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자전소설

진주라 천리길/1

김현거사 2014. 5. 11. 14:54

진주라 천리 길


이 이야기는 어느 토요일,선릉기원 동기들 모임 후,소주잔 기울이며 김교수가 들려준 이야기다.

그는 신문사 문화부 기자 은퇴 후,고향인 진주(晋州) 00대학 겸임교수로 말년을 보내고 있었다.기자다운 픽션같은 이야기였다.


그는 강의 차 일주일에 한번 진주로 내려가곤 했다.그런데,갈적마다 번번히 친척이나 친구 신세지기 미안해,잠은 대개 찜질방에서 자고,점심은 교수들과 먹지만,저녁은 거의 혼자였다.

그날은 강의를 마치니 달이 밝아서,혼자 드라이브 겸 신안동 들판 음식점에서 저녁 먹을 양으로 서장대 밑으로 차를 몰고 나갔는데,강 건너 망진산 절벽에 달이 뜨고,하얀 안개 덮힌 과수원 복숭아 꽃빛이 붉어서 볼만했다.김교수가 초등학교 어린 시절에 또래들과 선생님 따라 동요 부르며 그 먼 길 걸어서 소풍오던 약수암 강 건너편에 진주시가 ‘습지원’이란 곳을 만들어놓았다.차를 세우자,기암절벽 아래 강물은 호수처럼 잔잔하고,부드러운 신록은 그 위에 그림자 짙어지고 있다.달무리 낀 하늘 아래,사람들 산책하라고 만든 커다란 화감암 원석 징검다리 놓인 강물에 하얀 해오라비 몇 마리 자고 있다.‘강이 푸르니 새 더욱 희다.’는 두보 싯귀 생각났다.

이런 고요하고 아름다운 풍경 보며,정수는 더 이상 객지를 헤매고 싶지 않았다.저 대밭 어디에 초막 하나 짓고,차 끓이는 연기나 피우며 한복이나 입고 한가히 살고싶었다.서울서 대학 졸업하고 직장도 서울이라 그동안 틈틈이 온 고향은 사뭇 변해있었다.40여년 전에 떠난 고향은 이처럼 평화롭고 고요하지 않은가.무얼 찾아 낮선 타향을 그 오랜 시간 헤매었던가.그만 눈시울이 시큰하였다.


그때 문득 푸른 대나무 총총히 선 아름다운 대밭 속에 오솔길이 있고, 끝에 한옥 한 채가 보였다.‘이런 예상치 못한 곳에 저런 운치있는 한옥이 있다니!’가까이 닥아가 살펴보니,대 사립문 너머 배꽃 몇가지 교교히 피어 있는데,겨우 두어칸 될 앙증맞게 작은 한옥 골기와 지붕에 푸른 이끼 옛스런 멋을 풍겼다.


마당엔 소나무 분재가 몇 점 있었다.학처럼 고고한 자세로 만든 분재 생김새나 용틀임한 뿌리 뻗음으로 보아 주인이 안목 높은 사람인 모양이었다.쌍사자가 받치고 있는 석탑도 있고,오죽(烏竹) 몇그루도 보였다.방금 돋은 달빛은 오죽과 석탑 그림자를 땅에 환하게 비치고 있다.도대채 대나무 싸릿문 반쯤 열어놓고,누가 이렇게 멋있게 사는가.

‘한옥과 분재들이 하도 멋스러워 실례를 무릅쓰고 한번 둘러보았다’고 변명할 셈이었다.정수는 조심스레 마당으로 들어가 듬성듬성 놓인 초석을 밟으며 분재들을 살펴보았다.

‘누구세요?’

그러자 주인인듯한 여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달빛 아래 보니,키가 늘씬한 삼십 초반 여인이다.하얀 피부는 봄비에 목욕한 배꽃처럼 곱고,갸름한 얼굴의 난초잎처럼 가늘은 눈섶의 선이 고혹적이다.

‘소나무 분재 작품이 하도 훌륭해서....’

원래 남의 집에 무단친입한 것을 이리 대충 얼버무릴 예정이었는데,문득 여인이 어디서 본 얼굴이다.

‘혹시 칠암다도회 회원님 아니세요?’

정수가 물어보자,여인이 비칠 듯 맑은 눈동자로 정수를 보더니,

‘어머나!서울서 오신 교수님!’

반갑게 정수를 알아본다.한복 차림으로 다도회서 차 따르던 모습이 무척 인상깊던 그 여인이다.몇마듸 이야기를 나눈 적 있다.

‘어떻게 오셨어요?’

‘우연히 왔습니다.강의 끝나고 저녁 먹을 겸 드라이브 나왔다가...이렇게 좋은 곳에 저렇게 좋은 소나무분재 키우시며 사시는군요.’

‘뭘요.변변치 못해요.’

그윽한 눈빛으로 분재를 바라보는 여인 모습이 선녀같다.

‘이렇게 뵈니 무척 반갑습니다.’

‘네!잠시 올라가셨다가 가시지요.’

집엔 아무도 없는 눈치였다.실내에 올라서자,여인은 정수 신발을 가지런히 놓아놓고 올라왔다.

창가에 쭈욱 진열된 앵두가 담긴 술병과 난초 화분에 달빛이 희롱하고 있었다.밖에서 개구리 울음 들려오고,텔레비젼에서 ‘창문을 닫아도 스며드는 달빛.마음을 달래도 파고드는 사랑.사랑 사랑 사랑이라니,사랑이란게 무엇인가.한송이 떨어진 꽃을,낙화 진다고 서러워 마라’창부가락이 고요히 흐르고 있다.

‘식사 전이라 하셨지요?마침 추어탕 끓인 것이 있는데요?’

‘아니 괜찮습니다.금방 갈 겁니다.’

굳이 사양하는 정수를 뿌리치고 여인이 상을 차려왔다.

‘이렇게 폐 끼쳐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수가 미안해하며 자세를 고쳐앉자,

‘시장 하시지요?’

여인이 음식상 앞에 살포시 앉으면서,놀랍게도 두손으로 얌전히 수저를 정수에게 건네주며 조용히 지켜본다.가슴이 뜨끔 하더라고 한다.수저를 손에 건네주는 그런 법도는 옛 양가집 법도다.여인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가장에게 얌전히 음식수발하는 모습이다.식기는 고태 나는 놋제품이고,추어탕은 따끈하고,산초는 향기로웠다.


정수는 원래 복고풍 인물이다.눈이라도 온 뒤에 서재를 청소해놓고 향 피우고 붓글씨 쓰거나 한시 읊기를 낙으로 삼는 사람이다.그래 여인의 정성스런 음식 수발에 내심 크게 감명 받았다.

정수의 이상적 여인상은 이랬다.소슬바람 부는 산창(山窓)에 나란히 앉아 차를 마시며 창밖을 감상하고,문학적 감상을 함께 논하고,철 따라 향기로운 과일주 담고,텃밭에 채소 키우고,아침 새소리 들으며 잠에서 깨어 집안 청결히 해놓고,맑은 하루 시작하는 그런 여인이다.

정수 노년의 소박한 꿈은 이런 것인데,그의 학벌 좋은 서울 부인은 달랐다.늘상 옆 집 외제차 노래를 부르고,담배 피우지말라,TV 챈널 돌리지 말라,자동차 세차해놓아라 주인처럼 명령하고,교회 간다,동창 만난다,남편 설겆이 시키고 막 대하는 성가신 상전이었다.어렵게 공부시켜 결혼시키고,자신의 노후 자금인 퇴직금으로 집까지 장만해 내보낸 자식들은,며느리까지 직장 다니지만 외국 여행 가시라며 봉투 내민 적 없고,명절이라도 아예 코빼기 보기 어려웠다.불쌍한 돈벌어 오던 기계는 이제 폐품이 되었고,이게 요즘 풍조라고 믿는 것이 젊은 자식들이었다.정수는 썩은 고목처럼 남모르게 속이 텅 빈 사람이었다.힘없는 노인정 영감처럼 대하는 아내와 자식이 야속했다.그래 정수는 진주에 올 때마다 어디 지리산에 혼자 자그마한 다원이나 하면서 차릴까싶어 땅을 찾으러 다녔고,스님과 새벽에 불경이나 읽고 살만한 작은 암자 없나 물색하러 다녔던 것이다.

‘언제 다도의 심오한 이야기를 교수님께 듣고 싶었습니다.주변엔 다도 아는 분이 적어서요,’

여인이 다도 이야길 꺼내며,

‘머루주 한잔 드릴까요?’

이렇게 묻더라고 한다.약수암 근처 산에서 따온 머루로 직접 담은 술이라 했다.뜻밖의 제안이었다.아무도 없는 빈 집에 달빛 휘영청 밝고,미인은 술한잔 서비스 하겠다는 데 어느 목석같은 남자가 반하지 않을 수 있겠더냐는 것이다.진홍빛 머루주를 정수 잔에 따를 때,살짝 숙인 아미(蛾眉)가 고전적이었다고 한다.

‘술은 많이 마신다고 유쾌한 것이 아니고,단 한 잔 마셔도 이렇게 운치가 있어야지!’

득의양양한 정수 말이었다.하기사 그의 표현대로,달빛 아래 미인이 따라준 술은 천금의 가치있는 술이다.

창 밖 대숲 속 잠자리에 든 새소리만 나직이 들려왔다.호젓이 이야기 나누다 밤 깊어 정수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간혹 진주에 오시지요?’

여인이 묻고,

‘네,매주 한번 진주에 옵니다.’

정수가 대답하였다.

‘오시면 저희 집을 꼭 찾아주셔요.제가 차 대접할께요’

꼭이라는 그 말이 은근하여 끝없이 행복하더라고 한다.

(1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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