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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통

김현거사 2014. 4. 20. 10:01

 

 

  전두환 사령관을 만난 곳은 신당동 이다. 박정희 대통령 빈소 앞에 별을 단 군인이 퍼런 잠바에 권총을 차고 앉아 있었다. 살벌한 표정으로 앉은 그 모습은 누구라도 고인의 존엄을 훼손할 수 없다. 만약에 그런 자 있으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박대통령이 피살된 그 당시 재벌들은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동안 신세는 졌지만, 혹시 잘못 나섰다가 찍힐까봐 전부 눈치만 보고 있었다. 서울의 그 유식하고 잘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말 없이 뉴스로 돌아가는 사태만 주시하고 있었다. 한심한 시간이었다. 그 당시 회장실에 들어갔다. '회장님! 그동안 박대통령은 우리가 첨단반도체 한다고 얼마나 호의적이었습니까? 신당동에 조문을 가시지요.' 이렇게 건의 드렸다. 그러자 회장은 '가도 괜찮을까?' 되려 물었다. 뭔가 찜찜한 것이다. '회장님! 앞으로 정국이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박통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2-3년 지나면 확실히 달라집니다. 경제발전으로 나라를 혁신시킨 것이 그 분 치적을 누가 다시 이루겠습니까? 지금 조문 가서 설사 우리가 조금 손해보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우리가 옳다는 것이 알려질 것 입니다.' 이 말에 회장이 결심하여 향촛대 준비하여 신당동에 조문을 갔다.

 그러나 정작 나도 이 일로 나중에 우리 회사의 패가 그렇게 잘 풀릴줄 몰랐다. 당시 전두환 사령관은 자기를 키워준 박대통령 시해 사건이 나자, 일생일대의 모진 결심을 하였을 것이다. 누구도 박대통령을 모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나중에 12.12사건도 이래서 터졌을 것이다. 死卽生의 각오로 나서서 결국 일개 군인이 대통령 자리를 거머잡고 올라간 것이다. 훗날 우리 회장과 TK 대부 신현확 총리가 모처에서 식사하던 자리에 수행한 적 있다. 당시 각료 전체가 벌벌 떨고 한마듸 말도 못하던 일을 한참 들었다. 

 여하간 그때 우리 회사가 신당동 다녀가자, '저 사람들 누구야?'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물었다고 한다. 재벌 중에 유일하게 조문한 회사였다. 의리 있는 회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후 그 분이 대통령에 오르자, 우리 회사를 확실하게 믿고 밀어주었다. 우리는 재벌 회사 중 처음으로 매년 전 임직원이 동작동 국립묘지 박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곤 했다.

 

  전통이 일본 재계의 대부 마스시타고노스케를 한국에 초청했을 때 였다. 청와대서 연락이 왔다. 공항에 나가라는 것이다. 말은 전경련 초청이지만, 실은 청와대 초청이었다. 와서 한국의 분단 현실을 보고 일 재계에 대한국 협력 무드를 조성시키는 일이 그 목적이었다. 우리 회사는 마쓰시타의 칼라 TV 오디오를 생산하던 회사다. 공항 접견서부터 전방 시찰, 청와대 방문, 전경련 강연, 새마을 본부 방문 등 모든 스케쥴에 관여했다. 새마을본부 전경환 회장은 원래 스케쥴도 없는데, 우리에게 부탁해서, 고노스께 옹을 새마을본부로 모셔갔다. 그 바람에 옹의 강연 들으려고 여의도 강당에 빽빽히 모였던 사람과  방송사 취재진들은 거의 한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나중에 전통이 하야하여 백담사 계실 때다. 나는 대학 강의 차 속초로 가다가 백담사에 들린 적 있다. 왈가왈부 말은 많지만, 나는 남자다운 그 분 기백은 좋아한다. 눈 쌓인 절에 계시니 위로라도 해드리고 싶었다. 그러나 백담사 입구에서 차를 돌렸다. 대구서 온 뻐스들이 이미 너댓개나 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 아니라도 전통의 팬은 많았던 것이다.

 

 

 나는 박충훈 전 대통령 권한대행 하면 우선 그 분의 인품을 생각한다. 내외경제 기자였으니, 무역협회장 시절 그 분 산하에 있었지만, 대면한 적은 없고, 대통령 권한대행 후 회장 지시로 그 분의 성복동 자택을 방문하여 뵌 적 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날 그 분이 약속 시간에 댁으로 돌아오면서, 나에게 전화 주신 일이다. 성북동 밑에서 차가 밀려 10분 늦겠다는 그 전화는 일국의 정상에 있던 분이, 그것도 약속은 약속이라고, 아는 사람 일개 비서에게 할 전화는 아닐 것이다. 교통체증으로 10분 늦는 것은 보통사람들도 흔히 범하는 일이다. 손님 왔다고 대청에 나오셔서, 굳이 그냥 들어가 계셔도 된다고 말해도, 말상대 해주신 사모님도 인상 깊었다. 또 공손히 차를 내오던 아름다운 며느님도 잊히지 않는다. 낮선 손님 오자 호기심이 발동하였을 것이다. 옆에는 왔다가. 할머니가 '선생님에게 인사 드려!' 하자,  할머니 뒤로 숨던 순한디 순한 손자가 있었다. , '아! 참 잘생겼구나. 이름이 뭐냐?'고 묻자, 환한 얼굴로 앞으로 나오던 귀엽던 모습도 기억난다. 그 댁은 가족 모두가 교양 있고 온화하였다. 국민의 사표라 할만 했다.

 그날 찾아간 용건은, 회장 막둥이 아들 서울대 교수 추천 건이었는데, 그 어른은 오시자, 냉큼 인장을 가져오라고 하여 날인 해주시며 혼자말로 '서울대 출신이 아니라서 어려울 것인데...' 중얼거렸다. 덕이 높은 분은 이렇게 일을 처리 하시구나 싶었다. 않될 일도, 이렇게 호의로 처리하시는 걸 보고, 많이 배웠다. 소인배들은 될 일도 생색 내기 바쁜데, 큰분들은 매사를 이렇게 처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존경하고 따랐을 것이다.

  나는 비서라는 직업상, 그 당시 한국 정재계 유명인사 집은 거의 가보았다. 그 중 권력 맛에 취한 집에선 자식들까지 방자한 꼴을 보았다. 오직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렴씨와 박충훈 대통령 권한대행 댁에서 교양있고 온화하고, 존경스런 가문의 모습을 보았다. (계속)

  

 

 

나는 박정희 대통령을 나는 예나 지금이나 존경한다. 사람들이 다 반대하는 그 분의 유신조차 불가피한 상황을 긍정하는 사람이다. 6.3 데모 때 였다. 데모 제일 잘하는 대학을 다녔는데 같은 과 후배에 도올 김용옥이 있었다. 그는 영어 독어는 잘했지만, 건방진 편이다. 그러다 복학생인 나와 한 판 붙은 것이다. 그는 얼굴에 냇천자를 긋고 침을 튀기며 데모의 필요성을 역설했지만, 신문기자가 되려고 사설을 달달 외던 나는 반대였다. 그래 수업을 받느냐 데모를 벌이느냐 주제로, 정식으로 빈 강당에 학생들을 모아놓고, 둘이 연사로 올라가서 설전을 벌였다. 나는 매슬로의 욕구 5단계설을 주장했다. 1단계는 생리적 욕구다. 2단계는 안전 욕구요, 3단계는 사회적 욕구, 4단계는 존경취득 욕구, 5단계는 자아실현 욕구다. 이런 욕구는 피라미드형으로 이뤄져 생리적 하위욕구가 가장 강한 것이다. 1단계 생리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경제를 살리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니, 독재니 뭐니를 따지는 일은 춥고 배고픈 우리 현실에서 사치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이북과 동남아 국가들보다 가난한 나라를 경제로 살린 사람을 반대하지 말고,가만히 곁에서 지켜보아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결과는 참석 학생들이 찬반 거수로 표시하였는데, 도올의 완패였다. 그러나 그는 결과에 따르자던 애초의 약속을 반측으로 맞받았다.

 그 당시 나는 데모 학생들로 무질서한 교문 앞 돌벤치에서 취재를 나온 미국의 모 유명 언론사와 중인환시 속에 외로운 데모 반대 인터뷰를 한 적도 있다. 훗날 시인 김지하가 과거의 행적을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한 것을 보고,  시인이 최근

 

 박통의 청렴성을 알게 된 것은 모 재벌 비서가 된 후다.

 

자 고고히 도 를 나와서 러나 수업을 거부하고 데모 벌이는 일을 무슨 신성한 의식인양 은 ㅂ가린 결과, 데모를 몰르   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도 있다.
 

 경옥고 바근혜

그는 유신반대 경옥고 김도룡 총무 비서관 서강대 전자공학과 학생이던 박근혜 회사 방문 임태순 교수와 뭄 ㄴ 

그 뒤 재벌 비서로 박정희의 청렴성

박정희 비자금 경옥고

박근혜 어린이 공원

박충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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