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나애심과 송민도

안숙선의 판소리 춘향가/영남문학

김현거사 2014. 2. 22. 07:17

 

      

   국창 안숙선의 판소리 춘향가                                                     

  추석 앞 둔 장충동 국립극장 하늘에는 둥근 달이 뜨고, 바람은 시원하였다. 그래서 문득 아무래도 판소리는 달빛 아래서 듣는 것이 제격이다. 어디 한번 섬진강 쯤에서 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위에서 배 한 척 흘러내려온다. 배 위의 한 여인이 있는데, 그는 머리에 옥비녀를 꼿았고, 손에 합죽선을 쥐고 있다. 배가 화개장터 쯤 왔을 때 그동안 지리산쪽을 바라보고 있던 월하미인(月下美人)이 해당화같은 붉은 입술을 열어 창(唱)을 시작한다.'  

 

 이런 생각을 하고있는새, 막이 오르고, 사회자가 안숙선을 소개했다.

'안숙선 선생님은 근세 명창 이화중선 박초월 박녹주 씨 다음 계승자 입니다'

이때 쥐면 한 줌 손에 쥐일듯 가날픈 몸매의 주인공이 사뿐히 청중에게 절 올린 다음, 조용한 회고쪼 허스키로 '아니리'부터 시작한다.

 

'호남의 남원이라 하는 고을이 옛날 대방국이었다. 동으로 지리산, 서로는 적성강, 남은 적강이며, 북으로는 운암이니 곳곳이 금수강산이요, 번화한 곳이고 명승지로구나.  산 지형이 이러니 남녀간 미모도 뛰어날뿐아니라 오랜 세월동안 변함없는 충신  관우왕의 사당을 모셨으니 당당한 충성스런 열사가 나지 않았겠는가?

대조선 숙종황제 즉위 초기에 사또 자제 도련님 한분이 계시는데, 젊은 나이가 16세요. 얼굴 모습이 맑고 수려하며 진짜 세상에 재주가 뛰어난 남자로다.'

 

 그렇게 사설이 시작되어 전라도 남원 기생 성춘향이 광한루에 그네 타러 나갔다가 사또의 아들 이몽룡을 만나는 장면이 나오자, 여기서 '소리'는 갑자기 톤이 바뀐다. 저 아랫배에서 창자를 뽑아올리는듯, 툭사발이 깨지는듯한 걸쭉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린다.

 

'사랑가'다.
 

 '사랑 사랑 내사랑이야! 어허둥둥 니가 내사랑이야! 만첩청산 늙은 범이 살진 암캐를 물어다가 놓고서, 이는 빠져 먹지는 못허고, 어르르릉 어흥 어루는듯, 북해 흑용이 여의주 물고 채운(彩雲) 간에서 넘노난듯. 
  너는 죽어서 버들 유(柳)자가 되고, 나는 죽어서 꾀꼬리 앵(鶯)자가 되어, 유상앵비편편귀로다. 가지마다 놀거덜랑 니가 난 줄 알으려므나. 저리 가거라 가는 태를 보자. 이만큼 오너라 오는 태를 보자꾸나.

 너는 죽어서 종로 인경 되고, 나는 죽어서 인경채 되야, 아침이면 이십팔수, 저녁이면 삼십삼천, 그저 뎅뎅 치거더면 니가 난 줄 알으려므나. 사랑이야 내사랑이로구나! 어허 둥둥 네가 내 사랑이야.'
 

 사랑가는 이도령이 춘향이한테 보내는 요즘 말로 세레나데다.

 사랑타령 끝나자, 질펀한 춘사장면이 나온다.  


 '애! 춘향아 말 들어라. 밤이 매우 깊었으니 어서 벗고 잠을 자자.'

'도련님 먼저 벗으시오. 매사는 쥔이라고 하니 쥔 너 먼저 벗어라.' 

 도련님 거동 보소. 우르르르 달려들어 춘향의 가는 허리 예후리쳐 덤썩 안고 옷을 차차 벗길 적에, 저고리 벗기고, 바지 벗기고, 버선마져 뺀 연후에 덤쑥 안아 이불 속에다 훔쳐넣고, 도련님도 훨훨 벗고 둘이 끼고 누웠으니, 좋은 호(好)자가 절루 생각난다.'
 

  이 대목은 춘향이와 이도령의 두 사람 대화를 소리꾼 한사람이 다 하는 모노드라마인데, 젊잖던 옛날에 이런 음담패설은 웬일일까.  판소리 유래가 광대들의 소학지희(笑謔之戱)라서 그런가 싶다.

 원래 판소리는 장원 급제하여 3일유가(三日遊街) 할 때 광대(廣大) 재인(才人) 불러서 듣던 것이요, 시골 장터 마당극이다. 낭인들 입에서 입으로 구전된 이런 외설적 표현은, 남녀칠세부동석 하던 그 시절 안방마님들이 얼굴 붉히면서 마음 속 갈증을 은근히 대리만족 했음직하다. 

 
 '사랑' 후는 '이별'이다. 

 

 '내 몰랐소 내 몰랐소 도련님 속 내 몰랐소. 도련님은 사대부요 춘향 나는 천인이요. 일시 춘흥을 못이기어 잠간 좌정 허였다가 버리난 것 옳다하고 나를 떼랴고 허옵신되, 속 모르는 이 계집은 늦게 오네, 더디 오네, 편지 없네, 손을 잡네, 목을 안고 얼굴을 대니, 짝사랑 외 즐그움에 오직 보기가 싫었겠소?

 독수공방 수절타가 노모 당고 당하오면, 초종 장례 뫼신 후에 소상강 맑은 물에 풍덩 빠져 죽을런지, 백운청산 유벽암자 삭발도승 되올런지, 소견대로 내 할텐디, 첩의 마음 모르시고 금불이요 석불이요? 도통하려는 학자신가? 천언만설 대답이 없으니 이게 어디 계집 대접이며 남자의 도리신가? ' 


 자고로 이별 원망않는 처자 없다. 이때 춘향의 강짜 도와주는 것이 고수의 장단이다. 퉁타당! 탕탕! 춘향이의 강짜처럼 장고소리 빨라진다.

 '조오타!' 감탄사가 여기저기서 터진다. '사람 헌장 허것구만.' 청중석에서 누가 이런 소리를 내뱉는다. '어따 그 양반 목소리 한번 억세게 크다.' 또 누가 이런 야지를 단다.

 어쨌던 판소리 마당은 청중이 왁짜지껄해야 더 맛이 난다.


 이별 다음은 시련이다. 시련의 백미(白眉)는 ‘쑥대머리’다.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 옥방(獄房)의 찬자리에 생각나는 것은 임 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 낭군 보고지고! 오리정 이별 후에 일장서를 내가 못봤으니, 부모봉양 글 공부에 겨를이 없어서 이러는가.

 이화일지춘대우(梨花一枝春待雨)에 내 눈물을 뿌렸으니, 밤비 내리는 문전 애끓는 소리 비만 와도 님의 생각. 가을비에 오동잎 질 때 잎만 떨어져도 님의 생각, 푸른 물 속 연꽃 따는 아가씨와 뽕 따는 여인네들도 날보다는 좋은 팔자, 옥문 밖 못나가니 뽕을 따고 연 캐것나.'

 

 춘향이가 봉두난발로 옥중에서 부르는, 이 쑥대머리는 가장 기억해둘만한 유명한 대목이다.

필자가 판소리는 굽이굽이 흘러가는 달빛 속의 돗단배에 몸을 싣고 들어야 제 맛 날 것 같다고 한 이유가 여기 있다. 전편이 처절한 한과 슬픔이다. 그 한이 구례 산동마을 산수유처럼 붉게 익어 툭툭 땅바닥에 떨어지고 있다.

 

춘향이의 탄식은 섹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 '햄릿'의 오필리아 탄식보다 애절하다.

 

  '하느님, 햄릿 전하께서 맑은 정신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 그렇게도 고결하시던 분이 저렇게 무너지시다니! 귀인의 수려함, 기사의 칼 석학의 교양이 있었는데, 이 아름다운 나라의 희망이며, 꽃이었건만, 유행의 거울이요, 예의범절의 본보기로, 만인의 우상이셨던 왕자 전하였는데 저렇게 망가지시다니.
 이제 난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여인이 되어 버렸어. 왕자님의 달콤한 사랑의 맹세를 들었던 내 귀가, 왕자님의 저 고귀하고 굳은 이성의 청아한 종소리가 이젠 금이 가 시끄러운 소음만 내는구나! 한창인 청춘의 수려한 용모와 자태도 아, 광란의 독기를 머금고 시들어버렸어!
아, 어쩌면 좋아! 옛날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이 눈이 지금의 저 모습을 어떻게 본단 말이야!'

 

 '시련’ 끝나면, ‘재회’가 온다. ‘어사또 출두’로 시작된다.
 

 '어떤 패랭이 쓴 젊은 사람이 질청으로 뛰어오며 ‘어사또 출두요’ 외치자, 동헌이 들썩들썩, 사또는 사령을 불러 옥쇠 단속하고, 남원 성중이 떠는구나. 각 읍 수령이 겁을 내어 탕건바람 버선발로 대숲으로 도망가고, 본관(本官)은 넋을 잃고 골방으로 들어가며, 역졸이 수령좌석을 뭉치로 쎄려부시는데, 금병(金甁) 수병(繡屛) 산수병과 대합 쟁반 술그릇 왱그렁 쟁그렁 깨어지고, 거문고 가야금 생황 세피리 젓대 북 장고가 산산히 깨어진다. 

 운봉 영감은 술을 먹다가 느닷없는 ‘출두야!’ 소리에 상 위 수박덩이를 도장 주머니인줄 알고 번쩍 들고 도망가고, 곡성 원은 겁결에 기생방으로 들어가 기생 속곳이 자기 도복(道服)인줄 알고 훌렁 뒤집어쓰니, 그 바지가랑이 사이로 곡성 원님 대그빡이 쑥 나왔지. 이 영감 한참 도망허다 봉께 말 한 마리가 있는지라, 겁결에 말을 거꾸로 타고는 '아이고 이 말 좀 보아라. 운봉으로 안가고 남원으로 부두둥 부두둥 가니, 암행어사가 축지법도 하나부다.' 하고, 운봉 하인 여짜오되, '말을 거꾸로 탔사오니 바로 타시오.' 


 

 코믹 가득한 수령방백 모습이 나온다. 이 대목은 골이 깊으면 뫼 높다고, 시련을 재회로 카타르시스 시키는 대목이다. 청중들은 옥중 춘향이의 고통과 어사또 출두의 극적인 대비로 마음이 정화된다.

 이런 마지막 해피엔딩 기법은 권선징악과 함께 우리 옛 선인들이 가장 좋아하던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춘향전은 <사랑> <이별> <시련> <재회> 네 부분, 기(起) 승(乘) 전(轉) 결(結)이 완벽하다. 소설에서의 극적반전(劇的反轉)이 완벽히 구사되어 있다. 참으로 고전의 원형이다. 

 

  극 끝나자 관중은 무대 위로 한없이 뜨거운 박수 보냈다. 판소리 외길 50년 적공(積功) 이런거다 싶다. 

 몇번인가 무대로 나와서 절하고 들어가는 안숙선을 보며 오페라의 여왕 마리아칼라스가 생각났다.

  기립박수 끝내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청중들은 수런수런 돌아가고, 그들 머리 위에는 중추(仲秋)의 달만 밝게 빛나고 있었다. 

 

(2012년 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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