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자전소설

진주라 천리길/2

김현거사 2014. 5. 11. 14:53

‘좋은 인연은 기다릴 때는 오지않고,이렇게 의외의 곳에서 뜻밖에 생기는 법이더라고.’

소주잔을 시원히 넘기며 정수가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뒤 진주 가면 그 집부터 들렀다고한다.그때마다 여인이 밖을 내다보며 정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울타리 탱자꽃이 하얀 향기를 풍기던 어느 초여름이다.나동면 골짜기 뻐국새가 누군가 그리운듯 애절하게 울던 그날은 여인이 평상에다 밥상을 채려주었다.따끈한 쌀밥과 사근사근 부드럽게 씹히는 묵은지,노릇노릇한 갈치구이는 서울 집에선 전혀 기대 못하던 음식이다.대나무 뿌리로 손잡이 한 백자주전자에 담아 온 술을 따라주자,정수는 감격했다고 한다.

‘주인께서도 한잔 받으시지요.’

꽃잎에 바람이 살짝 스치는 듯 했다.여인의 그윽하던 얼굴에 흔들리는  복숭아 꽃같은 향기로운 홍조가 잠시 떠올랐다.한참 머뭇거리다가 잔을 받더라고 한다.이런걸 섬섬옥수라고 한다.가늘고 매끈한 손이었다.꽃같은 입술에 잔을 비우고,정수 잔을 다시 채워주며,

‘선생님 명함 한 장 주실 수 있겠습니까?’

여인이 문득 얼굴을 붉히며 연락처를 요구했고,

‘교수는 명함이 별로 필요치 않습디다.김정수입니다.바를 정(正)에 빼어날 수(秀).’

정수가 메모지에 손전화 번호를 적어준 후 대답했다.

‘저는 밝을 소(昭),계집 희(姬),소희라 불러주세요.’

여인이 먼저 정식으로 자기 이름을 알리고 싶었던 듯 했다.이름을 밝히고 통성명하자,새삼 친밀감이 솟았다.

‘내 고향은 원래 진주인데,소희씨 고향은?’

‘저도 진주인데,어릴 땐 잠시 쌍계사 근처에서 컸습니다.’

‘쌍계사는 내가 항시 노후에 다원을 차리려고 꿈꾸던 곳인데....’ 

정수는 동의보감에서 야생 국화 무성한 산에서 흘러내리는 약수 마시고 장수한 중국의 장수촌(長壽村)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셔요?시간 있으시면,쌍계사 쪽의 좋은 땅을 소개해드릴까요?’

가재가 헤엄치는 맑은 계곡에 난초같이 푸른 석창포가 자라고,야생차가 많다는 것이다.소희는 정수가 좋아하는 걸 미리 알고 말하는듯 했다.


이튿날 두 사람은 쌍계사 위의 의신마을 거쳐 벽소령 비포장 계곡으로 올라갔다.절경이었다고 한다.계류는 바위 사이로 부드럽게 흐르고,함박꽃인지 산수국꽃 향기인지 알 수 없는 향기가 계곡을 온통 채우고 있더라고 했다.물소리 바람소리만 들리고 인적은 없었다.

그가 말한 땅은,바위 곁에 야생 차나무 듬성듬성난 천평 쯤의 땅이었다.물가에는 단오 때 여인이 그 물에 머리를 감던 석창포가 파랗게 자라고 있고,바위는 층층 폭포 이루어 비단천처럼 아름다운 물을 쏟아내고,맑은 쏘엔 산천어인지 피라미인지 알 수 없는 물고기가 힘차게 헤엄치고 있었다.마치 신선의 땅 같았다.

‘환상입니다.’

정수는 감탄했고,소희는 기뻐했다.소희가 보퉁이 네 귀에 정성스럽게  난초를 수놓은 비단조각 누비보에 술과 정갈한 음식에다 자개 젓가락까지 담아왔다.술은 야생복숭아로 담은 선도주(仙桃酒)였다.몹씨 달콤하고 부드러웠다.두 사람은 넓직한 바위 위에 자리 잡고 서로 권해가며 몇 잔씩 마셨다.음식 먹고난 정수 입가를 그때그때 소희가 흰 옥양목 손수건을 꺼내 떨리는 손으로 닦아주었다.소희가 좀 더 적극적이었다.먼저 정수의 연인인 듯 행동하였다.소희는 처음 정수를 보자,이분이 지금까지 자기가 그리워해오던 분이라는 깨달았다고 했다.정수도 소희가 그동안 그리워한 꿈 속의 선녀로 느꼈다고 실토했다.둘은 처음부터 서로 끌렸고,밀고당기는 사랑노름이 필요없었다.노을이 물 위에 부드러운 황금빛을 띄워놓고 가고 있었다.

‘여긴 내가 찾던 무릉도원이군요.’

‘여기가 제가 전부터 좋아하던 땅이에요.’

‘그럼 두사람이 다 원하던 땅에서 원하던 임을 상봉한 셈?’

정수 말에 소희는 얼굴을 붉혔다.둘은 함께 기뻤다.


비 맞으며 솔 모종 옮기고

구름에 쌓인 대사립문 닫네.

산에 핀 꽃은 수놓은 장막보다 좋고,

뜰 앞의 잣나무는 비단휘장이 되네.


정수가 나직이 한시 하나를 외자,


고요한 향료에서 피는 연기 마주하고

한가한 돌다리 위 살찐 이끼 바라보네.

아무도 와서 내게 무엇 묻지마라

나는 일찌기 세상과 맞지않네.


정말 뜻밖에도 소희가 그 후렴을 화답했다.동문선(東文選)에 나오는 원감(園鑑)국사의 시(詩)였다.정수는 말을 잊었다.시를 아는 여인 만나긴 꿈에나 가능한 일이다.더더구나 ‘나는 일찌기 세상과 맞지않으니,아무도 내게 와서 묻지를 말라’니!한 평생 기다려도 그런 여인은 오지 않는 법이다.

‘여기서 단둘이 야생차나 키우며 살았으면...’

‘교수님이 차나무를 키우시면,저는 곁에서 차 끓이고....’

단정히 앉은 소희는 시선을 딴 데로 둔채 혼자말로 중얼거렸다.옆에 들리는 것은 오직 물소리 뿐이다.가슴에 형용할 수 없는 환희가 넘쳐오름을 느꼈다.

정수가 가만히 소희의 손목을 당겼다.그리고 소희 손바닥 위에 자기 손바닥을 덮쳐 가만히 눌렀다.원래 손바닥이란 온 몸의 경혈이 집중된 가장 민감한 곳이다.

'아이!그렇게 누르시면 어떡해요?기분이 이상해져요’

소희가 당황한 듯 손을 빼려하자,

‘싫어요?’

‘아니.’

그 말에 정수는 소희를 끌어안았다.멈칫하면서 하는듯마는듯한 가벼운 저항 끝에,소희는 눈을 감은채 입술을 열어주었다.가볍게 떨리는 입술의 촉감은 하얀 배꽃같았다.차갑고 향기로왔다.비단같은 푸른 이끼 덮힌 바위 위에서 였다.

(2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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