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눈 내리는 아침

김현거사 2011. 1. 19. 11:13

 
 
 
눈 내리는 아침|隨筆
김현거사 | 등급변경 | 조회 56 |추천 0 |2010.01.04. 19:49 http://cafe.daum.net/namgangmunoo/5gNC/276 

2010년 1월 4일 새벽은 천지에 눈이 가득하다.

눈 쌓이니 푸른 소나무와 매화나무 나목을 비치는 어둠 속 정원 가로등이 문득 더 멋있다.불빛이 은밀한 설원에 비친다.나리는 눈발 속에 비둘기 몇마리 스윙을 추듯 부드럽게 허공 오르내리며 비행한다.새처럼 아무도 없는 눈덮힌 산 속을 나도 한없이 헤매다니고 싶다.한자 이상 내린 눈은 소나무 푸른 잎에 소담히 쌓였다가 어딘가서 분 실바람에 흔들려 두두둑 떨어진다.흩날리는 눈발도 아름답다.설국의 정취가 있다.지난 봄 깔끔한 향기 그리운 매화도 꽃 대신 소복히 눈을 실었다.雪花라는 말이 생각난다.보라빛 아름답던 자미화,검붉고 화려하던 잠미꽃 피던 넝쿨에도 하얀 눈 쌓였다.키 작은 앵두나무 오가피나무 역시 눈을 이고있다.   

봄철의 나무는 향기롭고 아름다운 꽃 피우는 점에서 사람보다 더 시인이다.겨울나무 역시 눈 덮히면 먼 동토의 고요한 순백의 시를 불러온다.나는 나무를 말없는 시인으로 생각한다.지난 봄 여름 가을 나는 이들 시인들과 가까이 지내왔다.      

 

사람들은 우리를 이제 <地空거사라>라 부른다.65세 이상은 지하철이 공짜기 때문이다.막이 내려진 무대를 쳐다보는 배우처럼 은퇴한 노인 마음은 좀 쓸쓸한 구석이 있다.나이 들어 정원의 나무와 가까운 친구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사람은 대개 이해득실로 움직이나 다행히 나무는 그렇지않다.이것이 나무와 더 가까운 이유이다.나무에게 배운다.모든 것은 때가 되면 버려야하고,떠날 줄 알아야 하고,이별에 담담할 줄 알아야 한다.생각하면 무엇하나.<花舞十日紅이고 달도 차면 기우나니> 아닌가.그저 젊은이가 헌옷 속에 옥이 든 것을 너무 모르는 아쉬움은 있다. 

 

차그운 베란다에서 한참 눈구경 하다가,목욕탕에 가서 뜨거운 욕조에서 몸을 풀었다.땀도 흘리고,머리도 감고,수건으로 전신 맛사지 하니 정신이 맑아져온다.세상사란 무엇이던가.명나라를 건설한 주원장을 생각해본다.그는 일자무식에서 천자가 되었으나,나중에 자신을 도운 공신들이 비리에 연루되자 모두 죽여야 했다.인간적 의리와 국가적 질서 유지를 위한 갈등이 컸다.마지막 그가 의지했던 왕후마져 그의 냉혹함을 탄식하며 단식 끝에 사별하고 말았다.그 뒤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구중궁궐 화려한 전각 속에 머리 허옇고 얼굴에 주름 가득한 초라한 노인만 남았던 것이다.그는 무엇을 위해 살았던가.인생의 웅지란 무엇이던가.모든 인간의 헛된 노력과 노인의 서글픔과 외로움이 밝은 거울인양 비쳐진다.서산대사는 이렇게 읊었다.<눈 덮힌 광야를 가는 이여(踏雪野中去), 아무쪼록 어지럽게 걷지마라(不須胡亂行), 오늘 그대가 남긴 발자국이(今日我行蹟), 드디어 뒤따라 오는 사람들의 이정표가 되리니(遂作後人程)>. 

다행이다 싶은 것은 나는 애초에 주원장같이 웅혼한 권세도 없었거니와 그로 인한 허망함도 없는 것이다.

 

목욕 후에 붓 들고 반야심경을 써본다.<色卽是空 空卽是色.> 예서체의 천하기봉,추사의 반야심경 집자(集字)에서 때로 난초잎과 칼날처럼 예리하고,고목 등걸같이 기괴한 필획의 묘미를 느껴봄도 좋고,<존재가 空이요,空이 곧 존재>라는 구절,<물질인 색온(色蘊), 감각인 수온(受蘊), 지각 표상 작용인 상온(想蘊), 의지 등 마음작용인 행온(行蘊), 마음의 총체인 식온(識蘊),오온(五蘊) 모두가 空>이라는 구절도 좋다.그저 고요한 묵향도 좋다.

 

'할아버지 한자 이렇게 많이 쓰시면 힘들지 않으셔요?'크리스마스 휴가로 미국서 온 딸이 데려온 큰손자가 글쓰는 방으로 살며시 들어와 묻는다.큰놈은 자기도 달력 뒷면에 뭔가 열심히 그림 그리고,작은 놈은 거실에서 드르륵 말을 탄다.모처럼 절집 같이 조용한 곳을 웃고 울어 난장판 만든다.아이들에게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백조의 호수 이야길 들려준다.초롱초롱한 눈빛,보드랍고 앙징스런 손,귀여운 건네는 말 한마듸 한마듸가 노인에겐 행복이다.

눈은 하루종일 내릴 모양이다.천하를 만건곤(滿乾坤) 하려는 듯 하다.눈도 축복이거니와 아이들도 축복이다.

                                                                                              (2010년 1월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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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망초 10.01.06. 17:46
개천변을 한바쿠 돌고 오시더니 글감 얻어 오셨네요.유감스럽게도 저는 로맨틱한, 마음 따뜻한 짝을 못만나 아파트 한바쿠 못했습니다.늘상 말해 왔지만 박식한 거사님! 역시나 입니다. 기상청 관측사상 최대의 눈 폭탄으로 서울에 이렇게 눈이 많이 내리기는 처음이라고 하는데 집에서 그냥 보내버린 것이 억울해서, 앵통해서 어쩌지요? 초롱초롱한 손주들과 즐거운 시간 많이 가지십시오.
 
 
봉화 10.01.04. 23:23
물망초님 왜이러시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눈을 데리고 놀면 되는데 꼭 누구랑이 아니어도 로맨틱 할수있답니다 거사님의 눈의 노래를 들어보세요 너무도 황홀하답니다 한바쿠 두바쿠 돌아다니셔요 거사님의 눈 이야기 잘듣고 갑니다 봉화
 
 
아송 10.01.05. 11:37
아 눈같이 맑고 흰 님의 가슴을 활짝 열고 바라 봅니다. 온통 눈밭에서 마구 뒹구는 강아지같이 그대의 글 속에서 나 또한 뒹굴었답니다.
 
 
이영성 10.01.05. 12:43
동재 친구야. 년초에 읽는 자네의 글이 좋구나. 눈길을 어지럽게 걷지 말라는 서산대사의 말씀 잘 배웠네.
 
 
농암 10.01.07. 04:49
연초 천지사위를 뒤덮은 백설을 보시면서 지공거사가 되시기까지 살아오신 인생의 족적을 눈밭위에 그리시면서 조용히 관조하시는 거사님의 단아하고 격조높은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천성산 10.01.09. 20:07
새해 아침에 서설을 보면서 좋은 글 쓰셨습니다. 내 살아온 길을 돌아보며 흐트러진 발자국을 바라보면서 사색에 잠기게 하였습니다.
 
 
초영 10.01.16. 22:11
(손계숙) 주옥같이 향기나는 수필에 기대어, 잠시 휴(休)해 봅니다.
103년만의 폭설이 퍼붓던 그날! 강아지도 좋다고 눈 밭에서 뒹굴고, 사위는 온통 눈빛으로 물들어 갔지요.
그날! 귀한 손주들의 재롱도 맘껏 누리셨네요? 김현선배님! 무척 행복하셨죠?
<주먹만한 눈>이 펑펑! 행복도 펑펑! 만건곤 하려는듯 눈의 축복과 가정의 축복이 가득한 좋은 수필! 역시 감동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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