고 하지 말며, 작은 이익을 돌아보지 말아라. 빨리 하려 하면 달성하지 못하고, 작은 이익을 돌아보면 큰 일 이루지 못한다.' 하셨다.

 

 노나라 세력가로 배다른 형을 죽이고 대부(大夫)가 된 계강자(季康子)가 물었다. '백성이 공경하고 충성하며, 선행에 힘쓰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에 공자는 '백성을 엄하고 정중하게 대하면 백성이 공경할 것이요, 부모에게 효성하고 백성에게 자애로우면 충성할 것이요, 착한 사람을 등용하여 그렇지 못한 자에게 교훈이 되게 하면, 백성은 선행에 힘쓸 것 입니다.' 하셨다.

 정치에 대해 묻자, '정치는 곧 정(正)이니 그대가 솔선하여 바르게 행하면 누가 감히 바르게 행하지 않겠는가?(政者 正也 子帥以正 孰敢不正)' 하셨다.
계강자가 '무도(無道)한 자들을 사형으로 다스려서 백성으로 하여금 겁을 먹게하여 유덕(有德)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함이 어떠리요?' 하자, '그대는 정치에서 어찌 살인을 일삼으려 하오? 그대가 선을 추구하면 백성은 저절로 착해질 것이오. 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고(君子之德 風), 소인의 덕은 풀과 같습니다(小人之德 草). 바람이 불면 풀은 반드시 머리를 숙입니다(草尙之風 必偃).' 하셨다.

 정공이 공자에게 묻기를, '임금이 신하 거느리고, 신하가 임금 섬기는 도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자, '임금은 예로써 신하를 부릴 것이며, 신하는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겨야 합니다.' 하고 대답했다.

 노나라 애공이 '어떻게 하면 백성들이 복종을 하겠소?' 물으니, '곧고 올바른 사람을 등용해서 곧지 않는 사람 위에 놓으면 백성들이 마음까지 복종 하지만, 부정직한 사람을 등용하여 정직한 사람 위에 놓으면 백성들이 복종하지 않습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시경> 3백 수를 외우면서도 국정을 맡아 잘 처리하지 못하고, 딴 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능히 홀로 외교에 대응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시를 많이 외운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벼슬자리가 없음을 걱정하지 말고 자기의 자격을 근심하며,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알려질만한 일을 하고자 노력하라.'

 

 벗에 관한 글

 

 자공(子貢)이 벗에 대하여 묻자, '충고하여 이끌어 주되 말을 듣지 않으면 곧 중지하여 (不可則止), 자신까지 욕됨 없게 할 것이다(無自辱焉).' 하셨다.
 자공이 한마디 말로 평생 실천할만한 것이 있습니까 묻자, '그것은 서(恕)로다(其恕乎), 자기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다(己所不欲 勿施於人).' 하셨다.


'유익한 벗 셋 있고 해로운 벗 셋 있다. 정직한 사람을 벗하고, 성실한 사람을 벗하고, 견문 많은 박학다식한 사람을 벗하면 유익하고, 겉치레 하는 사람과 벗하고, 아첨 잘하는 사람과 벗하고, 거짓말 잘하는 사람과 벗하면 해로우니라.'

'오랜 벗은 큰 잘못 없으면 버리지 말고, 한 사람이 모든 걸 갖추어지기를 기대하지 말라.(故舊 無大故則不棄也 無求備於一人).'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지 못함을 탓하라.' 
'여러 사람이 미워하여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하며, 여러 사람이 좋아해도 반드시 살펴보아야 한다.'

'호사스럽게 살면 불손하기 쉽고, 검소하면 고루해진다. 거만한 것보다 차라리 고루한 것이 났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고치지 않는것을 바로 잘못이라 한다.'
'자신 꾸짖기 엄하게 하고 남 책망하길 가볍게 하면, 원망하는 소리를 멀리할 수 있다.'

 

 기타

 

 *공자님은 네 가지 일은 하지 않았다. 억측하지 않았고, 무리하지 않았고, 고집하지 않았고, 자기를 내세우지 않았다.

 공자님은 좌석의 깔개가 바르지 않으면 앉지 않으셨고, 설 때에는 문의 중앙을 피하셨고, 들어갈 적에는 문지방을 밟지 않으셨다.

 밥은 정결한 것을 좋아했고, 회는 잘게 썬 것을 좋아했고, 상한 생선, 썩은 고기는 먹지 않았고, 냄새 나쁜 것, 잘 익히지 않은 것, 익지 않은 곡식이나 과일은 먹지 않으셨다. 고기는 바르게 자르지 않은 것은 먹지 않았고, 간장이 없으면 먹지 않았고, 고기가 많아도 밥보다 많이 먹지 않았고, 술은 일정한 양만 먹었으며 난음(亂飮)하지 않았다.

 저자에서 파는 술과 포는먹지 않았고, 과식하지 않았으며, 생강은 끼니마다 먹었다.

 종묘에서 내린 제사 고기는 밤을 넘기지 않았고, 제사에 쓴 고기는 사흘을 넘기지 않았고, 주변에 나누어 주었으며, 사흘이 지나면 먹지 않았다. 비록 나물국이라도 반드시 곡신에게 제사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표시하였고, 식사할 때 남과 이야기 하지 않았고, 잠자리에 들어서 말을 하지 않았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며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知者樂水 仁者樂山), 지자는 동적이며, 인자는 정적이다(知者動 仁者靜), 지자는 즐겁게 살며 인자는 장수한다(知者樂 仁者壽).'

 

공자가 구이(九夷) 땅에 가서 살려고 하자, 제자가 물었다. '누추한 나라에서 어이 살겠습니까?' 그러자 '군자가 사는 곳에 어찌 누추함이 있으리(君子居之 何陋之有)?' 하고 대답하셨다. 

 

*구이(九夷)는 중원 동쪽 낙랑 고구려 등 동이족(東夷族)을 말한다. <산해경山海經>에 따르면, 그 나라를 군자국, 무궁화(無窮花) 나라,  ‘근화향(槿花鄕)'이라 불렀다.   
  공자님 조상이 동이족이라는 설이 있다. 어쨌던 공자님이 구이의 땅을 언급한 것은, 도가 실행되지 않는 중원에 대한 실망감의 표현이다. '공야장(公冶長)' 6 편에 '뗏목을 타고 바다에 나아가고 싶다(道不行 乘桴浮於海)'고 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공자님이 냇가에서, '지나가는 것은 흐르는 물과 같구나. 밤낮 멈추지 않는구나(逝者 如斯夫 不舍晝夜).' 하셨다. 

 

*이 구절은 공자님의 자연관, 인생관을 담고있다. 도는 항상 흐르고 멈추지 않음을 한탄한 것이다.

 

'유익한 즐거움 셋 있고 해로운 즐거움 셋 있다. 예악의 절도를 즐기고, 남의 착한 점 말하길 즐기고, 어진 벗 갖기를 즐기면 유익하다. 지나친 쾌락 좋아하고, 편안하게 놀기 좋아하고, 주색 향락 좋아하면 해롭다.'

'지나친 것은 오히려 모자란 것과 같다(過猶不及).'

 

계로(季路)가 귀신 섬기는 일을 묻자, '살아 있는 사람도 제대로 섬기질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기리' 하시었다. 죽음에 대해 묻자, '아직 삶도 잘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 알겠는가?' 하셨다.

'예는 사치하기보다는 검소해야 되고 초상에서는 형식을 갖추기보다는 슬퍼해야 한다. 조상 제사 모실 때에는 앞에 계신듯이 하고, 신을 제사 지낼 때는 신이 있는듯 한다.' 하셨다.

'부모님 살아 계시면 멀리 떠나지 아니하며, 떠나면 반드시 가는 곳을 알려야 한다.'

 

 증자가 병이 나자 맹경자가 문안을 왔다. 증자가 말했다. '새가 죽을 때는 그 소리가 애처롭고, 사람이 죽을 때는 그 말이 착해집니다.'

자하(子夏)는, '죽고 사는 것은 운명에 있고(死生有命), 부귀는 하늘에 달렸다(富貴在天). 사해는 모두 형제다(四海皆兄弟也).'라고 말했다.

 

 공자님이 초나라에 갔을 때 광접여(狂接與)가 노래를 부르며 지나갔다. '봉이여! 그대의 덕은 어찌 그리 쇠하였는가! 이왕지사는 고칠 수 없지만, 앞으로의 일은 따라갈 수 있지 않겠소(往者 不可諫 來者 猶可追)? 그만두소, 그만두소, 지금 정치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위태하외다.' 이에 공자께서 그에게 닥아갔으나, 광접여가 피하여 달아나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