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고전 제 3편

가장 좋은 선은 물과 같다/ 노자의 도덕경

김현거사 2016. 1. 29. 09:56

 

 가장 좋은 선은 물과 같다/ 노자(老子) 도덕경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은 상편 하편 5,000언(言)으로 이루어진 짧은 책 이다. 그러나 이 책은 유가(儒家)의 논어, 불가의 불경, 기독교의 성경과 비견될만치 동서양을 통틀어서 가장 심오한 사상이 담긴 책 이다.

 도가(道家)의 경전인 이 책은 하바드대 인문 고전 선정 도서이기도 하다.

 첫 구절은 '따오 커 따오 페이창 따오.(道可道 非常道, 말 할 수 있는 도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 도가 아니요), 밍 커 밍 페이 창 밍(名可名 非常名,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이름이 아니다.)'으로 시작된다. 

 

 노자의 생몰 연대는 후스(胡適)나 펑유란(馮友蘭) 같은 근대 중국 학자들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나라 사마천은 <사기> 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에 이렇게 소개했다.

 '초나라 여향(術鄕) 사람으로, 성은 이(李) 씨. 이름은 이(耳), 시호는 담(聃)이다. 주나라 종묘의 수장실(守藏室) 사관 이었다. 천문(天文)·점성(占星)·성전(聖典) 전담하는 학자였다.

 공자가 와서 가르침을 청하니, 노자는 공자의 오만과 야망을 질책했고, 공자는 그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구름과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용에 비유했다고 한다.

  노자는 주나라에 살다가 덕이 시드는것을 보고, 주를 떠나 진(秦)으로 들어가는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러, 관문지기 윤희(尹喜)가 글을 남겨달라고 해서. 남긴 것이 도덕경(道德經) 이다. 

 160여 세를 살았다고도 하고, 2백 세까지 살았다고 하는데, 아들 종(宗)은 위나라 장군이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공자와 같은 시대에 산 노래자(老萊子)가 노자라기도 하고, 공자 사후 2백 년 이후 주나라 태사(太史)였던 담(儋)이 노자라고 한다. 그러나 어느 것이 진실인지 모른다.'

 

 말 할 수 있는 도는 언제나 변하지 않는 도가 아니요, 부를 수 있는 이름은 언제나 변하지 않는 이름이 아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다 미(美)는 언제던지 미요, 선(善)은 언제던지 선인 줄 알고 있다. 그러나 감정의 움직임에 따라 미가 도리어 추가 되고, 의지의 움직임에 따라 선이 도리어 불선(不善)이 된다는 것을 모른다.

 성인은 상대적으로 대립되어 있는 세계에 살지 않는다. 모든 것의 근거가 되는 무위자연 도의 세계에 살며, 말로써 사람을 교화하지 않고 말 없이 행동으로 본보기를 보여준다.

 

 선 가운데서 가장 좋은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 물은 모든 만물을 자라게 하지만, 높고 깨끗한 곳에 있으려고 다른 것과 다투지 않는다. 사람들이 항상 비천하고 더럽다고 싫어하는 곳에 스며든다. 그러므로 도(道)와 비슷하다.

 성인이 천하를 다스리는 데는 개인의 주의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다만 백성의 마음을 종합하여 자기 마음으로 삼는다. 강과 바다는 시냇물 보다 낮은 하류에 있어 냇물을 모아 왕자가 된다.

 백성 위에 서려하지 않고 몸을 낮추니, 모두가 즐거이 그에 귀의한다. 관리들이 몸에 비단옷을 두르고, 허리에 예리한 칼을 차고 다니고, 식탁에 맛있는 음식이 남아돌고, 집에 귀중한 재화가 있다면, 이런 몹쓸 행위로 백성을 다스리는 사람은 교만한 도적이라 한다.

 

 도는 한없이 크므로 상하좌우에 충만되어 있다. 만물은 도를 나타내며 생성한다. 그렇지만 도는 만물을 생성하면서도 자기 소유로 지배하려 하지 않는다. 

 무위자연의 도가 타락된 뒤에 덕이 나타나고, 덕이 타락된 뒤에 인(仁)이 나타나며, 인의 타락된 뒤에 의(義)가 나타나고, 의가 타락된 뒤에 예(禮)가 나타난다. 예는 사람의 성실성이 박약한 데서 일어나는 것이요, 자연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첫걸음이 된다.

 

 도를 잘 닦은 사람은 그 마음이 미묘 심원하여 그 깊이를 알 수 없다. 억지로 그 태도를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일에 신중을 기하여 빨리 단안을 내리지 않는 태도는 추운 겨울에 냇물을 건너갈까 말까 망서리는 것과 같다. 사물에 집착하지 않는 태도는 봄날에 얼음이 풀어져 녹는 것과 같다. 엄연한 태도는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 같고, 겸허한 태도는 빈 골짜기 같다. 시비 청탁 가리지 않는 태도는 더러운 흙 속에 섞인 물 같다. 누가 물처럼 군중 속에 들어가서 탁한 것을 탁한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서서히 맑게 할 수 있겠는가?

 

 도를 가진 이는 매사에 욕망을 만족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족 뒤에 불만이 오기 때문이다. 부족한 것을 만족하게 생각하는 사람만 항상 낡은 것을 아끼고, 새로 이루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속인들은 옳고 그른 것을 가리는데는 아주 똑똑하지마는, 도를 가진 이는 홀로 어리석은 듯하다. 속인들은 세밀하고 자상하지마는, 도를 아는 이는 담박하고 무미하여 답답스러워 보인다.

 도는 다만 어렴픗할 뿐이다. 있으면서도 꼴 없는 무형(無形) 속에 동작이 있고, 없으면서 꼴 있는 유형(有形) 속에 형상이 있다. 

 

 가장 교묘한 것은 졸열한듯 하다. 아주 가득 차 있는 것은 텅 빈 것 같다. 훌륭한 웅변은 말을 더듬는 듯하다.

냉정한 것은 조급한 것을 이긴다. 찬 것은 더운 것을 이긴다. 깨끗함과 고요함이 천하의 규범이 된다.

 

 스스로 슬기롭다고 자처하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 아니다. 자기 주장을 내세우는 사람은 남이 옳다고 여겨 주지 않는다. 스스로 칭찬하는 사람은 공(功)을 잃고 만다. 자기가 유능하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참으로 유능한 사람이 아니다. 그런 행위는 자연을 벗어난 것으로, 도를 행하는 사람에게는 마치 먹다 남은 밥이나 얼굴에 달린 혹처럼 쓸데없는 것이다.  

 사람은 발뒤꿈치를 들고 발끝으로 서서 오래 있을 수 없다. 두 다리를 벌려 큰 걸음 걷는 사람은 먼 길을 갈 수 없다. 자연스럽지 못한 행위는 오래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 몸은 살아있을 때는 부드럽고 죽으면 굳어진다. 초목도 그렇다. 그러므로 부드럽고 유한 것이 생의 현상이요, 굳고 강한 것이 죽음의 현상이다.

 미더운 말은 꾸밈이 없고, 꾸밈이 있는 말은 미덥지 않다.

 솔직한 사람은 변명하지 않고, 변명하는 사람은 솔직하지 않다.

 참으로 아는 사람은 무엇이나 다 널리 알지 못하고, 무엇이나 다 널리 아는 사람은 참으로 알지 못한다.

 자연 법칙을 도덕률로 삼으면, 영구불변의 덕이 온 몸에 충족하게 되어, 인공을 가하지 않은 산의 원목 같이 질박하게 된다. 그러나 목수가 원목을 베어 인공을 가하게 되면, 다만 기구(器具)가 된다. 

 대장부는 자연에 따른 질박한 생활을 하고, 인위를 따른 허식에 찬 생활을 하지 않는다.

 

 상류 지식층에 속하는 사람은 도를 들으면 열심히 실행한다. 중류 지식층에 속하는 사람은 도를 들으면 반신반의 한다. 하류 지식층에 속하는 사람은 도를 들으면 우스광스럽게 여긴다. (이런 사람에게 우스꽝스럽게 여겨지지 않는 도는 참 도가 아니다.)

 

 나는 세 가지 보물을 가지고 있으니, 첫째는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요, 둘째는 사물을 검약하는 태도요, 셋째는 남보다 앞서지 않으려는 행동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자비로운 마음이 있기에 용감 할 수 있다. 사물을 검약하므로 도리어 궁하지 않고 넉넉할 수 있다. 남보다 앞서지 않는 겸손이 있기에 완전한 경지로 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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