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춘향가 김창현 판소리는 달빛 아래 듣는 것이 제격이다. 이왕이면벛꽃 떨어지는섬진강이 더 좋을 것이다. 몇해 전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판소리 들으며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저멀리 푸른 갈대밭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하얀 백사장은 달빛 아래 졸고 있다. 섬진강위로 배 한 척 흘러내려온다. 배 위엔 한 여인이 서 있다. 여인은 머리에옥비녀 끼고, 흰 저고리에 붉은 치마 받쳐입고, 손엔 합죽선을 쥐었다.수심어린눈동자 고요히 들어 지리산을 보고 있다. 달은 강물에 비치고, 별은 하늘에총총하다.멀리물새가 나르는 모습 보이고,강바람은 살랑살랑 옷자락을 흔든다.배가화개장터에 이를 즈음이다. 어디선가대금소리가가날프게 들려오기 시작한다.이어거문고 소리화답해온다. 바이올린 현처럼 부드러운 생황소리도 난다.뱃머리의 한복 차림노인들이악기를 켜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고요히 서있던 원하미인(月下美人)은해당화같은 붉은 입술을 열어창(唱)을 시작한다. 목소리는 한이 배였고, 가락은 애절하다. 내가 만약연출가라면 꼭이런 판소리 연출을한번 해보고 싶었다. 막이 오르자, 사회자가국악계의 거인 안숙선을소개하였다. 근세 명창이라면권삼득 송만갑 임방울 김동진 이화중선 박초월 박녹주같은 분이 있다.그러나 판소리도 오페라처럼창자의 노래하는 모습을 보며 감상해야 완전한 것인데,아쉽다.득음(得音)의 경지를 넘어선 그분들'소리'는 남았으되공연비디오는 없는 실정이다. 마침 추석 앞 둔노천극장 하늘엔 달이 떴고,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하다.무대에 선안숙선의 몸매는쥐면 한 줌에쥐일듯 가날프다. 그 가날픈 몸매 어디서그런'소리'가 나오는지 모르겠다. 먼저 단가(短歌) 뽑으니,사람 애간장 녹이는애잔한음색으로 한참 나가다가, 갑자기 툭사발 삶아먹었는지 아래배에서 뽑아올리는걸쭉한 '소리' 튀어나온다. 판소리 외길 50년적공(積功)쌓은 명창의 '소리' 분명하다.탁! 부채 펼치는 손동작, 사뿐히 맵시있게돌아서는 발동작, 가슴 속 깊은 한을 허공에 던지는시선 모두 아름답다.이같이귀한'태'의 진수가 그를 통해 전해졌음이 다행이었다. 단가 끝나자본무대 펼쳐진다.그 유명한 '사랑가' 다. '사랑 사랑 내사랑이야 어허둥둥 니가 내사랑이야. 만첩청산 늙은 범이 살진 암캐를 물어다가 놓고서, 이는 빠져 먹지는 못허고, 어르르릉 어흥 어루는듯, 북해 흑용이 여의주를 물고 채운(彩雲) 간에서 넘노난듯, 저리 거거라 가는 태를 보자, 이만큼 오너라 오는 태를 보자꾸야. 너는 죽어서 버들 유(柳)자가 되고, 나는 죽어서 꾀꼬리 앵(鶯)자가 되어, 유상앵비편편귀이로다. 가지마다 놀거덜랑 니가 난 줄 알으려므나. 너는 죽어서 종로 인경이 되고, 나는 죽어서 인경채가 되야, 아침이면 이십팔수, 저녁이면 삼십삼천, 그저 뎅뎅 치거더면 니가 난 줄 알으려므나. 너는 죽어 이백도홍 삼춘화란 꽃이 되고, 나는 죽어서 범나비되야, 네 꽃송이를 덤뿍 물고 너울너울 춤을 추거덜랑 니가 난 줄 알으려므나. 사랑이야 내사랑이로구나 어허 둥둥 네가 내 사랑이야.' 사랑가는이도령이 춘향에게 보내는, 요즘 말로일종의 세레나데다. 구구절절 간절한뜻이시원한 폭포수가 내리쏟듯,관중의 마음뚫어준다. 남녀칠세부동석이던 옛날에이런 시원한 시나위는새악시 마음 속 갈증 충분히대리만족 시켜줄만 하다. '애! 춘향아 말 들어라. 밤이 매우 깊었으니 어서 벗고 잠을 자자.' '도련님 먼저 벗으시오. 매사는 쥔이라고 하니 쥔 너 먼저 벗어라.' 도련님 거동 보소. 우르르르 달려들어 춘향의 가는 허리 예후리쳐 덤썩 안고 옷을 차차 벗길 적에, 저고리 벗기고, 바지 벗기고, 버선마져 뺀 연후에덤쑥 안아 이불 속에다 훔쳐넣고, 도련님도 훨훨 벗고둘이 끼고 누웠으니, 좋은 호(好)자가 절루 난다.' 질펀한 춘사 장면 나온다.젊잖던 선조들 앞에서어떻게 이런음담패설이 가능했을까. 여자인 춘향이가 남자인 이도령더러 '매사는 쥔이라고 하니, 줜 너 먼저 벗어라'는 반말도 괴이하다. 그러나판소리 기원을 생각해보면 금방 수긍간다.판소리 기원은무가(巫歌)다,광대의 소학지희(笑謔之戱)다, 등의 몇개 설이 있다. 판소리는 과거 급제 후 광대(廣大) 재인(才人) 불러 3일유가(三日遊街) 할 때,급제한 홍패를 앞에 놓고 부귀를 빌던 홍패고사(紅牌告祀)에 초대되던 악극이다.시골 장터 찾아오던 악극이다.짚씨 낭인들 입에서 입으로 구전된 아리아다. 17세기 임란과 병자호란 격변기 거친 우리 최하층 민중아리아다.그래서 이 판소리 중에 '변강쇠 타령'은19세기 말에 등장한'차타레이 부인의 사랑'보다더 자유롭게 성을 묘사하기도 했다. '사랑' 다음은 '이별'이다. 사랑 나눈 후 서울 가는 이도령이 오죽원망스러웠을까. '내 몰랐소 내 몰랐소 도련님 속 내 몰랐소. 도련님은 사대부요 춘향 나는 천인이요. 일시 춘흥을 못이기어 잠간 좌정 허였다가 버리난 것 옳다하고 나를 떼랴고 허옵신되, 속 모르는 이 계집은 늦게 오네, 더디 오네, 편지 없네, 손을 잡네, 목을 안고 얼굴을 대니, 짝사랑 외즐그움에 오직 보기가 싫었겠소? 속이 진정 저러시면 누추한 첩의 집에 오시기가 웬일이오? 책실에 있으시어 방자에게 일장 편지 거절한다고 하였으면, 젊은 년 몸이 되어 살자살자 하오리까? 아들 없는 노모를 두고 자결은 못하겠소. 독수공방 수절타가 노모 당고 당하오면, 초종 장례 뫼신 후에 소상강 맑은 물에 풍덩 빠져 죽을런지, 백운청산 유벽암자 삭발도승 되올런지, 소견대로 내 할텐디, 첩의 마음 모르시고 금불이요 석불이요 도통하려는 학자신가? 천언만설 대답이 없으니 이게 어디 계집 대접이며 남자의 도리신가?나는 건너방 우리 어머니 곁에 가 잠이나 자지.' 춘향이가 문 열고 나가려고 한다.' 자고로이별 원망않는 처자가 어디 있던가. 춘향의 이 강짜를추임새로 돋워주는 것은 고수의 장단이다. 퉁타당 장고소리더빨라진다. '얼씨구' '그렇치' '좋다' 청중들감탄사도여기저기 터진다. 판소리는 노래하는 창자, 북치는 고수, 둘러싼 청중, 삼자가 만드는 예술이다. 말하자면 참여예술이다. '얼씨구! 사람 헌장 허것구만.' 시골 장바닥에서 막걸리로 얼굴 불콰해진 누가 이렇게거침없이 한마듸 고성을 내지른다고 누구 탓하리.'어따 그 양반 목소리 한번억세게 크네.'대사에 없는이런농지거리무대 위의 창자가즉흥적으로 내밷는다고누가 탓하리. 이것이 판소리다.모두왁짜하니 한바탕술렁대야 제대로 된 마당극이다. 이별 다음은 시련이다. 시련의 백미(白眉)는 ‘쑥대머리’다. 춘향이의'옥중가(獄中歌)’다.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 옥방(獄房)의 찬자리에 생각나는 것은 임 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한양 낭군 보고지고. 오리정 이별 후에 일장서를 내가 못봤으니, 부모봉양 글 공부에 겨를이 없어서 이러는가. 손가락의 피를 내어 사정으로 편지헐까. 간장(肝臟)의 썩은 눈물로 임의 화상을 그려볼까. 이화일지춘대우(梨花一枝春待雨)에 내 눈물을 뿌렸으니, 밤비 내리는 문전 애끓는 소리 비만 와도 임의 생각. 가을비에 오동잎 질 때잎만 떨어져도 님의 생각, 푸른 물 속연꽃 따는 아가씨와뽕 따는 여인네들도날보다는 좋은 팔자, 옥문 밖을 못나가니 뽕을 따고 연 캐것나. 내가 만일에 도령님을 못보고 옥중고혼이 되거더면, 무덤 근처 섯는 나무는 상사목이 될 것이요, 무덤 앞에 있는 돌은 망부석이 될 것이니, 생전사후 이 원통을 알아줄 이가 뉘 있더란 말이냐. 춘향이가 매 맞고 쑥처럼무성히 자란 봉두난발로 옥중에서 노래하는 부분이다. '햄릿하면,'to be,or not to be.that is the question.'으로 시작되는독백이 가장 유명하다.춘향가 하면이 쑥대머리가유명하다. 구구절절 가슴 아픈 춘향의 옥중 탄식은오필리아의 탄식보다 애절하다.이 장면에서 청중은 침 꿀컥 삼키며, 쥐죽은듯 숨을 죽인다. 판소리가 굽이굽이흘러가는 달빛 속 돗단배에 몸 싣고들어야 제 맛 난다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슬 젖은 별빛 아래서 들어야 제 맛 난다는 이유 여기 있다.그래야애잔한 장면이 더 살아나고, 비장미 더욱 가득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야민초의 한이 구례산동마을 산수유처럼 붉게 익어 톡톡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시련’이 끝나니, ‘재회’다.‘어사또 출두’다. 어떤 패랭이 쓴 젊은 사람이 질청으로 뛰어오며 ‘어사또 출두요’ 외치자, 동헌이 들썩들썩, 공방을 불러 재물을 단속, 신칙 사정을 불러 옥쇠를 단속, 남원 성중이 떠는구나. 각 읍 수령이 겁을 내어 탕건바람 버선발로 대숲으로 도망가고, 본관(本官)은 넋을 잃고 골방으로 들어가며, 통인은 목을 안고 날 살려라 날 살려라. 불쌍하다 관노사령 엎어지고 상투 쥐고 도망치며 난리났네. 역졸이 수령좌석을 뭉치로 쎄려부시는데, 금병(金甁) 수병(繡屛) 산수병과 대합 쟁반 술그릇 왱그렁 쟁그렁 깨어지고, 거문고 가야금 생황 세피리 젓대 북 장고가 산산히 깨어진다. 각읍 수령이 도망할제, 운봉영감은 도장 담는 주머니를 상 밑에 넣어두고 술을 먹다가 느닷없이 ‘출두야!’ 하는 바람에 상 위 수박덩이를 번쩍 들고 도망가고, 곡성 원은 겁결에 기생방으로 들어가 기생 속곳이 자기 도복(道服)인줄 알고 훌렁 뒤집어쓰니, 그 바지가랑이 사이로 곡성원님 대그빡이 쑥 나왔지. 운봉 영감 거동 보소. 한참 도망허다 봉께 말 한 마리 있는지라, 겁결에 말을 거꾸로 타고 '아이고 이 말 좀 보아라. 운봉으로는 안가고 남원으로 부두둥 부두둥 가니, 암행어사가 축지법도 하나부다.' 운봉 하인 여짜오되, '말을 거꾸로 탔사오니 바로 타시오.' '아이고 이놈아 언제 돌려타더란 말이냐? 말 모가지를 쑥 빼 똥구녕에다 쑤셔박아라!' 허둥지둥 넋이 빠진수령방백 모습 나온다. 청중은 벼슬아치들이 기겁하면 할수록, 코믹하면 할수록,즐거워한다.카타르시스를 느낀다. 어사또 출두의 기쁨 배가된다.모두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며 무릅을 탁! 치며, 희희낙락 기뻐한다.골이 깊어야 뫼가 높다.<시련>의 아품깊을수록<재회>의 기쁨은크다.이를 소설에서 극적반전(劇的反轉)이라 부른다. 춘향전의 ‘어사또 출두’야말로 고전적 극적반전의 원형이다. 결말은해피엔딩이다. 이것이 우리가듣고 또 들어도 춘향전에신물내지 않는 이유다. 춘향가는 <사랑> <이별> <시련> <재회>로 나눠,이른바 기(起) 승(乘) 전(轉) 결(結)의완벽한 구성이다. 극끝나자 관중은무대의 배우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우렁찬 박수 소리에 안숙선 명창이 무대에 세번이나다시 나와서얌전히 절하고 들어갔다.꼭 춘향이 모습 같다.오페라 '춘희(椿姬)'의 프리마돈나 보다아름답다. 안숙선 단독으로치러낸오페라인 점도 놀랍다. 오케스트라 지휘자 보다 오랜박수를 받는다. 흥겨운 마음으로 수런수런 돌아가는 사람들 머리 위 달도 밝다. 마음도 중추(仲秋)의 달처럼 밝다.춘향전은 역시고전 중의 고전이었다. Photo from the Internet: http://www.jabo.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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