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호반에서 만난 사람

김현거사 2022. 2. 17. 01:33

호반에서 만난 사람

 

오늘 조현건, 성증 친구와 세곡동에서 바둑 두고 막걸리 한 잔 하면서 남해 송정 해수욕장 놀러 갔던 이야기를 했다. 이제 나이 팔십 바라보는 시점에서 증이 아니면 누구하고 무지개 같이 아름다운 추억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때 증이는 상봉동에서 기타 학원을 하고 있었다. 마침 사범학교 교생 실습 나온 여선생들이 있었다. 그때사 하늘에 뜨가는 흰구름만 봐도 맘이 설레던 때다. 방학 중인 남자쪽은 여선생들과의 데이트가 은근히 반가운 소식이다. 서로 이야기가 잘 되어 노량에 가서 배를 전세 내어 남해 상주로 갔다. 모든 비용은 김영도 병원장이 부담해주셨다. 그분은 음악을 좋아했고 증이와 친했다.

이쪽은 해군사관학교 제복을 입은 발이, 그리고 성증, 강호전과 고대생인 걸이와 나고, 그쪽도 숫자를 맞추었다. 그런데 중앙로터리버스 터미널에 그들이 나타났을 때, 처음에 나는 좀 실망했다. 젊은 때는 얼굴부터 본다. 얼굴도 옷차림도 평범한 것 같고, 몇은 평범 이하이던 것 같다. 그땐 남자 대학생과 사관생도가 저울 추가 좀 무겁던 시절이다. 좌우지간 노량에서 배를 타자 바다는 소금 냄새를 풍겼고 갯바람은 싱그럽게 뱃전을 때렸다. 그런데 그때 내 눈이 한 여선생에게 집중되었다. 솔직히 그는 미모가 아니었고 날씬한 몸매도 아니었다. 그러나 어딘가 통실통실한 몸매가 귀여웠고, 안경을 쓰고 있었는데, 눈빛이 지적이었다. 내가 닦아가서 말을 걸자 상냥하게 대꾸하여  둘 다 기존에 사귀는 사람이 없어 그랬던지 둘은 번갯불에 콩 구워 먹는 식으로 정이 들고 말았다. 이성과 처음 몇 마디 대화가 오가자, 금방 친해지고 정이 들었다. 청춘이란 그런 것인가. 두 사람은 배가 남해에 닿기도 전에 서로 무언가 약속이라도 한듯한 사이가 되었고, 서로 전기 같은 것이 통하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상주 해수욕장에 닿자, 뒤에 금산이 높이 솟아있고, 울창한 송림 앞에 넓은 백사장이 펼쳐져 있었다. 좌청룡 우백호로 산이 바다를 둘러싸고 있고, 물은 호수처럼 잔잔하고, 정면에 있는 섬은 아담했다. 우리는 먼저 파트너를 정한 후 탁구도 치고, 백사장에서 조개도 잡았다. 저녁을 먹고 나선 한 사람씩 짝을 지어 백사장 이쪽저쪽으로 적당한 간격을 두고 흩어졌다. 날이 어둡자, 바다 위엔 달이 떴고, 나는 이희영 선생과 따뜻한 모래톱에 나란히 앉아, 푸른 파도 위로 끝없이 밀려오는 하얀 은파를 바라보고 있었다. 끝없이 밀려오는 건 파도와 은파만이 아니었다. 가슴속의 감정도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닐 세다카의 '그대는 나의 모든 것(You Mean Everything To Me)'이란 노랠 불렀다. '당신은 내 외로운 기도에 대한 대답입니다(You are the answer to my lonely prayer). 당신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천사입니다.(You are an angel from above). 당신이 놀라운 사랑으로 제게 오기 전까지는 나는 무척 외로웠습니다.(I was so lonely till you came to me With the wonder of your love). 

 희영이는 김하정의 '호반에서 만난 사람'을 불렀다. '파란 물이 잔잔한 호숫가의 어느 날.사랑이 싹트면서 꿈이 시작되던 날. 처음 만난 그 순간 불타오른 사랑은, 슬픔과 괴로움을 나에게 안겨줬네' 희영이의 노래는 어떤 편이냐 하면, 부드러운 바이브렛이 김하정 같았다. 아니 오히려 김하정 보다 더 고왔다. 파도 때문에? 은파 때문에? 나는 희영이 노래에 완전히 반해버렸다. 그래 그 밤이 새기 전에 나는 그에게 상처 입은 첫사랑 이야기, 친구와 동반 자살하기 위해 군에 입대한 이야기, 제대 후 남해와 욕지도를 2년간 헤맨 이야기, 세 가구가 사는 작은 섬 '풀이 섬'과 거기 울창한 동백숲에 살던 처녀 이야기를 다 털어놓았다. 희영이도 자기 집 내력을 다 털어놓았다. 집이 거제도 장승포인 것, 아버지는 승마를 하셨고, 어머니는 곰장어를 즐겼고, 무화과나무 낮은 울타리 너머 지심도가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했다. 우리는 상대에게 서로의 모든 걸 완전히 털어놓으므로서 무언의 약속을 했다.

나는 그에게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이란 소설을 읽어봤느냐고 물어봤고, 그는 읽었다고 대답했다. 그는 나처럼 문학을 좋아했다. '첫사랑'의 여주인공 '아샤'처럼 예민하고 정열적이었다. 둘은 완전히 코드가 일치했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완전히 영혼이 일치된 한 처녀와 밤을 새웠다. 이튿날 보트 옆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그때 희영이는 내 신발을 신고 사진을 찍었다. 내 신발 안에 자기 몸을 싣고 싶다는 표시였다.

그해 여름 방학이 끝나 서울 올라올 때였다. 기차는 진주서 서울까지 12 시간 걸린다. 그 12 시간 내내 눈앞에 희영이 얼굴만 보였다. 귀에 희영이 목소리만 들렸다. 편지를 보내면 즉시 답장이 왔다. 우리는 서로 경쟁하듯 편지를 주고받았다. 사흘이 멀다 하고 나는 학교 우체함 근처를 서성거렸다. 그러다 결혼 약속을 하려고 추석 전에 진주에 내려갔다. 희영이는 버들잎이 노랗게 물든 신안동 강변에서 어머니가 반대한다는 이야길 했다. 군의관 청년과 결혼하지 않으면 모녀관계를 끊겠다는 말도 전했다. '우리가 우연히 만나고 헤어지는 그런 사람일 수 없다'라고 나는 강변했다. 선택을 기다리겠다는 말을 하고 서울로 올라왔고, 그후 어느 날 소포를 받았다. 그 속에는 그동안 내가 보낸 편지 묶음과 간단한 메모 한 장이 들어있었다. '낯선 도시 아스팔트 위에 외로이 서있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습니다. 현이 보낸 편지 모두 동봉합니다. 희영이와의 만남은 남해의 추억으로 접어주세요. 안녕!'

지금도 김하정의 '호반에서 만난 사람'이란 노랠 들으면 그 해 여름 상주 해수욕장과 희영이의 목소리가 떠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