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창 안숙선의 적벽가 한마당
아리랑 중에서 진도아리랑이 가장 구슬프다. 그 노래 들을 때 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판소리 발생지는 전라도다. 전라도 사투리가 많이 섞인 판소리는 전라도 사람이 불러야 제맛 난다.
판소리는 장터에서 막걸리 한사발 쭈욱 들이킨 소리꾼이 걸찍한 입담으로 읊어온 한국식 오페라다. 일인 혹은 고수와 둘이서 벌리는 창극인데, 그 소리엔 이슬 맞으며 집시처럼 떠돈 유랑인생의 애환과 해학이 묻어있다.
세모에 판소리 한마당을 맛보려고 장충동 국립극장에 가니 입구에 최상무가 기다린다. 그는 내 초등학교 동창이고 국창 안숙선씨 남편이다.
십대에 진주 개천예술제에서 본 후 한 눈에 반했다고 한다. 그 후 부인은 가난한 예술가의 길을 밟아 국창이 되었고, 대통령의 평양, 위싱톤 방문시 수행하기도 했다.
입구에 간단한 먹거리와 막걸리 동이가 놓여있다. '술아! 너 본지 오래로구나.' 우선 한 잔 널름 마시고 안주 한 점 먹고 달오름극장에 입장했다.
원래 판소리는 막걸리 잔 옆에서 제대로 익는다. 얼큰해져야 관중과 배우가 서로 한덩어리가 된다.
바로 무대 앞에 앉았다. 판소리는 창 하는 사람의 한숨, 손짓, 발짓, 얼굴 빛, 눈 빛이 잘 보이는 위치라야 제 맛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 서양의 오페라 관객은 망원경을 가져간다.
막 오르기 전에 무대를 바라보니, 매 난 국 죽 사군자 휘장이 국립극장다운 기품이 있다. 매화는 고풍스럽고, 난초는 은은하고, 국화는 옛스럽고, 대나무는 청아하다.
'명창 안숙선 선생님이 오늘 밤 공연을 끝으로, 내일부터 후학을 기르는 교수로 가시는 마지막 날 입니다.'
사회자 소개를 들어보니, 오늘 무대가 뜻있는 자리다.
이윽고 한복 차림 프리마돈나가 손에 합죽선 들고 나오더니 얌전히 두 손 모아 인사하고, 잠시 숨을 고르더니 '아니리'부터 시작한다.
'한나라 말엽, 위 한 오 삼국시절에 황제가 미약하고 여러 도둑들은 함께 일어난다. 간휼하다 조조는 천자를 자칭하여 천하를 엿보았고.....'
<적벽가>는 삼국지의 조조가 제갈공명에게 패해서 혼비백산 달아난 적벽대전을 읊은 것이다.
'아니리'는 낮은 음성이다.
그 다음에 빠른 '중머리'로 들어간다.
'도원이 어데인고? 한나라 탁현이라....'
유비 관우 장비의 도원결의 장면이 되자, 소리꾼도 반가운지 갑자기 낮은 소리가 명주를 찢는듯 고음으로 바뀐다. 그러더니 유관장 세 영웅이 와룡강 제갈양 찾아가는 장면에선 느린 '진양조'로 바뀐다.
소리꾼이 '소리'를 내지르는 사이, 고수는 신명나게 북을 친다.
'둥둥둥둥' '딱딱딱 딱 따다닥'
북을 치다가 북채로 딱다닥 따다닥 북 테두리를 쳐 박자를 맞춘다. 실 가는 데 바늘 가고, 바람 가는 데 구름 간다. 창자 고수 두 사람 호홉이 멋지게 맞아떨어진다. 간혹 고수는 '얼쑤!' 추임새로 흥을 돋운다. '조오타!' 관중도 객석에서 화답한다.
원래 판소리는 한 명 소리꾼이 창(소리), 말(아니리), 몸짓(발림)을 섞어가면서 긴 이야기를 노래로 표현하는 예술이다. 무대 위에는 딱 두사람 뿐이다. 서양 오페라처럼 수십명이 필요치 않다. 오직 고수와 소리꾼, 그리고 관중이 있을 뿐이다. 판소리는 관중이 참여하는 창극이다. 이런 예술은 우리 판소리 밖에 없다.
'김교수! 소리꾼의 대사나 목소리뿐 아니라, 연기도 중요하니, '태'를 한번 유심히 보시게!'
옆에서 최상무가 일러준다.
'태'란 숨을 탁 멈추며 차르르 부채를 펼치는 동작, 착! 부채를 손바닥에 접는 동작, 사뿐히 돌아서는 발걸음, 흡족 비통한 표정, 눈동자, 시선 하나하나를 말한다.
'태'가 곱지 않으면 감동이 덜한데, 아담한 키에 자색 고운 명창은, '태'도 역시 일국의 국창답다.
평자는 안숙선을 '아담하고 단아한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와 달리, 용솟음치듯 힘차게 폭발하며 무대를 장악하는 칼날같이 힘 있고 맑은 고음이 장기'라고 한다.
과연 그렇다. 감기로 한 손에 손수건 들고, 가끔 땀을 닦는 안숙선씨 연약한 몸에서 어떻게 그런 용솟음 치는 정열의 폭발이 가능할까. 무대를 장악하는 칼날같이 힘 있고 맑은 고음이 가능할까.
최상무 이야기로는 밤새 감기로 끙끙 앓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무대 위에만 서면 사람이 달라진다고 한다. '끼'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잠시 후 조자룡이 시산혈해(屍山血海) 전장을 누비며 유비의 아들 아두를 품에 품고 장판교에 도달하는 대목에 오자, 템포는 빠른 '자진머리'로 바뀐다.
옛날 우리 할머니들은 '조자룡 헌 칼 쓰듯'이라는 말을 좋아했다.
조운이 장판파에서 너무 많은 적군을 죽여 창날이 너덜너덜하도록 무뎌져서 때마침 나타난 하후은을 일격에 베어버리고 조조의 보검 청강검을 탈취했던 그 통쾌한 대목이다.
여기서 관중은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쳐도, '얼쑤! 조오타!' 큰소리로 추임새를 던져도, 입에 손을 넣고 휘리릭 휙휙! 휘파람 불어도 상관없다.
사실 이 대목은 누군가가 신명이 나서 무대로 올라가 덩실덩실 춤을 추다 내려와도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판소리는 관중과 배우가 함께 하는 참여예술이기 때문이다.
조자룡의 무사귀환을 축하만 해주면 된다.
이 대목에서 안숙선씨가 능청을 떤다. 없던 사설을 즉흥으로 삽입한다.
'아이고! 나도 사람인디, 목인들 오죽 마르것소. 물 한모금만 쫴깸 먹고 허입시다'
그러고 유유히 주전자 물을 컵에 딸아 천천히 마신다.
감기 걸린 몸이 무대 위에서 한 시간이고 두시간이고 쥐어짜면 목인들 오죽 아프랴.
관중들은 모두 우하하하! 웃음판이 벌어진다.
이런 해학이 판소리의 장점이다. 관중의 공감 없는 예술이 무슨 예술일까. 판소리는 배우와 관중의 공감을 우선시 한다. 예술적 카타르시스는 그 다음이다.
나는 친구 최상무 덕에 안숙선씨의 <적벽가>, <수궁가>, <춘향가>, <흥보가>, <심청가> <변강쇠 타령>등을 전부 감상할 수 있었다.
그 중 <적벽가>만 해도 수많은 사자성어(四字成語)가 나온다.
'삼강(三江)은 수전(水戰)이요 적벽은 오병(吳兵)이라, 난데없는 화광(火光)이 충천(沖天)하니 조조(曹操)가 대패(大敗)하여 화용도(華容道)로 행(行)할 즈음에 응포일성(應砲一聲)에 일원대장(一員大將)이 엄심갑(掩心甲) 옷에 봉(鳳) 투구 저켜 쓰고 적토마(赤토馬) 비껴 타고 삼각수(三角鬚)를 거스릅시고, 봉안(鳳眼)을 크게 뜹시고 팔십근(八十斤) 청룡도(靑龍刀) 선뜻 들어....'
<수궁가>, <춘향가>, <흥보가>, <심청가>도 마찬가지다.
<홍보가>는 이렇게 나온다.
'충청 전라 경상의 삼도 월품에 사는 박가 두 사람이 있었으니 놀보는 형이요 흥보는 아우인데 동부동모(同夫同母) 소산이되 성정은 아주 달라 풍마우지 불상급(風馬牛之不相及)이라.
사람마다 오장육부로되 놀보는 오장칠부인 것이 심사부(心思腑) 하나가, 왼편 갈비 밑에 병부주머니를 찬 듯하여 밖에서 보아도 알기 쉽게 달리어서....'
<심청가>는 이렇게 나온다.
'송나라 말년에 황주 도화동(桃花洞)에 한 사람이 있었으니, 성은 심(沈)이오 이름은 학규(鶴奎)라. 누대(屢代) 잠영지족(簪纓之族)으로 문명(文名)이 자자터니, 가운(家運)이 영체(零替)하여 이십 안에 안맹(眼盲)하니, 낙수청운(洛水靑雲)에 벼슬이 끊어지고...,'
그 많은 고사성어 외우기도 힘들겠다 싶었다. 수많은 문장들이 굴비 엮어놓은듯 구구절절 엮여있다.
그런 고전들 섭렵하고 수백번 읊었으니 예인의 풍류는 그 얼마나 깊을까.
감동 속에 <적벽가 한마당>은 밤 10시에 끝났다.
그동안 장장 3시간 공연 중에, 혹은 아미를 숙이고 흐느끼며 탄식하고, 혹은 심중의 무한한 정을 좁은 어깨가 터지도록 목청을 뽑고, 혹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수줍게 돌아서던 미인이 딱 그자리에 멈춰선다.
잠시 무대 위에 정적이 흘렀다. 활활 가마처럼 타오르던 마음 속 불길은 꺼지고, 진달래꽃 가득 핀 청산 두견새 울음같던 애절한 소리도 멈추었다. 미인 혼자 차그운 백자가 되어 무대에 서있다.
국창 안숙선의 판소리 <적벽가> 완창이 끝난 것이다. 이 공연이 국악창극단 멤버로서의 마지막 공연이라고 한다. 한 예술가의 뜻깊은 마지막 공식 무대였던 것이다.
보신각 제야(除夜)의 종이 울리기 2시간 전이었다.
(문학시대 2008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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