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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대통령(3)

김현거사 2014. 4. 22. 13:53

 

  박정희 대통령은 요즘은 다들 존경한다. 그러나 내가 대학 다닐 때는 사정이 달랐다. 데모하면 애국자고, 정권 옹호하면 이상하게 보았다.

 그 시절 대학 같은 과에 도올 김용옥이 있었다. 그는 얼굴에 냇천자를 긋고 침을 튀기며 데모를 하고 싶어 하는 재학생이고, 나는 기자가 되고싶어 신문 사설을 밑줄 긋고 외우던 데모 반대 복학생이었다. 선배와 후배가 상극으로 만난 것이다. 그는 우선 개인적 충고부터 삐딱하게 나갔다.

 '용옥아! 그 좋은 머리로 서양철학 뜯어치우고 동양철학을 해라.서양철학은 아무리 잘해도 결국 세계 2등밖에 못한다. 동양철학으로 나가야 나중에 그 분야 세계 제일의 학자가 되지.' 그러자 그는 그 안하무인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며, '김 선배가 아무도 안하는 동양철학 하는 이유 빤한 것 아니요. 동양철학 노교수님들 학점이 후하니까...' 

 하루는 강의실에서 부닥쳤다. 그가 무슨 애국지사마냥 뜨거운 눈빛으로 급우들에게 '이제 우리 학교가 데모 나설 때가 되었다'고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수업이나 받지, 데모는 무슨 놈의 데모?' 나는 강의실에 들어서자말자, 이렇게 말하였다.

 서로 옥신각신 말싸움 하다가 결국, '그러면 한 강의실에 학생들을 몰라넣고, 정식으로 이 시국강연을 벌였다. 데모를 벌이느냐, 아니면 수업을 받느냐 의견을 피력하고, 거기서 결론 나는 쪽으로 행동통일 하자'고 합의한 것이다.

 그는 시국의 문제점들만 지적하였다. 나는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을 주장했다. 1단계는 생리적 욕구다. 2단계는 안전 욕구요, 3단계는 사회적 욕구, 4단계는 존경취득 욕구, 5단계는 자아실현 욕구다. 이런 욕구는 피라미드형으로 이뤄져 생리적 하위욕구가 가장 강한 것이다. 1단계 생리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경제를 살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독재니 뭐니를 따지는 일은 춥고 배고픈 우리 현실에서 사치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결과는 참석 학생 찬반 거수로 결정했는데 도올의 완패였다. 

  당시 학생들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반대를 무슨 신성불가침의 이념인듯 착각하였다. 그러나 나는 맑스의 구조이론을 옳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경제의 하부구조가 결국 정치 문화 상부구조를 결정하는 것이다. 우선 먹고 살게 된 이후에야 상부구조인  정치 형태가 의미있는 것이다. 민주던 독재던, 그 당시 우리나라 형편에서는,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정부가 최선의 정부라고 생각했다.

 나는 독재란 개념을 이렇게 생각했다. 가난이 가장 큰 독재이다. 나라가 가난하면 온 국민이 희생물이 된다. 취직을 못하면 부모에게 죄인이 된다. 일할 곳 없는 젊은이는 얼굴을 펴고 살 수 없다. 겨우 회사에 들어가면 당당히 할 말을 못하고 상사의 눈치만 보게 된다. 이것이 경제가 모든 사람을 내려누르는 독재인 것이다. 정치판에서 반대 정당을 누르는 것은 극히 제한된 정치권 이야기지, 독재 축에도 끼지 못하는 것이다. 

 나라가 잘 살면, 회사원은 상사에게 할 말 다하고 산다. 수 틀리면 다른 회사로 당당히 갈 수 있다. 일자리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이 서민들의 민주요, 자유인 것이다.

  당시 박통은 경제 재건을 방해하는 반대파에 엄하게 한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일반 국민은 아무도 그에게 고통 받은 적 없다. 오히려 일자리 많아 호강을 누렸다. 가난은 호랑이 보다 무섭다고 한다. 박통은 그 호랑이를 퇴치하기 위해 싸웠을 뿐이다. 

 이런 속에서 어느날 학생 데모를 취재나온 미국의 모 언론사가 나를 찾았다. 그들은 데모 찬성과 반대 이론을 가진 학생을 인터뷰 하고싶어 했다. 그러나 데모 반대 의견을 가진 나 같은 학생은 그야말로 찾기 어렵던 시절이다. 나는 데모 군중이 옆에서 지켜보는 무질서한 교문 앞 돌벤치에서 그들과 인터뷰 한 적 있다.

  당시 맹열 데모꾼 김계동 동문은 나중에 국회의원이 되었다. 시인 김지하씨는 반정부적인 글로 유명세를 탔다. 모두 데모와 반정부 운동 하여 한 몫 챙겼다. 무슨 사상가인양 행세했다. 감방 갔다온 것을 무슨 훈장처럼 자랑했다. 그러나 최근 김지하씨는 생각을 바꾸었다. 나는 정치는 관심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김지하씨는 양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박통 팬이지만, 사실 우리 집안은 박통의 피해자다. 아버님은 5.16을 군사쿠테타라고 평하다가 수사기관 조사를 받고 진양군 교육감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우리 집안은 한번도 대통령을 비난한 적 없다. 나중에 박대통령이 제대로 정치를 잘했기 때문이다.

 

 이런 시국관 덕분에 나는 덕도 보았다. 기자 하다가 기업체로 옮길 때 였다. 회장이 직접 면접 했는데, 현존하는 사람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길래, 나는 박정희 대통령이라고 대답하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분이 딱 원한 대답이었다. 그분은 자주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곤 했다. 그 서신을 써 줄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뭐라는 사연을 말하면서 편지를 써오라고 하더니, 내가 쓴 편지를 읽어보고는 '내일부터 비서실로 출근하라.'고 말해주었다. 그후 나는 년간 몇번씩 '누구누구 대통령 옥궤하(玉机下)' 란 호칭 밑에 청와대행 편지 초안을 잡았다.(계속)

 

  비판 잘하는 신문기자가 남의 비서로 간다는 것은 궁합상 맞지않는다. 나긋나긋한 비서란 이미지와 기자 이미지는 상극이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 10년 지난 처지에 어디 시험쳐서 새로 갈 곳이 없었다. 어쨌던 이참에, 나중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일단 재벌이란 사람이 사는 모습이나 옆에서 구경하자. 그분도 한국 경제 발전의 한 축이니, 그 분 자서전이나 한번 써보자. 이런 요량으로 갔다.

 가서 제일 처음 한 일은 그 양반 비자금 조사였다. 어디다 썼을까, 누가 받았을까가 궁금했다. 그래 파일 정돈이라는 명목으로 서신들을 일주일간 전부 검토하였다. 비밀 금고 안에는 대통령과 고급 관료, 은행장, 법조계 인사에게 보낸 서신들이 있었다. 선물 받는 사람들 명단과 주소, 연락처, 선물 내역이 있었다. 

 그걸 검토하면서 나는 박정희 대통령이 참으로 청렴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항간에선 박통이 내가 들어간 그 회사를 봐준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 회사에 투자 지분이 있다는 루머도 있었다. 말짱 할일 없는 사람들 이야기였다. 그 회사 앨범에는, 서강대 전자공학과 학생이던 근혜씨가 단발머리 하고 와서 라인 투어 하는 사진이 몇 장 있었다. 근혜씨 서강대 은사인 임태순 교수와 두어번 오고 간 편지도 있었다. 친한 건 사실이었다. 박통이 반도체에 관심은 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건 국가 장래를 위한 첨담산업에 대한 관심이었다. 

  박통에게 보낸 편지를 전부 읽었지만, 어디에도 뇌물 바친 흔적은 없었다. 박통은 철저히 우리 회사를 밀어줬지만, 단 돈 10원 한장 받은 적 없었다. 이런 깨끗한 분이 다 있나 싶었다, 나는 그 후 박통을 철저히 믿게 되었다.

 박통 밑에서 오랜 재무장관을 한 김용환씨와 우리 회장이 잘 알던 분이다. 간혹 인사동 요정 <장원>에서 식사를 했다. 그 옆에 앉아 나는 박통의 면모를 직접 들었다. 김장관은 녹번동인가에 집이 있었는데, 나는 그분 부인에게서 장관이 12시 이전에 집에 오는 적이 없다는 이야기, 공휴일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Workaholic(中毒)이라는 말이 있지만, 박통 밑 각료는 사생활이 없었다. 물론 박통 역시 사생활이 없었다. 어떤 때는 새벽 2시에 박통한테서 전화가 온다고 한다. 고독하기 때문이다.  경부고속도로 건설, 월남 파병 등 굵직한 일을 처리할 때는 혼자 잠못들고 청와대 뜰을 거닌다고 했다. 여론과 국민에게 시달리던 대통령이 시바스리갈이나 폭탄주 마신 심정 이해되었다. 독재한다고 야당이 사사껀껀 쌍지팡이 들고 반대했지만, 그들은 지금 경부고속도로만 잘 타고 다닌다. 나는 박통에게 보낼 서신을 만들 때, 이 시대의 영웅을 대하는 기분으로 편지를 썼다.

 나는 직접 박통 옆에 가본 적은 거의 없다. 정신적으로만 존경했고 가까웠다. 단 세종문화회관서 열리는 무슨 리셥센 자리에서는 옆에서 지켜보곤 했다. 매번 초청장이 오면, 모시던 회장은 연세를 핑계로 빠지는데, 그때 내가 가서 방명록에 대필서명 해놓고 왔다. 그 자리는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자리고, 한국 재계 거물들만 가는 곳이다. 들어가면 칵테일 잔 들고 박통 근처 갈 수 있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새끼 재벌들은 대통령 경호실과 안기부 눈치 보느라 근처에 얼씬도 못한다. 이때  가장 인상 깊은 것은 정주영 회장이다. 정회장은 인품이 서글서글해서, 누군지 모르지만, 거기 들어온 이상 모두 중요한 사람이겠지 하는 생각에 장내를 흽쓸고 다니며 모두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 덕에 나도 한국 최고 재벌 손은 몇번 만져보았다. 

 박통은 결국 10,26 사태로 서거하셨지만, 그 분 서거 한 달 전에 우리 회장이 경옥고 한 단지를 보냈다. 경옥고는 흰머리가 검어지고, 빠진 이가 다시 나며, 말처럼 뛰어다니게 해준다는 명약이다. 그걸 드시고 국정에 더욱 박차 가해 달라고 첨부한 서신에 적었다. 경옥고 제작은 회장 한약 심부럼 전담이던 내가 했다. 재료는 꿀 인삼 생지황 백복령인데, 내가 경동시장에 나가서 재료를 사오고, 충북 영동에 가서 마른 뽕나무 뿌리를 구해와서 약을 다렸다. 닭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동의보감 처방 때문에, 근무는 않고 용인 연수원에 조수 하나 데리고 가서 한 사나흘 잘 놀았다. 그 약을 청와대  김도룡 총무 비서관에게 전달했는데, 김비서관은 우리 회장의 깐깐한 성격을 잘 알기 때문에 검사를 거치지 않고 바로 올려드리겠다며 반겨주었다. 대통령은 서거 전 며칠 전부터 이 경옥고를 드시었을 것이다.

 

 박근혜씨는( 당시 근혜씨는 우리보다 나이가 어려, 우리 비서실에서는 그를 근혜양이라고 호칭했다.) 아버지가 서거하신 후, 우리 회사 옆인 화양동 어린이 공원 안 육영재단을 찾아가 만났다. 세상 인심이 고약해서, 아무도 찾아오지 않던 때라, 설 추석에 금일봉 들고 찾아간 내가 무척 고맙고 반가웠을 것이다. 그는 어려운 자기 근황을 소개하고 회장님께  안부 전해달라는 부탁을 하곤했다. 돈이 없어 난방비도 줄인다는 이야기도 기억 난다. 박통이 거액의 돈을 감춰두었단 세상 루머는 철없는 사람들 이야기다.

 나는 10, 26 당시 신당동 대통령 빈소에 재벌 중 우리 회사만 찾아간 이야기, 매번 기일에 중역을 대동하여 국립묘지를 참배한 이야기를 자세히 해주며 근혜씨를 위로했다. 날씨가 추워야 송백의 절개를 안다하지 않던가. 대화를 해보면, 근혜씨는 얼음공주처럼 차그운 인상이었는데, 대통령에 당선된 지금은 여성다운 면모가 살아나 있어 볼 때마다 이쁘다. 근혜씨는 육영수 여사 타계 후 퍼스트레이디를 한 경험 때문인지, 대화에서 말 한마듸 한마듸가 바늘 틈 꽂을 틈 없이 조용하고 빈틈없고 치밀하였다. 신중하여 결코 누구를 원망하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제 대통령에 당선 되신 후, 패션에도 신경 쓰고, 침착함과 신의로 국정을 다스리고, 유창한 외국어로 우방과의 관계를 다져가고 있어, 참 반갑다. 과연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때 좀 더 자주 찾아가서. 외로운 아가씨를 워커힐 식사라도 초대했어야 했다는 생각을 해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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