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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교산전투(光敎山戰鬪)

김현거사 2022. 2. 12. 12:11

광교산전투(光敎山戰鬪)

 

어제는 행복한 날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동네 옆에 광교산(光敎山)이란 산이 있다. 이 산은 높이 582m로 경기도의 진산(鎭山)이자, 남으로는 수원 시내를 관통하는 수원천의 발원지이다. 동으로 흐른 물은 수지와 분당을 거쳐 서울 탄천의 발원지가 된다. 산 좋아하는 사람은 양재동 청계산(618m)에서 시작하여 우담산(425m) 바라산(428m) 백운산(564m)을 거쳐 광교산 형제봉에 이르는 종주산행을 즐기는 곳이기도 하다.

거기 광교산 문화포럼(대표 안강현)에 갔다가 향토사를 연구하는 몇 분의 학자들을 만났다. 나는 수지로 이사온지 10여 년 되고, 그동안 몇 번 광교산 형제봉을 오르긴 했지만, 산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게 없다. 928년 왕건이 후백제의 견훤을 정벌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 산 행궁에 머물면서 군사들 노고를 치하하고 있다가 이 산에서 광채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광경을 보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주는 산이라 하여 산 이름을 친히 ‘광교(光敎)’라고 하였다는 것, 또 창성사(彰聖寺)를 비롯 89개 처에 암자가 있었다는 것, 또 노송이 많아 거기 수북이 쌓인 눈을 예부터‘광교 적설(光敎積雪)’이라 하여 ‘수원 8경’ 중 으뜸으로 꼽았다는 것만 알고 있다. 나는 매번 등산하면서 비로봉 근처를 지날 때 '김준용(金俊龍) 장군 전적비 70m 등산로 없음'이라고 적힌 안내판을 보았지만, 그게 6.25 동란 때 어떤 장군 전적 안내판인 줄 생각하여 가보진 않고 그냥 지나치기만 했다.

그런데 이날 광교산 포럼에서 김준용 장군의 광교산전투(光敎山戰鬪) 이야기를 듣고 큰 깨우침을 얻었다. 광교산 전투는 교과서를 다시 고쳐 써야 할 빛나는 전투였고, 광교산은 병자호란 중 조선이 거둔 가장 찬란한 전승지였다. 우리는 흔히 병자호란 하면 1637년 인조가 지금 송파 부근에 있던 전도(三田渡)에서 소현세자와 3 정승과 6 판서를 거느리고 진흙밭을 100보가량 걸어서 9층 단에 앉아있던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한 ‘삼전도의 굴욕’을 먼저 생각한다. 그 이유는 그동안 우리는 중국을 지배한 청의 위세가 두려워, 청 태조 누루하치의 사위이자, 청 태종 황 타이지의 매부인 청나라 최고 전략가, 청나라 제일 명장 양 고리(楊古利)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청의 실록에 의하면, 당시 양 고리는 붉은 갑옷을 입고 황금 가면을 쓰고 청군을 진두지휘했으며, 그가 전사하자 청나라 2대 황제 청 태종 황 타이지(皇太極)는 매형의 죽음을 애도하여 만(卍) 자와 수(壽) 자가 새겨진 황제의 비단 황룡포를 덮어 염(殮)을 하고, 사흘 밤낮을 울며 식음을 전폐하였으며, 상여가 돌아오자 교외까지 나가 맞았고, 친히 제물을 올려 곡하고, 태조 누루하치의 릉인 복릉(福陵) 옆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한편 양 고리를 사살한 김준용 장군은 선조 41년(1608)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전라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군사를 이끌고 용인의 광교산에서 중국 청나라 군대를 무찌르는 공을 세웠으며, 이후 지방관과 병마절도사를 지냈고 죽은 후에는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암반에 새긴 <忠襄公 김준용 戰勝地> 

당시 청나라 전신(前身)인 후금(後金)은 어떤 나라였던가. 나중에 중국 강역 전체를 집어삼키고 3백 년간 지배한 청나라는 원래 궁술이 뛰어나고 용맹하기 이를 데 없는 타고난 전사들로서 우리와는 형제지국이었다. 조선은 이미 1439년 세종 때 윤관이 그들과 타협하여 6진을 개척한 적 있으니, 그때는 세력 미약하던 여진족 형 노릇 했던 셈이다. 그런데 후금은 당시 만주와 몽골 대부분을 차지하여 세력이 비대해지자, 1636년 1월 명나라 영토 베이징(北京)을 공략하면서 우리에게 금과 은을 위시하여 말과 정병(正兵) 3만 명을 요구했고, 이제까지의 兄弟之義를 君臣之義로 고치자고 요구했다. 이에 조정은 발칵 뒤집혀 후금의 사신을 죽이고 싸우자는 의견이 속출했고, 후금의 사신은 이를 알고 본국으로 도망쳤다. 

그 후 1636년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정하고, 우리나라에게 황 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에 참석하라고 요구했고, 거기 참석한 우리나라 사신은 신하로서의 예를 거부했다. 그러자 황 타이지는 국서(國書)를 보내 왕자와 척화론자를 압송하여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으로 침략하겠다고 협박했다. 당시 청군 병력은 청병(淸兵) 7만 8천, 한병(漢兵) 2만, 몽골병 3만으로, 대략 12만 8천이었다. 그해 12월 청군이 자랑하는 팔기군(八旗軍)이 압록강을 건넜으니, 전략적으로 명나라와 전투가 벌어질 때 친명배금(親明背金) 사상을 가진 조선이 후방을 칠 것을 염려해서였다. 이렇게 병자호란은 일어났고, 전 국토가 말발굽에 유린되었으나 광교산 전투만은 유일하게 빛난 승리로 끝난 전투이다.

이날 포럼에는 경희대 진용옥 명예교수, 광교산 전투의 개괄한 임종삼 오산학연구소 위원, 화성지역학연구소 정찬모 소장, 용인시청 학예연구사 이서현 박사 등, 향토사를 조명하는 분들이 모였는데, 특기할 사항은 4백여 년 전 여기 광교산에서 청 태조 누루하치의 사위인 명장 양 고리(楊古利)를 사살한 김준용(金俊龍) 장군의 후손 김영수 원주김씨충양공파(忠襄公派) 회장이 참석했다.  (수필가 김창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