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나애심과 송민도

클래식이여 안녕! /수필문학

김현거사 2014. 2. 22. 06:22

 

   클래식이여 안녕! 

  편력이라고 할 것도 없지마는, 나의 노래는 트롯트에서 시작되어 트롯트에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내고향 진주는 이태리 쏘렌토같은 곳이다. 아름다운 저 바다는 없지만 남강은다.

 남강가에선 진주 출신 '가요계의 황제' 남인수의 <추억의 소야곡>이나 <애수의 소야곡>을 항상 들을 수 있었다. 누군가가 쎅스폰으로 불어제끼는 이봉조의 <밤안개>나 <떠날 때는 말없이>를 들을 수 있었다. 

 

 산레모가 칸소네의 본고장이라면콩클대회에 구름처럼 사람 모이던 진주는 트릇트의 본고장이다.

 내 어린 시절은 이 트롯트 속에서 지나갔다. 나는 엔간한 트롯트 노래는 거의 다 할 줄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하이눈>이나 <돌아오지 않는 강>, <모정>을 원어로만 불렀다. 당시 국산 영화는 체류탄 영화, 국산 가요는 '뽕짝'이라고 무시하는 풍조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 와서 전혀 모르던 음악을 만났다. 클래식이다.

 당시 종로 2가에 <디 세네>와 <뉴월드>라는 음악실이 있었다. 미식축구 선배들과 들락거렸는데, 나는 거기서 <다이아나>니 <알디라>니 <하이눈>이니 하는 곡들을 만났다. 이런 곡은 나도 제 아는체 할 수 있었고, 요한스트라우스의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슈벨트의 <보리수>, 이바노비치의 <도나우의 잔물결>,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 같은 곡도 마찬가지였다.

아! 음악실에서 영원히 이런 곡만 틀어주었다면, 그 후에 생긴 그런 불상사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나는  모차르트와 바그너를 만났다. 도대채  모차르트면 모차르트지 <협주곡 21번 2악장>은 무엇인가. 바그너면 바그너지 <탄호이저 서곡>은 뭣인가. 쇼팽도 마찬가지다. <발라드 제1번>은 뭔가. 차이콥스키 역시 <교향곡 제6번 제1악장>은 뭔가.

  이름 알만한 작곡가들이 도대채 협주곡은 무엇이고, 서곡은 무엇인가. 1번 6번 하는 숫자는 무슨 수작이고, 무슨 놈의 노래가 가사도 없느냐 싶었다.

 

 그러나 서울 친구들은 달랐다. 클래식만 나오면 물 만난 고기처럼 꼬리를 치며 좋아했다. 어떤 자는 눈을 지긋이 감고, 자기가 무슨 심포니 지휘자라도 되는 양 두 손을 허공에 휘젖기도 했다.

 클래식만 나오면 그들은 유식해져버렸고나는 무식해져 버렸다. 나는 그 웬수같은 클래식만 나오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곤 했다.

  

 나는 클래식이 싫었다. 목관악기 금관악기 현악기의 삐꺽거리는 소리도 싫었다. 한 없이 반복되는 똑같은 소리에 사래를 쳤다. 어서 그 곡이 끝나기만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그러다 어느 날 나의 인내심은 한계에 도달하고 말았다. 산에 가야 범을 잡고 물에 가야 고기 낚는다. 모종의 결심을 하고 몇개월 단기 코스로 그 얄미운 것 정복에 들어갔다. 

 그건 연립3차방정식이 아니다. 아무리 난해하고 어렵더라도 배우면 돌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 학교 클래식 강좌에 나가기 시작하여 눈 딱 감고 쓴 한약 마시듯 6개월간 클래식을 배웠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6개월 배워도 감동은 낙동강 오리알이요, 개똥밭 참외 였다. 얻는게 없었다.

  그래 '에라 이딴 놈의 콩나물 대가리. 내가 모른다고 인생에 무슨 탈이라도 나느냐?' 싶어, 시원하게 클래식과 손 흔들고 작별을 고해버렸던 것이다. 

 

  그 후 나는 오랜 시간이 경과한 후에사 그 이유를 깨달았다.

  나는 원래 산자수명한 고장에서 자랐다. 청아한 물소리, 숲속의 새소리를 듣고 자랐다. 소나기폭풍우, 남강에서 겨울에 얼음이 쨍쨍 갈라지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그게 자연의 완벽한 원음이었다. 심포니는 그 원음을 흉내낸 불완전한 인공의 소리였다. 

 천부적으로 원음을 듣도록 설계된 귀가 인공적인 소리를 거부한 것이다. 서양 깽깽이 소리를 무슨 신주단지처럼 모실 이유가 하처에도 없었다. 그런데 미친 년 널 뛰듯 궁둥이 덜썩거려서 되겠는가.

 

 또다른 이유도 발견했다. 우리가 아무리 몸에 맞지도 않는 서양 옷을 입고, 얼굴에 맞지도 않는 서양 분장을 하고, 아랫배 부풀리고 서양식 발성으로 '축배의 노래'나 '싼타루치아'를 불러도 우리는 파바로치나 마리아칼라스가 아니라는 것을. 그건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눈에 거슬리고 민망스럽고 챙피한 짓이었다. 

 

 드디어 구름이 지나가고 해가 나타난 것이다. 개미 구멍에 방축이 무너지듯 클래식에 대한 환상은 이렇게 시원히 깨져버렸다. 그 후 나는 해금이나 피리 소리가 자연의 원음에 가깝다는 걸 알았다. 드디어 제 것 귀한 줄을 안 것이다. 

 

 차제에 노래도 백 프로 트롯트로 바꾸었다.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 나애심의 <미사의 종>으로 바꾸었다. 그 얼마나 고고하고 용감한 선택이었던가.

 그 노래들은 강건너 등불이었다. 세월 저쪽의 아련한 추억이 묻어있었다.

  

 'Do not forsake me oh my darling' 게리쿠퍼와 그레이스켈리의 <하이눈> 주제곡은 잊어버렸다.

'There is a river called the River of No Return' 마릴린몬로가 카페에서 기타를 치며 부르던 애절한 <돌아오지 않는 강>도 잊어버렸다. 'Love Is A Many Splendored Thing' 제니퍼존스가 출연한 <모정>의 그 감미롭던 코러스도 잊어버렸다.

 

 간혹 직장 부하들과 회식을 하면서 랩이니 소울이니 하는 걸 들은 적은 있다. 그건 감정도 박자도 내키지 않는 그들 노래였다. 사람이 일평생 애창하는 노래는 그들이 20대 때 즐겨 부른 노래란 걸 그때 깨달았다.  나의 노래는 아득한 세월 저쪽 1960년대 였다.

 

 공자님은 논어에서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고 하였다. 노래에 세대 차이란 것이 없을 수 없지만, 신세대는 신세대다워야 하고, 구세대는 구세대다워야 하는 것이다. 변절자는 슬그머니 젊은이 흉내를 내기도 했지만,  모든 세대는 공존의 가치가 있고, 서로의 가치는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옛 것을 고고히 보존하면서 나의 노래만 부르던 중 근래에 와서 한줄기 서광을 만났다.

 한류라해서 젊은 가수들이 동서양을 휩쓸어버리자, 그들의 선배는 누구고. 그 뿌리는 어디인가 하는 문제가 떠오른 것이다.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한류 뿌리를 사랑한 사람에게 광명천지 온 것이다. 과연 용기있는 자는 성공을 얻는다. 

그 후 나는 자랑스럽게 내 노래방 십팔번을 트롯트로 고정시켰다. 맘 놓고 '클래식이여 안녕!' 클래식과는 작별인사를 고해버렸다.

 

 (수필문학 2013년 년간대표수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