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나애심과 송민도

해운대 엘레지

김현거사 2016. 10. 10. 10:37

 

 해운대 엘레지

 

 지금도 내가 노래방에 가면 꼭 불러보는 노래가 있다. <해운대엘레지> 다.  그 노래는 나에게 해운대 백사장에 수없이 오고 또 가는 파도처럼 추억이 밀려오게 한다.

 그는 나에게 그리움만 남긴채, 이제는 정말  두번 또다시 만날 길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때 그 시절 그리운 시절 못잊어 흐느끼게 한다.

 

 종대가 금년 봄에 이승을 떠났다.  '아버님이 오늘 돌아가셨다'는 따님 전화 하나로 만사는 끝나버렸다. 스므살 때, 부산 두구동 그의 집엔  넓은 정원이 있었고, 옆엔 맑은 냇물이 흘렀다. 둘은 달빛 아래서 키타를 치며  <Moon river>와  <돌아오지 않는 강>을 불렀다.

 그는  '돌아오지 않는 강으로 불리는 그 강'( There is a river, called the river of no return)을 영원히 건너가버린 것이다.

 

  남부터미널에서 뻐스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가노라니 차창에 옛 일이 주마등인양 스쳐갔다. 

 

 그는 내 초등학교 동창이다. 부산고로 진학했지만,  방학이면 진주에 있던 나하고만 항상 어울렸다. 둘 다 운동을 잘했고 체격이 좋았다. 하나는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은 무송이고, 하나는 맨손으로 버드나무를 뿌리채 뽑은 노지심이었다.

 

 먼저 입대한 것은 나였다.  63년도에 나는 두 친구를 자살로 잃고,  자원입대했다. 살벌한 수송병과를 지원하여 운전병이 된 나는 카뮤의 <이방인> 주인공  뭐르소 같았다. GMC에 자살용 실탄을 숨기고 다녔고, 서면 하이에리아 부대 옆 사창가에서 헌병을 구타하고, 헬멧과 완장을 빼았아 전 제부지역 15P 전 헌병대에 비상이 걸리게도 했다.

  종대는 그때 온천장 깡패였다. 금정산 중턱에 토굴을 파놓고, 하루 종일 운동만 하다가, 하산하면 건달들과 어울려 다녔다. 

 

 그 종대가 육군 이등병 계급장을 단 나를 온천장에서 보자, 해병대에 입대했다. 얼마 후  부산진 역파 헌병이 되어 나타났다. 마이가리 하사 계급장을 붙이고 하얀 해병대 헬멧 쓴,  엄청난 거구가 탄  해병대 찦차는  차체가 한쪽으로 비스듬이 기울어 있었다. 그야말로 장관 이었다. 

 

  종대는 수영만 운전교육대 훈련병인 내가 외출 때마다 자갈치로 안내했다. 우리는 돈은 얼마던지 있었다. 휴가병은 기차 안에 수없이 많았고,  '어이!' 거구의 해병대 헌병이 손짓만 하면 휴가병들은 우리가 마실 술값은 자기들이 알아서 얼마던지 제공하곤 했다.

 

 종대는 제대하자 동사무소에 근무했다. 그때 그는 대통령 앞으로 한 장의 편지를 띄웠다. 

'독일의 청년 나치스 당원, 일본의 가미가제 특공대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데, 한국의 젊은이들은 왜 이 런가?  데모 만능은 종식되어야 한다. 애국 청년단을 만들 필요가 있다'

는 요지였다.

  편지는 대통령에게 보고되었고, 대통령은 부산 해운대 조선비치호텔에 왔을 때 종대를 불렀다.

 덩치 작은 대통령은 거구의 종대에게 호감이 갔을 것이다. 

 현재 어떤 일을 하느냐고 묻고, 동사무소에 근무한다고 하자, 

 ' 자네 그럼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싶은가?'

 하고 물었다고 한다. 

 그때 종대 대답이 걸작이다.

 '부산 시민 건강을 위해서 서면 위생계서 일하고 싶습니다.'

아주 몫 좋은 장소를 콕 찍어 대답했다고 한다.

 박통이 싱긋이 웃으며, 배석한 부산시장더러,

 '어이 임자! 이 친구 이야기 들었지?' 

고 갔다고 한다.

 

 이때부터 서면 위생계 서랍 속엔 봉투가 저절로 쌓이더라고 한다. 그는 방학때 마다 나를 부산에 초대했다.  나는 그 덕에 광복동, 해운대, 송정 등 근사한 곳은 다 갔다. 공주사대 출신 브니엘 여고 여선생을 송정 해수욕장에서 제대 복학생에게 소개한 것도 그때다.

 

  나역시 그를 끔직히 대했다. 한번은 그가 내가 다닌 학교에 와서 벽보를 보았다. 

'어이! 저기 장학생 명단에 있는게 누고?'

 그 말 한마듸로 둘은 학교 옆 하월곡동에서 마시고, 청계천에 진출하여 마시어, 두 달 하숙비에 해당되던 그 돈 한 잎 남기지 않고 다 썼다. 

 

 내 불로그에는 흘러간 노래가 많다. 스콧맥킨지의 <If you're going to San Francisco>, 마리린 몬로의 <The River of No Return>, 앤디윌리암스의  <Moon river>  같은 노래다.

 그런데 최근에 그 노래들이 몽땅 날라가버렸다. 음반 보호법 때문이다. 곡은 사라지고 '관리자에 의해 중단된 동영상 입니다'는 멘트만 남아있다.

 떠난 것은 항상 우리를 허전하게 한다. 그 노래 함께 부르던 사람이 떠나 더 허전했다.

   

  김해 장례식장에 도착한 시간은 밤 11시 였다. 조문객 돌아간 식장에는 하얀 상복 입은 부인만 있었다. 젊은 시절 꽃처럼 아름답던 부인이다. 수척한 눈빛이 마음 아팠다. 

 

 불시에 옛 일이 떠올랐다. 부인은 가덕도 출신이다. 경남여고 졸업하고 처음 종대와 맺어질 때는  한송이 애련한 동백꽃 같았다. 그렇게 고울 수 없었다.

 삼촌이 박통 누님 사위였고, 곤양성 위에 살던 종대 집에선 말이 많았다. 종손 며느리 될 처녀가 양부모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우짜모 좋것노?'

 어느날 종대가 나에게 전화로 묻자,

  '가만 있거라. 부산 내려가서 보자!'

 

 이렇게 서대신동에서 만난 셋은 송정해수욕장 백사장에서 밤을 새웠다. 파도는 달빛에 부서지고 있었다. 노틀담 꼽추 종대 옆에 집시 에스메랄다 그가 있었다. 수없는 이야기는 볓빛에 뿌려졌고, 수없는 노래는 파도에 묻히었다.

 

‘우짜꼬?’

이튿날 종대가 물었다.

'우짜긴 뭘 우째? 뜯어 치아뿌라  문디 자석아! 내가 옥이씨 데리고 살란다.'

 

 그녀도 옆에서 그 말은 들었다. 평생  나를 특별히 생각했다.

 전화라도 걸면  애교스런 경상도 사투리로 그리 반가워 할 수 없었다. 

 언제 셋이 부산서 노래방 갔을 때다.

'이 노래를 옥이씨에게 바칠랍니다'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품에 겨워...꽃잎이 빨갛게 물이 들었소’. 

나는  <동백 아가씨>를 불렀다.

 

  밤 깊은 상가에서 그녀의 눈에 맺힌 이슬을 보니,  세월이 무정타 싶었다. 가슴 한쪽이 아려왔다. 

 그 밤 나는 잠 한숨 붙이지 못하고 뜬눈으로 새웠다.

 

종대와 이별한 얼마 후다.  박인환의 시 '인생은 외롭지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와 숙녀'를 읽다가 문득 종대가 그리웠다.

 

 전화를 걸어보니, '지금 거신 전화는 결번이오니, 확인하시고 ...'  하는 멘트가 나온다. 

 하도 허망해서 동창록을 뒤져보니, 주소는 옛날 집 주소다.  따님 전화도  '없는 번호 입니다. 확인 후 다시 걸어주십시오.'로 나온다. 

 

'쏴아아! 어디선가 쓸쓸한 썰물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나는 물 빠진 갯가에  홀로 선 것이다.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를 하고 다짐을 하던 너와 내가 아니냐. ...

 송정에서 그와 부른 노래만 귓전을 울렸다.

 

 부산 동창들 아무도 그의 연락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인생의 끝자락이란 이런 것인가. 갑자기 발을 헛디딘 것처럼 휘청했다.

  멜랑꼬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이제는 정말  <해운대엘레지>  노래말처럼, 다시 두번 또다시 만날 길이 없다면,  못난 미련을 저 바다 멀리멀리 던져버려야 하는가. 그때 그 시절 그리운 시절 못잊어 흐느끼며 살아야 하는가.

 

 (201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