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이야기
내 불로그에는 흘러간 노래가 많았다. 스콧맥킨지의 <If you're going to San Francisco>, 마리린 몬로의 <The River of No Return>, 앤디윌리암스의 <Moon river> 같은 노래다. 그런데 최근에 그 노래들이 몽땅 날라가버렸다. 음반 보호법 때문에, 곡은 사라지고 '관리자에 의해 중단된 동영상 입니다'는 멘트만 남아있다.
떠난 것은 항상 우리를 허전하게 한다. 노래가 사라져 허전하고, 그 노래 함께 부르던 사람이 떠나 더 허전하다. 종대가 금년 봄에 이승을 떠났다. '아버님이 오늘 돌아가셨다'는 따님 전화 하나로 만사는 끝나버렸다. 우리가 스므살 갓 넘었던 그 때, 종대네 집은 두구동에 있었다. 거기엔 넓은 정원이 있었고, 정원 옆에 커다란 바위돌이 있었다. 그 아래 냇물이 있었다. 우리는 달빛 속에서 키타를 치며 <Moon river>를 부르고, <돌아오지 않는 강>을 불렀다. 그 시절 소중한 추억을 몽땅 싣고 그는, '돌아오지 않는 강으로 불리는 그 강'( There is a river, called the river of no return)을 영원히 건너간 것이다.
뻐스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노라니 주마등인양 옛 일이 스쳐갔다. 종대는 내 초등학교 동창이다. 그는 부산고에 진학했지만, 방학 때면 항상 나와 어울렸다. 나는 평행봉을 잘했고, 종대는 역기를 잘했다. 둘다 체격 크고 근육이 많아, 친구들은 우릴 노지심 무송으로 불렀다. 우리는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고, 버드나무를 맨손으로 뿌리채 뽑은 양산박 호한들을 동경하였다. 63년, 고등학교 졸업한 해에 먼저 군에 입대한 건 나였다. 철학과에 입학한 나는 알베르카뮤의 <이방인> 주인공 흉내를 내고 있었다. 가장 살벌하고 비인간적인 병과가 수송이라 생각했다. 운전병이 되어, 뭐르소처럼 이유없는 충동에 몸을 내맡기고 다녔다. 삶의 의미를 방황하는 것, 그게 실존주의라고 생각했다. 서면 하이에리아 부대 옆 밤거리에서 2인1조 헌병을 구타하고, 헬멧과 완장을 뺏아, 제부지역 전 15P 헌병대에 비상이 걸리게 한 적도 있다. 몰던 GMC에 자살용 실탄을 숨기고 다니기도 했다. 종대도 비슷했다. 3학년 때 체육선생에게 도전하다가 그 학교서 졸업 못하고 딴 학교 가서 졸업 했다. 금정산 중턱에 토굴을 파놓고 거기서 종일 운동 하면서, 간혹 하산하여 온천장 주먹들과 어울려 다녔다. 그가 어느날 거기서 육군 이등병 계급장을 단 나를 만나자, 금방 해병대에 자원입대 했다.
이때가 종대 전성기다. 그는 부산진 역파 헌병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 그때처럼 종대가 근사하게 보인 적 없다. 마이가리 하사 계급장을 붙인, 하얀 해병대 헬멧 쓴, 그 엄청난 거구가 탄 찦차 차체가 한쪽으로 비스듬이 기운 해병대 헌병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 이었다. 운전교육대 훈련병이던 나는 외출 때마다 그를 만났고, 그는 항상 자갈치로 나를 안내했다. 우리가 횟집에 들어가면, 그날 그 집 아줌마는 횡재한다. 돈은 얼마던지 있었다. 우린 먹성도 좋았다. 기차 안에는 휴가병이 수없이 많았고, 종대는 기차에만 올라가면 소기의 목적을 쉽게 달성할 수 있었다. '어이!' 그가 휴가병 불러놓고, 눈만 치껴뜨면, 휴가병은 제 일 제가 알아서 했다. 돈 이야기 한 적 없어도, 돈이 스스로 주머니에 들어왔다. 도깨비 방망이같은 이야기다.
군 시절 이렇게 넘기고도, 종대 손엔 여전히 그 방망이가 쥐여져 있었다. 처음 동사무소에 근무했는데, 박정희 대통령 앞으로 보낸 편지가 단초가 되었다. '독일의 청년 나치스 당원, 일본의 가미가제 특공대는 나라를 위해 젊음을 바치는데, 왜 한국의 젊은이들은 반정부 데모만 하는가? 국가 통제권의 애국 청년단 만들 필요가 있다' 는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편지는 대통령에게 보고되어, 박통이 부산 왔을 때, 해운대 조선비치호텔에 종대를 불렀다. 덩치는 작지만 야무진 대통령이다. 거구를 보자 호감이 갔을 것이다. 몇마듸 말을 나누고, ' 자네 그럼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싶은가?' 하고 물었다. 그때 종대가 '시민들 건강을 위해 서면 위생계서 일해보고 싶습니다.' 아주 몫 좋은 장소를 콕 찍어 말했다고 한다, 박통이 싱긋 웃으며, 배석한 부산시장에게, '어이 임자! 이야기 들었지?' 그러고 갔다고 한다.
위생계란 곳이 어떤 곳인지 대략 아실 것이다. 종대가 솥뚜껑만한 얼굴로 상대를 잠시 쳐다만 보면, 봉투가 저절로 서랍 속에 쌓이더라고 한다. 방학때 마다 나는 부산에 초대되었다. 우리는 광복동, 해운대, 송정 등 돈 쓸만한 곳은 다 갔다. 송정 해수욕장에서 공주사대 출신 브니엘 여고 여선생을 불러 소개한 것도 그때다. 치고 받는 재미도 있어야 한다. 나도 뭔가 돌려주었다. 한번은 내가 다닌 학교로 그가 와서 벽보에서 뭘 보았다. '어이! 저기 장학생 명단에 있는게 누고?' 이 말 한마듸로, 내 차례 였다. 하월곡동에서 마시고, 청계천에서 마시어, 두 달 하숙비 해당되던 그 돈 동전 한 잎 남기지 않고 다 썼다.
명동에서 신문기자 하던 어느날이다. 그가 나를 찾아와 내무부로 가자고 했다. 서면에서 D일보 기자를 폭행하여 지방판에 대문짝만한 기사가 난 것이다. 고시 합격한 감사관 친구는 종대 앞에서는 말이 없었다. 부산 시절 종대가 그에게도 선심 많이 썼던 것이다. 대화 중에 종대가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 그가 나에게 귀뜸했다. '종대 일이라면 무조건 봐줘야 하지만, 봐줄려면 내 목이 달아난다 '. 그 말 한마듸에 나는 종대를 데리고 나왔다. '뭐라더노?' 그가 묻자, '니가 사표 써라. 잘 나가는 친구 신세 망칠 일 없다.' 고 대답했다. 이렇게 공무원 마감한 종대는 그 후 작은 사업체를 운영했다. 무슨 전기제품 만들던 회사다. 감사관 친구는 그후 부산시장을 거쳐, 국회의원에 출마했는데, 그때 한 친구가 후원금 모금차 날 찾아왔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소중히 생각하는 친구는 종대다. 그가 아니다. 종대는 내 대소사에 불원천리 하고 나타난다. 그는 아니다. ' 그러자 그 친구가 톤을 높였다. '아니 자네가 김시장한테 그런 소리 할 처진가?' 그래 나는 ' 지위나 재물로 친구 정하지 않는다. 나는 후원금 낼 이유 없고, 나중에 무엇을 부탁할 용의도 없다. 본인에게 이 말 전해도 된다.'고 말했다.
장례식장에 닿은 시간은 밤 11시 였다. 조문객 돌아간 식장에는 하얀 상복의 부인만 있었다. 젊은 시절 꽃처럼 아름답던 부인이다. 그 얼굴에 세월의 흔적 역력했다. 수척한 눈빛이 마음 아팠다. 불시에 옛 일이 떠올랐다. 부인은 가덕도 출신으로 경남여고를 졸업했다. 처음 종대와 맺어질 때는 종대 집에서 말이 많았다. 규수가 미모이고 머리 좋은 건 틀림없지만, 양부모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종대 집안은 곤양에서 절벽 위의 성을 차지하고 살던 가문이다. 삼촌이 박대통령 누님 사위다. 섬처녀를 종손 며느리 삼는데는 어른들 의견이 분분했던 것이다. '우짜모 좋것노?' 어느날 종대가 나에게 전화 했다. '가만 있거라. 부산서 보자!' 이렇게 서대신동에서 만났는데, 첫눈에 내가 반했다. 할머니 밑에서 외롭게 자랐다는 말은 들었다. 그 모습 마치 한송이 애련한 동백꽃 이다. 그렇게 고울 수 없다. 종대 옆에 앉으니 완전히 '야수와 미녀'다. 노틀담의 곱추와 짚씨 여인이다. '이놈이 복도 많구나' 싶었다. 셋은 그날 송정해수욕장으로 가서 백사장에서 밤을 새웠다. 앞에는 파도가 부서지고 있었다. 두 야수는, 손에 쥐면 부서질 것 같은 동백 아가씨를 옆에 끼고, 수없는 이야기를 볓빛에 뿌렸고, 수없는 노래를 파도에 묻었다. ‘우짜꼬?’ 이튿날 종대가 물었다. '우짜긴 뭘 우째? 뜯어 치아뿌라.’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옆의 그녀도 그말 듣고 있었다. 그가 ‘와? 그 이유가 뭐꼬?’ 묻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옥이씨 데리고 살란다. 우하하하! 니는 치아뿌라 문디 자석아!’ 이런 사연이라, 종대부인은 평생 나를 특별손님으로 생각했다. 전화 걸면 애교스런 경상도 사투리로 그리 반가워 할 수 없었다. 찾아가면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시장에서 사왔다. 셋이 언제 부산서 노래방 갔을 때다. '이 노래를 옥이씨에게 바칩니다' <동백 아가씨>를 불렀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품에 겨워...꽃잎이 빨갛게 물이 들었소’.
밤 깊은 상가에서 친구 부인 눈에 맺힌 이슬을 보니, 세월이 무정타 싶었다.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그날 밤 나는 잠 한숨 붙이지 못했다. 뜬눈으로 새웠다. '쏴아아! 어디선가 쓸쓸한 썰물 소리가 들렸다. 이제 나는 물 빠진 갯가에 홀로 선 것이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 너와 내가 아니냐. ...' 송정에서의 그 밤 그 노래가 귀에 들렸다. 종대는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떠난 것일까? '인생은 외롭지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박인환의 시 '목마와 숙녀'가 생각났다.
종대와 이별하고 돌아온 얼마 후, 케이불 방송에서 수호지를 방영하고 있었다. 거기 행자 무송과 화화상 노지심의 활약을 보자, 형언할 수 없는 감회가 치솟았다. 그가 그리웠다. 그래 핸드폰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니, '지금 거신 전화는 결번이오니, 확인하시고 ...' 하는 멘트가 나온다. 하도 허망해서 동창록을 꺼내 뒤져보니, 집주소가 옛날 집 주소다. 따님 전화는 '없는 번호 입니다. 확인 후 다시 걸어주십시오.'로 나온다. 부산 동기회장에게 물어보니, 평소 종대와 가깝던 사람이 이교장이라 한다. 이교장에게 전화해보니, 그도 모른다. 인생의 끝자락은 이런 것인가. 갑자기 발을 헛디딘 것처럼 휘청했다. 전화는 결번이고, 노래는 관리자에 의해 중단되었다. 멜랑꼬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리움만 그 파도 속에 오고 또 간다. 이제는 정말 <해운대엘레지> 노래말처럼, 다시 두번 또다시 만날 길이 없다면, 못난 미련을 저 바다 멀리멀리 던져버려야 하는가. 그때 그 시절 그리운 시절 못잊어 흐느끼며 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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