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산(踏山)의 의미 김창현
동기들 모임에서 '등산은 왜 하는가?'가 화제에 오른 적 있다. 그러자 누가 선뜻 '산이 거기에 있기에' 하고, 힐러리경의 말부터 꺼낸다. '그 말은 멋만 부렸지, 좀 애매한 이야기 아닌가' 하고 반문했더니, 멋진 대답 둘이 나왔다. '고마 간다.' '꽃 보러 간다' 였다. '고마'란 진주 사투리로 그냥 아무 뜻없이 간다는 말이고, 꽃 보러 간다는 것은 순전히 웃으개 말이다. 꽃이 무엇인가. 해어화(解語花), 즉 등산 오는 여인 보러 간다는 것이다. 한바탕 웃었다.
불경이나 성경을 읽고, 필묵(筆墨)으로 한시를 써보거나, 바둑을 두거나, 노장(老莊)을 배워보는 것이 노년의 취미일 것이다. 그 외에 가장 어울리는 취미는 답산(踏山)일 것이다. 백발 노인이 지팡이 짚고 산기슭 거니는 모습은 신선을 연상시킨다. 등반 등산 산행 답산이란 말이 있지만, 여기선 답산이란 말을 쓰기로 하자. 시서(詩書)를 농(弄)하는 데도 법이 있으니, 선비의 답산에 법이 없겠는가. 나는 그 법을 산수화 이론서에서 찾았다. <개자원 화전>에, '그림 속에 시가 있고, 시 속에 그림이 있다'는 말이 있다. 산수(山水) 속에서 그럴듯한 풍경을 찾고, 시를 찾는 것이 선인들 답산의 의미일 것이다. 그래 화론(畵論)에 구체적으로 나오는 안개나 물, 바위와 나무, 산길 등에 대한 이론들을 유심히 읽어보았다.
안개를 주목해야 함은 명백하다. 산도 안개 속의 산이 더 신비롭다. 산이 미인이라면 안개는 미인의 얼굴을 가린 스카프다. 먼 산 아지랑이처럼 신비로운 경치도 없다. 산을 볼 때는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주산(主山)은 높이 솟아야 좋고, 구불구불 연결되어야 좋고, 세(勢)가 우람한 기상이 있어야 좋다. 뾰족한 것을 봉(峰)이라 하고, 둥근 것을 만(巒)이라 하고, 서로 연(連)한 것을 영(嶺)이라 하고, 절벽에서 오랜 풍설에 닦이고 씻겨져 납작하게 튀어나온 바위를 파(坡)라 하며, 산 사이에 끼어 흐르는 물을 간(澗)이라 한다. 푸른 산에 백운이 걸치어 층을 이루어 산을 가로막고, 구름이 열린 곳에 창천(蒼天)이 나타난 모습을 운산(雲山)이라 하고, 나무가지 사이에 안개 덮힌 것을 운초(雲梢)라 한다. 어쨌던 구름과 안개는 산에 비단옷 입히는 시인이다. 아침에 이내가 끼고, 저녁에 노을이 낀 것을 도연명은 '산기일석가(山氣日夕佳)'란 귀절로 표현했다. 산기운은 아침 저녁이 아름답다는 것이다. 이야기는 간단하다. 안개와 노을이 산을 더 신비롭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주목할 것은 물이다. 바위를 안고 흐르고, 나무를 감돌아 흐르고, 폭포를 이루고, 쏘가 되기도 하는 것이 물이다. 물은 나무를 적시고, 바위를 적시고, 다람쥐와 청설모같은 산짐승의 목마름을 해갈해준다. 천지를 적시고, 만물을 함양(涵養)한다. 물 소리는 자장가마냥 다정하기도 하고, 가늘게 흐느끼기도 한다. 마침내 집채같은 바위를 흔드는 우뢰소리로 변하기도 한다. 이 물소리를 불가에서는 팔만사천 법문이라고 하고, 부처님 장광설(長廣舌)이라고도 한다. 산에 가서 하루 종일 물가에 앉아있어도 탓 할 이 없다. 약수도 한모금 마셔보고, 시원한 물에 얼굴도 씻어봐야 한다. 폭포와 쏘도 눈여겨 보아야 하고, 물에 비친 바위와 나무와 흰구름도 유심히 보아야 한다. 조용한 물소리와 시원한 바람소리 들으면서 차나 시주(詩酒)를 즐기는 운치도 잊어선 않된다. 그런데 산에 와서, 마치 마라톤을 하듯 열심히 꼭대기로만 치닫는 분들이 있다. 나는 그분들이 왜 산에 왔는지 묻고싶다. 산에서 산(山)과 수(水)가 만나는 곳, 진경산수화 펼친 곳은 계곡이다. 여기 오래 머무는 것은 그래서다.
산의 바위와 초목도 그냥 무심히 보아넘겨서 안된다. 둘 다 기절(奇絶)하여 천하절경이지만, 설악산은 바위가 좋고, 지리산은 나무가 좋다. 설악산 천불동, 거제도 해금강이 이름난 것은 빼어난 암산이기 때문이다. 미원장(米元章)은 기묘한 바위를 보면, 기뻐 말하기를, '이것은 나의 절을 받을만 하다' 하고 예를 갖추어 절 하고, 매양 석우(石友)라고 불렀다 한다. 죽림 아래 물가에 놓인 토파(土坡)는 매양 은자를 기다리는 것 같아 좋고, 기봉(奇峰) 괴석(怪石)은 무심히 구름을 모우고 바람을 몰아치듯한 세(勢)가 있어 좋다.
만장같은 바위에 손바닥을 대고 천년 세월을 느껴봐도 좋고, 바위 이끼의 고색(古色)을 감상해도 좋다. 청태(靑苔) 속에 피어난 가날픈 풀꽃을 감상하는 것도 좋은 취미이다. 눈 덮힌 바위, 달빛 비친 바위를 보며 시상(詩想)에 잠겨도 좋다. 어쨌던 바위는 산의 뼈대이며, 좋은 산은 반드시 좋은 뼈대를 지니는 법이다. 산의 나무를 감상함에는 먼저 뿌리를 보는 것이 좋다. 천인단애에 솟아, 암석에 끼이고, 빗물에 씻긴 나무가 노목이 되면, 흔히 뿌리를 노출하고 있다. 마치 세상을 벗어난 선인이 여윌대로 여위고 나이가 늙어서, 근골이 울퉁불퉁 불거져 나온 것과 같아서 운치가 있다.
지리산 법계사 가는 길에 용같은 뿌리로 바위를 감고, 서너개 가지를 창공에 거침없이 뻗은 거대한 반송(盤松)이 있었다. 이런 기목(奇木)은 어떤 호사가가 제 아무리 많은 비용을 부담하고 구하려해도 얻지못할 나무이다. 나도 이 나무를 목우(木友)로 느끼고, 예를 갖추어 절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 적 있다. 곁에 닥아가 한동안 나무의 숨결과 바람 타고 날라가는 나무의 향기를 맡은 적 있다. 수원 광교산 정상 근처에는 거대한 철쭉나무가 많다. 높은 곳에 자라는 철쭉은 꽃빛이 연분홍이고 키는 우리 두배나 될만치 거대하다. 풍우에 흙이 벗겨져나가서, 전화통처럼 크고 기괴한 뿌리는 분재하는 사람 넋을 빼놓기에 충분하였다. 약수터 가는 길에는 노스님이 짚고다니는 주장자처럼 생긴 욕심나는 소나무 뿌리가 뻗어 있었다. 땅에 구불구불 노출된 그 뿌리는 오랜 세월 사람의 발길로 반질반질 윤이나서 지팡이로는 최고의 물건이었다.
대채로 산에 가서 갈 길을 잊은듯 나무의 수형과 뿌리 모습에 반하여 한가히 살펴보는 습관은 바람직하다, 낭떨어지에 난 것, 돌 위에 난 것, 비스듬히 굽어 바람 타고 다니는 선인(仙人)같은 것, 물결 밟고 다니는 신녀(神女)같은 나무를 볼 수 있다. 이 나무 하나하나 손뼉을 치며 넙적다리를 치면서 득의(得意)하여 구경하는 것이 좋은 취미이다. 고인(古人)은 좋은 산에 좋은 산길이 없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산길은 구불구불하여 숨었다가 보였다가 해야 한다. 산길이 죽은 뱀처럼 꼿꼿하면 안된다. 은사(隱士)가 나귀 타고 다닐만한 길이어야 하고, 산속 어딘가에 유인(幽人)이 싸리문 열어놓고 은거한 모습을 상상해볼 길이어야 한다. 눈 덮힌 산속에 홀로 핀 매화가 생각나는 길이어야 하고, 맑은 바람에 머리를 씻은 고사(高士)가 달 아래 거문고 타는 소리를 상상해볼만한 길이어야한다.
모름지기 흉중에 이런 풍류가 있어야 비로서 답산의 의미를 안다 할 것이다. 그러나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지금 우리 주변에 고인(古人)의 뜻은 멀고, 시(詩)는 실종되었다. 그래서 글로서 몇자 옛날 선비들의 뜻을 헤아려본다. (한국수필 2011년 7월호에 게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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