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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지가 이순신 장군의 고향이었다.

김현거사 2021. 12. 5. 11:16

숟가락이 국맛을 모르듯이 수지에 산지 10년 넘었지만 수지 좋은 줄 모르고 살았다. 그냥 성복동은 신분당선 전철역에서 강남역 가기 편리하고, 신봉동은 광교산 형제봉에서 내려오는 계곡이 탁족하기 좋다는 정도만 알고 살았다. 그런데 작년 11월에 수지문학회에서 고기리 이순신 장군 할아버지 이백록(楓巖公)의 묘소와  장조카 이완(李莞) 장군 묘소를 참배했다. 그때 개인적인 사정으로 참가 못했지만, 고기리가 이순신 장군 덕수 이씨 세거지라니 언젠가 꼭 참배하리라 생각해왔다. 보통 이순신 장군은 서울 충무로에서 태어났고, 외갓집이 있던 아산에 현충사 묘소가 있다는 건 알지만, 수지 고기리가 고향인 건 모른다. 조선 중기까지 남귀녀가혼(男歸女家婚)의 영향으로 남자가 결혼한 뒤 처가에서 상당 기간 거주하는 풍습 때문에 먼저 아산을 생각하지만,  이순신의 할아버지 이백록(楓巖公)은 중종 17년(1522년)에 생원 2등에 합격하였고 참봉을 거쳐 평시서봉사를 역임하였다. 조광조(趙光祖)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약을 받아 죽고 주위 인물들도 참형을 당하자, 벼슬을 내놓고 조광조의 묘소가 있는 용인 수지구 심곡리에서 멀지 않은 고기리에서 은거하다가 사망했다. 이로 인해 이순신의 아버지 정(貞)은 벼슬을 단념한 채 43세 쯤 외가이자 처가 가까운 충청도 아산 음봉으로 이사하였으니, 이순신을 수지 사람으로 볼 수 있다. 장군은 소싯적부터 할아버지 묘소가 있는 고기동 산 18-1 지역 광교산 시루봉에서 흘러내린 명당의 혈이 맺힌 조부 산소에 평생 벌초와 성묘를 다녔을 것이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충무공 이순신은 우리가 아는 이상으로 세계가 알아주는 명장이 아닌가. 세계 각국의 해군 사관 학교에서 생도들에게 가르치는 세계  4대  해전의 주인공에 충무공의 한산대첩이 들어간다. 1) B.C. 480년 그리스의 데미스토클레스(Themistocles) 제독의 살라미(Salamis)해전.  2) 1588년 영국 하워드(Howard) 제독의 칼레(Calais) 해전.  3) 1592년 거북선을 앞세워 승리를 거둔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한산대첩(閑山大捷).  4) 1805년 영국 넬슨(Nelson) 제독의 트라팔가(Trapalgar) 해전이 그것이다.

 

1921년 영국의 해군 중장 조지 밸러드는 '제독 이순신은 동양의 넬슨 제독이다'라고 단언했다. 명나라 장수 진린은 '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經天緯地의 재주와 나라를 바로잡은 補天浴日의 공로가 있는 사람이다'라 했다. 심지어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의 도고 헤이하찌로는 그 전쟁 축하연 자리에서 '자신을 이순신 제독에 비유하는 건 神에 대한 모독'이라 했다. 임진왜란 참전 장수 와키사카 야스하루는 '내가 제일로 두려워하는 사람은 이순신이며, 가장 미운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좋아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흠모하고 숭상하는 사람도 이순신이며, 가장 죽이고 싶은 사람 역시 이순신이며, 가장 차를 함께 하고 싶은 이도 바로 이순신이다'라고 했다. 아래 그림은 일본이 그린 이순신 장군 모습인데, 얼마나 충무공을 무서워했으면 도깨비처럼 묘사했을까.

수지 사는 사람인 이상 세계적 명장 이순신 장군 고향이 수지라는 걸 안 것만 해도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그런데 12월4일 또하나 즐거운 일이 보태졌다. 광교산 문화포럼(대표 안강현)이 瑞鳳寺址 정비 사업 청취 및 답사를 실시했다. 세미나는 용인 시청과 산하 연구소, 도의원, 대학교수 등 30 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폐사지 바로 밑에 있는 '코나헤이븐'에서 열렸다. 세미나에서 용인시청 학예연구사 이서현 박사는 '천년 전 고려 후기 사찰인 서봉사지에서 금동 보관과 백자 연봉, 창칼과 화살촉이 다량 출토된 것으로 미루어 여기가 병자호란과 임진왜란 때 승병들 근거지였다고 추정된다'고 소개했다. 경희대 진용옥 명예교수는 '현오국사비가 이곳에 설립된 까닭은 국사가 왕족 출신으로 같은 왕족 출신 의천 국사의 뒤를 이은 제2대 천태종 종정이었고, 서봉사 주지를 지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절터는 6단 축대로 되어있고, 동원 서원 중원으로 나눠져 있는데, 경기 남부에서 가장 큰 대규모 사찰 이었다고 한다. 축대 위 현오국사비는 신축 건물로 잘 보존되어 있고, 금당터에서 바라본 남쪽 시야는 봉황이 날라가는 모습의 형제봉이 상서러운 기운을 펼치고 있다. 400년 전 여기 형제봉에서 병자호란 때  전라도 兵馬節度使 金俊龍 장군이 仁祖 15(1637) 1 5일부터 6일까지 激戰을 벌인 끝에 청나라 누루하치의 사위 楊古利와 적장 2명을 사살하였다고 한다. 가슴 후련한 이야기 듣고 돌아왔다. 

戰勝地에 碑 모양으로 岩盤에 새긴 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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