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기고 글

한강을 따라가며/2008년 문학시대 여름호

김현거사 2011. 6. 16. 16:19

양재역에서 일산 가는 버스는 한남대교부터 쭈욱 한강을 따라간다.반포동 흑석동 여의도 행주산성을 지나 김포대교 건너 일산으로 간다.딸아이가 사는 일산 갈 때 나는 꼭 9700번 버스를 탄다.

강 보며 가는 길은 심심치 않다.
한강은 발원지인 태백산 검용소(儉龍沼)에서 출발하여 514킬로를 흘러 서해에 닿는다.금대봉의 화려한 야생화 꽃밭을 지나서,정선 아우라지 맑은 여울을 지나서,두견새 울음 우는 영월 청령포를 지나서,백로가 나르는 청풍명월 충주호를 지나서,가로등 졸고있는 여주를 지나서,수종사 종소리 아득한 양수리를 지나서,서울로 흘러온다.

그동안 한강은 수많은 인간사를 듣고 본다.애잔한 아우라지 처녀의 사연을,청령포에 유배된 단종의 한을,탄금대에 들려오던 우륵의 가야금 소리를,아차산에 얽힌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사연을,그 외 수많은 민초의 애환을 듣고 본다.

강은 처음 검용소 석회암 암반을 뚫고 나올 때는 폭포를 이루고 힘차게 솟구쳤고,여의도 근처의 강 하구에 와서는 하폭이 호수처럼 넓어지고,물결은 조용하고,유속은 느려졌다
강은 하구에서 서둘러 달릴 필요가 없다.흐린 물 맑은 물 구별할 필요도 없었다.모든 지류를 흡수하여 하나가 되었고,수많은 아품을 품에 머금고 하나로 되었다.그 모든 구별과 아품은 원래 온 곳을 알 수 없고 간 곳도 알 수 없는 구름 같은 것이었다.그리고 서해로 흘러가 어머니 품에 안기듯 그 넓은 품에 안기는 것이다.
강은 바다가 된 것이다.아!스스로 시원(始原)의 고향이 된 것이다.

인생도 강 같았다.강처럼 천리 떨어진 고향에서 시작한 나의 여정도 처음은 폭포처럼 힘차게 출발했다.꿈을 안고 고향을 떠났고,타향을 전전하며 슬품의 언덕과 환희의 초원과 좌절의 늪을 지나쳐왔다.해 뜨고 달 지는 세월 속에 부드러운 봄비,차그운 가을비 젖으면서 지향없이 흘러왔다.삶의 회포는 가슴 속에 눈물의 호수 만들고,그리움의 섬 만들었다.수천의 노래 부르고,수만의 길을 돌아왔다.
그리고 문득 환갑 고개 넘고,은퇴의 스크린 뒤쪽에 섰다.나는 이제 하구에 도달한 강처럼 유속이 느려졌고,흐린 물 맑은 물 더 이상 구별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청탁(淸濁) 빈천(貧賤)조차 원래 바다엔 없었다.저 앞의 바다를 보면서 알 수 없는 이의 품으로 조용히 밀려가고 있다.

그 강 따라 외손자를 보러간다.인생은 한편의 드라마였다.나는 막이 내리기 직전의 무대 앞에서 일어나는 관객이었고,손자들은 입장권 사들고 들어와 새 좌석 찾는 관객이었다.이쪽 조명은 어두워지고 저쪽 조명은 불이 켜졌다.일산에 도착하면 나는 가녀린 심장의 고동 느껴지는 손자의 어린 몸을 부드럽게 안아주곤 한다.대본 없이 시작된 연극이었다.꿈결같던 드라마 하나 끝나고 새 드라마 하나 펼쳐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