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기고 글

고향집의 감나무처럼/문학시대 2007년 가을호

김현거사 2011. 6. 16. 16:30

지내놓고 보면 인생은 아름다운 꿈이었다.
그것은 피었다가 소리없이 봄밤에 진 배꽃의 낙하였다.
애수와 그리움 싣고 달빛 아래 떨어진 환상이었다.

끝내 애태우고 가버린 첫사랑의 소녀.
철학을 즐기던 대학시절.
어렵던 취직.
펜을 꺽고 나온 신문기자 생활.
이문동 전셋집에서 아름다운 아내 고생시키던 일.
아픈 딸애 병원비 걱정하던 초라한 호주머니.
출세한 친구의 오만.
진급은 연기되고 떨어져 나가던 친구들.

대략 이런 스토리로 나의 강물은 흘러갔다.
그러는새 내 청춘은 끝났고,인생의 희노애락은,내 내부에서 영글었다.
나는 좀은 인간다운 체험을 지닌 중년으로 변했고,그래서 좀은 안심되던 것이다.
소설로 치면 웅대한 스펙타클도 없고,감동할만한 사연도 없다.
그러나 좀은 다정다감하고,좀은 겸손과 분수도 터득한 것이다.

종교도 神도 없이 그 황량한 사막길을 잘도 건너온 것이라 생각하려한다.  
한가지도 성공해본 적 없고,잘한 적 없어,오히려 중용만 살아온 것이 대견하다.
    
하나도 남보다 띄어난 구석없이 살기가 어디 쉬운가?
그런데 나는 기특하게도 그렇게 살아왔다.

돈도 별로 없고,친구도 많지않고,자식도 둘 뿐이다.
거실에서 난초를 키워봤지만,꽃을 본 적이 드물다.
한강에서 낚시도 해봤지만,강준치 한 마리 제대로 올린 적 없다.
글을 써봤지만,작가도 아니다.
그림을 그려봤지만,전시회를 연 적도 없다.
산을 타봤지만,항상 뒤처진다.
노래방 가선 한곡조 불렀지만,무대에 서본 적 없다.
불경도 읽지만,절에는 가지 않는다.
작은 회사 임원도 했지만,일치감치 끝났다.
집 마당에 고추와 상치 두어포기 심어먹는 것이 취미이고,덤덤히 산다.

진주 우리집에 평범한 감나무가 하나 있었다.
나무가 거창하지도 않았고,감이 특별한 것도 아닌,평범 그대로의 나무였다.
그러나 해마다 하얀 감꽃이 피고,홍시가 익고,낙엽이 붉어,타향살이 하며,얼마나 자주 그 감나무를 그리워해왔던가?

그 감나무마냥 나도 살고싶다.
정다운 사람 몇이 그리워해주면 되는 것 아닌가?
인생을 부피로 평가할 필요가 있는가?

스님들은 가진 것을 줄이는 연습도 한다.
고향의 감나무처럼 나는 만년에 달콤한 홍시나 몇 개 달고싶을 뿐이다.
노자 가라사대,‘유한한 인생이 무한한 욕망을 따라가는 것이야말로 위태롭다’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