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사와 오간 편지

경남미디어 신문 수필 칼럼

김현거사 2018. 11. 12. 10:15

  망경산 

                                                                                                         수필가 김창현

 

 누구나 마음 속에 그리운 산 하나 있을 것이다. 나에겐 진주 망경산이 그런 산이다. 

 망경산은 북쪽이 깍아지른 절벽이고, 남쪽은 부드러운 능선 펼친 외유내강의 산이다. 산 정상에 서면 멀리 토끼 귀처럼 생긴 지리산 천왕봉이 보이고, 발 아래 비단띠처럼 남강이 휘감아, 봄엔 눈 녹은 물에 은어 올라오고, 가을엔 신안동 들판 위로 기러기 떼 나른다. 

 망진산은 절벽이 멋있다. 절벽은 '폭풍의 언덕‘에서 어린 히스크리프와 캐더린이 놀던 성 같다. 나는 어떤 소녀가 그리워 '내 죽거던 님이여'란 크리스티나 로젯티의 시를 거기 새겨놓았다. 산 남쪽은 과수원과 밭이 많다. 산그늘에 거울같이 빤짝이는 습천못이 숨어있다. 나는 단석산에서 무예를 딱은 김유신 장군처럼 망경산을 휘젖고 다녔다. 축지법 쓴다고 산을 활공하며 뛰어 다녔고, 어떤 나무를 정해놓고 매일 뛰어넘었다. 몇 년 후 그 나무가 사람 키를 넘어도 넘을 수 있다는 무협지 이야길 굳게 믿었다.  나에겐 키 작은 나무는 높이뛰기 기구, 다랭이 논처럼 층층 이룬 밭들은 넓이뛰기 뜀틀 이었다. 그 덕에 나는 고등학교 때 백미터, 높이뛰기, 넓이뛰기 선수였다. 산은 내 체육선생 이었다.  

  산은 내 음악선생이기도 했다. 나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산에 올랐다. 산에 개근하여 비오는 산 속, 눈 오는 산 속 정취를 안다. 산에서 들리던 모든 소릴 기억하고 있다. 가령 늦가을 숲에 떨어지는 낙엽 소리, 달 밝은 산마루의 침묵과 풀벌레 소리 같은 들릴듯말듯한 고요한 소리에서부터, 아지랑이 속에서 노래하던 종달새, 골짜기에 메아리 던지던 뻐꾸기, 여인의 곡성처럼 한 서린 산비둘기 울음을 기억하고 있다. 태풍 불어 나무 찢기고, 골물이 콸콸 내려가던 사납던 골짜기 소리도 기억하고 있다. 산은 전원교향곡을 내게 가르켜준 음악선생 이었다. 

 산은 나에게 색의 향연 일깨워준 미술선생이기도 했다. 나는 산이 보여준 많은 꽃들을 기억한다. 절벽의 원추리꽃. 바위 틈 패랭이꽃, 보리밭 가 하얀 찔레꽃을 기억한다. 진주알처럼 풀밭 수놓던 이슬, 화폭처럼 산을 붉게 물들이던 노을을 기억한다. 산은 나에게 생생한 색의 향연을 일깨워준 미술선생이었다.

 나는 산들바람과도 추억을 공유하고 있다. 지금도 나는 도심의 페이브먼트 위를 걷다가 비가 개이고 산들바람이 불면 맘이 야릇해진다. 비 갠 후 남강 무지개가 눈에 선하다. ‘비가 개이고 산들바람이 정답게 또 불면, 새는 즐거이 짝을 찾는데 노래를 잊은 이 마음.’ 문정숙의 노래가 생각난다.

 망진산에 어머님이 자주 가시던 절이 있었다. 절에는 '해탈이'라는 고양이가 있었다. 해탈하라는 그 이름이 좋아 우리 고양이도 개명해준 적 있다. 망경산은 어머님이 기도하러 다니신 산이다. 내 체육선생, 음악선생, 미술선생이고, 사춘기 감성을 안아준 숨겨놓은 애인이다. 그래 진주에 가면 한참 그 산을 바라본다.

(경남미디어 2018년 12월 11일)

 

진주 가는 길

 

  고향길 나서면 항상 차창 밖 풍경 보느라고 정신이 없다. 가는 길이 3시간 넘게 걸리지만, 풍경 보느라고 한번도 지루해 한 적 없다. 나는 봉오리, 산록, 강물, 구름 어느 것 하나 허투로 보지 않는다. 그 풍경이 굳이 마원(馬遠)이나 황공망(黃公望)의 산수화일 필요 없다. 산록을 물들여 사람 감동시키는 산벚꽃, 오솔길, 흘러가는 흰구름 모두가 산수화의 원본이기 때문이다.

 고향길에서 처음 만나는 곳이 안성이다. 거기 넓은 들판과 실개천이 보인다. 나는 그 풍경 볼 때마다  소 몰고 실개천 둑을 거닐고 싶다. 우짖는 노고지리 소리 듣고 싶고, 봄나물 뜯고 싶고, 유리 어항으로 피리와 모래문지 잡고 싶다. 밤하늘 들판의 별무리를 보고 싶다. 

 대전 지나면 나타나는 잠두마을은 덕유산과 마이산에서 발원한 금강이 산태극 수태극으로 굽이쳐 흘러가는 마을이다. 대진고속도로에서 보면 강이 세 번 지나간다. 먼저 강마을, 그 다음 기암절경과 강, 끝으로 절벽강이 보인다. 경치가 목가적이라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이곳 강변은 복숭아꽃 살구꽃 가로수 별천지란다. 강물에 나지막히 엎드린 다리가 있다. 그 위에서 피래미 낚을 수 있겠고, 다리 위에서 하루밤 자보는 것도 운치있겠다.  

 다음에 무주 적상산(赤裳山)이 나타난다. 붉을 적(赤) 치마 상(裳), 적상산은 단풍 들면 절벽이 마치 붉은 치마 입은 듯 하다고 적상산이다.

 인삼랜드 휴게소에서 잠시 쉬고 육십령 터널 지나면 산맥이 보인다. 그 웅혼한 산세는 볼 때마다 사나이 가슴에 불을 지른다. 이 근처 어디 쯤 자리잡고 저 산맥 위로 뜨고 지는 아침 해와 달과 별 보며 살지못하는 내 신세가 안타깝다.

 생초 지나면 지리산이 옆으로 보인다. 지리산의 특징은 웅장함이다. 능선은 한없이 부드럽고, 골은 한없이 깊고, 바위는 한없이 크다. 물은 한없이 맑고, 나무는 한없이 푸르고, 구름은 한없이 희다. 이런 웅장한 모습은 서울 근교 산들이 발치에도 못따라 간다. 수많은 계곡이 있다. 중산리, 대원사, 백무동, 뱀사골, 피아골, 화엄사, 쌍계사, 칠선계곡이 있고, 계곡은 계곡마다 절을 품었다. 대원사, 내원사, 쌍계사, 칠불사, 화엄사, 천은사가 그것이다. 절이 하동에 41개, 산청에 47개, 함양에 12개, 그 밖에 구례 남원까지 합하면 무려 150개다. 

 이 지리산의 자랑꺼리는 인심이다. 중산리는 곶감철에 가면 홍시는 따먹어도 아무도 간섭하지 않고, 원지는 추어탕 시키면 노릇노릇 갈치구이 두 토막 나온다. 이런 갈치구이는 서울서 무조건 세종대왕 초상화 한 장 꺼내야 맛볼 수 있다. 생초는 은어튀김, 거창은 한우불고기 유명하다.

 나는 객지 생활 하면서 늘 지리산을 생각했다. 지리산 계곡물처럼 맑고, 지리산 집채만한 바위처럼 의젖하고, 지리산 약초처럼  영험해야지 생각해왔다. 나는 지리산에서 흘러온 남강물 먹고 자라서 내 혈관에 그 피가 흐르는 걸 자랑으로 생각한다. 새댁 친정집 바라보는 감회로 지리산 모습 열심히 바라보다 보면 곧 남강 상류 팻말 보인다. 그리고 버스는 곧 진주 시내로 진입한다.

 

 고향의 작은 둠벙 

 

  지금 진주 신안동은 아파트촌이지만 전에는 산 기슭에 이십여 가구 올망졸망 살던 동네다. 앞에는 하동 가는 신작로가 있고, 그 너머 남강이 있었다. 할아버지 집은 언덕 위 큰 정자나무 옆에 있었다. 정자나무 아래 잿마당은 동네 사람 휴게소다. 여름밤 쑥불 피워놓고 사람들이 멍석에 앉아 곰방대 하얀 연기 빠꼼빠꼼 뿜으며 이야기 했다. 우리 삼촌은 결혼하자 숙모가 맘에 안든다고 만주로 내빼어 일년이나 돌아댕겼다. 맘 잡으라고 문전옥답 여나믄 마지기 떼어주고 새집 지어 벽에 떠억하니 신식 벽시계 달아주었다. 그 밑에 탱자나무 울 사이로 물이 흘러와 고인 둠벙이 있었다.  

 그 둠벙이 어린이 놀이터였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작은 헬리콥터처럼 하늘을 날라다니는 빨간 고추잠자리다. 그 다음이  수면에 꼬리를 깐닥깐닥 담그며 물을 적시는  검푸른 물잠자리다. 그 중에서 아이들이 가장 좋아한 것은 둘이 교미 한 채 하늘을 날아다니던 왕잠자리다. 왕잠자리 암컷은 '또니'라 부르고, 수컷은 '수벵이'라 부른다. '또니'는 몸이 초록빛이고 '수벵이'는 하늘빛이다. 아이들은  '또니'를 실에 매달아 작대기로 허공에 빙빙 돌렸다. 그러면 날아가던 '수벵이'가 이를 보고 달라붙어 풀 위로 살살 끌어내려 손으로 덮쳐잡는다. 잡은 '수벵이'는 날개를 손가락 사이에 끼고 다녔다. 간혹 '또니'를 구하지 못하면 호박꽃으로 '수벵이' 날개와 엉덩이 부분을 노랗게 물들여, 가짜 '호박 또니'로 '수벵이'를 낚았다.

 하늘에 공군이 있다면 물에는 해군이 있다. 거북선처럼 동그랗게 생긴 몸에 노처럼 생긴 발로 헤엄쳐다니는 방개가 있고, 물 위를 기름처럼 슬슬 미끄럼질 치는 소금쟁이가 있다. 방개는 땅바닥에 뒤집어 놓으면 등으로 뱅그르르 돌다가 껍질 밑 부드러운 날개를 펴고 날아간다. 

 이 밖에 얼룩무뉘 해병대 옷 입고 군가처럼 시끄럽게 노래 부르는 개구리가 있고, 미꾸라지 있고, 자라도 있다. 그러나 둠벙의 주인은 전신에 금빛 찬란한 비늘 덮힌 붕어다. 아이들은 바지 걷어부치고 검정 고무신 들고 붕어 잡는다고 개구리밥 물에 뜬 풀섶 헤치면서 옷 젖는줄 몰랐다. 

 지금 생각해보니 이 둠벙이 세상 천지 둘도 없이 좋은 어린이 놀이터였다. 서울은 아파트 단지마다 어린이 놀이터란 게 있어 거기 그네와 미끄럼틀 있다. 집에 가면 밧데리로 움직이는 비싼 로보트와 자동차 있다. 그러나 그걸 둠벙에 있던 것들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소낙비 내린 후면 풀잎에 등이 녹색이고 배가 하얀 청개구리가 나타난다. 피부가 그렇게 부드러운 살아있는 작난감을 서울 어디서 찾아볼 수 있는가. 메뚜기와 여치도 있다. 여치는 뒷다리 잡고 방아 찧고, 메뚜기는 툭툭 튀는 놈을 잡아 풀에 꿰어 집에 가져가 짭조름한 반찬 만들었다. 물 속에 잠수함이 다녔다. 금빛 찬란한 비늘 덮힌 붕어는 소형 잠수함이고, 자라는 항공모함 이다.  잡으면 손에서 빠져나가려고 버둥거리는 살아있는 작난감이다.

 간혹 개골개골 개구리떼 울고 천둥 벼락 치고 소나기 내린다. 아이들은 그 비를 '호랑이 장가간다.'고 했다.  얼굴과 옷이 젖어도 걱정하지 않았다. 잠간 놀고나면 곧 해 나오고,  옷이 마르기 때문이다. 이런 건강한 어린이 놀이터를 서울 어디서 찾아볼 수 있는가. 그 시절 둠벙 근처 하얀 찔레꽃과  논둑에 베어 말리던 짙은 풀 냄새를 서울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는가. 

 

                                                                                                               

 

  강변에 서면                                    

 

  전에는 강이란 멱감고 물고기 잡으며 노는 곳인 줄로만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강변에 서면, 강물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나이 들수록 강이 다정한 친구로 닥아온다. 안개 속에서, 별빛 아래서, 나는 강과 대화를 s나눈다.

 강도 나처럼 바위를 사랑했고, 절벽의 노송을 사랑했고, 달빛 아래 빈 나룻배를 사랑했다. 강도 나처럼 성벽의 이끼 낀 돌을 좋아했고. 다리의 외로운 가로등을 좋아했고, 기적을 울리며 떠나는 기차를 좋아했다. 강도 나처럼 구비구비 구빗길 헤쳐오며 탄식하고, 울부짖고, 때로 환희의 노래를 불렀다. 강도 나처럼 한번 떠나온 길은 다시 돌아갈 수 없었고. 한번 이별한 사람은 다시 만날 수 없었다. 

 강과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닮은 존재인지 모른다. 내가 작은 강인지 모른다. 강에 수많은 별이 비치다 사라지듯, 내마음 속에도 얼마나 그리운 별들이  비치다 사라졌던가. 강이 흘러온 시간과 여정을 탄식하듯, 나도 얼마나 흘러온 시간과 여정을 탄식했던가. 우리는 마음이란 계절 따라 얼었다 녹았다 하는 변덕쟁이란 걸 알았고, 세월은 쏜살같이 달아나는 심술쟁이란 걸 깨달았다. 우리는 남풍에 실려온 봄처럼 목적지 없이 타향을 헤맨 에뜨랑제였고, 밤하늘 유성처럼 허무한 궤적으로 사라져 가는 존재였다. 

 그래 나는  강의 그 쓸쓸한 미소를 좋아한다. 나 역시 쓸쓸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는 강의 싸파이어처럼 푸른 눈동자를 사랑한다. 강의 눈동자는 여신의 눈동자처럼 차겁고 푸르다. 나는 그 신비한 눈동자 앞에서 내가 사랑했던 소녀 이야길 하고, 젊은 날 뭉게구름 같던 꿈을 이야기 한다. 그때 강은 고요히 침묵하면서 경청한다. 강은 참회를 들어주는 신부님이고, 명상을 가르키는 스님이다.    

  고향은 이제 부모님도 타계하셨고, 친구들도 흩어졌다. 아는 사람 드물다. 그 고향에 아직도 누군가가 있어 고요히 노랠 부르고 있었다. 그 소리는 요람에서 듣던 어머님 목소리 같다. 아기 잠재우던 어머님 음성같다. 그래 이제 나는 고향에 가도 외롭지 않다. 강변에서 물소릴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경남미디어신문 수필 칼럼. 2018년 11월26일)  

 

  고향집 감나무


 '명절에 다른 사람들은 다 오는데, 너는 서울 살기가 그렇게 어렵나? 와 한번도 못내려 왔노?' 

 울산 고모님은 갈 때마다 내 손 잡고 걱정스런 눈빛으로 말씀하시곤 했다. 가난한 신문 기자는 명절마다 고향 갈 여유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인생은 봄 밤에 피었다가 떨어진 배꽃의 낙하였다. 달빛 따라 흘러간 서글픈 환상이었다. 끝내 애태우고 가버린 첫사랑 소녀. 철학을 즐기던 대학시절. 바늘 구멍처럼 어렵던 취직. 펜을 꺽고 나온 기자 생활. 이문동 전셋집에서 아내 고생시키던 일. 아픈 딸애 병원비 걱정하던 초라한 호주머니. 출세한 친구의 오만. 떨어져 나가던 친구들. 대략 이런 스토리로 내 인생의 강물은 흘러갔다.

 소설로 치면 웅대한 스펙타클도 없고, 감동할만한 사연도 없다. 그러는새 청춘은 끝났고, 생의 희노애락은 내 내부에 영글었다. 종교도 신(神)도 없이 그 황량한 사막길을 잘도 건너온 것이라 생각한다. 돈도 별로 없었고, 친구도 많지않았다. 기자를 했지만 내근기자 였고, 회사원 되었지만 중역으로 끝났다. 수필을 쓰지만 이름난 작가 아니고, 그림 그리지만 알아주지 않는다. 불경을 읽지만 절에 가지 않고, 난초를 키우지만 꽃을 본 적 없다. 한가지도 성공한 것 없고 남보다 잘한 것 없다. 

 이리 살면서 나는 좀은 인간다운 체험을 한 다정다감한 사람 되었고, 좀은 겸손과 분수를 터득했다. 그래 좀은 안심되던 것이다. 

  진주 우리집에 평범한 감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수형도 못생겼고 단감도 아니었다. 떫은 감 추석 후까지 기다리다가 감이 하나씩 붉게 물들면 따먹곤 했다. 그런데 타향살이 너무 고달프고 서글퍼서 그랬을까. 뒤쳐진 내 모습과 나무가 닮아서 그랬을까. 언제부턴가 못생긴 감나무가 그립기 시작하더니, 나중엔 농도가 심해져서 사무치게 그리웠다. 하얀 서리 맞은 감이나 달빛 아래 홍시는 아름다워서 그렇다 치자, 감나무에 와서 울던 매미까지 애잔한 존재였다. 그래 하나 방편을 세웠다. 늦가을 진주로 전화하여 곶감 주문하는 일이다. 그건 제주 한라봉이나 해남 고구마와 다르다. 달콤하고 쫀득쫀득한 향수가 입 안에 씹힌다.    

 그러다가 최근 기특한 발상 전환을 했다. 우리집 감나무는 못생기고 평범했다. 그러나 누군가 눈물겹도록 그리워 해주질 않았는가. 못생긴 나도 감나무처럼 되자 싶었다. 그후로 나는 마음 편하다. '나도 늦가을에 달콤한 홍시나 몇 개 달아야지' 하고 생각한다. 


(문학시대 2007년 가을호)


 

 

  고향의 달 
                

 

고향의 달 
                

 

  지금도 서울의 달은 고향 달과 다르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공중에 뜬 달이 무슨 서울 달 고향 달이 따로 있겠냐마는, 젊은 시절 뼈져린 가난의 경험 때문인지 서울 달은 고향 달과 다르다는 생각을 한다

 결혼해서 집은 창동에 있고, 직장은 명동에 있었다. 퇴계로서 버스 타면, 차는 남대문, 시청 앞, 중앙청, 혜화동, 미아리, 수유리 거쳐 두 시간만에 창동 닿았다. 거기 지하 전세방에 살던 나는 여전히 박봉이고 전망도 어두웠다. 칼바람 귓전 때리던 벌판이 있었다. 얼어붙은 땅에 비치는 달빛 차거웠다. 허공에서 전선은 웡윙 날카로운 소릴 내고 울었다. 땅바닥에 찍힌 시커먼 전붓대 그림자가 내모습 같았다나는 왜 이런가. 울고싶은 심정으로 포장마차 찾곤 했다. 잔소주에 뜨껀뜨껀한 오뎅 국물 목구멍으로 넘길 때, 목 메이게 그립던게 배건너 육거리 달빛이다.

 고향 육거리 한쪽 길가에는 여름 내내 평상이 놓여있었다. 달은 항상 평상에서 빤히 보이는 길 건너 한약방집 양철지붕 위로 떴고, 그 집 창문 커텐 뒤엔 숨어서 밖 내다보는 수줍은 두 딸이 있었다. 평상엔 매일 세 여인이 나오곤 했다. 우리집에 세들어 살던 은경이 엄마는 농대 전임강사 따라온 서울 사람이다. 처녀 때 문학을 좋아해 항시 그 듣기 좋은 서울 말로 문학 이야길 꺼내곤 했다. 키 크고 성격 시원한 용환이 엄마는 드링크 들고왔고, 모시 적삼 즐겨입던 오십대 길년이 엄마는 미인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한가족 같았다. 우리는 모기향 피워놓고 부채 부치며 참외 깍았고, 밤 이슬 내려야 평상에 눕혀놓은 잠든 아기 안고 집에 돌아갔다. 그 시절 달빛은 다정했다.

 바다 건너 영국 습격한 바이킹처럼, 강 건너 도동 습격하던 소년이 있었다. 그가 수박 서리하여 물을 건느면  달빛은 물 위에 영롱하고 산과 들 홍건히 비쳤다. '낙동강 빈 나루에 달빛이 푸릅니다. 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없이 가고파서...’ 이호우의 달밤같았다.

 이태리 청년의 벨칸토 세레나데는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칠암동 누구네 집 울 밖에서도 자주 트롯트 세레나데 던져졌다. 겨울 밤 추워서 외투 깃 세운 소년은 떨면서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 부르곤 했다. 지금은 없어진 용사회관, 국보극장, 진주극장은 이름마져 정답다. 과외지도 선생님 눈 피해 스릴 있게 도둑영화 보고 진주교 넘어올 때, 다리 위를 서성이던 달빛은 얼마나 밝았던가.

  그러나 지금 서울의 달은 뭔가 허전하다. 희뿌연 달이 스모그 속을 헤매다가 보는 사람 없이 서해로 실종된다. 서울의 달은 잊혀진 여인이다. 더 이상 그리운 존재 아니다. 사람들은 이제 달을 잊고 살고, 나 혼자만 고향 달 생각하며 허전해 한다.


(문학저널 2009년 10월호)

 

 

고향의 꽃

 

 진주시 망경남동 41번지 우리집 마당은 꽃동산 이었다. 봉선화는 우물에 물 뜨러 온 동네 아낙 손톱을 모두 빨갛게 물들였고, 달리아는 크기가 달덩이만 했다. 빨강 노랑 채송화는 아침마다 새로웠고, 문 밖에는 하얀 탱자꽃이 피어있었다. 

 서울 올라와서 딴 꽃을 만났다. 첫번째가 라일락이다. 향기 좋은 보라빛 라일락은 서울 여학생들처럼 세련된 꽃이었다. 캠퍼스 라일락 벤치 옆에는 늘 어린 딸을 데리고 다니던 허리 구부정한 늙은 사진사가 있었다. 동문인 아내와 결혼한 후 갔더니, 노인은 더 늙고 초라해졌고, 딸은 처녀가 되어있었다. 그때 촬영한 사진이 40년 내내 내 서재에 걸려있다.

 불교신문 시절 또다른 꽃을 만났다. 백운(白雲)스님께 난을 배웠고, 원고청탁차 찾아간 사당동 미당선생 뜰에서 파초와 국화를 배웠고, 동승동 이희승 선생댁에서 오동꽃 향기를 배웠다. 향기 고결한 오동꽃은 그걸 와이샤스 주머니에 넣어가서 선물한 총각을 국학대학 이기영 학장 여비서와 데이트 하게 만들어주었다. 문필가들의 꽃도 배웠다. 도연명은 국화, 주렴계는 연꽃, 소동파는 대나무로 유명하고, 신흠과 퇴계선생은 매화로 유명하다.

 아내 모교 이화여고는 장미가 유명하다. 우리는 서울의 유명한 장미원 안가본데 없다. 종로5가 노점, 상일동, 파주를 불원천리(不遠千里) 찾아다녔다. 백장미, 노랑장미, 피스장미 등 우리집 장미는 모두 명품이었다. 서울 생활 40년 동안 주택 아파트 빌라 할 것 없이 1층에만 살았다. 모네처럼 연못 만들어 수련 키웠고, 미국의 타샤튜더 할머니처럼 차 마시며 디기달리스꽃 감상했다. 베란다에 분재 키우고, 관음죽 천리향 키웠다. 양재동 꽃시장에는 40년간 알고지낸  여인이 있다. 새댁 때 종로 5가 노점에서 매화 분재 산 인연으로 지금도 찾아가면 커피 내놓는다. 

  이렇게 타향의 꽃에 묻혀 살던 어느 날 이다. 문득 비온 뒤 들판에 떠오르던 무지개처럼 고향꽃이 마음에 떠올랐다. 그건 촌스러워 아무 것도 아니라고 그동안 외면하던 꽃이다. 봉선화 채송화가 그렇게 가슴 저미게 하는 꽃인 줄 예전엔 미쳐 몰랐다. 여시도 죽을 때 고향 하늘 바라보며 운다고 한다. 고향꽃과 그때 사람들이 가슴 저미도록 그립다.  

 망경동엔  넓은 정원이 있었고, 우물이 있었고, 꽃을 키우던 어머님이 계셨다. 봉선화꽃 따가던 동네 아낙이 있었고, '울 밑에선 봉선화야' 쑥국새 울음처럼 슬픈 타계한 여동생 노래가 있었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고향' 신안동  할아버님 집가엔 소복한 여인같은 찔레꽃이 서럽게 피었다. 거기 노란 저고리 입고 시집 와서 일찍 타계한 사촌형수가 살았고, 손자들 가면 말 없이 수박 참외 담긴 지게 옆에 놓고 가시던 할바시가 살았다. 대밭에 보라빛 칡꽃 피던 배건너에는 한 소녀가 살았다. 나는 아직도 그 집 탱자나무 울타리에 핀 꽃을 별처럼 하얗고 청초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T.S.엘리오트는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 고 읊었다. 나는 이제 타향의 꽃보다 고향꽃을 더 사랑한다. 그 꽃에서 소년 시절 사랑하던 사람을 본다. 4월은 잔인한 달이다. 봄마다 시나브로 꽃은 지고, 그리운 사람들도 진다. 그들은 달빛 속 실루엩,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는 음악처럼 되었다. 그러나 얼마나 슬프고도 감사한 일인가. 해마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꽃이 피면 그 사람이 다시 눈 앞에 보인다는 사실이. (문학시대 2010년 여름호)

 

 

고향의 꽃 

  

 타향살이 50년에 이젠 꽃도 고향꽃이 그립다. 망경남동 41번지 우리집 봉선화는 우물에 물 뜨러 온 동네 아낙 손톱을 모두 물들이고도 남아 세들어 살던 서울서 내려온 진주 농대 교수 부인 은경이엄마 손톱도 빨갛게 물들이곤 했다. 봉선화는 사람 키만했고, 닭똥으로 키운 달리아는 사람 머리통만 했다. 채송화 백일홍 결명자꽃이 빨강 주황 노랑으로 도배를 하고, 내가 만든 연못엔 습천못에서 잡아온 붕어하고 메기가 살았다. 대문 밖 나가면 집들이 탱자나무 울타리라 봄철이면 향기로운 하얀 탱자꽃이 피곤했다.

 그러다가 63년에 서울 올라와서 딴 꽃에 눈이 팔렸다. 우선 대학 캠퍼스 캠버스에 핀 라일락꽃을 만났다. 그 보라빛 라일락은 서울 여학생들처럼 세련되고 깔끔했다. 그에 비하면 그동안 정들었던 고향 봉선화나 탱자꽃은 촌스러웠다. 짙은 라이락 향기 퍼지던 벤치에 앉아있던 여학생 이미지에 울타리에 탱자꽃 하얗게 피던 소녀 이미지는 가려졌다. 그후 나는 철학과 동문인 아내와 결혼했다. 모교에 갔다가 옛날 캠퍼스에서 낡은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주던 허리 구부정하던 늙수구레 사진사를 만났다. 그는 늙고 형색이 더 초라해졌고, 당시 데리고 다니던 어린 딸은 이젠 처녀티가 박혀있었다. 마침 라일락 꽃도 피었겠다 그때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 내 서재에 걸려있다. 40년 전이지만 거기선 지금도 아내와 나는 청춘이다. 

 

 

 타향서 본 두번째 인상적인 꽃은 칸나다. 그 꽃이 부산 유엔묘지 옆에 있던 우리 부대 철조망 옆에 피곤 했다. 나는 대학 1학년 때 자원입대하여 항만사 소속 229 자동차 대대 운전병 되어 일찌감치 기압이란 기압은 모두 받았다. 물 적신 고무호스에 초죽음 되어 차량보초 나가서 초겨울 차그운 날씨에 철조망 밑에 피어있던 이슬 젖은 칸나 보면 고향 생각 간절했다. 그 요염하던 붉은 빛 주홍빛 노란 빛 지금도 생각난다.

그 초겨울 차그운 날씨에 철조망 가에 피던 이슬 젖은 칸나가 그렇게 요염했다.   

 세번째 타향에서 본 꽃은 제비꽃이다. 나는 제대 후 글 쓴다고 섬으로 돌아다녔다. 남해 미조리 낮으막한 돌담에 작은 보라빛 제비꽃이 피어있었다. 민박집엔 새댁과 금순이가 살고 있었다. 제비꽃처럼 앙징맞은 금순이는 초등학교 1학년이다. 원양어선 선원인 아빠가 집에 없어선지 학교 다녀오면 늘 내 곁에 붙어다녔다. 금순이가 등대 넘어 파도 잔잔한 바다로 나를 안내했다. 둘은 거기서 조개도 잡고 헤엄도 쳤다. 내외한다고 얼굴 보이지 않는 새댁 대신 금순이가 밥상도 들고왔다. 세월이 지난 후 찾아가 수소문 해보니, 책갈피에 끼운 작은 제비꽃같은 금순이를 아는 사람이 없었다. 

 불교신문 다닐 때 원고 수주하면서 문인들 만났다. 쌍계사 백운(白雲)스님은 내게 지리산 춘난 갖다주었고, 중앙포교사 김어수(金魚水) 시인은 향기 풍기던 풍난 석부작을 책상 위에 길렀다. 사당동 미당(未堂) 선생은 뜰에 파초를 키웠고, 동승동 이희승 선생 댁 골목엔 오동나무가 있었다. 오동꽃은 보라빛 꽃빛도 곱지만 향기도 신비롭다. 그 꽃을 불교학자 이기영 교수 여비서에게 바치고 데이트 한 적 있다.

 결혼한 후는 장미를 키웠다. 아내가 다니던 이화 교정에 장미가 많았다고 한다. 우리는 종로5가, 상일동, 파주 등 서울 이름난 장미원 안가본데 없다. 불원천리(不遠千里) 꽃을 골라왔기에 우리 백장미, 노랑장미, 피스장미는 모두 명품이다. 그 재미에 서울 생활 내내 아파트 빌라 막론하고 1층에 살았고, 미국의 타샤튜더 할머니 책을 애독했다. 양재동에는 40년 내 단골 분재집 있고, 해외여행은 캬툴레아 심비디움 앞에서 많은 시간 보냈다.

 

 

 이렇게 내가 평생 꽃을 좋아한 발단은 어머님 때문이다. 우리 집은 마당이 넓어 닭을 키웠다. 닭똥 거름먹은 봉선화는 싱싱해서 키가 어린애 가슴팍에 닿았다. 모광화(母光華)란  불명(佛名)을 가지셨던 어머님은 인심이 좋았다. 물 뜨러 온 동네 아낙들은 봉선화로 손톱에 꽃물 들이고 우리 꽃을 칭찬했다. 나는 화단에 돌로 연못을 만들고  그 위에 보라빛 꽃 피는 싸리나무 심어놓고 붕어를 키웠다. 채송화 달리아 맨드라미 모두 싱싱했고 달리아는 꽃 하나가 달덩이만 했다.꽃들이 서울와서 50년 살면서 그동안 정붙인 서울 꽃 제치고 이젠 더 보고싶다.

 할아버지가 사시던 신안동에는 찔레꽃 곱게 피었다. 찔레꽃은 소복한 여인처럼 서럽다. 작은 하얀 꽃과  노란 꽃술 향기롭다. 뻐꾹새 울 때 허기진 우리는 찔레순을 꺽어먹곤 했다. 그때  삶은 감자 소쿠리에 담아오던 사촌 여동생 지금 진주의 병원장 부인이 되어있다.

  나는 하얀 탱자꽃을 별처럼 청초한 꽃으로 생각하고 있다. 내가 좋아한 소녀가 탱자나무 울타리에 쌓인 집에 살았기 때문이다. 첫사랑은 비온 뒤 잠시 떴다 사라지는 무지개 같지만, 그 바람에 나는 탱자꽃을 세상 가장 순결한 꽃으로 생각한다.

고향에는 이밖에도 보라빛 칡꽃, 분홍빛 복숭아꽃 살구꽃, 노란 원추리꽃이 피는데, 청춘에 고향을 떠나서 그런지 낙화유수 이제 나는 타향살이 50년에 이젠 꽃도 고향꽃이 그립다. 시도 죽을 때 되면 고향하늘 쪽 보고 운다고 한다. 타향살이 할만큼 해서 그럴 것이다. 망경남동 41번지 우리집 봉선화는 우물에 물 뜨러 온 동네 아낙 손톱을 모두 물들이고도 남았다. 봉선화 하나가 사람 키만했다. 그 봉선화 몇그루가 우리집에 세들어 살던 서울서 내려온 진주 농대 교수 부인 은경이네 손톱도 빨갛게 물들이곤 했다. 드리와 삵바느질로 생계 은필년이네 은경이네 와 그 그 다음 그리운 꽃은 우리 할아버지 사시던 신안동 야산 찔레꽃이다. 하얀 꽃잎  노란 꽃술 찔레꽃은 소복의 여인 같았다. 어딘가 슬펐다. 그 다음 고향꽃은 소녀네 울타리에 피던 하얀 탱자꽃이다. 그 소녀 때문일 것이다. 나는 지금도 탱자꽃을 별처럼 청초한 꽃으로 생각하고 있다. 

  

 4월은 잔인한 달인지 모른다. T.S. 엘리오트의 '황무지'란 시를 보면 '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봄비로 잠든 뿌리를 뒤흔든다.'로 시작된다. 낙화로 분분히 떨어지는 꽃잎 보면 나 역시 추억과 욕망이 사정없이 뒤섞인다. 그때 나는 유년 시절 봉숭아꽃 찔레꽃 탱자꽃이 핀 추억의 꽃길로 들어선다. 그 오솔길에는 세월 속에 흘러간 사람, 그리운 사람이 꽃이 되어 나타난다. 꽃은 말이 없지만, 멀리서 들리는 음악처럼 어머님의 목소리 희미하게 들린다. 달빛 속 실루엩처럼 소녀의 모습 희미하게 보인다. 이 얼마나 슬프고 감사한 일인가. 사람은 만날 수 없지만, 해마다 마음 속에 비단처럼 고운 꽃길은 다시 열린다는 사실이. 

                                                                                           (문학시대 2010년 여름호)

 

 

   진주 여인

 

 추석에 지리산 사는 친구가 감을 보내와 모처럼 서울서 단성감 맛을 본 적 있다. 처음 본 단성감 모습은 못생기고 촌스러운 면이 있었다. 크기와 단맛 둘 다 악양 대봉시보담 못했다. 그러나 과육이 쫀득쫀득 차지고 결로 찢어지는 그 맛이 악양 대봉시가 형님하고 부를만한 데가 있었다. 악양 대봉시는 크고 달긴 하지만 과육이 쫀득쫀득 하거나 차지고 결로 찢어지는 그런 묘미가 없다. 단성감은 고동시 먹감 돌감 따바리감이라 부르지만, 씨가 없어 먹기 편하고 값도 착하다. 나야 진주 살 적에는 그  진가를 몰랐지만, 조선 천지 감이란 감은 다 맛본 칠십 넘어 서울에서 단성감 그 천하 명품 진가를 알게 되었다. 옛날부터 진주 사람들이 이 감을 알아준 이유 알만했다. 

 

 

  

  그후 나는 진주여인이 단성감 같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객지 떠돈지 40년 지나서다. 원래 진주는 남인수 이재호 손목인 이봉조 배출한 음악 도시다. 진주에서 친구 만나 식사 후 노래방에 갔는데, 서울서 내려온 친구 심심치 말라고 그가 자기 산악회 총무를 불렀다. 그런데 그 총무님이 진짜 진주 여인이었다. 나는 그 분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서울 여인은 세련되지만 바늘 틈 하나 들어갈 틈이 없고 여유가 없다. 그런데 그분은 수줍고 부드럽기만 했다. 꼭 약수암 근처에 핀 진달래꽃 같았다. 진주 여인의 특성은 무엇인가. 인근에서 생산되는 과일과 야채 같다. 부드럽기는 신안동에서 자란 토란처럼 부드럽고, 시원하기는 도동의 수박처럼 시원하다. 달콤하기는 비봉산 산딸기같이 달콤하고, 연하기는 습천못 무화과처럼 연하다. 성품은 촉석루 밑 석류처럼 새콤달콤하고, 피부는 비온 칠암동 대밭 속에 돋는 죽순처럼 하얗고 보들보들하다. 봄이면 들판에서 쑥 캐고, 여름이면 봉선화 꽃물 들인 손으로 남강에서 빨래한 그 진주 여인이다.

 이 천년기념물 진주 여인이 용모도 고운데다 예술의 도시 여인답게 노래도 일품이다. 어째 이리 평범 속에 비범을 감췄나 싶었다. 단성감처럼 걸기적 거릴 씨도 없고,  쫀득쫀득 묻어오는 정, 결로 찢어져오는 고운 마음씨만 있다. 나는 그날 깊이 깨달은 바 있다. '삼천리 방방 곡곡 아니 간 곳 없다마는, 비봉산 품에 안겨 남강이 꿈을 꾸는, 내고향 진주만은 진정 못하다'는 것을. 역시 여인은 진주 여인이 천하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