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자전소설

수필가로 늙어가는 이유/상편

김현거사 2014. 5. 11. 14:58

수필가로 늙어가는 이유


어릴 때는 지붕 위의 닭처럼 나하곤 상관없던 존재가 문학이다.새벽에 망진산 한달음에 올라가 타잔처럼 질주하고 촉촉히 땀방울 난 목덜미 남강에 씻고,다리 건너 학교에 활기차게 다니던 나는  운동 못하는 힘 없는 동기들 할일이 문학이거니 생각했다.

 그런 내가 지금 새벽 예불하고,꽃 가꾸고,조용히 집필하는 사람으로 그야말로 환골탈태 해버렸다.아무도 예상못한 이런 코스로 온 까닭이 무엇일까.이유를 곰곰 생각해보니,몇개 짚히는 것이 있다.

 

사단의 발단은 첫사랑이지 싶다.둘째는 철학과 다닌 것,셋째는 신문기자 된 것이다.알다시피 원래 철학과란 곳이 <데칸쑈> 배우는 머리 복잡해지는 곳이요,신문기자란 것은 글 못쓰면 쫒겨나는 직업이다.

물장사 10년에 궁둥이질만 남는다고,'글 쓰는 자'라고 칭하는 기자 10년 후 밥 벌이로 간 곳이 어떤 기업 비서실이란 곳이다.창업주 청와대 오야붕에게 보낼 편지 써주고,자서전 써주기로 합의한 것이다.거기서 사보 제작이니 뭐니해서 한 20년 잡문 꺼적거리다가 은퇴하자,따로 할 일도 없고 심심하고 해서,고향 동기들 싸이트에 들어가 또 글을 쓰기 시작했다.그러니 재주는 메주라도 이렁저렁 평생 글을 쓰긴 쓴 것이다.그런데 마음 가는대로 생각 가는대로 쓰는 것이 수필 아닌가.그래 무쇠도 갈면 바늘 된다고, 어느날 어쩌다가 정말 우연히 수필가란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내 인생의 매 코스는 내가 선택해서 간 것 같지않다.철학도에서 기자 비서 수필가란 좀 특이한 길로 빠졌는데 어쩌다 그리 되었을까.그 소이연과 희비쌍곡선을 한번 회상해보기로 했다.

 

장로교 창시자 칼빙은 모든 것은 신의 예정에 의해 된 것이라는 <예정설>을 주창했다.칼빙은 우리 인생이 신이 그렇게 살도록 예정한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설교한 모양이다.도대채 신은 왜 남의 인생을 본인 상의도 없이 제맘대로 재단했을까.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N. 로렌츠는 나비효과(Butterfly Effect)란 이론을 발표했다.로렌츠는 컴퓨터를 사용하여 기상현상을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과정에서 초기 조건의 미세한 차이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점점 커져서 결국 그 결과에 엄청나게 큰 차이가 난다는 것을 발견했다.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나비 날개짓으로 한 인생의 출발점을 찾고싶다.최초의 미묘한 나비 날개짓이 어디서 시작되었을까.집 울타리에 순결한 하얀 탱자꽃이 핀 한 소녀네 집이지 싶다.나는 밤마다 그 집 근처를 배회하면서 <불 밝던 창> <먼 싼타루치아> <물망초> 등 세레나데 부르고,돌아와서 쓴 건 연애편지요,읽은 건 연애소설이었으니까 말이다.연애편지 잘 쓰려고 알게 된 작가가 섹스피어 투루게네프 헬만헷세 서머셑모옴 워즈워드 였다.황홀한 첫사랑 감정 때문에 원어로  함렛의 <To be or not to be,that is question> 대사,크리스티나 로젯티의 <When I'm dead My dearest,Sing no sad song for me.> 시 왼 것도 그 소녀 때문이지 싶다.

이런 꽤 낭만적 이유로 나의 글쓰는 버릇은 시작되었다.그러나 이 최초의 날개짓 바람이 나중에 토네이도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첫사랑은 첫사랑이고,첫사랑 말고 다른 요인은 없을까.부전자전이란 말이 생각난다.가문도 한 요인이다.동경서 돌아오신 아버님 주업은 교직이고 부업이 문학이셨다.춘원 이광수가 주관하던 잡지에 시를 투고하고,진주 문인들 요청으로 촉석공원 전몰장병 추모비의 시를 구상하실 때 막내 아들 앞에 세워놓고 마당에서 상기된 얼굴로 초고 낭송하시던 아버님 영향 크다.왜정 때 저술한 <화랑세기>란 책이 고려대 도서관에 있는 것을 보고 나도 훗날 아버님처럼 저술을 남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실제 나중에 서너권의 책을 썼다.아직 졸업 하지않은 서울대 불문학과 학생을  문산중학교 교사로 특채하여  배꽃 핀 교정에서 교장과 교사가 어울려 시를 읊던 아버님 모습이,나는 시는 까막눈이지만, 근사해 보였고,우리집에 보내준 보들레르의 <악의 꽃>이란 책이 그때 문산의 그 박남수 선생이 후에 숙대 불문과 교수 되어 출판한 우리나라 최초 불어 번역 시집임을 알았을 땐,아버님이 존경스러웠다.

 

첫사랑 소녀에게 연애편지 쓰던 버릇과 아버님 문학 취향이 나를 돗단배처럼 바람 팽팽히 받은채 문학이란 바다로 떠민 셈이다.밀리면 그쪽으로 가기 마련이다.

데칼트 칸트 쇼펜하워가 당시 철학계의 유행이었다.문인들은 알기 어려운 까뮈와 싸르트르 실존주의로 법석들을 떨었다.그 바람에,숭어가 뛰니 망둥어 뛴다고,나도 실은 별로 읽지는 않았지만, 쇼펜하워의 염세주의 책 들고 다녔다.

 

그래 어렵지않던 집 자녀들이 흔히 국문과 영문과 택하듯 철학과 선택한 것이다. 아버님은 반대하실리 없고,오히려 대견해 하셨다.

 

대학교 무슨 학과가 뭘 가르키는지 먼저 알고 간 사람은 없다.들어가서 뭘 배우는지 안다.서양철학 일색이었다.소크라테스 프라톤  아리스토텔 쇼펜하워 스피노자 칸트 헤겔 니체 맑스 듀이 하이트헤드 가르키고 있었다.동양 쪽 배우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얼른 칸트 헤겔 쇼펜하워부터 배워줬다면 동네방네 떠들고 다녔을 것이다.그러나 철학개론은 탈레스 피타고라스 소크라테스 아낙싸고라스 푸르타고라스같은 한가한 희랍 사람들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그래 나는 이렇게 생각해보았다.철학은 인생이다.따라서 철학은 책보다 인생을 먼저 배워야한다.고로 나는 공부 보다 먼저 인생을 알아야 한다.이 삼단논법으로 나는 공부 않아도 될 면허증 받은 셈이었다.

서울생활은 천방지축 고삐 풀린 망아지였다.책은 가방 깊숙이 넣어두고, 풋담배 배우고,막걸리에 취하고,미식축구에 취해 살았다.하고한 날 간 곳이 서울운동장,종로 3가 <디세네> 음악실이다.철학도처럼 보일려고 강의 빼먹고 자주 간 곳이 교정 뒤 인촌 묘소였다.그러다가 사고 치고 말았다.

 

하나는 진주,하나는 서울,제일 가깝던 친구 둘이 약속한 것처럼 거의 같은 시기에 자살한 것이다.대개 얼띈 청년들이 쇼펜하워 보다 더 심각해지기 마련이다.내 경험에 의하면 그렀다.가장 위험한 것이 염세주의 용어 몇개 익힌 생초보들이다.셋 중 하나 남았으니,할 일은 뻔했다.

 

기말 시험 앞 두고 이리 되자,진주 갔다가 서울 갔다가 왔다갔다 헤맨 그 생초보는 답안지를 어떻게 썼던가.거침없이 태연히 글 대신 마리린 몬로와 피카소 그림 그려놓은 것이다.적어도 이 정도 난해한 답안이라야 선문답 될 터였다.철학과 교수가 철학도 마음 훤히 읽어 달라는 것이 나의 주문이었다.그러나 교수들은 냉담했다.존경하던 철학 국어 교수 두 분이 주신  F 학점은 나를  학점미달로 고대에서 제적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들이 알고보니 속물인갑다.'조지훈 신일철 교수를 일단 이렇게 정의하고,내 나이 스므살에 황당하게 자원입대한 것이다.알제리 주둔 프랑스 외인부대를 동경했었다.간 곳은 부산 항만사령부 229수송 자동차대대였다.그곳엔 80명 취침인원 중에 남한산성 군형무소에서 벽돌 굽던 사고자가 칠팔명 되었다,명성답게 그들은 특이한 기술로 사병을 다뤘다.빳다 대신 부드럽고 낭창낭창한 자동차 기름 주입하는 고무호스를 사용했다.그래야 뼈 분질러질 걱정 않고 소신껒 칠 수 있기 때문이다.고무호수는 탄력이 좋아 살 속에 척척 감겨들었다.나는 까뮈의 소설 <이방인>의 주인공 <뭐르소> 였다.내 차에는 칼빈 실탄 여나믄발이 항상 숨겨있었다.부조리한 실존을 언제던지 떠나고 싶을 때 쓸 물건이었다.

 

정말 사건 좀 나줬었어야 했다.그랬어야 대학 제적이라는 치욕이 은폐될 것이다.그러나 신은 항상 오묘하시다.인간 상상을 초월하는 드라마 쓰신다.

'그가 <죽음의 철학>이란 책을 가지고 다닌다.''그의 차  호르에서 칼빈 실탄 이십 발이 나왔다.'란 귓속말이 중대에 퍼졌다.그러자 ROTC 육군 소위는 이 골치 아픈 대학 후배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하고 쩔쩔 매었고,그 대신 재부지구 군형무소 총감방장 출신인 그 중대 최고참이 대대 전체에서 유일한 대학생 운전병 나에게 관심을 보였다.이것도 운명이다.그 후 나는 남들이 받던 단체기압이나 점호에서 완전 열외였고,유유히 그와 피엑스에서 건빵 안주로 막걸리 마시던 특과였다.

 

인생 맘대로 않되는 것은 살아본 사람은 다 안다.제대 하자 나는 갈 곳이 없었다.총기자살은 실패였고,제적은 현실이었다.

아무도 모를 먼 섬으로 스스로 유배 결정한 것은 이 까닭이다.유배지는 남해와 욕지도 였다.나는 지금도 그 처참한  파도소리 귀에 선하다.자르르 쌰르르! 새벽마다 욕지도 자갈밭 쓸면서 내 가슴 면도칼로 후비던 해조음이 무섭다.누구의 관심권에서도 잊혀지고 소외된채 촛불 아래 원고지에 눈물 뚝뚝 흘리며 글 쓰던 그 고독이 몸서리쳐진다.절망은 책이 아니라 현실로 왔던 것이다.그래서 섬 생활 2년 후,나는깍아지른 절벽을 타고 내려갔다.가파른 벼랑의 나무를 붙잡고 술 한병 통채로 마신채 술기운에 거기 잠들었다.생사결정을 신에게 물은 것이다.

 

그리고 나는 신의 대답을 들었다.첫번째 총기 자살,두번째 바다 투신,이 두개 시도는 신의 뜻과 다르다는 거였다.그 때 나는 니체의 <초인>을 생각했다.바다는 검붉은 포도주빛으로 발 밑에 출렁대고,하늘엔 보석처럼 별이 총총했다.나는 이 광경을 보며 왠지 모르게 껍질을 깨고 나온 새처럼 자유로움을 느꼈다.

절벽 위로 올라선 순간 나는 키엘케골과 쇼펜하워를 던져 버렸다.그들은 약발 없는 신약 파는 서양 약장수였다.실존철학은 더 한층 유해한 말작난이었다.철학한답시고 스스로가 판 절망의 상처는 깊고 깊었다.그러나 거기 살이 아물고 인생의 생살이 새로  돋기 시작한 것이다.나는 회복되었고,비로서 자유로워진 것이다.

(상편)

'전자책· 자전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새 시대 수필이론 다섯 마당>을 읽고  (0) 2014.05.11
수필가로 늙어가는 이유/중편  (0) 2014.05.11
진주라 천리길/1  (0) 2014.05.11
진주라 천리길/2  (0) 2014.05.11
진주라 천리길/3  (0) 2014.0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