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 풍경과 글

왕유/사슴울타리

김현거사 2012. 2. 13. 20:23

중국화가 오금목의 '상산채지도' 섬서성 남전산의 장관.

 

 

사슴 울타리(鹿柴) / 왕유


空山不見人(공산불견인)
但聞人語響(단문인어향)
返景入深林(반경입심림)
復照靑苔上(부조청태상)


빈 산에 사람은 볼 수 없는데
어디선가 들리는 사람의 소리
석양빛 깊은 숲에 들어와
다시 푸른 이끼 위에 비치네.

       
<해설>

녹채(鹿柴)는 《망천집》왕유의 시 가운데 가장 많이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시다.

왕유가 섬서성 장안(長安) 동남쪽 남전현(藍田縣) 남전산(종남산) 기슭 남곡천(藍谷川)이 흐르는 곳에 망천장(輞川莊)이란 별장을 마련하여 은거하게 된 것은, 1등으로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현종(玄宗) 황제의 눈에 벗어나 제주(濟州)에 귀양살이한 벼슬길에서의 실의(失意) 때문이다.
왕유는 자신을 후원해 준 장구령이 간신인 이임보에게 밀려서 파면당하는 일을 보면서, 부귀공명의 덧없음을 깨닫고 마음의 안식(安息)을 찾아서 불교의 참선 수행에 깊게 심취하였다. 

《구당서》에 의하면 “왕유는 망천 계곡의 어구에 있는 송지문(宋之問)의 남전별장을 샀다. 망천의 물이 집 둘레를 감싸며 흘렀고, 따로 물을 끌어 대나무 골, 꽃 언덕을 축조하였다. 함께 수도하는 친구 배적(裵迪)과 더불어 배를 띄워 왕래하고, 거문고 줄을 타고 시를 지으며 종일토록 읊조리고 노래하였다. 이렇게 하여 망천계곡에서 경치가 뛰어난 20경(景)을 택하여 5언절구로 각각 20수를 읊어 총 40수 의 시를 모아서 《망천집》이라 이름하였다. 조정에서 파하고 돌아오면 향을 피우고 홀로 앉아 참선독경을 일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송(宋)나라 소동파(蘇東坡)는 왕유의 시에 대하여 평하기를 “시 가운데 그림이 있고, 그림 가운데 시가 있다”고 하였다. 시론(詩論)에서 최고의 품격으로 삼는 시화일치론(詩畵一致論)이 여기서 비롯하였다.

왕유는 또 그림도 잘 그려, 망천장 벽에 망천계곡의 승경 20경을 그려 놓았다고 한다. 이것이 유명한 왕유의〈망천도〉이다. 왕유가 산수화, 문인 남종화의 시조가 된 그림이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명(明)나라 시인이며 문학평론가로 유명한 이동양(李東陽)은 성당(盛唐)의 시풍을 추구하는 당시(唐詩) 부흥운동을 부르짖었는데, “왕유의 시는 담백한가 하면 더욱 짙고, 가까운가 하면 더욱 멀구나”라고 평하였다.

청(淸)나라 황배방(黃培芳)은 왕유의 시를 평하기를 “한가로운 정경은 속세의 먼지와 소음에 찌들어 있는 자들이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는가? 오직 평정한 마음에서만이 경물의 묘사가 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청(淸)나라 시인으로 신운설(神韻說)이란 시론으로 청나라 문단은 물론 우리나라 실학 북학파(北學派: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박지원)의 시에도 큰 영향을 준 왕사정(王士禎, 王士?)은 왕유의 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송(宋)의 엄우(嚴羽)는 시선일치(詩禪一致)를 주장하였으나 왕유와 배적의 망천(輞川) 절구(絶句)에는 글자마다 선(禪)에 들어가 있다”

왕사정의 신운설은 시의 풍격에 있어서 함축과 자연, 충담(沖澹), 묘오(妙悟)를 신운(神韻: 신비롭고 고상한 운치)으로 삼고 있는데, 왕유의 시를 으뜸으로 삼았다. 이른바 언어의 표현은 다했어도 그 뜻은 다함이 없고 여정(餘情)이 무궁한 맛이 남아 있는 것을 의미하는 언외지미(言外之味)와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된 물아일치의 경지이다.

녹채란 사슴을 키우는 울타리를 뜻한다. 아름다운 사슴동산이다. 녹야원(鹿野苑)이다.

《당시전주(唐詩箋注)》에는 “‘인적이 없다(不見人)’와 ‘사람의 말소리가 들린다(但聞人語響)’라고 한 것은 숲이 깊기 때문이다. 숲이 깊어 햇볕이 덜 들면 이끼가 자라기 쉽다. 저녁에 되비치는 빛이 스며들고 빈 산은 고요하니 진실로 사슴이 터전을 삼기 알맞은 곳이다. 시가 매우 섬세하다”라고 해설하고 있다.

이 시에서 ‘텅 빈 산(空山)’과 ‘석양볕(返景)’ 그리고 ‘푸른 이끼(靑苔)’의 시어는 절묘하다. 불교에서 무었을 깨달음이라 하는가? 깨달음의 내용이 무었인가? 그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공(空)이다. 공 사상은 대승불교의 기본이 되는 핵심사상이다.

우주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하는 사물이 자기를 형성하는 고유한 실체가 없이 여러 가지 요소들이 인연따라 화합하여 일시적으로 모습을 이루고 있을 뿐 영원히 존재하는 것은 없다는 존재의 실상(實像)을 밝힌 진리이다. 우리의 마음도 실체가 없다. 자성(自性)이 없다. 무자성(無自性) 즉, 공이다. 이 도리를 아는 것이 깨달음이고, 참선 수행을 통해 깨달으려는 경계가 공의 세계이다.

1구에서 공산(空山)이 있는데 사람이 보지 못한다(不見人)고 했다. 공의 도리를 보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텐데, 그러나 2구에서는 어디선가 도란도란 사람소리가 들린다. 진리를 먼저 알고 있는 성문(聲聞) 선지식의 소리가 들린다. 마치 《십우도(十牛圖)》에서 잃어버린 소를 찾아 나서는데, 소의 발자국을 보았고(見跡), 깊은 산속에서 소가 우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1구와 2구의 ‘견(見)’과 ‘문(聞)’은 보는 것과 듣는 시청각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견성오도(見聲悟道) 즉, 사물을 보고,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는 세계로 이끌고 있다.

3구에서는 내 마음의 깊은 단계인 제8아뢰야식(深林)에 반야지혜(空觀)가 깊숙이 들어와(入) 회광반조(廻光返照)하는 것을 저녁 석양빛이 깊은 숲속에 들어온 것으로 표현하였다.
결구(結句)에서 “다시금 푸른 이끼 위에 비추네(復照靑苔上)”는 압권이다.

‘푸른 이끼’는 왕유가 깨달은 인생의 모습이다. 왕유는 자연 속 이끼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천재 왕유의 위대한 통찰력이다.
이끼는 남들이 모두 싫어하는 낮은 곳, 음지 습지를 좋아한다. 이끼는 큰 고목나무나 바위 틈에 붙어서 끝까지 죽지 않고 강한 생명력으로 살아 남는다. 이끼는 혼자 살 수 없다. 여럿이 모여 군생(群生)한다. 연꽃처럼 고원(高原)에서는 자랄 수가 없다.

불교 경전에서는 연꽃을 더러운 연못 속에서 자라지만 그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꽃을 곱게 피워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보살에 비유하고 있다. 더러운 이 세상 사바세계에 살면서도 그 더러움에 오염되지 않는 보살이 불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왕유는 온갖 난관과 고통을 감내하고 저 낮은 습지, 척박한 바위와 깊은 늪 속에서도 푸른 모습으로 무한한 생명력으로 생존 본능이 강한 성질을 가지고 부드러운 융단처럼 곱고 평화롭게 자라고 있는 하찮은 이끼를 통해서 민초(民草) 중생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푸른 이끼는 이 세상의 주인공으로 살아가고 있는 민초 중생을 상징한다. 왕유의 위대한 발견이다. 왕유는 이끼를 통해서 위대한 중생을 발견한 것이고, 또 중생을 통해서 부처를 발견한 것이다.

엄우(嚴羽)가 말한 묘오(妙悟)의 경지이고, 왕사정이 말한 신운(神韻)의 경지이다. 오언절구 20자 글자 하나하나가 절묘하고, 절제된 함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언외지미(言外之味)의 극치를 보여주는 만금(萬金)의 시이다. 가히 시불(詩佛)이라 칭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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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 김형중 법사의 '명품선시 100선'을 연재한다. 김형중 박사는

중국 연변대학교에서 휴정의 선시를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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