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2

내가 만난 대통령들

김현거사 2014. 9. 28. 11:31

 

  내가 만난 대통령들

 

 얼마 전 남강 문우 세사람과 기차를 타고 경주로 가면서 차 안에서 오간 이야기이다.

 '요즘은 스피드 시대라 수필도 분량이 길어 잘 읽지 않는다. 함량미달의 작가가 횡설수설하는 수필이 많다.' 

 그러면 이런 이야기는 어떻소 하면서, 내가 어떤 이야기를 꺼냈다. 시간도 많겠다 내가 만난 대통령 이야기  몇개 소개하니,  앞에 앉았던 여류시인이 '그 이야기는 재미라도 있어 좋다'는 반응이었다.

 그래 간략히 소개한다.

 

 나는 남의 비서 노릇을 20여년 하였다. 그러다 이런저런 일로 노무현, 김대중,박충훈, 박근혜 대통령을 직접 만났다. 박정희 전두환 두 분은 제법 근처까지 가보았다.

대통령이라면 옛날에는 왕이요, ‘상감마마’ 다. 드라마에선 ‘폐하! 황은이 망극하옵니다’라고 말하는 대사의 대상이다. 이런 왕과의 알현은 옛날엔 족보에 올릴 대사건이다.

 

 노무현 씨는 노래방에서 만났다. 한번은 비서실 직원들과 회식을 하다가 3차로 한남동 필하모니란 노래방에 갔다. 그때 술은 이미 만취상태였는데, 안면있는 사람이 보이길래, 술김에 반갑다싶어 청하지 앉는 그들 좌석에 털썩 앉았는데, 그 자리가 노무현 씨와 손숙 씨 자리였다.

 손숙씨는 학창시절 연극한다고 교정에서 멋 부리고 다닌 사람이다. 내가 먼 발치로 꽤 이쁘다고 여기던 여학생이다. 그래 '이 아줌마는 내가 안암동에서 본 아줌마네. 여긴 웬일이여?' 하고 시동을 걸었는데, 생각보다 붙임성 많다. 당장 '아 그러시군요. 반갑습니다' 동문이라고 반갑게 해준다.

 그런데 안면 있던 남자는 알고보니, 전혀 모르는 사람이다. 신문에서 자주 본 얼굴을 아는 사람으로 순간적으로 착각한 것이다. '선생은 안면은 많은데, 지금 가만히 보니, 신문과 TV에 자주 나온 사람이라서...' 노선생한테는 취중 실수임을 슬쩍 비쳤다. 그러자 그 양반 화통하다. '아! 우리나라 사람들 다 동포 아닙니까. 자! 한잔 받으시오.' 그러면서 양주 잔을 내게 내민다. 아마 옆에 앉은 미인을 고려해서였을 것이다. 

 이렇게 남의 자리에 앉아서 한 일은 실수 밖에 없다. '어! 잔이 비었네. 신사숙녀 여러분, 이러시면 곤란하지. 내 잔이 비었소'  술 따라 달라고 야단을 쳤다. 끝내 양주 한 병 완전 비워버렸다.

 두 병 째 때 노무현씨 노래 지명이 와서 그 양반이 무대로 올라갔는데, 그때 나는 그가 내 무슨 친한 친구라도 되는 양 어깨동무하고 같이 무대에 올라갔다. 같이 마이크 잡고 노래 세 곡 불렀다. 노래 끝나고 내 노래도 신청했다. '어이 사회자 양반! 내가 누군지 잘 모르는 모양인데.... 내가 적어도 가요계의 황제 남인수 고향 사람이오. 반주 한번 넣어주소'  그러곤 순서에 없는 노래 세 곡을 연속으로 불렀다. 이걸 안하무인이라 한다. 술주정이라 한다. 이때 노의원은 니가 내 노래 불렀으니, 나도 니 노래 같이 부르겠다는 심보인 모양이다. 같이 마이크 잡고 세 곡 나란히 부르고 내려왔다.  

 지금 생각해도 그날 운 좋았다. 임자 잘못 만났으면 시비 끝에 멱살 잡혔을 것이다. 나중에 비서실 직원들이 몰려와서, '의원님 죄송합니다. 저희 모모 그룹 비서실장님입니다. 만취해서 결례가 많았습니다. 오늘 계산은 저희들이 하겠습니다.' 사과를 했다. 그때 그 노선생 댓구가 지금도 맘에 든다. '나도 술 좀 하는 사람이요. 괜찮소, 계산 관두소.' 였다.

 훗날 나는 홈컴잉 자리에서 손숙씨 만났다. '전에 필하모니에서 결례한 그 사람이 바로 이 사람  올시다. 기억 납니까?' 그랬더니 손숙씨는 빵긋 웃으며, '아니네요, 정말로 재미있던 분이시던데요.'하고 댓구했다.

  

  김대중 씨는 속초에서 만났다. 대통령 유세 때였던 것 같다.

 한번은 관리부장이 내 방에 와서 오피스텔 두개와 강당을 김대중씨가 쓴다고 보고했다.

 부장 생각엔 얼만가 사용계약금 받은 일을 칭찬받고 싶었던 같다.

 '어? 돈을? 그쪽에 연락해서 돈은 돌려주소.'

이런 지시를 그는 선뜻 이해 안가던 모양이다. 쭈삣거리며 눈치를 본다.

 '썩어도 준치라고, 그래도 김대중 씨는 우리나라 3김 중 한 분. 그런 분한테 돈 받아서 쓰나? 오히려 우리 백화점에서 강연하니 백화점 피알해준 것이요. 우리가 도로 그 양반한테 광고비 줘야지...' 

 그랬더니, 좀 있다 속초 당 지부장 전화가 온다.

 '감사합니다. 선생님한테 사장님 조치 보고하겠다느니 어쩌니, 돈 없는 야당 신세 하소연 겸해 고맙다는 인사였다. 

 

 나야 그때나 지금이나, 정치는 지붕 위 닭처럼 보는 사람이다. 관심 없다.

 그러나 같은 호남 출신 그룹 회장은 어떨까 싶어서 미리 보고는 해두는 것이 좋겠다. 전화 보고를 드렸더니, 노회장이 흐믓해한다.

 '그랬어? 그럼 김대중씨 오시면 자네가 한번 만나소. 내 안부도 좀 전하고....' 

 말하자면  만나서 직접 자기 생색도 좀 내라는 것이다.

'그러겠습니다.' 이렇게 대답하고 당에 연락하였더니, 좀 있다 면담 시간이 온다.

 그런데 우리 그룹 종합조정실에서 난리가 나버렸다.

 '김대중씨는 절대 만나선 안된다'는 것이다.

 아들 회장이 대통령 출마한 이회창씨와 경기고 동창이다. 아버지 이야기 듣고, 아들이 화들짝 놀래버린 것 이다. 선거 자금도 좀 건넨 것 같았다.

 '알았어요.' 일단 이렇게 대답은 했으나, 일은 꼬였다.

 아버지는 만나라 하고, 아들은 안된다고 펄펄 뛴다. 김대중씨 쪽도 문제다. 멀쩡히 면담 신청해놓고 금방 어떻게 취소하나? 그날 그룹 본사는 밤 10시까지 만나지 말라는 긴급 전화를 무려 세번이나 나에게 하였다.

 '아따 호떡집에 불 났어? 골치 아프게.' 

이때 내가 골치 썩이다 내린 결론은, 만나고 안만났다고 잡아떼면 그만이라는 것이다.

 

 이튿날 김대중씨를 만날 때는, 그 분과 별로 친하지 않은 노회장 안부만 전하려고 면담 신청했다긴 뭔가 싱거웠다. 그래 내가 궁리해 낸 것이 내가 출판한 책 한권을 증정해 올리겠다는 구실이다. 

 대통령 출마한 사람이란 그런 것인가 싶었다. 15층 복도 전체가 그 양반 만나려는 사람들 천지였다.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한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방에 들어가니 정동영 정희경 두분이 수행하고 있었다.

 VIIP라고 우리 직원이 방에 병풍도 하나 갖다 놓았다.

 '백화점 사장님 이십니다.'

 속초 지부장이 나를 소개하자, 

'서로 인사하세요.'

 김대중씨는 손을 뻗어 뒤에 배석한 두사람을 가리킨다.

 '아! 이분들 제가 잘 아는 사람들 입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생판부지의 남자가 자기를 안다니 정작 당사자들이 더 놀랬을 것이다.

 그러나 다음 내 말도 따져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이분들 요즘 신문 TV에  맨날 얼굴 나오는 분들 아닙니까?'

 그 말에 모두 웃고 말았다. 

 다 바쁜 분들인데 우물쭈물 할 필요없다. 바로 본론에 들어 갔다.

 '평소 제가 듣기로 선생님은 책을 많이 읽는 어른으로 알고 있어, 혹시 지방 가실 때 비행기 기다리는 시간에 보시라고 책 한 권 올리려고 왔습니다. 제가 쓴 책인데, 동양 고전을 간략히 소개한 책 입니다. 그리고 저희 노회장님 안부 전해 올립니다.'

 그러자, 그 분은 책을 보더니,

 '아 출판사가 김영사군요. 김영사 좋은 출판사지요. 곧 내 책도 거기서 한 권 나옵니다.'

 그러면서 배석한 사람에게 자기 책을 가져오라해서 즉석 휘호하고 건네준다. 한길사에서 나온 <나의 길, 나의 사상>이란 책이었다.

 

 

 

 곁들여 본인 이름 새겨진 탁상시계와 만년필을 내놓았다. 하나 주고 셋 얻었으니 장사 잘 한 셈이다.

  훗날, 만년필은 나에게 살갑게 구는 호남 출신 후배에게 주었다. 김대중 휘호 새겨진 그 만년필은 나에겐 별 의미없었지만, 그에겐 폼 나는 물건이었을 것이다. 

  

 

 

 이날 강연 마치고 돌아갈 때, 선생은 나에게 또다른 선물 하나 주고 갔다.

 내 집 찾아온 손님이니 가실 때 배웅이나 해야겠다고, 백화점 입구에 나갔더니, 수많은 인파 속에서 어떻게 나를 보았던지 모르겠다. 선생이 인파를 헤치고 내게 닥아오더니, 귓속말 건넨다.

 '회장님께 잘 다녀갔다고 안부 전해주시오'

 내용은 별 거 아니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정치 9단의 그 제스쳐 의미를 몰랐다. 이튿날 아침에사 깨달았다.

 새벽에 대명콘도 골프연습장에서 경찰서장 만났을 때다.

 '김사장!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소? 서로 자주 만나는 사람이....'

느닺없이 이런 소리를 한다.

 '아니 서장님 무슨 말씀입니까?' 물으니, '사람이 뭘 숨기고 그러지 맙시다. 수사과장한테 어제 일 다 보고 들었소. 김대중 선생과 귓속말 한 거...' 한다. 

 그 보고를 받고, 그는 내가 서울의 무슨 대단한 사람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그 참 군중 앞에서의 정치인 귓속말 하나가 이처럼 약빨이 강하다.

 경찰서장과 같이 운동하던 세무서장은 더 놀래버렸다. 그 분도 호남 분이다. 당장 그날 아침밥부터 세무서장이 샀다. 백화점 사장한테 세무서장이 물주겠는가. 그날 이후부터 세무서장과 경찰서장이 날 대하는 태도는 백팔십도 달라져버렸다. 다 그 양반 덕택이다. (계속)

 

 

  전두환 사령관을 만난 곳은 신당동 이다. 박정희 대통령 빈소 앞에 별을 단 군인이 퍼런 잠바에 권총을 차고 앉아 있었다. 살벌한 표정으로 앉은 그 모습은 누구라도 고인의 존엄을 훼손할 수 없다. 만약에 그런 자가 있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박대통령이 피살된 그 당시 재벌들은, 그동안 누구나 신세는 졌지만, 혹시 잘못 나섰다가 찍힐까봐 전부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서울의 그 유식하고 잘난 사람들도 마찬가지. 뉴스 돌아가는 것만 주시하고 있던, 한심한 시간이었다.

 그 당시 회장실에 들어갔다.

 '회장님! 그동안 박대통령은 우리가 첨단반도체 한다고 얼마나 호의적이었습니까? 신당동에 조문을 가시지요.' 

 그러자 회장은 '가도 괜찮을까?' 되려 물었다. 뭔가 찜찜한 것이다.

 '회장님! 앞으로 정국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박통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2-3년 지나면 확실히 달라집니다. 경제발전으로 나라를 혁신시킨 그 분 치적은 앞으로 어느 대통령도 따라가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조문 가서 설사 우리가 지금은 누구한테 오해 받고 조금 손해본다해도,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옳았다고 금방 밝혀질 것 입니다.'

 이렇게해서 회장이 향촛대 준비하여 신당동에 조문을 갔다.

 

 그러나 정작 나도 이 일로 나중에 우리 회사 패가 그렇게 잘 풀릴줄 몰랐다.

 당시 전두환 사령관은 자기를 키워준 박대통령 시해 사건이 나자, 일생일대의 모진 결심을 하였을 것이다. 누구도 박대통령을 모독해서는 안된다는 맥락에서 12.12사건 터졌을 것이다. 死卽生의 각오로 나서서 결국 일개 군인이 대통령 자리를 거머잡고 올라간 것이다.

 나는 당시 각료들은 모두 소신없고 나약했다고 생각한다. 훗날 회장과 TK 대부 신현확 총리가 모처에서 한잔 하던 자리에 수행하여, 신총리 입을 통하여 당시 이야길 들었다. 신총리는 대구 지방 어른으로 대접 받던 분이다. 총리 퇴임한  나이에도 양주 한 병 비우시던 호탕한 분이다. 그 배짱 좋은 양반도 할말 못하고 물러섰다고 했으니, 당시 분위기 짐작된다.

 여하간 그때 우리 회사가 신당동 다녀가자, '저 사람들 누구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물었다고 한다.

 그분은 재벌 중에 유일하게 조문한 회사를 의리 있는 회사라고 일단 기억한 모양이다. 후에 대통령에 오르자, 확실하게 밀어주었다.

 

  전통이 일본 재계의 대부 마스시타고노스케를 한국에 초청했을 때 였다. 

 청와대서 연락이 왔다. 공항에 나가라는 것이다. 말은 전경련 초청이지만, 실은 청와대 초청이었다.

 와서 한국의 분단 현실을 보고 일 재계에 대한국 협력 무드를 조성시키는 일이 그 목적이었다.

 우리 회사는 마쓰시타와 합작하여 칼라 TV 오디오를 생산하던 회사다.

 공항 접견서부터 전방 시찰, 청와대 방문, 전경련 강연, 새마을 본부 방문 등 모든 스케쥴에 관여했다.

 그때 새마을본부 전경환 회장은 원래 스케쥴에 없었다. 그런데 전경환씨는 고노스께의 방문을 받고싶었던 모양이다. 우리에게 부탁해서, 고노스께 옹을 새마을본부로 초청했다. 그 바람에 옹의 강연 들으려고 여의도에 빽빽히 모였던 사람들은 거의 한시간 기다렸다.  방송사 취재진들은 한시간 펑크를 냈다.

  전경환 본부장 친구 한 분이 우리 회사 감사였다. 일종의 로비스트였다. 그 인연으로 전본부장과 남영동 룸싸롱에 가 본 적 있다. 내 생전 술자리 호스티스에게 그렇게 친절하게 대하는 백전노장을 본 적 없다. 그분들  노는 수준은 거의 예술이었다. 팁도 후했지만 약자에게 다정하게 대하는 그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중에 전통이 하야하여 백담사 계실 때, 나는 대학 강의 차 속초로 가다가 백담사에 들렸다. 지금 그 분에 대해 왈가왈부 말은 많지만, 나는 남자다운 그 분을 원래 좋아한다. 눈 쌓인 절에 계시니 위로라도 해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백담사 입구에서 차를 돌렸다. 대구서 온 뻐스들이 이미 너댓개나 와서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나 말고도 전통 팬은 억수로 많았다.

 

 

  박충훈 전 대통령 권한대행 하면 우선 그 분의 인품부터 생각난다. 내외경제 기자였으니, 무역협회장 시절 나는 그 분 산하에 있던 기자였다. 그러나 대면한 적은 없고, 대통령 권한대행 후에 내가 모시던 회장 지시로 그 분 성복동 자택 방문하여 뵈었다.

  인상적인 것은, 그날 그 분이 댁으로 돌아오면서, 성북동 밑에 차가 밀려 10 분 늦겠다고 나에게 전화 주신 일이다. 그 전화는 일국의 정상에 있던 분이, 그것도 약속은 약속이라고, 일개 비서에게 할 전화는 아닐 것이다. 교통체증으로 10분 늦는 것은 보통사람들도 흔한 법이다.

 그동안 손님 왔다고 대청에 나오셔서, 굳이 그냥 방에 들어가시라고 말해도, 말상대 해주신 사모님 인품도 기억난다. 또 공손히 차를 내오던 아름다운 며느님도 잊히지 않는다.

 낮선 손님이 오자 호기심 발동하였을 것이다. 옆에 왔던 손자가. 할머니가 '선생님에게 인사 드려!' 하자,  할머니 뒤로 숨었다. '아! 참 잘생겼구나. 이름이 뭐냐?'고 묻자, 환한 얼굴로 인사하던 손자 모습도 기억난다.

 그분 가족들은 모두가 교양 있고 온화하였다. 국민의 사표라 할만 했다.

 그날 찾아간 용건은 별거 아니었다. 회장 막둥이 아들 서울대 교수 추천 건이었는데, 그 어른은 냉큼 인장을 가져오라고 하여 날인 해주시며 혼자말로 '서울대 출신이 아니라서 어려울 것인데...' 중얼거렸다.  덕이 높은 분은 일을 이렇게 처리 하는구나 싶었다. 소인배들은 될 일도 생색 내기 바쁜데, 큰분들은 않될 일도, 이렇게  호의로 처리하시는구나 하고 속으로 많이 배웠다. 

 

  나는 비서라는 직업상, 한국 정재계 유명인사 집은 거의 가보았다. 그 중 권력 맛에 취한 집에선 자식들까지 방자한 꼴도 더러 보았다. 오직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렴씨와 박충훈 대통령 권한대행 댁에서 교양있고 온화하고, 존경스런 가문의 모습을 보았다. (계속)

 

 

 박정희 대통령은 요즘은 다들 존경한다. 그러나 내가 대학 다닐 때는 그렇지 않았다. 데모하면 애국자고, 반대하면 사상가였다. 그때 생긴 에피소드 하나 소개하고 넘어가자.

 매스컴에 간혹 나타났던 도올 김용옥과 얽힌 이야기다. 

 그는 얼굴에 냇천자 긋고 침을 튀기며 데모 하고 싶어 하는 학생이고, 나는 그 반대 학생이었다. 나는 신문 사설 밑줄 긋고 외우던 기자 지망 군대 제대한 선배였고, 그는 처음부터 성깔머리 삐닥한 후배였다. 

 '용옥아! 너 그 좋은 머리로 서양철학 뜯어치우고 동양철학 해라. 서양철학은 아무리 잘해도 결국 세계 2등밖에 못한다. 동양철학 해야 나중에 그 분야 세계 제일의 학자가 된다.'

 한번은 내가 그에게 호의로 이런 말을 한 적 있다. 그 소리에 그는 그 안하무인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봤다.

 '김 선배가 아무도 안하는 동양철학 하는 이유 내가 모를 줄 아오? 동양철학 노교수님들이 학점 후하게 주니까 장학금 챙기려고 하면서...'

 선배한테 이런 말버릇이 어디 있는가. 

 이 친구가 나중에 하바드에서 동양철학으로 박사를 받고 돌아오자 딴소리 했다. 

 당시 동양철학 전공은 철학과 30명 중 나와 권모라는 친구 둘 밖에 없었다.

그걸 아무도 모를 것이다 싶은지, 그가 후에 자기도 전공한양 말하는 걸 보고, 고소를 금할 수 없다.

  

 용옥 군이 하루는 강의실에 갔더니, 자기가 무슨 애국자마냥 뜨거운 눈빛으로 급우들에게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이제 우리 학교가 데모 나설 때가 되었다'느니 뭐니 떠든다.

이건 아니었다. 당시 사람들은 집권자 욕을 하기 즐겼지만, 그건 몰지각한 행동이요, 속된 군중심리다. 적어도 학문 중 학문이라는 철학을 배운 사람은 이러면 않된다고 나는 생각했다.

복학생이던 나는 그때 그 과 큰형님이다.

 '수업이나 받지, 데모는 무슨 놈의 데모?'  

이렇게 찬물을  끼얹자 용옥이와 말싸움이 시작되었다. 설전이 벌어지자, 급우들이 제의했다. 

 '그러면 빈 강의실에 가서, 정식으로 두사람 의견을 한번 펴시오. 데모를 하느냐, 마느냐. 결론 나는 쪽으로  모두 행동 통일 하겠다'고.

 단상에서 먼저 용옥이는 시국의 여러 문제점을 나열하였다.

 나는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을 주장했다.

 1단계는 생리적 욕구다. 2단계는 안전 욕구요, 3단계는 사회적 욕구, 4단계는 존경취득 욕구, 5단계는 자아실현 욕구다. 이런 욕구는 피라미드형으로 이뤄져 생리적 하위욕구가 가장 강한 것이다.

 나는 일단계 생리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제일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부터 역설했다. 먼저 경제를 살리는 일이다. 독재니 뭐니를 따지는 일은, 춥고 배고픈 우리 현실에서 사치에 불과하다고 말하였다.

 결과는 참석 학생 찬반 거수로 결정했는데, 도올의 완패였다.

 그러나 그는 그 후 내가 도서관 간 사이에 그가 '김형은 나이도 많고, 아무래도 정보부 끄나풀 같다. 어디서 그런 이론을 배웠겠느냐?'며 급우들을 꼬득겨, 강의실을 점령하고 고대 데모에 불을 질렀다. 

 그 꼴을 미식축구 선수였던 내가 가만 두었겠는가. 용옥이 죄는 두가지였다.

 첫번째는 결론 나는 쪽으로 행동통일 하잔 약속을 어긴 것, 두번째는 나를 정보부 운운하여 매도한 것. 이날 교수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사정없이 폭행 당한 일이 아마 용옥이 대학 4년 중 가장 치욕적 일이었을 것이다.

 철부지 때 일이지만, 당시 박통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소개한다.   

 

  당시 학생들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반대를 무슨 신성불가침의 이념인듯 착각하였다. 그러나 나는 맑스의 구조이론을 옳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경제란 하부구조가 결국 정치 문화 등 상부구조를 결정한다. 우선 먹고 살게 된 이후에 상부구조의 칼라가 결정되는 것이다. 배고픈 놈이 민주던 독재던 그게 무슨 상관이냐. 우리나라 형편에서는,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정부가 최선의 정부다.

 지금도 나는 독재란 개념을 이렇게 생각한다. 가난이 가장 큰 독재이다. 나라가 가난하면 온 국민이 희생 당한다. 자식도 취직 못하면 부모에게 죄인이다. 취직 못한 젊은이는 얼굴 펴고 살 수 없다. 직장 없는 부모도 자식에게 죄인이다. 말하자면 먹고 살 직장 없으면, 자식도 부모도 다 죄인인 것이다. 가난이야말로 전국민을 죽이고 살리는 무소불위의 독재인 것이다.

 그 반면에 정치판에서의 제한된 독재는, 전혀 국민과는 상관 없는, 정치권 속에만 존재하는 독재다. 선량한 국민에 대한 독재가 아니다. 나라가 잘 살게 되면, 그때는 저절로 민주화, 자유화가 온다. 회사원은 상사에게 할 말 다하고, 수 틀리면 다른 회사로 당당히 갈 수 있다. 일자리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이 진정한 민주요, 자유이다. 

  박통은 경제 발전을 방해한 정적들에게 엄하게 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국민은 아무도 그에게 고통 받은 적 없다. 오히려 일자리 많아 호강을 누렸다. 가난은 호랑이 보다 무섭다. 박통은 그 호랑이를 퇴치를 위해 싸운 고독한 투사이다. 

 

 그 당시 나의 시국관을 지금도 나는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나는 학생 데모를 취재나온 미국의 모 언론사와 인터뷰를 했다. 데모 찬성 학생은 많았지만, 데모 반대 주장하는 학생은 그야말로 찾기 어렵던 시절이다. 데모 중인 교문 앞 돌벤치에서, 당당히 인터뷰한 일을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당시 맹열 데모꾼 박계동 동문은 결국 그 길로 나가 나중에 국회의원이 되었다. 성공회 신부 이제정 동문도 박통 반대당에 들어가 부총리 챙겼다. 용옥 군도 그 궤변 강연과 책으로 삼청동에 빌딍 하나 챙겼다. 시인 김지하씨도 반정부적인 글로 유명세 탔다. 모두 데모와 반정부 운동하여 한 몫 챙겼다. 무슨 사상가인양 행세했다. 고통을 당했거나 감방 다녀온 것을 무슨 훈장처럼 자랑했다. 그러나 아무도 40년 전 자기 행동을 반성하는 사람 없다. 나는 그들이 국회의원 부총리를 해먹어도 부러워 한 적 없다. 어리석은 역사의 코메디 주인공들로 생각한다. 아마 자기 나라 미래를 그렇게 사사껀껀 방해한 사람들이 큰소리 치고 사는 나라는, 지구상에 우리나라 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 김지하씨가 생각을 바꾸어 다른 성명을 낸 적 있어, 나는 김지하씨는 그나마 양심은 있구나 하고 생각한다. 인간들은 저마다 제가 옳다고 우기지만, 시간이 지나면 역사는 이를 판정해준다.

(계속)

 

 

 나는 박통 팬이지만, 사실 우리 집은 박통 피해자다. 아버님은 5.16을 군사쿠테타라고 했다가, 수사기관 조사를 받고, 진양군 교육감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박통이 정치를 제대로 했기에 우리 집안은 누구도 대통령을 비난한 적 없다.  

  그러나 이런 시국관 때문에 나는 사회 나와서 덕을 좀 보았다. 

 신문 기자 하다가 기업체로 직장 옮길 때다. 입 바른 기자를 비서로 쓴다는 일은 쉽지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회장이 큰 결단을 내렸다. 자서전을 쓸려니 글쓰는 기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회장 직접 면담이었는데, 그때 그 분이 현존하는 사람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대답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말이 그분이 딱 원한 대답이었다.

 회장은 자주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서신 써 줄 사람 나타난 것이다.

 나에게 뭐라고 몇마듸 말을 해주면서 대통령에게 보낼 서신을 하나 써보라고 하더니, 내가 쓴 편지를 읽고는 '당장 내일부터 비서실로 출근하시오.'라고 결정했다. 

 그후 나는 '박정희 대통령 옥궤하(玉机下)' 란 존칭 밑에 청와대 행 편지 초안을 잡고, 그 편지를 청와대로 전달하는 배달원이 되었다.

 

  나도 처음에는 사실 그 회사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다. 이참에 재벌이란 사람 사는 모습이나 최측근에서 구경이나 해보자. 그것도 나중에 내가 작품을 쓰면, 작품 소재가 될 것이다. 이 정도로 생각했다. 이 양반이 한국 경제의 한 축을 이룬 분이니, 그 분 자서전에서 당시 한국 경제 르뽀를 써보자. 이런 요량으로 갔다. 

 사실 그 양반과 내가 체질상 궁합이 맞겠는가. 나는 비서라기엔, 나긋나긋하지도 않고 말도 거칠다. 고집도 세다. 그런데 나는 비서실에서 20년 썩었다.

 몇년 지나고보니 갈 곳이 마땅치 않아, 그래서 아예 거기 눌러붙었다.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결국 나중에 그 분 자서전도 끝내줬고, 그룹 비서실장도 했고, 그 양반한테 연세대 명예박사 감투도 머리에 얹어줬다. 돈 문제에서도 부천 화신전자 땅 3만평을 3년 거치 8년 분활상환 조건으로 계약금 6억 내고 사서, 나중에 그걸 5천억 짜리 로또로 만들어 주었다. 

 

 어쨌던 내가 거기 가서 제일 처음 한 일은 그 양반 비자금 조사였다. 명목은 보안점검, 파일 정돈이지만, 실은 이 양반이 돈을 어디다 누구에게 바쳤는가가 궁금했던 것이다. 

  비밀 금고 안에는 대통령과 고급 관료, 은행장, 법조계 인사에게 보낸 기밀 서류가 있었다. 선물 받는 사람들 명단과 주소, 연락처, 선물 내역이 있었다. 나는 그걸 일주일간 샅샅이  검토한 끝에, 박정희 대통령이 참으로 청렴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분은 철저히 우리 회사를 밀어줬지만, 단 돈 10원 한장 받은 적 없다.  회사가 뇌물 바친 흔적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박통은 당시 재벌 모두에게 세금쪼로 다 뜯어내던 ‘방위성금’을 우리 회사는 면제해주었다. 돈 받고 봐준게 아니라, 첨단산업 하는 회사라는 그 이유 때문에 봐준 것이다.

항간에선 박통이 내가 옮긴 그 회사 투자 지분이 있다는 루머가 있었지만, 말짱 일 없는 사람 이야기다. 

 그 회사 앨범에는, 서강대 전자공학과 학생이던 근혜씨가 단발머리 하고 와서 라인 투어 하는 사진이 몇 장 있다. 근혜씨 서강대 은사인 임태순 교수와 왕래한 편지도 있다.

 박통이 반도체에 관심은 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건 국가 장래를 위한 첨담산업에 대한 관심이었다. 

우리 회사가 청와대에 보낸 것은,‘佛心’ 이라고 쓴 김회장 글씨 한 점 밖에 없다.

 선물은 딱 하나 있다. 박통 서거 얼마 전에 경동시장서 사온 인삼 생지황 등 고급 한약재로 영동에서 뽕나무 뿌리를 구해와서 고아서 만든, 경옥고(瓊玉膏) 한 단지다.

 

  차지철이 한 원양회사서 불로소득한 집이 있었다. 4,19탑 방문하고 오던 길에 차지철이 자랑스럽게 박대통령을 모시고 집들이를 했다. 그런데 음식이 엘리베이터 타고 2층으로 올라오는 것을 보자, 박통이 자네도 이런 식으로 할려는가?’ 하면서 화를 벌컥 내는 바람에 차지철이 황급히 이 집을 반납하고 연희동으로 도로 이사간 일화가 있다.

이런 점이 내가 박정희 대통령에 감동한 대목들이다. 세상에 이런 깨끗한 분이 다 있나 싶었다, 그래서 나는 그 후로 완전히 박통 신도가 되었다.

  

  박통 밑에서 오랜 재무장관을 한 김용환씨가 간혹 우리 회장과 청진동 <장원>이란 요정에서 식사를 했다. 거기서 들은 박통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고생하는 파독 광부와 간호원들을 만나 눈물 흘린 이야기, 정주영과 의기투합해 경부고속도로 뚫은 일, 여론이 반대하던 월남 파병 이야기는 모두 사나이 가슴이 치는 이야기였다.

 박통은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월남 파병 등 이런 굵직한 일을 처리할 때는, 혼자 잠을 못들고 청와대 뜰을 거닐었다고 한다. 그러다 간혹 새벽 2시에 김장관한테 전화 한다고 한다. 독재한다고 야당은 사사껀껀 쌍지팡이 들고 반대하지, 철모르는 대학생도 데모로 괴롭히지, 참으로 고독했을 것이다. 

 김장관은 녹번동인가에 집이 있었다. 나는 그분 댁에서 부인에게 커피 얻어먹으며, 장관이 12시 이전에 집에 오는 적이 없다는 이야기, 공휴일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Workaholic(中毒)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런 멋진 대통령과 장관을 나는 존경했다. 

 그래 나는 박통에게 보낼 서신을 만들 때 이 시대 영웅에게 편지 쓴다는 기분으로 안을 잡았다. 그 당시 헐뜯기만 하던 야당들과 정반대 사상이다. 그들은 정권 뺏으려고 박통을 욕하고 국민을 선동했을 뿐이다. 옳고 그른 걸 모른다. 페어플레이 정신이 없다. 지금 그들은  미안하단 말 한마듸 없이 그들이 반대하던  경부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를 잘만 이용하고 있다. 

 

 나는 직접 박통과 대화를 해본 적은 없지만 세종문화회관  리셥센에서 몇번 뵈었다. 초청장이 오면, 모시던 회장은 매번 노년을 핑계로 빠지는데, 그러면 내가 가서 방명록에 대필서명 해놓고, 누가 왔고,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보고 와서 보고했다.

 그 자리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자리다. 한국 재계 거물들만 가는, 말하자면, V-VIP 모임이다. 들어가면 칵테일 잔 들고 박통 근처 갈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새끼 재벌들은 대통령 경호실 안기부 눈치 보며 근처에 얼씬도 못한다.

 가장 인상 남는 사람이 정주영 회장인데, 정회장은 인품이 서글서글해서, 누군지 모르지만, 거기 들어온 이상 모두 중요한 사람이겠지 생각하고, 장내를 흽쓸고 다니며 악수를 청하였다. 그 바람에, 나도 한국 최고 재벌 손은 몇번 만져보았다. 

 

  우리 회장이 박통에게 보낸 유일한 선물은 10,26 사태로 서거하기 한 달 전에 보낸 경옥고 한 단지다.

 경옥고 제작은 20년 회장 한약 심부럼 전담했던 내가 했다. 재료는 꿀 인삼 생지황 백복령인데, 경동시장에 나가서 재료 사오고, 충북 영동에 차 끌고가서 마른 뽕나무 뿌리 구해와서 약을 다렸다. 닭 우는 소리 들리지 않는 곳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동의보감 처방 때문에, 용인 연수원에 조수 하나 데리고 가서 한 사나흘 잘 놀았다.

 경옥고는 그 약을 먹으면, 흰머리가 검어지고, 빠진 이가 다시 나며, 말처럼 뛰어다니게 해준다는 명약이다. 그 약 드시고 국정에 더욱 박차 가해 달라는 첨부 서신을 써서, 청와대  김도룡 총무 비서관에게 전달했다. 김비서관은 우리 회장의 깐깐한 성격을 잘 안다. 의례히 하는 검사를 거치지 않고 바로 올려드리겠다고 하였다. 지금도 궁금한 것은, 대통령이 서거 전에 그 경옥고를 몇 숟갈이나 드셨을까 하는 점이다.

 

 

  대학생 때 단발머리 하고 우리 회사를 방문했던 박근혜씨는 아버지 서거 후, 회사 옆 화양동 어린이공원 안 육영재단 사무실에서 몇번 만났다.

 세상 인심이 고약해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던 그 때, 내가 회장을 설득하여, 설, 추석에 금일봉 들고 찾아갔다. 근혜양은 무척 고마워하며, 회장님  안부도 묻고, 돈 없는 이야기도 했다. 절전하고 난방비도 줄인다고 했다. 나는 우리 회사가 10, 26 당시 신당동 빈소 찾아갔던 이야기, 중역 대동하여 국립묘지 참배한 이야길 해주었다.

 근혜양은 그때 아무나 만날 수 있는데, 아무도 찾아가지 않았고, 지금은 아무나 만날 수 없는데, 사람들은  그를 만나려고 애 쓴다. 이게 세상 인심이다. 

 근혜양은 어머니 육영수 여사 타계 후 퍼스트레이디 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말 한마듸 한마듸가 바늘 틈 꽂을 틈 없이 빈틈없고 치밀했다. 신중하여 결코 누구 원망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얼음공주였다.

 그러나 대통령 당선된 지금은 다르다. 여성다운 면모가 살아나, 패션도 좋고, 간혹 얼굴에 떠오르는 미소도 이쁘다. 신의로 국정을 다스리고, 유창한 외국어로 우방과의 관계를 다지고있어, 고맙다.

 과연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나간 일이지만, 그때 좀 더 자주 찾아가. 외롭던 아가씨를 워커힐 식사라도 초대 했어야 했다. 그러나 이제 초야에 묻힌 나는, 진심으로 존경했던 그의 아버지처럼, 그 딸 근혜씨를 존경한다. 근혜씨가 소신있는 훌륭한 업적을 이루어, 통일을 앞당겼으면 싶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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