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마음에 두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居 士 四樂) 김창현
인생 백년이라지만, 백년을 살아도 삼만육천일이요, 앞길이 구만리라지만, 목슴은 바람 앞에 등불이요, 풀잎에 맺힌 이슬이다. 그 짧은 인생에 노루 꼬리처럼 짧은 것이, 문턱 밑이 저승이라는 노년의 시간이다. 직장에서 은퇴한 노년의 시간은 밤 깊은 법당에 향 하나가 타서 고요히 재가 되는 시간, 늦가을 붉은 홍시가 꿀로 익어 낙과되고마는 그런 짧은 시간이다. 이 안타까운 시간에 무엇을 마음에 두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밤을 낮인양 일하던 젊은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는 노년이다. 노년은 노년다운 시간을 가짐이 바람직하다. 그림을 그려도 좋고 시를 써도 좋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좋고, 자서전을 써보는 것도 좋고, 이웃을 위해 봉사활동을 펼치는 것도 좋다. 벼슬 사양하고 초야에 묻힌 옛날 선비들처럼 살아보는 것도 바람직하다. 눈을 사회에서 다른 데로 돌려보는 터닝포인트가 필요하다.
먼저 봄에는 꽃과 채소를 마음에 둘만하다. 귀천궁달이 수레바퀴마냥 도는 세상보다 자연에 맘 돌리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다. 비 내린 상쾌한 봄날 아침 아침 뜰에 나가보자. 흙을 밀치고 나온 수선화 새촉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함박꽃 붉은 촉, 상사초 푸른 촉도 보인다. 흙 속의 부드러운 새촉들은 어린 소녀 같이 싱싱하다. 그 새촉은 마치 우리 노인이 옛날 소년 때 만난 첫사랑처럼 우릴 가슴 설레게 한다. 봄은 콘닥터가 지휘하는 심포니처럼 아름답다. 꽃들은 차례대로 의상을 입고 무대에 등장한다. 개나리 산수유는 노란 저고리, 진달래는 연분홍 치마, 목련은 하얀 드레스 차림이다. 매화와 배꽃은 향기가 청초하고, 벚꽃은 비단처럼 화려하다. 벌 나비처럼 향기 찾아서 이리저리 온갖 꽃의 품으로 날아들만 하다. 이 축제의 뜰에서 라일락이 연인처럼 달콤한 향기를 풍겨오면, 히야신스꽃도 잊으면 안된다. 꽃집에서 몇개 구근을 골라 와보라. 실내에 자색 보라색 노란색 순백의 향기가 가득해질 것이다. 천상의 향기가 이럴 것이다. 봄은 정말 음미해볼만한 아름다운 심포니다. 겨울 넘긴 텃밭의 청갓과 부추 몇 잎도 기쁨이다. 뜯어서 접시에 놓는 재미도 잊어선 안된다. 식탁에 올린 담박하고 쌉싸레한 푸성귀에 맛을 들여야 한다. 건강에도 좋거니와 고인(古人)의 담박한 의취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여름은 물소리를 마음에 둘만하다. 고요함을 즐기는 노인이란 오래된 벼루처럼 운치있는 법이다. 여름에 가장 고요한 소리는 물소리이다. 물소리 중에 으뜸은 처마에서 하나씩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다. 한방울 두방울 떨어지는 그 소리에 귀 기울이면 그 작은 울림 하나하나가 교회의 종소리 산사의 목탁소리처럼 청아하다. 수정으로 깨어지는 그 소리에 몰입해보면 천지의 파장이 몸에 스며든다. 거처하는 집이 교회나 절간처럼 청결하고 고요해짐을 느낄 수 있다. 산골 물소리도 고요하다. 배낭에 술과 찬거리 담고, 홀로 청산을 찾아가보라. 적막강산 속에서 안개를 마시고 구름을 타면서, 흰구름에 눈 씻고, 솔바람에 이마 씻고, 흐르는 물소리에 마음을 씻어보라. 세상의 모든 시시비비가 문득 저멀리 모기소리같이 하찮게 들릴 것이다.
가을에는 여행을 마음에 둘만 하다. 한번 흰구름을 닮아봐야 한다. 버리고 비우고 떠나볼줄 알아야 한다. 무심한 흰구름처럼, 황금빛 주홍빛으로 단풍 물든 산 허리 달빛 아래를 거닐고, 어기야 디어챠 어기여차 갈대밭 속을 한 잎 조각배에 몸 싣고 가고, 갈매기 벗삼아 외로운 섬 멀리 사라지는 황혼을 따라가봐도 좋을 것이다. 들녂에서 추수하는 농부에게 슬며시 닥아가 탁주 한잔 얻어마셔도 좋고, 출렁거리는 뱃머리에서 어부가 갓잡은 싱싱한 생선을 흥정해봐도 좋다. 등대가 보이는 항구의 목로주점을 찾아가도 좋다. 주가(酒家)의 늙은 여인과 젖가락 장단치며 구성지게 옛노래 불러도 좋다. 밤차로 고향에 가서, 타계하신 부모님 무덤을 돌아봐도 좋다. 흔히 여행을 인생 같다고 한다. 그러나 아쉬운건 인생이니, 여행은 떠나도 돌아올 수 있지만, 인생은 한번 떠나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한다. 불귀(不歸)가 끝인 것이다. 인생은 온 곳 모르고, 갈 곳 모르는 구름이다. 그렇게 화려하다가 금방 허망하게 스러지는 구름이다. 버리고 비우고 떠나는 구름의 마음을 배워야 한다.
겨울에는 차를 마음에 둘만 하다. 눈 오는 밤에 고서를 뒤적이면서 풍로에 차 한잔 끓이는 것이 노년의 운치다. 목욕 후 먹을 갈아놓고 묵난을 쳐보는 것도 좋다. 피리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도 좋다. 허공에 피어오르는 차의 향기에 마음을 모울 때, 살아온 인생의 전과정을 투명하게 관조할 수 있다. 올 때도 빈손으로 왔거니와 갈 때도 빈손인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아니던가. 삶은 지팡이 하나와 발우 하나만으로 족했던 것이다. 금전이나 대인관계에 고민할 필요도 없다. 현우(賢愚)도 따질 필요가 없었다. 명예도 거치장스런 것이었다. 마음은 어디서나 자유로워야 했다. 가난하면 청빈을 구하고,부귀하면 검소를 벗했어야 했다. 간혹 밤늦어 참선을 끝내고, 이윽고 차 한잔 기울이면, 흉중에 속계와 선계가 하나임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차의 품질에 연연할 필요도 없다. 오직 맑은 차 한잔의 의미만 가슴에 담으면 그만이다.
봄은 꽃을 즐기고, 여름은 물소리 즐기고, 가을은 여행을 즐기고, 겨울은 차를 즐김이 좋으리라. 사계절 이 밖에 할 일이 또 무엇이랴. 아침은 시를 읽고, 오후는 낮잠을 자고, 밤엔 달을 구경함이 좋으리라, 하루에 할 일이 이 밖에 또 무엇이랴. 은퇴한 노년이란 어차피 직장도 떠났고, 자녀도 품에서 떠나갔다. 신부님이나 스님의 처지와 같다. 이제야 못에 갖혔던 고기, 새장에 갖혔던 새가 자유를 찾은 것과 같다. 공작은 깃을 아끼고, 범은 발톱을 아낀다고 한다. 이제야말로 처음으로 인간다운 삶을 아끼며 살 때가 온 것이다. 동지에 개딸기 찾듯이, 뒤늦게 과거에 연연할 필요 없다. 그동안 밤송이 우엉송이 다 밟아본 노년이다. 이제야말로 한번 표연히 출세간의 길로 가볼 때가 온 것이다. 천지에 소요유(逍遙遊)할 빈 배 하나가 저 멀리서 조용히 흘러오고 있다.
(청다문학 2011년호 게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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