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고향이라면 뻐꾹새 우는 앞산과 부엉부엉 밤 부엉이가 우는 뒷산 이야길 하지만, 나의 살던 고향은 서울 하고도 중심지인 중구 명동 2가 95번지라 나에겐 시골 추억은 없고, 대신 명동에 대한 추억만 남아있다. 나는 지금 미도파 백화점 길 건너편 2층 적산가옥 다다미 방에서 고고성을 울렸으니, 그 일대는 1950년대 60년대 戰後 서울을 대표하는 '문화의 거리'였다. 유명한 작가와 배우, 가수의 아지트였고, 오후 3시 다방에는 원고를 청탁하는 잡지사, 신문사에서 오는 전화로 시끌벅적했다. 낮에는 다방, 밤에는 대폿집을 찾아온 예술인 중에 '명동백작'이라 불렸던 소설가 이봉구, '목마와 숙녀'를 쓴 박인환, '풀'과 '푸른 하늘을' 등을 쓴 김수영, 쉬지 않고 담배를 피워대며 허무를 노래했던 공초 오상순, 가곡 '보리밭'의 작곡가 윤용하, 수필집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를 쓴 전혜린 등이 왔다 갔다 했다. 거기 명동파출소 건너편 탤런트 최불암 모친이 운영하던 빈대떡집 '은성'에는 1956년 봄 깨진 유리창 안에서 시인 박인환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세월이 가면'이란 시를 썼고, 그때 옆에 있던 작곡가 이진섭이 즉석에서 곡을 완성하고, 근처에서 술을 마시던 현인을 불러와서 노래를 부른 일화가 유명하다.
나는 1948년 생이라 이분들과는 30년 터울이지만, 당시 명동 바닥은 나의 놀이터 였다. 덕수와 남산 국민학교 동창들과 지금은 신세계 백화점이 된 당시 동아백화점 분수에 들어가 파출소 아저씨 눈을 피해 텀벙거리고 놀았고, 분수대 안에 있던 붕어 미꾸라지 물방개를 잡다가 호루라기 소리가 나면 꽁무니가 빠지라 집으로 도망가곤 했다. 바로 앞 중앙우체국 건물 앞에 쭈그리고 앉아 새 파는 아저씨가 있었다. 새장 안에 십자매와 눈이 큰 문조가 있었고, 내가 아저씨에게 알도 낳느냐고 물어본 후, 십자매를 사고 싶어 엄마한테 20원 달라고 졸라서, 종이 봉지에 십자매 한 쌍을 넣고서 기쁨에 젖어 달려온 적 있다. 남산에는 약수터가 세 개 있어 주전자 들고 가 약수를 떠 오곤 했고, 명동성당은 언덕길이 가팔라 올라가면 구름이 조용한 성당 위로 스쳐가는 모습이 성당이 나한테 달려드는 것 같았다. 신부님이 날 귀여워해 주시고, 몰래 훔쳐본 수녀님은 아름답다고 느꼈던 기억이 남아있다. 집 건너편 미도파 백화점은 설탕 어름 과자가 나를 유혹했고, 그 옆 지금 롯데백화점 자리 국립도서관에 어린이 도서관이 있었다. 거길 책 보러 자주 드나든 영향으로 이화 여중고 다닐 때 '학원' 잡지에 자주 시를 실었고, 학원 표지 모델로 나온 적 있다.
명동 우리 집은 2층짜리 적산가옥인데, 6.25 이후 아버지가 나고야에 계시는 바람에 집과 사무실과 공장 205평을 어머니가 관리했다. 작은 땅이지만 마당에 봉숭아와 나팔꽃 심었고, 창고엔 아버지가 두고 간 낙타 오버코트와 술잔과 마작 세트가 있었다. 어머니는 경성 사범 출신으로 공화당 명동 부녀 위원장을 지내셨고, 동북 제대 출신인 아버지는 이승만 대통령 시절 한일관계가 원만치 못하여 밀항 아니면 왕래가 어려워 일본에 계셨다. 어머니는 산파 손에서 태어난 약하디 약한 약골을 불면 꺼질까 쥐면 터질까 호호 불며 키웠다. 한 해 아래 남동생과 길거리 다닐 때는 꼭 두 손 잡고 걸어라, 잃어버리면 안 된다고 일러주시곤 했다.
그 후 명동에서의 나의 마지막 기억은 516 쿠데타로 미도파 앞 군인들 총소리를 들은 것이다. 그 역사의 현장 명동은 옛날 명동과 달라졌다. 당시 5,60년대 서울의 문화공연은 모두 '시공관'에서 열렸다. 연극, 무용, 발레, 최고 인기를 누렸던 여성국극과 '활동사진' 영화까지 볼 수 있던 곳이 시공관이었다. 시공관 근처에 '모나리자', '청동 다방', '갈채 다방' 등 다방과 '은성'으로 대표되는 대폿집, 그리고 위스키 시음장 '포엠'과 문인들 공간이었던 '동방 살롱'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 명동은 국립극장이 남산으로 이전한 후 문화의 거리에서 패션의 거리로 변했다. 전에 시공관이던 명동 예술극장은2004년 복원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해, 2009년 새롭게 탄생하기는 했지만 이미 명동은 문화의 거리에서 벗어나 있다. 현재 명동은 코로나 사태의 직격탄을 제대로 맞았다. 그동안 찾아오던 중국, 일본 관광객도 감소하고, 시민들 발길도 뜸해졌고, 명동 입구의 X-mas 구세군 자선냄비도 시들해졌다. 건물마다 '임대' 문구가 붙은 곳이 보이고 한때 명동을 가득 메웠던 노점도 많이 사라졌다. 현재 명동의 벽면에는 5,60년대 문인들이 찾았던 다방이 그려져 있고 '경상도 집', '은성' 간판만 보인다. 박인환, 이봉구 시인이 술잔 기울이던 그 시절 그 노래가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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