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자전소설

첫사랑/2

김현거사 2014. 5. 11. 14:41

그날 밤부터 나는 가수가 되었다.혜정이가 살던 학장댁 관사는 탱자나무

울타리로 둘러쌓여 있었다.봄이면 하얀 탱자꽃이,가을이면 노란 탱자가

향기로웠다.그 울타리 주변 어둠 속에서 밤마다 세레나데를 불렀다.황홀한

사랑의 감정으로 부른 그 노래는,도입부가 바리톤의 저음으로 시작되는,

'불 밝던 창'이라는 노래다.'불 밝던 창에 어둠 가득 찼네.내사랑 넨나 병든

그때부터.그의 언니 울며 내게 전한 말은,내 넨나 죽어 땅에 묻힌 것.'약간

다리를 절던 혜정이 이미지가 ‘넨나’로 변한 것이다.자신이 가사와 곡을 쓴

엘비스프레스리의 감미로운 미성을 흉내내어 '러브미텐더'도 불렀다.

'Love me tender,love me sweet.Never let me go.'

아!혜정이 집 탱자울 안에 우물이 있었다.달밝은 밤,탱자울 밖에서 훔쳐본

우물가 소녀는 얼마나 아름다웠던가?진주서 성장한 그 어느 소녀도 혜정이처럼

간절한 사랑의 세레나데를 수없이 듣고 성장한 소녀는 없을 것이다.

 

그를 생각하면서 망진산에 올라가 바위에 손에 피멍까지 들면서 못과 망치로

영시를 새겨놓기도 했다.'크리스티나 로젯티'의 '내 죽거던 임이여'란

시다.'When I'm dead my Dearest,sing no sad song for me.Plant no

roses at my head,nor shaddy Cypress tree.찔레꽃 향기 풍기고,약골 보리밭

에서 뻐꾸기 울음 날라오던 망진산 정상 바위에 새겼던 그 시는 지금 없어져

버렸다.방송탑을 세우는 공사 중에 그 큰 바위를 통째로 없애버린 것이다.

그러나 산은 지금도 소년이 거기서 부르던 노래,'언젠가 푸른 언덕 위에,

사랑하던 님 웃어주었지.''그린필드'는 기억할 것이다.

사랑의 감정이 싹틀 때 진주는 못견디도록 아름다운 도시다.봄철 푸른 남강 물

 위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면.버들 숲 물속에 은어가 꼬리치며

올라오고,남풍은 부드럽게 불고,'당미' 언덕에 벛꽃이 하얗게 피는 것을 보면.

지드의 '좁은 문'을 읽고 산책 나가서 탱자꽃 하얗게 핀 과수원에 파란 페인트

칠한 나무문을 보면.그 집 뜰에 서있는 한 소녀를 보면.흰구름 떠있던

강변에 어느새 황혼이 붉게 물드는 것을 보면.밝은 달이 촉석루와 남강,

의암바위 비칠 때.느티나무 노란 낙옆이 공원 벤치 옆으로 바람에 날라갈

때.진주 소년은 풍부한 감성 지닌 청년으로 성장한다.

새벽 안개 덮힌 남강에서,이곳 출신 남인수의 뽕짝과 이봉조의 '밤안개'

쎅스폰 소리 흉내내며 진주 소년은 자란다.전원도시의 순한 성품으로 자란

진주 사람은 그래서 거짓말을 업으로 삼는 국회의원조차 순하다.

 

혜정이는 길에서 만나면 어떤 편이냐하면,내가 밤마다 자기 집 밖에서

세레나데를 부른 그 남학생인 건 알고있는 눈치였다.그를 찬미하는 남성이

있다는 것은 여자로서 우쭐한 일이고 세상 무엇보다 달콤한 비밀이다.

한번 그 얼굴을 보고싶은 유혹을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간혹 수줍어하면서

발걸음을 늦추고 살짝 돌아보곤 했다.

아!그 돌아본 행동 때문에 실낱같은 새 용기를 얻고,남강에 유등을 띄우던

개천예술제 전야 인파 속을 나는 얼마나 열심히 찾으려고 헤매였던가.

혜정이와 나란히 같이 다니던 단짝 친구가 얼마나 부러웠던가.간혹 아침

등교시 다리 위에서 교복 차림 그들 모습을 볼 수 있었다.그 뒤를 따라가며,

나는 내가 영자로 태어나 다정히 혜정이 옆에 있을 수 없음을 얼마나 탄식했던가.

 

나는 어떤 편이냐하면,가슴 떡 벌어진 장사급 소년이었다.국민학교 때부터

백미터 학교 대표였고,고등학교 시절에는 투창 투원판 높이뛰기 넓이뛰기

삼단뛰기 백미터 진주시 대표였다.공부도 그런대로 했고,쉬는 시간에

교단에 올라가 미치밀러 합창단의 부드러운 목소리 흉내내며 '켄터키 옛집'과

'스와니강의 추억'을 원어로 부르던 사람은,나중에 뉴욕서 의사하던

우영이와 나였다.그런 문무겸전(文武兼全) 자부하는 내가 혜정이 앞에서는

나뭇꾼이고,그이는 선녀였다.짚시 여인 보라고 노틀담 위험한 탑을 오르는

곱추 '콰지모도'가 나였다.눈섶이 '지나롤로부리지다'같이 가늘던 소녀가

혜정이고,부글부글 술처럼 끓어오른 감정 때문에 얼굴만 붉히고 어눌한

행동하던 '앤소니퀸'이 나였다.나는 세상에서 가장 못난 추남인 것처럼

혜정이 앞에만 가면 부끄러웠다.이런 지나친 프라토닉 러브는 컨트럴

불가능한 고압전류로,그것이 나의 불행이었다.

혜정이에게 쓸 편지 인용구를 찾기 위해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던가?

소년에서 청년으로 가던 그 3년 동안에,투르게네프의 '첫사랑''짝사랑'.

톨스토이의 '부활''전쟁과 평화'.토스토엡스키의 '죄와 벌''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헬만헷세의 '페터카멘친트''데미안''싣달타''청춘은 아름다워라'.

꿰테의 '파우스트'.한스카롯사의 '성년의 비밀'.섹스피어의 '햄릿''로미오와

줄리엩''맥베스'.사머셑모음의 '면도날''인간의 굴레''달과 6펜스'.토마스

하디의 '테스'.에밀리부론테의 '폭풍의 언덕'.뒤마휘스의 '춘희''마농레스꼬'.

나타니엘호손의 '주홍글씨'.릴케의 '말테의 수기'.룻소의 '참회록'.밀턴의

'실락원'.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앙드레지드의 '좁은 문''전원교향악'.

앙드레말로의 '인간의 조건'.스땅달의 '적과 흑'.빅톨유고의 '레미제라불'.

보들레르의 '악의 꽃'.까뮈의 '이방인''시지프의 신화'.레마르크의 '개선문'.

싸르트르의 '자유의 길'.훼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바다와

노인'등을 종횡무진 읽었다.

 

얼마나 책 속의 많은 아름다운 여성들이 혜정이었던가.혜정이는 공상 속에서

매번 '아쌰' '잔느' '줄리엩' '테스' '넨나' 였고,그 상대방은  나였다.짝사랑은

나를 연애소설 탐독자에서 문학청년으로 만들고,일기를 쓰게하고,철학을

동경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내 집 서재에는 그 소설들과 철학책과,성장하면서 글씨체가 몇번이나

바뀐 오래된 일기장이 소중히 꽃혀져 있다.영어를 많이 인용한 유치한 내

소년기의 빛바랜 일기장이 40년 전 시간을 가리키는 시계처럼 딱 멈춰있다. 

 

나의 고등학교 3년은 이렇게 지나갔다.나는 운동선수에서 사색하는 청년이

되고,시와 철학을 사랑했다.내 인생의 전환점에 혜정이가 있으니,혜정이가

없었다면 나는 사범대 체육과에 가서 체육선생이 되었을 것이나,그러나

철학과엘 갔고 신문기자 되었던 것이다.

 

소년시에 그 많은 편지를 쓴 까닭에,지금도 나는 수필을 쓴다.이 점은 혜정이

덕택이다.그러나 나는 한번도 만나자는 말을 한 적이 없다.그것은 불경

(不敬)이었다.그는 나의 여신(女神)이었다.내 모든 편지는 간접화법의

'보고싶다' '그립다'는 표현만 있고,직접 '만나자'고 쓴 적은 한번도 없다.

꽃을 보고,달을 보고,구름을 보고,낙엽을 보고,바다를 보고,산을 보고,

영화를 보고,책을 읽으면서,음악을 들으면서.산책 하면서,여행 하면서 느낀

청년기의 모든 감정은 혜정이한테 보낸 편지 속에 있다.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한 영혼의 성장이 담긴 그 수천통의 편지를 혜정이가 지금도 지니고 있어서

한편이라도 돌려준다는 가설이 불가능한 점이다.

나의 사랑은 키엘케골의 '유혹자의 일기'같은 것이었다.관념에서 시작해서

관념으로 끝난 사랑이었다.그러나 모든 턴넬에는 끝이 있다.7년의 짝사랑도

끝이 있었다.

 

이때는 혜정이가 초등학교 교사였고,나는 군인이었다.내가 가장 친하던

철수라는 친구가 철도 자살하자,자원입대하고 마치 내가 까뮈의 소설

<이방인> 주인공 ‘뭐르소’인체 하고 있었다.문학하는 젊은이가 흔히

그러듯,허무와 죽음을 무슨 훈장인양 겉에 내비치고,끝나지도 않은 사랑을

실연인양 미리 절망하면서,나는 그당시 가장 난잡하던 서면 하이에리아부대

근처 술집을 출입했다.

그러다가 혜정이 혼처가 정해진다는 말을 듣자,그가 교사로 근무한 문산엘

갔다.나는 군복 상하의를 빳빳이 풀먹여 다려입었다.모자의 병장 계급장을

광약으로 반짝빤짝 딱고,파리가 낙상할 정도로 군화도 미끄럽게 칠했다.

수송병 빨간마후라를 목에 걸쳤고,어깨는 떡 벌어지고,허리는 잘룩하고,

걷어올린 팔뚝은 구리빛 억센 근육으로 덮혀있었다.내 생애 그렇게 외모에

신경 쓴 일 두번 다시 없다.

 

고추잠자리가 날아다니는 초등학교 운동장 큰 푸라타나스 그늘 아래서 였다.

온종일 화랑담배를 피우며 기다리자,이윽고 딸랑딸랑 교정엔 하학종이 울렸고,

곧이어 재잘거리는 활기찬 초등학생들 흐름 속에 퇴근하는 촌스러워 보이던

시골 선생님들 속에 혜정이가 보였다.

코스모스 하늘대는 신작로 길을 따라가서,석탄연기 품으며 들어온 기차에

같이 올라가니,'오징어 땅콩!''석간신문이요!'행상들 외침소리,마른 미역

등을 선반에 올려놓은 장사꾼 아줌마들 잡담소리 요란했다.그 틈에 슬쩍

소녀 옆에 닥아가 말 붙인 기차 통학생이 얼마나 많았던가.그러나 부대에서

자살한다고 칼빈 실탄을 지니고 다니고,외출 나가서 15P 헌병을 구타한

적까지 있는,남자사회에서는 맹견같던 내가 혜정이 앞에서는 어린 양이었다.

영주의 따님을 사모하는 중세의 기사처럼 나는 온순했다.단언컨대 내 영혼에

수소폭탄처럼 큰 충격을 가할 수 있는 어떤 힘이 있다면,그것은 물리적인

외부의 힘이 아니라,연약한 한 소녀의 미소였다.신(神)은 내 생명 어딘가에

그렇게 반응하는 회로를 심어놓은 것이다.

 

기차가 주약동 터널을 통과하여 마중나온 사람들과 택시들과 여인숙 호객꾼들

혼잡한 진주역에 두사람을 내려놓을 때까지,나는 초조해 하면서도 끝내

혜정이에게 닥아가지 못했다.다행히 상대편은 수업 중에 교정을 서성거리던

나를 알아보았던 것 같다.일부러 정상적인 개찰구가 아닌 반대편 망진산

쪽 샛길로 나갔던 것 같다.

들판길은 겨우 사람 하나 지나갈 정도로 좁았고,노란 벼이삭에 바지가 스치자

메뚜기가 툭툭 튀어올랐다.대지엔 감미로운 바람이 불고,간신히 산 허리에 남은

황혼은 누리에 붉은 빛을 던지고 있었다.저녁 안개는 들판을 덮고,산촌 굴뚝

파란 연기는 허공으로 오르고 있었다.

혜정이는 스와니 강변을 거니는 제니처럼 천천히 들길을 걸어가다가 고개를

숙이고,마치 내가 닥아가 무슨 말을 해보라는 듯이 잠시 멈춰 섰다.그러나

그 순간,내 가슴의 고동은 왜 그렇게 쿵쾅쿵쾅 크게 뛰던가.심장이 너무나

쿵쾅거리는 바람에 나는 그 고동 소리를 혜정이가 들을까봐 겁내고 있었다.

입은 바짝 말랐고,다리는 허공을 밟듯 휘청거렸다.말을 하려해도 턱이

떨려 도저히 발음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였다.

어느새 주변은 완전히 어둠에 덮히고 멀리 동네의 등불이 별처럼 빛나기

시작했다.나는 사시나무처럼 떨고만 있었다.혜정이와 나란히 서있던

감미롭고 안타깝기만 했던 그 시간이 몇분이었는지 몇초였던지 모르겠다.

그리고 혜정이는 천천히 발걸음 떼고 가버렸다.

먼 유성에서 날라온 요정처럼 첫사랑 소녀는 이렇게 가버렸다.그것은 한

여름밤의 꿈이었을까.그러나 손자 손녀까지 둔 이 나이에도,지금도 내

가슴속에 황혼의 안개 덮힌 그 들판과,먼 어둠 속에서 별처럼 깜박이던

등불과,고개 숙이고 서있던 소녀 모습이,천 권의 서사시보다 황홀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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