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는 천리길 2

아버님

김현거사 2019. 9. 14.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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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님

 

 

  다음 글은 서울시립대 총장, 문교부 차관을 역임한 제자 정희채 씨가 쓴 글이다. 정차관님은 박창남(전 함부르크 총영사), 김경래 (전 경향신문 편집국장), LG 구자경 전 회장 등 진주사범 제자들과 종로 2가 음식점에서 아버님 회고록 출판기념회를 마련해주신 분이다.

 

 

 

 

 "1945년 10월 이승만 박사의 지방 순회 때 일 이다. 진주는 청년단, 부녀단, 공무원, 진주사범, 진주농고, 진주고, 진주여고, 인근의 군민까지 전부 길에 나가 환영했다. 그러다 진사와 진농의 행열이 서로 얽혀 싸움이 벌어졌다. 진농 학생 천여명이 진사로 몰려왔다. 진주사범 교장은 교기를 앞세우고, 전 교직원과 학생을 데리고 진농에 와서 사죄하라는 것 이다.

 

 해방 후, 시대는 좌우익으로 나뉘어 백주에 테러가 자행되고, 사람 목슴이 파리 목슴과도 같던 치안부재 시대였다. 싸움이 벌어지면 피차 수백명의 사상자가 예상되었다. 쌍방은 대창과 칼, 삽, 쇠스랑등으로 무장하고 벼르고 있었다. 진사 학생들은 그런 수모를 당하느니 차라리 일전을 하고 죽자고 결정했다. 강당에 모여, 손에 붕대를 감고, 죽창을 다듬었다.

 사태가 험악하자, 약산(若山) 김성봉(金性奉) 선생님이 나섰다. 제자들 생명이 중요하니, 세번이나 진사에 쳐들어와 굴욕적 사죄를 요구하는 진농에, 당신이 목슴을 걸고, 화의사절로 가겠다는 것 이다. 선생님이 이렇게 나서자, 선생님을 모시고 함께 가서 죽겠다며, 학생 대표도 나섰다. 박근(朴槿)(전 U.N.대사), 강갑수(姜甲秀), 정구현(鄭九鉉)(교육자)과 나 였다.

 진농에 도착하니, 진농학생들은 젊은 혈기에 전원이 손에 무기를 들고 운동장에 집합하여, 총공격을 기다리는 살벌한 분위기 였다.

선생님은 태연자약 조회대 단상에 오르셨다. 적의에 가득한 눈들이 선생님을 응시하고 있었다. 취하시는 태도가 조금이라도 못마땅하면, 당장 밟아죽이겠다는 것 이다. 이때 선생님의 현하 웅변이 터져 나온 것 이다.
 "친애하는 진농의 건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누구를 죽이겠다고 이렇게 모여 있는가? 여러 피끓는 젊음이 정작 생명을 걸고 싸워야 할, 왜놈들은 현해탄 너머로 사라져 버렸는데, 그 불구대천의 적은 고스라니 놓쳐버리고, 이제 그대들은 내동포 내형제를 때려죽이겠다고 이렇게 모였단 말인가.

 이것이 광주 학생의거 같은 목슴을 걸고 싸워야 할 의로운 일입니까? 조국 해방을 맞고, 그 첫번째 일이 겨우 이것 입니까. 이것이 사내로서 꼭 하지 않으면 않될 일입니까? 진사 학생들도 약세지만, 결사대를 조직해 죽기로 작정하고, 명예를 지킬려고 하고 있읍니다.

 여러분의 스승으로서, 나는 이 더러운 꼴을 내눈에 담지않고, 심혈을 기우려 키운 내 제자의 목슴을 하나라도 건지기 위해서, 여러분에게 빌다가 죽기 위해서 이자리에 왔읍니다. 싸움의 주원인은 시장이 대열의 순서를 정해준 것을 어기고, 진농이 진사의 후미대열을 끊은데서 시작됩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의 이 꼴을 보고는 사과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할말을 다 했읍니다. 바라는 것은 여러분의 지성 입니다. 자 이 김성봉이를 때려 죽이고, 스승의 시체를 넘어 진주 사범을 공격하시오."

 선생님은 팔장을 낀채 단 위에 서 있었다. 미쳐 날띄던 천여명 학생이 숨을 죽였다. 폭풍 전야의 그 무시무시한 고요였다.

그 때 진농 학생 대표는 생각이 깊은 사람 이었다. 간단한 숙의가 끝나자, 학생들을 조회대형으로 정렬 시켰다.

"일동! 선생님에게 경례"

 힘차게 외쳤다.

"선생님! 우리들은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싸우려 했읍니다. 그러나 선생님 말씀을 듣고 잘못을 깨달았기 때문에 물러서겠읍니다. 선생님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훌륭하신 김성봉 스승님께 만세 삼창으로 진농의 의기도 보여드립시다!  만세!  만세!  만세!’

진농 교정 안은 봇물처럼 터진 만세 삼창 소리로 뒤덮혔다. 선생님은 단 위에서 울고 계셨다.

그 후 진농 대표가 오히려 진주사범에 사과하러 가서, 그 사건은 마무리 되었다."

 

 약력


 아버님은 초등학교 시절 청담스님 급우였다. 다섯 살 나이 많고 결혼한 청담스님이 반장이고, 아버님은 부반장 이었다. 청담이 독립만세로 경찰에 잡혀있을 때, 아버님은 경찰서 마당에서 밤을 새웠다. 훗날 스님이 조계종 종정으로 계실 때, 상경하시면 우리 형제를 조계사로 데리고 가시곤 했다. 

 만세운동 후 진주 유지들은 지역 인재양성을 위해, 장학생을 일본에 파견했다. 그 두 명 중 한명이 아버님이다. 동경대학 문학예술과에 적을 두고 이광수가 주재하던, “조선문단‘과 황석우가 주관하던 ”조선시단“에 글을 실었다. 

 귀국해서 비봉루의 은초(隱樵) 정명수(鄭命壽)씨 사랑방에서 바둑을 두며 세월을 보냈다. 

 

 

 

 

 

 

 

 

 

 

 

 해방이 되자, 진주극장에서 열린 시민대회 건국준비위원회 의장을 하셨다. ‘건준’은 경찰서와 시청을 일본인에게서 인수받고 치안을 유지했다. 음악인 남인수(南仁樹) 이재호(李在鎬)씨, 여류성악가 황필연(黃必蓮) 김미영(金美影)씨와 친했다. 해방 기념으로 남인수를 진주로 초대하여 아버님 사회로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후학 양성이 시급하다고 생각하고, 1930년 창원군 진전(鎭田)에서 첫 교편을 잡은 이래, 진주사범, 안의중학교장, 문산중고교장, 진양군 교육감을 지내시며, 1960년까지 30년을 지역 교육계에 헌신했다. 안의중학 교장은 사범학교 동문 이시우(李時雨) 씨가 무정부주의 운동에 심취하여 이상촌의 꿈을 실현하자고 세 번이나 찾아와 요청하여 간 것이다. 이시우 씨는 망명정부 요인 유림(柳林)씨를 모시고, 용추사(龍秋寺)에서 전국 아나키스트 대회를 연 인물이다.  진주사범 교사 재직시는 “화랑 전기”를 저술했다. 화랑의 명칭, 화랑도의 업적, 화랑과 풍월(風月), 향도(香徒), 남무(男巫), 남사당(男寺堂), 화냥년(花郞女), 굿중패(乞粒), 광대(廣大), 향도군(香徒軍), 상두군(喪頭軍) 등 명칭의 변화를 고려사나 이조실록에서 추적하여 자세히 남겼다. 국립도서관에 가서 열람하면, 당시 화랑에 대한 저술을 남긴 분은 단재 신채효와 아버님 두 분이다.

 

 

 

 

 

 

 

 

 

 

 

 

 

 

 

 

 

 

 

 개천예술제를 주관하던 설창수시인과 교류했고, 임란 때 성을 지키다 순국하신 분들을 모신 창렬사(彰烈詞) 중수기(重修記) 비문을 쓰셨다. 이반성면 인조대왕이 은신하셨던 성전암(聖殿庵) 현판 글 쓰셨고, 촉석루 옆 6.25전승비와 순국선열 및 전몰군경 충혼탑에 새겨진 헌사문은 학도병으로 큰 아들을 잃은 아버님 문장이다.  

 

 

“여기 충혼으로 모셔진 임들이여. 나라와 겨레 위해 그 목슴 바치셨네.

忠義 烈士 얼이 맺힌 옛 성터에,

그대들 탑이 되어 높으시구나. 고이 잠드시라. 靑史에 빛나리.”

 

 아버님은 신안동 지주집에서 태어나 가난한 제자들의 학비를 도와주셨다. 외교관 김창남, 언론인 김경래, 시인 박남수, 교육계 정태수, 정희채, 정구현 선생이 아버님이 아낀 제자다. '악의 꽃'을 번역한 숙대 박남수 교수는 서울대 학생일 때 아버님이 문산중학교 교사로 특채했다. 1977년 대사, 차관, 편집국장, 장군 등 제자들이 종로 2가 음식점에서 아버님 회고록 출판 기념회를 열어주었다. 아버님은 단정한 외모에 다정다감한 편이지만, 성품은 대쪽같으셨다. 진주 일대 제자들에게 영향력이 컸던 관계로 5.16을 ‘군사반란’이라고 혹평하시다가 구속되어 교육감에서 물러나셨고, 말년까지 중정 요원이 동태를 감시했다. 그후 박정희 대통령이 나라를 살리자, 박대통령을 항상 칭찬하셨다.  우리 일족은 아버님 영향을 받아, 진주서 교장 다섯, 교사 삼십 명을 배출했다. 

 

 

화랑전기(花郞傳記)

2018년 12월 07일(금) 11:27 [인터넷청도신문]

 

 어느 날 책장 속에 꽃혀있는 책을 정리하다 보니 화랑관련 책이 2권이 나왔다. 하나는 화랑세기(花郎世記) 이고 다른 하나는 화랑전기(花郞傳記) 이다. 화랑세기(花郎世記)는 신라시대에 김대문(金大問)이라는 사가(史家)가 기록한 것이라 하지만 원본은 없는데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것을 필사 했다고 하는 책이며, 위작(僞作)의 논란(論難) 속에 쌓여 있는 책이다.
다른 하나는 화랑전기(花郞傳記)인데 김성봉(金性奉)씨가 찬(撰)한 책이다.
이 책의 간기(刊記)를 보면 발행년도가 단기4279년이니 곧 서기1946년이다. 발행한 곳은 진주사범학교(晋州師範學校)이고 저자겸 발행자는 김성봉(金性奉)이다. 주소는 진주부(晉州府) 본정(本町) 339번지(番地) 인쇄인은 진주개문사(晋州開文社) 김천수(金千洙) 주소는 진주부(晉州府) 일출정(日出町)198번지(番地)이니까 아마도 진주사범대학에서 교재를 하기 위해서 만든 책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러나 오랜 우리의 역사서를 낱낱이 읽어 보고 기초한 책이라 생각되어 귀하다고 여겨진다. 이 책의 내용을 여과 없이 옮겨 보는 것은 우리 청도가 화랑의 원산지라고 말은 하고 있지만 화랑에 대해서 아직 깊은 연구가 없기 때문에 이것이 그 단초가 되어서 화랑에 대해서 깊은 연구가 있었으면 한다. 그리고 현재 운문댐 하류보 곁에 만들어진 신화랑풍류 마을에 그 핵심을 삼는 화랑에 대해서 아무도 절박한 심정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없음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이 글을 옮겨본다. 독자제현께서도 깊은 관심과 또한 화랑에 대한 책들을 소장하고 있다면 이곳 화랑풍류 마을로 그 복사본이라도 전해 준다면 청도의 자산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필자가 이 책을 다시 옮겨 소개하는 이유는 책이 낡을대로 낡아서 만지면 바스라질 것 같고 또 종이의 질(質)이 좋은 것이 아니어서 언젠간 이 책마져도 사라질 것 같아 앞으로 화랑(花郞)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반드시 한번은 읽어 보도록 권(勸)하고 싶어서 새로 옮겨 적어본다.
옮겨적는 과정에서 혹여 한자(漢字)를 잘못 판독한 곳도 없지 않으려나 염려(念慮)도 되지만 처음 가는 사람의 길이라 간혹(間或) 잘못이 있는 것은 다음 사람이 밝혀주길 바라면서 일차 게재를 한다. 이 책 중간에 3줄이 빠진 곳이 있는데 이것은 소장하고 있는 책에 인쇄 때 빠진 것이라 물음표를 가지고 표시하였다.
아무튼 이글을 읽어보는 독자들께서 화랑과 관련된 연구를 하고 또 다른 기록이 있으면 함께 공유하기를 바라면서 신문의 공간이 허락하는 데로 게제를 하여 본다.

화랑전기
김성봉 찬
 
머리말
아즉 깊은 연구도 없고 많은 고증도 대조도 하지 못하고 본편을 세상에 내어놓는 것은 두려운 일이고 외람된 생각을 금할수없다.
우리 건국을 위하여 돌 하나 흙 한줌이라도 옮겨드려서 이바지 하려는 정성만으로 교단에 서서 반년이 넘는동안 사초수집 참고서등을 찾아 왔으나 우리의 사재는 오랫동안 왜적에 파괴되고 매몰당한 나머지라 손쉽게 얻어지지를 않고 간혹 좀먹은 진서를 발견하더래도 대단히 해석하기 어려우며 체계를 세우기에 여간 곤란한 것이 아님을 느끼고 이런 점에 대하여서 특히 이방면에 유의하시는 동지자(同志者)에게 조그마한 참고가 될까 하여 이것을 정리하였을 뿐이다.
우리 국사는 통일신라까지 합한 삼국시대 약일천년이 가장 황금시대요. 역사의 모습이 호화판이라 할 것이다. 그 이전의 2천년은 역사상 유년(幼年)시대요, 그 이후의 일천년 고려, 이조는 간혹 천재의 출현으로 보옥같은 업적을 남긴 것도 사실이지만 문화면 이외의 정치사는 대체로 내리막길을 걸어 이조말년의 비애사를 남기고 말았다.
우리의 역사책을 펴는 학도와 선생님들이 다 같이 감격하는 것은 삼국시대 할아버님들의 그 경륜과 그 애국심이다. 위대한 민족성의 발현은 찬란한 문화를 지었고 빛나는 국가를 건설하였다.
우리는 오늘과 같이 애국심의 앙양을 필요로 할 계단이 또 없을 것이니 이때를 당하여 다시한번 민족적 감격을 아르켜서 우리의 건국정신에 맑고 새로운 정신을 샘솟게하는 정열을 고취할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닐까? 자!
이 작은 책은 통일신라의 원동력이 된 화랑정신을 찾어보려고 여기 관한 문헌을 참고자료로 보시고 많은 계시와 채찍을 아끼지 마시기 바랜다.
부록으로 실은 단재 신채호선생님의 유고는 선생님의 조선사연구초에서 가져온 것인데 참으로 귀중한 사료이고 더욱이 낭유불선(郞儒佛仙) 사조(思潮)의 우리민족 성쇠(盛衰)에 끼친 영향에 대하여 탁월(卓越)한 역사를 보는 눈과 풍부한 식견(識見)으로 비판(批判)하신 옥고(玉稿)로서 본론과 중대 관련성이 있는 구절(句節)이오니 겸하여 음미하심을 바래는 바이다.
단기 4279년 6월13일 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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