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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초에 가신다면/문학시대 2007년 가을호

김현거사 2011. 6. 16. 16:24

속초에 가신다면

                                                                                                                                          김창현

 

 속초는 아름다운 도시다. 설악산과 동해 사이에 숨은 보석같은 도시다. 떠나오면 신기루처럼 눈에 아련히 떠오르는 도시가 속초다.
 속초에 가신다면 무엇부터 볼 것인가? 달빛부터 보아야한다. 달빛이 신선봉에서 화암사 청소년 캠핑장으로 내려와, 영랑호와 먼 바다에 닿은,그 부드럽고 광활한 누리에 푸른 빛 가득 던진 광경을 보면서, 울산바위 아래를 하얀 이슬 밟으며 밤 깊도록 거닐어보아야한다.
 월하(月下)에 경전 읽는 소리 들으면 마음이 탈속(脫俗)해지고, 월하에 시를 논하면 운치 표묘하여 속세를 떠나고, 월하에 미인을 보면 번뇌 한없이 높아진다고 한다. 단청 붉은 신흥사 극락보전과 부도(浮屠)에 비치는 달빛은 탈속한 친구와 감상하기 알맞고, 기러기떼 허공을 나르는 송지호, 하얀 갈대 흩날리는 화진포 달빛은 시를 논하는 친구와 감상하기 알맞으며, 암벽이 돌출한 영금정의 일렁이는 푸른 은파는 연인과 함께 보아야 제격이다.
 달빛이 배이면 술보다 독한 것. 너무 밝아서 사람에게 답월(踏月)을 강요하거나, 끝내 잔 들어 마시게하는 달빛만이 진정한 달빛이다. 차 속에서 '에딛 삐아프'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샹숑 '고엽'(枯葉)을 들어보라. 인생이 월광(月光)의 허공에 흩어지는 푸른 담배연기같음을 알수 있다.

 천하 제일 단풍 묻지마라. 한계령(寒溪嶺) 단풍을 보아야한다. 이른 아침 하얀 안개가 산허리에 감겨 눈부시게 피어오르는 한계령에 가보라. 젖은 바위와 계류 굽이굽이 수정같은 물결 위에 흩어지는 낙엽의 비 만산홍엽(滿山紅葉)인데, 안개는 조용히 수묵화 그리고 있다. 다정한 사람 손잡고, 수억년간 한 점 티끌까지 씻은 준수한 암벽에서 꽃처럼 떨어져 벽옥(碧玉)의 물에 떠가는 단풍잎을 보라. 
 선녀탕과 용소폭포 주전골 만경대에 가보라. 설악의 나무 모두가 화가임을 알게된다. 사람이 마치 파스텔화 속을 걷는 것 같다. 나무가 화폭(畵幅)인양 산을 덮었다. 나무마다 선호하는 색이 있으니, 은행과 백양나무는 노란색을 주로 쓰고, 벛나무 옻나무는 붉은색, 굴참나무 신갈나무는 갈색 톤을 즐긴다. 노란 은행나무잎 오십대 여인의 미소처럼 은은하고, 벗나무 단풍은 밤 깊은 삼십대 카폐 여인의 루즈처럼 짙다. 

 어성전 법수치리 면옥치리 현리를 아는가. 청옥의 물빛이 속초의 자랑이다. 물이 그리 깨끗할 수 없다. 옥류는 바위 곁에서 바이올린 현처럼 부드럽게 구비치고, 폭포 만나면 은구슬처럼 깨어지고, 들판에서는 흰구름 비친 투명한 거울이 된다. 봄물은 시적이고, 가을물은 사색적이다. 산 가득 벛꽃 물에 뜨서 흐르는 면옥치 봄은 '산중대작(山中對酌)' 칠언절귀(七言絶句) 생각나게 한다.

'두 사람이 술잔을 대하니,산꽃이 피네. 한잔 들게 한잔 들게 또한잔 들게.
나는 취하여 잠을 자려하니 그대는 잠깐 돌아갔다가, 내일 아침 생각나면 거문고 안고 오라'

신선의 경지 이룬 이태백의 풍류가 있다.

 투명 크리스탈 잔에 담고싶은 현리의 가을은, 얼음처럼 찬 수면 위 낙엽은 노랑과 주홍 비단무뉘 수놓으며 흐른다. 간혹 피라미가 황혼의 수면에서 튀어오르고, 이때 문득 보들레르의 '가을의 쏘넷' 한구절 툭 떠오른다. 
 최상의 물빛 본 후라야 물소리 논할 수 있다. 선림원 폐허의 구름무뉘 조각 석등(石燈)과 삼층석탑 위로 초생달 뜬 밤, 구룡령 물소리 혼자 들어보라. 이곳 물소리 들으러 오던 한 숙녀가 있었다. 아!그러나 물소리 가슴에 들리고, 남대천 뚜거리탕은 아직도 따끈하건만, 그때 잔 건네던 그녀의 흰 손은 보이지 않는다.

 설경(雪景) 진경산수(眞景山水)를 알려면 속초로 가라. 눈이 하지에 가야 녹기에 설산(雪山)이요, 바위가 눈처럼 희다해서 설악(雪嶽)이다. 산 아래 단풍이 한창 붉을 때, 눈 덮힌 은백 봉우리들이 청자빛 하늘을 이고있는 모습, 설악만이 간직한 비경이다. 눈은 기암절벽의 노송과 검은 고사목(枯死木)과 청댓잎을 만나 그 격조 더함을 알 수 있다. 코발트불루 빛 하늘과 청화백자 보다 흰 백설이 이룬 단색 대비가 얼마나 깊은 맛인가 여기서 깨닫는다.
 설악의 인적없는 설원(雪原)은 어디인가? 용대리 산림욕장 계류의 푸른 결빙 위에 찍힌 육각 보석같은 눈의 결정을 보라. 낙엽교목  숲 설화(雪花)의 궁전에 안개가 무시로 지나갈 때, 미답(未踏)의 설야(雪野)에 눈바람 멀리 흩어짐 보라. 
 녹차 한잔 마시며 호반(湖畔) 눈내리는 풍경 보기엔, 영랑호가 제일이다. 지붕까지 쌓인 눈에 집이 반쯤 묻히고, 푸른 사철나무 울타리 붉은 열매 맺힌 모습, 영랑호의 서정이다. 눈 쌓인 매화가지 너머 신선봉 미시령 황철봉 대청봉 보라빛 연봉 사이로 가장 장관인 것은 하늘로 치솟은 토왕성빙폭(氷瀑)이고, 낮엔 아껴두었다가 달 아래 볼 곳은 기암(奇巖) 울산바위 설경(雪景)이다.

 안개는 잊혀진 시간 떠오르는 하얀 커텐인가. 그리운 '아야진' 커피숍 창가로 가보라. 안개가 선박의 마스트 가리고, 허공을 가리고, 희미한 먼 바다의 등불 가리고, 추억을 가린다. 낮선 이국을 홀로 헤매는 정취가 솟는다. 한치 앞 분간하기 힘든 해무(海霧)에 덮힌 미시령고개, 늦가을 홍시 달린 감나무에 비치는 장산리 공항 푸른 써치라이트, 수산에서 들어가는 여운포 밤바다 드라이브 길의 오징어잡이 푸른 어화(漁火)가 끝없이 신비로운 것은, 속초에 수시로 안개 짙은 밤이 있기 때문이다.

 신(神)이 살던 정원의 폐허련가. 처처(處處)의 꽃은 숨어서 피어있다. 도원저수지 옆 초등학교 교정에 피는 벛꽃의 속절없는 흰 물결, 향냄새 젖은 낙산사 홍련암 뜰의 붉은 해당화, 필레약수의 자주빛 금낭화, 비룡폭포 오르는 난간 절벽의 푸른 금강초롱, 미시령 눈밭의 보라빛 얼러지꽃, 영하의 대청봉 하얀 에델바이스, 조용한 하일라밸리의 보라빛 난쟁이붓꽃, 알프스 3번 파브릭코스 오르는 전동차 범퍼 위로 덮히는 분홍 코스모스. 그밖에 푸른 용담꽃, 하얀 구절초, 노란 삼지구엽초와 매발톱꽃, 자주빛 꽃창포 등 기화요초(琪花瑤草)가 자생한다. 송이 향기만 말하지 말라. 야생 꽃향기 송이보다 향기롭다. 향수(香水)도 오히려 부끄럽다. 속초는 꽃조차 여승처럼 기품있는 향기를 지녔기 때문이다.

 속초는 실낙원(失樂園)이다. 푸른 파도 한없이 밀려오는 피안(彼岸)의 땅이다. 천상의 모습을 지상에 재현한 신의 작품이다. 이 속초에 가셨다면....그대는 문득 아름다움의 극치에서 어딘가서 들려오는 가날픈 쏠베지송을 꼭 들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