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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산반도 단풍 여행

김현거사 2021. 7. 29. 15:14

변산반도 단풍 여행

 

올해처럼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엔 누군가와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싶던 참이었다. 누군가와 소주잔 앞에 놓고 밤새도록 이야기 나누고 싶던 참이었다. 늘그막의 네 사람이 다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래 인덕원에서 만나 승용차 하나에 탑승하여 변산반도로 떠났다. 핸들 잡은 운전수는 권순탁 합기도협회 부회장. 그 옆에는 전 진단학회장 김두진 박사, 뒷좌석은 이종규 전 육군 소장과 수필가인 거사. 초판부터 농담으로 시작했다. 김지미 나훈아 이야기다. '이 발은 누구 발?' '지미 씨 발.' '이 팔은 누구 팔?' '지미 씨 팔'.

밖을 내다보니, 산도 들판도 단풍으로 울긋불긋 하다. 천지가 칼라 옷 입었다. 은행나무는 노란 레인코트 입은 빗속의 여인같다. 단풍나무는 이미 밤 깊은 카페 마담처럼 만취한 얼굴, 갈대는 하얀 은발을 날리며 날 부르고, 키다리 미루나무는 노란 반짝이 치마입고 빤짝 빤짝 춤추고 있다.

부안 가서 백합죽 못먹으면 잘못 여행하는 것이다. 찾아 찾아 유명한 집 갔으니, 소방서 옆 부안군 향토 음식 1호점 이화자 씨 음식점이다. 집은 널찍하고 음식 깔끔하다. 과연 전라도답다. 퍼렇기에 청포 묵인가 했더니 흑깨 묵이라 했고, 사근사근 씹히는 것도 그냥 김치 아닌 삭은 묵은지다. 하도 맛깔나서 두 번 청해 먹은 것은 대한민국 젓갈 일 번지 줄포만 곰소 멸치젓이다. 꿀처럼 단 것은 샛노란 단호박찜 이요, 흑갈색으로 목젖 부드럽게 넘어가는 것은 이 장군이 청해서 나온 전라도 모주다. 허허 참! 첫 단추부터 잘 꿰었다.

우째 이런 일이 있나 싶었다. 사람 북적거리는 격포 대명콘도에 가서 권 회장이 VIP 멤버십 카드 내미니, 그건 일반 멤버쉽의  반값만 내면 된단다. 4인실 1박에 단돈 2만 5천 원이라니, 완전히 공짜다. 온 김에 한 일주일쯤 놀다 가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창밖은 하얀 파도가 한 줄기 백마처럼 힘차게 달려와 채석강 절벽에 부서지고 있었다. 짐 놓자마자 내소사 찾아갔다. 절 입구 상가들은 아직 철이 아니라 군침나게 만드는 전어 굽는 연기를 뿜지 않았지만, 바지락 넣은 파전 굽는 냄새는 한없이 고소하기만 하다. 

전나무 숲 걸어가면서 내소사 땅 밑을 한번 파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어디다 물감을 얼마나 파묻었기에 단풍이 모두 저리 붉나? 붉어도 그냥 붉은 것이냐. 나무들이 샤넬이나 루이비통 화장품으로 화장했나. 세련되고, 깔끔하고, 선명하다.  우리 네 사람이 감탄한 것은 내소사 단풍의 그 천재적 칼라 감각이다. 그 다음 선운사 단풍은 어떻던가. 곰소 들러 갈치 내장젖 한 통씩 차에 실은 후 찾은 선운사 단풍은 어떻던가. 여기도 천재요 내공이 보통 아니다. 아니 여긴 한술 더 떴다. 밑에 꽃무릇이 깔려서 더 그런가. 노랑 주홍 진홍빛 단풍이 물에 비친 도솔천 풍경은 바야흐로 사람을 취케 만든다.

해는 지고, 사방은 어둠 물드는 시각이었다. 이때 숲은 가장 청정한 공기를 내뿜고 있다. 이 장군과 김 교수는 냉큼 법당에 들어가 부처님 전에 예를 올렸고, 거사는 법당 앞 홍시가 곱게 익은 키가 우리 키 다섯 배나 될 늙은 감나무한테 예를 올렸다. 지혜의 눈이 열린 사람은 세상 만물이 다 부처님인 것을 알게 된다고 한다. 곳곳이 부처님(處處佛像)이요, 일마다 불공(事事彿供)이란 말이 있지 않던가. 나는 법당 앞 감나무에 달린 홍시를 보면서 인생을 생각했다. '천년 고찰에 살아서 저럴까? 어쩌면 마지막을 저렇게 아름다운 홍시로 장식할까?' 감나무가 한없이 부러웠다. 

 

그 날 밤 우리는 갯내음 가득한 주점을 찾아갔다. 먼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이 바다냄새 짙게 풍기는 창가에 자리 잡고, 우리는 전어구이부터 음미하기 시작했다. 전어는 꼬리와 머리를 잡고 장작불에 노릇노릇 구워진 고소한 전어를 통째로 먹어야 제 맛이다. 그 다음 세발낙지 먹고 건배, 소라회 먹고 건배, 문어회 먹고 건배 , 수없이 건배하고 마지막에 우럭 매운탕 먹었다. 몸에 좋다는 전복 내장은 오늘 운전수로 수고한 권 부회장한테 팁으로 주었다. 우린 살아온 시간 많고 화제도 많다. 일 배 일 배 부일 배 권커니 마시거니 하다 자정을 넘겼다. 사단장 출신 이장군은 부하 많이 다뤄본 사람이다.  서빙하는 아줌마한테 몇 마디 건네자 아줌마가 서비스 전어구이 한 접시 더 내온다. 태권도 협회 권 부회장도 가만 있지 않는다. 안주인 부르더니, 뭔가 목소리 낮춰 말을 하니, 그때부터 여주인이 서비스 안주도 더 나온다. 선비같이 수줍은 김 교수는  웃기만 하고, 거사는 서해 건너 채석강에서 죽은 이태백을 생각했다. 인생은 한바탕 봄꿈 같은 것, 좋은 밤(良夜)에 모름지기 백 잔의 술을 사양하랴. 이태백은 배를 타고 강 속의 달을 잡으려다 빠져죽었다. 

이튿 날 아침 온천물로 목욕한 후 잠시 바닷가 거닐었다. 전망대에 올라가서 광활한 바다에 밀려오는 파도도 감상했다. 사람도 저 파도 같을 것이다. 끝없이 밀려와서 밀려가는 것이다. 사람도 내소사 선운사 단풍 같다. 언제가 땅에 떨어져 어딘가로 사라질 것이다. 그 중 벗과 하루 밤 맘껏 잔을 권하며 끝없이 정담 나눈 일 기억해둘만한 일이다. 사람은 외로운 섬이다. 변산과 군산을 연결하는 새만금 방조제는 그 길이가 백리나 된다고 했다. 외로운 섬과 섬을 연결하는 긴 방조제를 보아서 그럴까. 돌아오는 차속에서 사람은 외로운 섬이라는 생각이 더욱 짙어진 것 같다. (2010년 1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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