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 산보기 (上)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낮은 저 무덤은'으로 시작되는 '성주풀이' 가사를 자세히 들으면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인생이 와서 영웅호걸 절세가인 되어본들 결국 낙양성 십리허 높고낮은 저 무덤으로 가는 거 아닌가? 언제 한번 망우리 공동묘지를 가보리라. 삶의 희비애락이 일장춘몽이요 허구임을 거기서 보리라. 만산홍엽 소소히 떨어지는 가을밤 청명한 달빛 아래 혼자 가보리라 다짐했었다. 그러나 정작 청량리 거쳐 구리시 다니는 55-3 버스를 탄 건 6월 어느날이다.
고개 정상 키높은 아카씨아 그늘의 아스팔트 길 따라 묘역에 들어가니, 묘원관리소 안내판에 태조 이성계가 동구릉에 자신의 산소를 정하고 돌아오다 여기서 '이것으로 오랫동안 근심을 잊게 되었노라'고 한, 망우리(忘憂里) 지명의 유래가 적혀있다. 이태조가 근심을 잊을만한 곳이라고 한 말을 믿고 그랬을 것이다. 그후 가난한 서민들이 묘지터로 보기 어려운 여기 가파른 북향 땅에 망자(亡者)를 모시기 시작하여, 지금은 망우리에 2만9천600 여 묘가 있다.
묘역에 들어가니. 수십년 된 벚나무 고목의 가지 사이로 북으로 면목동 이문동 시가지 집들이 멀리 내려다 보인다. 뻐꾸기는 뻐꾹뻐꾹 이산 저산 옮겨가며 울고,꾹꾸르 날개짓하며 산비둘기는 머리 위로 나른다. 한적한 길에 살 빼러 온 아줌마들과 하얀 보드라운 털북숭이 강아지 끌고온 귀여운 꼬마애들이 보인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나려도 나는 그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못하지. 사랑은 가도 과거는 남는 것,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마른잎은 떨어지고 마른잎은 흙이 되고 마른잎에 쌓여서 우리들 사랑은 사라진다해도.'
시인 박인환의 무덤이 나온다. 종군기자 출신으로 '명동 백작'으로 불리었다던 박인환이다. 일류양복점 라벨 붙은 외제 초크리트색 싱글에 버버리코트를 걸치고, 붉은 넥타이 커피색 양말, 검정 박쥐우산을 든 박인환. 술도 봄에는 진피즈 가을에는 하이볼 겨울에는 죠니워커를 가려 마셨다던 박인환이다. 전후 파리의 살롱에서 검은 옷에 검은 머리 하고 낮고 음울한 음색으로 샹송 '장미빛 인생'을 호소하듯 부른 쥴리엣그레꼬좋아하고, '고엽'의 이브몽탕에 심취하고, 돌아오지않는 애인 폐르킨트를 눈덮힌 노르웨이 숲속 통나무집에서 기다린 '솔베지의 노래'를 항상 불렀다는 박인환이 거기 흙 속에 누워있었다. 길가 돌에는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인생은 외롭지않고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그러나 정작 시인의 묘소 옆에 새겨진 시는 다른 시다. 그가 전후의 명동에서 최불암씨 모친이 운영하던 주점 '은성'에서 즉석에서 시를 쓰고 현인이 노래 부른 '세월이 가면' 이 아니다. 그 시는 그가 '마리서사'란 서점을 운영할 때, 서점에 찾아온 키크고 날씬한 몸매의 이지적 외모를 가진 문학소녀 이정숙에게 바친 시 아니던가. 그래서 대학 강의차 속초 다니던 시절엔, 그의 고향 인제 상동리 소양호가 보이는 길가의 박인환 시비(詩碑) 옆에 차를 세우고, 31세에 폐결핵으로 요절한 그를 생각하지 안호았던가.
박인환의 묘 근처에 화가 이중섭의 묘가 있다. 둘다 북향이지만 시인과 화가가 바로 곁이라 덜 외롭겠다. 곧이어 독립운동가 서동일 오재영 선생 묘소가 나오고, 1K 지점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니 능선 위로 올라간다. 산이 높아지자 아카시아 밤꽃 냄새가 짙어지고 사위가 조용해진다. 길가 나무벤치에 앉아서 보온병 기울여 커피 마시는 사람, 나뭇가지 당겨 오디를 따먹는 사람, 반바지 차림에 허리에 달랑 수통 하나만 차고 달리는 처녀, 꺼꾸로 걸음하여 올라가는 노인이 보인다.
능선 조금 못미친 곳에 우리 키 높이의 돌에 '독립투사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란 이름과 그가 동아일보 창간사로 쓴 '주지(主旨)를 선명하노라.'라고 새긴 글이 보인다. 장덕수 선생은 와세다대학 시절 전일본 대학생 웅변대회서 일등을 하였으며, 김성수 송진우 현상윤 최두선 신익희 김병로 백관우 김준연 등 그 시대 기린아들과 교류하며, '청춘'에 수필과 번역문을 싣고, 타고르에 대한 논문을 쓴 문학도다. 콜롬비아대학서 철학박사를 받았으며, 김활란에게 구애하여 실패하자 이화여전 교수 난석(蘭石) 박은혜와 결혼한 인물이다. 그러나 아깝다. 최근에 일본 학도병 강제동원을 독려한 친일파로 낙인되었다. 박교수와 합장(合葬)한 무덤 앞 석인(石人) 얼굴 한부분이 날라갔고, 석주(石柱)도 반쯤 쓰러져있다. '역사란 무엇인가? 결국 죽어 한 줌 흙이 될 인간이 사필귀정(事必歸正)이란 말 잊어선 않된다는 생각이 든다.
능선에 올라서니, 멀리 토평 들판 위에 하얀 띠처럼 한강이 보인다. 강 넘어 우측은 남한산성이고 좌측은 검단산이다. 가운데 미사리 들판이 펼쳐져 있다. 이태조가 망우리 고개서 이 활달한 명당의 기운을 보고는 근심을 잊을만 하다 싶었다. 여기 남향판에 죽산(竹山) 묘소부터 만해(卍海) 위창(葦滄) 호암(湖巖) 소파(小波) 송촌(松村) 묘소가 쭈욱 있다. 앞에는 한강이요 뒤는 한조각 흰구름 걸린 푸른 숲이다. 어렵던 시절에 큰인물들이 공동묘지 꼭대기에 묻힌 것은 섭섭하나, 이렇게 좌향이라도 반듯한 남향에 시야가 넓은 것이 다행이다.
죽산 조봉암은 1959년 진보당 사건으로 자유당의 국가보안법에 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정치가다. 무덤 앞 돌에는, '우리가 독립운동 할 때 돈이 준비되어서 한 것도 아니고,가능성이 있어서 한 것도 아니다. 옳은 일이기에 또 아니하고서는 않될 일이기에 목슴을 걸고 싸웠지 아니하냐?' 는 어록이 새겨져 있다. 죽산은 3.1운동에 참여했고, 상해서 일경에 체포되어 7년을 구형 받았으며, 1925년 조선공산당을 조직했으나, '노동자계급의 독재나 자본가계급의 전제를 반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공산당과 결별한 후, 전향한 분이다. 제헌의원과 초대 농림부장관,국회부의장을 하다가 진보세력을 규합, 두번 대통령에 출마한 것이 화근이었다. 진보당 사건으로 검거되어 정적들에 의해 제거된 인물이다. 그러나 현재 서울에서는 매년 그의 추모회가 열리고 있고, 북한에선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능'에 김규식 조소앙 홍명희와 나란히 죽산의 허묘(墟墓)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 그 다음 만해스님 묘소에는 서대문형무소에서 일본 검사의 심문에 대한 답변으로 제출한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한귀절이 새겨져 있다.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않으려는 것은 인류가 공통으로 가진 본성으로서, 이같은 본성은 남이 꺽을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스스로 자기 민족의 자존성을 억제하려 하여도 되지않는 것이다. 만해는 대쪽같은 절개를 지킨 선지식(善知識)이다. 육당(六堂) 최남선과의 일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3.1만세 사건 이후 변절한 육당이 중추원 참의 관직을 받았다. 스님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마음으로 이미 절교를 선언했다. 어느날 육당이 길에서 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그를 보고도 못본체하고 빨리 걸어갔다. 육당이 따라와 앞을 가로막아서며 인사를 청했다. '만해선생 오랜만입니다' 그러자 스님이 물었다. '당신 누구시오?' '나 육당 아닙니까?' 스님이 또한번 물었다. '육당이 누구시오?' '최남선 입니다.잊으셨습니까?' 그러자 스님은 외면하면서 '내가 아는 최남선은 벌써 죽어서 장송(葬送)했오.' 뒤도 돌아보지않고 가버렸다 한다. 친구였던 화가 일주(一洲) 김진우와의 일화도 있다. 스님은 일주가 배정자 집에 기숙하며 그림을 그린다는 말을 듣고 그 집을 찾아갔다. 배정자가 나와 반가히 맞았으나 스님은 아무 대꾸없이 따라 들어갔다. 일주가 정말 기숙하는지를 기웃기웃 살폈다. 배정자는 이또 히로부미의 양녀이자 정부(情婦)였다. 고종황제를 비롯한 이완용 등 대신을 홀린 고급창녀다. 일주가 배정자를 시켜 상을 차려와 술을 따르자, 스님은 일주를 물끄럼히 보고있다가 술상을 뻔쩍 들어 일주에게 집어던졌다. 그리고 아무 말없이 그 집을 나왔다. 그후 스님이 별세하자, 일주는 통곡하며 끝까지 호상하여 누구보다도 스님의 죽음을 슬퍼하였다고 한다.
만해스님 묘소는 세월에 풍화된 삼단 시멘트 계단 위에 부인(夫人) 유재우(兪在右)님 묘소와 나란히 있다. 초라하지만 이 정도나마 묘소를 가꾼 것은, 40여년 전에 처음으로 당시 풍전상가에 있던 대학생불교연합회가 망우리 귀퉁이에 있던 스님의 묘소에 관심둔 덕택이다. 당시 불교신문에 근무하던 내가 만해스님 망우리 묘소를 탐방하고온 대학생들 이야기를 기사화하던 기억이 새롭다. 스님 묘소 앞에서 한가지 섭섭한건 스님은 시인인데, 스님의 묘소 앞에 시비(詩碑)가 없음이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 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얼마나 선사다운 깊고 아름답던 시였던가.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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