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전자책· 수필

목단

김현거사 2012. 9. 26. 16:58


 

 

목단 

 

  비 개인 아침, 세모시 서걱거리는 소리가 날 것 같은 얇은 꽃잎이 목단 꽃잎이다. 형언하기 어려운 향내 지닌 꽃술이 목단 꽃술이다. 꽃잎의 결은 얇은 한지 주름을 방금 다림질한 것 같고, 꽃술의 향은 금분(金粉)에 매화향 사향을 섞은 것 같다. 목단꽃 피는 5월이면, 이 화려한 빛과 고귀한 향기로 사람을 압도하는 목단이, 푸른 잎새 너울너울 손짓하며 정원으로 나를 불러낸다. 날더러 뜰에 나와 자신의 아름답고 고귀한 자태에 감격하여, 포로가 되어, 무릅 꿇고 배례하라 한다.

 

 목단은 머리에 봉황과 용을 새긴 봉잠(鳳簪) 용잠(龍簪)을 꽃고, 금실에 비취(翡翠) 곡옥(曲玉)을 단 사슴뿔 모양의 관(冠)을 쓴 여왕이다. 허리의 과대(銙帶)에 무지개빛 요패(腰佩)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시녀에게 일산(日傘) 받치고, 어가(御駕) 호위하는 붉은 옷 별감, 조례복 입은 문신, 투구 갑옷 무장한 장수들에 둘러쌓인 여왕폐하다.

 

 그래서 화왕(花王) 목단이 나타나면, 기화요초들은 문득 빛을 잃고, 스스로 신하가 된다. 누가 순서 정한 것도 아닌데, 황실 위엄에 몸을 움츠리고, 황실 품위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푸른 빛 은은한 붓꽃은 시녀처럼 목단 발치에 엎드리고, 어린 소녀의 복사빛 볼을 한 영산홍도 둘러리 자처하고 몸을 낮춘다. 진보라빛 아름다운 꽃을 가지가 휘도록 단 자목련도 얼굴 붉히고 뜰 한 켠에 숨어버리고, 개나리 진달래 같은 속가(俗家) 미인들은 목단이 오기 전에 진작 사라져버린다. 

 

 향기 있는 꽃도 마찬가지다. 난이 맑음을 자랑하고, 오동이 격조를 자랑하고, 야래향 만리향 천리향 울금 장미가 저마다 은밀한 향을 자랑하지만, 달빛을 사향으로 버무린듯한 목단의 고귀한 향 앞에선 풀이 죽고만다. 이슬 맺힌 목단꽃 향내는 뜰을 적시고, 사람의 오관을 적신다. 그 향은 피부를 뚫고 들어가 중풍이나 혈관계 질환을 고치는 사향처럼, 귀부인이 몸에 지닐 최상급 향이다.  

 

 그래서 옛부터 화가들이 부귀목단도(富貴牧丹圖) 그렸다. 그러나 대채로 그림 값은 고가인지라, 나는 실제 목단을 침실 앞 마당에 심어놓고 구경한다. 이 목단이 5월이면 그림 보다 더 생생한 향기와 빛깔을 나에게 맘껒 제공한다. 눈으로는 생동감 있는 봉오리, 활짝 꽃잎 펼친 모습, 애처러운 낙화까지 자세히 보여주고, 코로는 바람 타고 침실로 마음대로 넘나드는 진동하는 향기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맡게 해준다.

 

 이런 목단을 보면서, 나는 천년 전 서라벌에 살았던 한 미인을 그려보기도 한다. 목단에 얽힌 고사를 남긴 선덕여왕이다. 사서에 미인이라는 기록을 남긴 계림(鷄林)의 여왕은 얼마나 고왔을까. 경국지색이라는 양귀비 같았을까. 오월(吳越)의 흥망을 좌우한 서시 같았을까. 이 여왕에게 당태종이 목단꽃 그림과 목단씨 세 되를 보냈다. 원래 당나라는 주렴계가 '애련설(愛蓮說)’에서 ‘당나라 이씨 왕조는 사람들이 심히 목단을 사랑하였다(自李唐來 世人甚愛牧丹 )’고 쓴 것에서 보듯이, 목단재배가 성하였다. 그 목단을 이웃 나라 여왕에게 선물한 것이다.

  꽃을 여인에게 보낸 남자, 당태종은 전략가였다. 그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망한 수나라를 계승한 나라의 황제다. 당연히 수나라의 복수를 염원하여, 제삼국에 꽃을 보내어, 원교근공지책(遠交近攻之策)을 꾀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측면에서 항상 삼국유사의 설화에 의문을 느낀다.

 

  여하간 나는 5월이 와서, 목단을 만나면, 천년 전 계림의 신비로운 여왕을 만난다. 여왕은 진평왕의 딸로 16년간 여왕으로 재위하였고, 그의 첫째 동생 천명공주는 김춘추의 어머니이며, 둘째 동생 선화공주가 백제 무왕의 부인이 아니던가. 꽃을 보면서 햇빛에 빤짝빤짝 빛나는 수많은 곡옥을 단 사슴뿔 모양의 금관을 쓴 여왕의 모습을 떠올린다. 얇은 한지 주름을 금방 다림질한듯 고운 목단 꽃잎 같은 여왕의 옷자락을 그려본다. 여왕이 신라의 젊은 화랑에게 던졌을 신비로운 미소를 보고, 여왕 몸에서 풍겼을 매화향 용뇌향 사향 냄새를 맡는다. 

 

 시인 영랑은 ‘찬란한 슬품의 봄’을 노래하였다. 목단이 피었다 뚝뚝 지는 모습은, 화려함의 극치에서 요절하는 미인을 생각케 하고, 미인박명(美人薄命)이란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그 5월은, 천년 전 신라 화랑이 되어, 계림의 신비로운 귀부인을 만나고 헤어진다는 사실만으로 얼마나 더 가슴 설레고 아름다운 계절인가.   

                                                                                                 (09년 5월)

       목단꽃                                                                                                      

                                                                                                                       김창현

      

 목단꽃 피는 5월이다. 비 개인 아침, 세모시 서걱거리는 소리가 날 것 같은 얇은 꽃잎이 목단 꽃잎이다. 형언하기 어려운 향내 지닌 꽃술이 목단 꽃술이다. 꽃잎의 결은 얇은 한지 주름을 방금 다림질한 것 같고, 꽃술의 향은 금분(金粉)에 매화향 용뇌향 사향을 섞은 것 같다. 화려한 꽃빛과 고귀한 향기가 사람을 압도한다.

 5월이면 이 목단이 푸른 잎새 너울너울 손짓하며 정원으로 나를 불러낸다. 날더러 뜰에 나와 자신의 아름답고 고귀한 자태에 감격하여, 포로가 되라 하고, 무릅 꿇고 배례하라 한다.

 목단은 머리에 봉황과 용을 새긴 봉잠(鳳簪) 용잠(龍簪)을 꽃고, 금실에 비취(翡翠) 곡옥(曲玉)을 단 사슴뿔 모양의 관(冠)을 쓰고, 과대(銙帶)에 무지개빛 요패(腰佩) 치렁치렁 늘어뜨린 여왕이다. 시녀에게 일산(日傘) 받치게 하고, 어가(御駕) 호위하는 붉은 옷 별감, 조례복 입은 문신, 투구 갑옷으로 무장한 장수들에 둘러쌓인 여왕폐하다.

 그래서 화왕(花王) 목단이 나타나면, 기화요초들은 문득 빛을 잃고, 스스로 신하가 된다. 누가 순서 정한 것도 아닌데, 황실 위엄에 몸을 움츠리고, 황실 품위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푸른 빛 은은한 붓꽃이 제일 먼저 시녀처럼 목단 발치에 엎드리고, 어린 소녀의 복사빛 볼을 한 영산홍도 둘러리 자처하고 몸을 낮춘다. 진보라빛 겉면과 하얀 속살을 가진 아름다운 꽃을 가지가 휘도록 단 자목련도 얼굴 붉히고 뜰 한 켠에 숨어버리고, 개나리 진달래 같은 속가(俗家) 미인들은 목단이 오기 전에 진작 사라져버린다. 

 향기 있는 꽃들도 마찬가지다. 난이 맑음을 자랑하고, 오동이 격조를 자랑하고, 야래향 만리향 천리향 울금향 장미가 저마다 은밀한 향을 자랑하지만, 달빛을 사향으로 버무린듯한 목단의 고귀한 향 앞에선 풀이 죽고만다. 이슬 맺힌 목단꽃 향내는 뜰을 적시고 사람의 오관을 적신다. 그 향은 피부를 뚫고 들어가 중풍이나 혈관계 질환을 고치는 사향처럼, 귀부인이 몸에 지닐 최상급 향인 것이다.   

 그래서 옛부터 화가들이 부귀목단도(富貴牧丹圖) 그렸다. 그러나 대채로 그림은 값이 고가라, 나는 그림 대신에 생생한 목단을 침실 앞 마당에 심어놓고 구경한다. 목단 군식(群植)은, 5월이면 살아있는 향기와 빛깔을 나에게 선사한다. 눈으로는 생동감 있는 봉오리, 활짝 꽃잎 펼친 모습, 애처러운 낙화까지 자세히 보여준다. 코로는 바람 타고 침실로 마음대로 넘나드는 진동하는 향기를 아침부터 저녁까지 보내준다. 이럴 때 나는 그림 보다 실물을 선택한 나의 안목에 내 스스로 만족해한다.

  목단을 보면 서라벌의 한 미인이 떠오른다. 사서에 미인이라는 기록이 실린 선덕여왕이다. 계림(鷄林) 여왕은 얼마나 고왔을까. 경국지색 양귀비 같았을까. 오월(吳越) 분쟁의 주인공 서시 같았을까. 이 아름다운 여왕에게 당태종은 목단꽃 그림과 목단씨 세 되를 보냈다. 주렴계가 '애련설(愛蓮說)’에서 ‘당나라 이씨 왕조는 사람들이 심히 목단을 사랑하였다(自李唐來 世人甚愛牧丹 )’고 썼으니, 당나라는 목단재배가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목단을 신라 여왕에게 선물한 것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의 설화는 좀 다르다. 당태종이 선덕여왕에게 나비가 없는 목단꽃 그림을 보내어, 후사 없음을 조롱했다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의 진위는 당시 동북아 정세에서 판단해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당시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망했다. 그 후에 당나라는 수나라 원수를 갚겠다고 절치부심하며 고구려와 팽팽히 대치했다. 당나라 이세민은 전략가였다. 그는 고구려를 치기 위해서, 당연히 신라에 대해서는 원교근공지책(遠交近攻之策)을 썼을 것이다. 그리고 선덕여왕은 진평왕의 딸로 16년간 여왕으로 재위하였다. 그의 첫째 동생 천명공주는 김춘추의 어머니이며, 둘째 동생 선화공주는 백제 무왕의 부인이다. 이세민이 훗날 삼국통일을 이룬 이런 걸출한 가문의 꽃같은 여왕을 조롱했다는 이야기는, 아마 삼척동자도 믿기 어려울 것이다. 

 여하간 5월이 오면 나는 목단을 마주 한다. 그리고 화랑이 된다. 화랑은 목단꽃 여왕에게 사모와 충성, 두 마음을 바쳤을 것이다. 여왕은 햇빛에 빤짝빤짝 빛나는 수많은 곡옥을 단 사슴뿔 모양의 금관을 썼을 것이다. 무지개빛 허리띠 치렁치렁 늘어뜨렸을 것이다. 옷자락은 목단 꽃잎처럼 얇은 한지 주름을 금방 다림질한듯 고왔을 것이다. 여왕의 몸에선 매화향 용뇌향 사향 섞은 것 같은 향내가 났을 것이다. 

 나는 여왕의 눈빛과 걸음걸이까지 생각해본다. 그가 젊은 화랑에게 던진 향기로운 목소리, 신비로운 미소까지 상상해본다. 그러고 뜰의 목단을 대하면, 나는 천년 전 사람이 된다. 아름다운 여왕의 포로가 되어 그 앞에 무릅을 끓고 배례하는 신라 화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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