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부활

김현거사 2018. 6. 30. 06:41

  부활

 

 <부활>은 톨스토이의 3대 대작 <전쟁과 평화>, <안나카레니나>, <부활> 중 마지막 작품이다. 러시아의 주간지 NiVA에 연재한 것인데, 톨스토이는 당시 러시아 정교회 한 분파인 Dukhobors파의 카나다 이민 재정착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 작품을 연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귀족 청년과 하녀의 비극적인 사랑'을 통하여 당시 러시아 사회의 치부, 계급사회의 모순, 벌률의 허점을 너무 날카롭게 비판하여 원래 소설 완본은 러시아에서 간행되지 못하고, 외국에서 먼저 간행되어 러시아로 밀수되어 읽혀졌고, 작가 톨스토이는 교회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 때문에 정교회에서 파문 선고를 받았다. 이때 '어떤 권력도 나를 神으로부터 파문하지 못할 것이다' 라는 톨스토이의 답변이 유명하다.

 톨스토이는 임종 얼마 전에 자신의 전기 작가 비류코프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누구한테도 안 한 얘기일세. 이 얘기를 내 전기에 넣어주게.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두 가지 큰 죄를 지었네. 결혼 전에 아크시니야 등 몇몇 소작인 여자와 관계를 가졌네. 또 하나는 숙모님 댁에서 일하던 가샤라는 하인을 건드린 죄일세. 그녀는 순결한 처녀였는데 내가 유혹했기 때문에 숙모님 댁에서 임신이 탄로나 쫓겨나서 신세를 영 망치고 말았네.'

이로 보면 이 작품은 톨스토이의 일종의 참회록이요 유언서에 가깝다.

 

 우리나라 가수 송민도가 노래한  '카투사의 노래' 가사를 보면, '마음대로 사랑하고 마음대로 떠나가신 첫사랑 도련님과 정든 밤을 못 잊어/ 얼어붙은 마음속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오실 날을 기다리는 가엾어라 카투사/ 찬바람은 내 가슴에 흰 눈은 쌓이는데 이별의 슬픔 안고 카투사는 흘러간다.'고 나와있는데, 그 가사 그대로다.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은 두 개의 모티브가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전기 작가 비류코프에서 고백한 자기 체험 고백 이다. 톨스토이는 1828년 백작 집안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는데, 세 살 때 어머니, 열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고모 밑에서 자랐다. 1844년 16세 때 카잔 대학에 합격했고 또 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사 자격 검정시험을 치러 두 과목에 합격한 후 사교계에 출입하면서 도박과 주색에 빠져 임질에 걸려 고생할 정도로 방탕했다. 그 당시 숙모님 댁에서 일하던 가샤라는 순결한 하인을 건드렸고, 가샤는 톨스토이가 유혹했기 때문에 숙모님 댁에서 쫓겨나 신세를 영영 망치고 말았다. 그 체험이 하나의 모티브다.

 두 번째 모티브는 코니라는 변호사한테서 들은 실화가 그 바탕이다. 핀란드 어느 별장지기의 딸 로자리아는 대학 갓 졸업한 청년에게 농락당해 임신한 뒤 주인집에서 쫓겨나 매춘부로 전락했다. 페테르부르크  매음굴에 살던 그녀는 술 취한 손님의 돈 100 루블을 훔친 죄로 4개월 금고형을 받는다. 그때 그 재판 배심원 중 하나가 로자리아에게 그 짓을 한 남자였다. 남자는 잘못을 반성하고 당시 이 재판의 검사였던 코니를 찾아와 상의한 후, 코니가 만류하는 데도 불구하고 매일 구애해 여자로부터 결국 결혼 승낙을 받아냈다. 그 후 금식기간 끝나면 식을 올리려고 준비하고 있던 터에 신부 될 여자가 발진티푸스로 죽고 말았다.

 

 톨스토이는 코니한테서 이 이야길 듣고 1889년부터 '코니의 이야기'라는 초고를 쓰기 시작하여 1899년 가을에 탈고했다. 톨스토이가 마지막 인생 꼬박 10년에 걸쳐 쓴 소설이 이 <부활>이다. 여기서 주인공 네프르도프는 톨스토이와 그 재판 배심원 둘의 분신이라 할 수 있고, 여자 주인공 카츄샤는 가샤와 로자리아의 복합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로망 롤랑은 그래서 이 책을 톨스토이의 유언서라고 불렀다.

 

  Synopsis(개요)

 

  1958년 서독 Rolf hansen 감독에 의해 <復活. Resurrection>이란 이름으로 제작된 영화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 네플류도프는 지방재판소의 배심원으로 어느 날 법정에서 살인 절도 혐의의 한 여인을 만난다. 그 죄수는 10년 전 그가 범했던 카츄샤 마스로바였다. 고아였던 카츄샤는 어머니가 일했던 주인집에서 길러졌고, 그 집 아들인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네플류도프를 사모하는 당시 18세였던 티 없이 맑고 아름다운 처녀였다. 그러나 네플류도프는 카츄사를 하루 밤 농락의 대상으로 생각하여 범하였고, 카츄샤가 임신하자 몇 푼의 돈을 쥐어주고 내보냈다. 주인집에서 나온 그녀는 사생아를 낳았으나 아이는 곧 죽고 만다. 방황하던 그녀는 끝내 윤락의 구렁텅이에 빠져 창녀로 전락하게 된다.

 그후 카츄샤는 26세 때 어떤 부유한 상인이 심장마비로 쓰러지는 현장에 있게 되었는데, 그 상인의 돈을 빼앗기 위해 독살했다는 혐의로 법정에 끌려간다. 카츄샤는 울부짖으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법정 배심관 중 한 사람이 네플류도프 였다. 네플류도프가 보기에 카추샤의 무죄는 의심할 나위가 없었으나, 그녀의 유죄를 주장하는 사람에 맞서 그녀를 옹호할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곧 나와 그녀와의 관계를 알게 될 터이지' 하는 우려감에서 였다. 재판관은 수속상 서식의 불비로 해서 그녀를 시베리아로 보내라는 판결을 내린다. 그 결과를 보자 네플류도프는 그녀에 대한 죄책감으로 몸을 떨며 그녀에게 용서를 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날 이후 네플류도프는 지금까지 지속되어 온 유부녀와의 아름답지 못한 관계를 끊고, 또한 결혼 상대였던 코르차진 가의 처녀 미시와도 인연을 끊는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카추샤에 대한 자기의 죄가 사라졌다고 생각되지 않아, 변호사와 공소장을 작성한 후, 감옥으로 가 그녀에게 결혼을 신청하지만, 카츄샤는 증오의 눈길로 그를 바라본다. 그러나 결국 카츄샤는 네플류도프의 진심에 감화되어 내면적으로 순수한 본래 마음으로 돌아간다.

  

<1934년 프랑스에서 제작된 '부활'>

 그녀는 이제 솔직하고 인간미 넘치는 사회 개혁자 시몬슨에게 마음이 끌리고 있었다. 시몬슨 또한 네플류도프에게 그녀와 결혼하겠다는 뜻을 밝히는 것이었다.

시베리아는 눈보라에 갇혀 있었다. 네플류도프는 어느 날 카추샤에게 황제의 특사가 내렸다는 소식을 받게 되었다. 그는 기쁨에 넘쳐 즉시 카추샤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녀는 그에게 감사하다는 말은 하면서도 그 특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시몬슨과 더불어 유형 생활을 계속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었다. 그는 이미 그녀에게 아무 쓸모가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에게는 그것이 슬프기도 했고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그를 괴롭히는 것은 그 점만은 아니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봉사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밤을 꼬박 새운 네플류도프에게는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제 네플류도프에게는 두 개의 길이 놓여 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철저하게 살인죄를 뒤집어쓴 카튜사를 모른척하거나,

아니면 지금이라도 자신 때문에 뒤틀려버린

카튜사의 인생을 되돌려놓는 길이다.

네플류도프는 결국 후자의 길을 선택하고,

그 길은 자신의 결심과, 자신의 의지보다는 훨씬 더 험난하고

가시의 융단이 끝 간 데 없이 깔려 있는 고난의 길을 걸어간다.

하지만 네플류도프는 그 가시의 길을 맨발로 걸어가면 걸어갈수록

자신의 내면속에는 지금껏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희열이 자신을 에워쌈을 깨닫게 된다.

 

 그 이후부터 네프로도프는 끈질기게 면회를 다니면서 몇가지 사실을 알게된다. 교도소란 악한 사람들이 수감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도 수감되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사람들이 세상을 살기 좋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제도들을 만들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제도가 사람들을 얽메이게 하고 있다는 겁니다.
대표적으로 법정에선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엄벌하지만 오히려 범죄자가 된 까닭에 다시 범죄를 저질러야하는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죄인이 된 것은 다만 그를 그렇게 만들어버린 환경 속에 놓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젊은이가 없개 하려면 이런 불행한 인간을 만들어 내는 환경을 없애도록 애쓰는 것이 중요하다.



거부의 딸 마리아 코르차기나와의 약혼을 파기했고, 은밀히 만나던 유부녀 마리아 바실리에브나와의 관계도 청산한다형이 확정되어 카츄사가 시베리아 유형 길에 오르자 그는 3등 열차를 타고 시베리아까지 그녀를 따라간다.

 

 

  캬츄사는 시베리아 수형생활 중 잡범들의 감방에서 정치범들의 감방으로 옮겨지게 되고 그곳에서 혁명가 시몬슨과 장군의 딸 마리아 파블로브나를 만난다. 그로부터 큰 감화를 받아 카츄샤의 마음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여 급기야 네프로도프를 이해하고 용서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녀는 석방되자 네프로도퓨를 거절하고 시몬슨과 결혼하겠다고 한다네프로도프의 열성에 감동하여 그를 사랑하지만 더 이상 짐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네프로도프는 시몬슨을 따라가는 카츄샤를 바라보면서 한없는 슬픔과 부끄러움을 느낀다. 집에 돌아와 네플류도프는 머리맡에 놓인 성경을 집어드는데 거기서, '일곱 번씩 일흔 번씩이라도 용서하라'는 구절을 읽고 큰 감동을 받는다. 그날 밤 성경을 읽어가던 네플류도프는 하느님의 구원을 확신하고 타인을 위해 제3의 삶을 살 결심을 한다. 

 영화는 여기서 끝난다. 기독교인이라면 꼭 한번 보아야할 영화다.

 

 (*'부활'은 러시아와 프랑스 등에서 여러개 영화로 만들어졌다. 내가 본 영화는 시베리아에서 네프로도프가 카츄샤에게 진정을 호소하여 서로 맺어지는 걸로 되어있었다. 찬바람 몰아치는 카츄샤의 시베리아 유형생활의 비참한 장면이 없어 연민의 정을 폭발적으로 끌어일으키지 못했다. 또 네프로도프가 성경을 읽고 하느님의 구원을 확신하는 짙은 종교적 체험도 주지 못했다. 결말이 밋밋했다. 그러나 다른 영화는 다르다. )

최초로 돈을 받고 판 소설이 부활이다

1910년 10월 28일 부인에게 편지를 남기고

딸 알렉산드리아와 의사를 동반하고 가출..

방랑의 길에 나선다

며칠후 11월 7일 우랄 철도의 아스타포보역의

역장 관사에서 83세의 인생에 작별한다

 


어느 날 재판소의 배심원으로 나온 주인공 네흘류도프 공작은 살인절도 혐의를 받아 재판을 받는 까츄샤를 만난다. 그녀는 청년시절에 자기가 정욕의 대상으로 유린한 순결하고 아름다운 그 까츄샤였던 것이다. 그녀는 임신을 하고 하녀 겸 양녀로 있던 집을 쫓겨나 타락하여 전락해 버린 것이었다. 네흘류도프는 그 타락의 원인이 자기의 무책임한 행동에 있음을 깨닫는다. 그는 이 까츄샤에 대한 양심의 가책과 귀족사회에 속한 자기 생활 태도에 대하여 깊은 의혹을 품게 되고, 동시에 남의 노역으로 포식하게 되는 토지사유제에 대하여 회의를 갖게 된다. 까츄샤의 감형운동을 위하여 감옥에 드나드는 동안에 그는 도움을 바라는 무고한 죄인들을 발견하고 그에 대한 냉혹한 불합리를 목격하게 된다. 그는 일신상의 정리를 위해서 자기 영지에 내려가서 농촌의 궁핍을 눈앞에 보게 되고 또 뻬쩨르부르그에 가서 유력자들을 찾아다니는 동안 귀족 사회의 경박함과 부패를 다시금 인식하게 된다. 그리하여 재판소에서의 인상이 사회 비판과 현대 문명에 대한 규탄으로까지 확대된다. 이 같은 흐름에 따라서 제 1 부에서는 재판소와 감옥을 중심으로서 한 사법 형벌의 세계가 다루어지고, 제 2부에서는 자기 영지의 농민과 빼쩨르부르그 상류사회의 묘사와 죄인호송대의 출발 전후의 사건이 다루어지고, 제3부에서는 시베리아의 죄인호송 여행 이야기가 다루어지고 있다. 결국 네흘류도프라는 한 귀족이 까츄샤라는 한 창녀를 따라 괴로운 시베리아 유형을 자청하여 시베리아의 황막한 벽지에서 끝없이 바라던 용서의 정신으로 영혼의 부활을 발견한다는 내용이다.


작자 자신이 한번도 시베리아의 황야나 감옥을 구경한 일이 없으면서도 눈에 보이듯이 생생하게 표현한 죄인들의 생활, 시몬손을 비롯한 남녀 혁명가들의 생활은 당시의 사회를 아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고 하겠다. 또한 뻔뻔스럽도록 양심이 마비돼 버린 재판관, 오만불손한 부패한 관리, 호화찬란한 껍데기를 쓰고 있으면서도 속은 텅텅 비어 있는 상류사회 귀족들이 경멸적으로 그려진 모습은 이 나라에 혁명이 불가피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제정 말기 압제정치의 옹호자였던 포베노스쩨프가 문교대신 또뽀로프의 가명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기독교의 참 정신을 망각하고 껍데기 의식에만 집착하여 정부의 추악한 주구에 지나지 않았던 러시아 정교회의 공허함이 여지없이 풍자되고 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렇게 볼 때《부활》은 제정 러시아의 부정인 동시에 새로운 러시아의 예언이라고 하겠다. 제정 러시아의 사회생활이 비판되고 해부되어 있을뿐더러, 그 불완전한 사회제도 아래서 신음하고 있던 국민의 이상과 고통과 앙심이 〈세계의 양심〉인 작가의 양심을 통해서 《부활》속에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러시아 문학의 2대 지주인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가리켜, 전자를 지식계급의 대표작가라고 생각한다면, 후자는 러시아 정신의 표현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전자가 러시아의 부조리와 죄악에 대해서 더 많은 사랑으로 속죄하려고 했다면, 후자는 행동으로써 속죄하려고 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부활》에서 토지문제에 큰 비중을 두어 다루고 있다. 그 자신이 큰 영지를 가진 대지주였으며, 국민의 대부분이 농사에 매달려 사는 러시아의 형편으로서 그는 이 문제를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해 깊은 연구를 쌓은 그는, 《부활》에서 스펜서의 〈사회평형론>을 읽고 감명을 받은 네흘류도프가 대학 졸업논문을 〈토지사유론〉이란 제목으로 쓰고, 또 자기 자신의 사상을 실증하기 위해서 상속받은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해 준다는 이야기를 넣어 의의를 부여했던 것이다.


원래 톨스토이는 《부활》에서 네흘류도프와 까츄샤를 결혼시켜 시베리아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게 하면서 중요한 국가개혁안을 기안하여 황제에게 진언하는 형식으로 그의 의견을 직접 소개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 기초안이란 《헨리 조지론》에 입각하여 토지를 국유로 하고 조세를 단일제로 한다는 개혁서였다, 결국 이러한 계획은 피했지만 아무튼 톨스토이는 수많은 등장인물들을 통해서 당시의 잔인한 러시아의 사회조직에 대하여 예리한 비판을 가했다. 그러나 모든 권력과 전제에 대한 매서운 통매를 가하는 톨스토이의 이러한 불온사상에 대해서 당국에서는 그냥 묵과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부활》은 주간잡지 《니바》에 연재되고 있을 때부터 벌써 수많은 삭제가 가해졌다. 이 때문에 《부활》의 완본이 러시아 안에서 간행되지 못하고 외국에서 간행되어 러시아에 밀수되는 형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가차없는 교회에 대한 비판은 종교성의 기피하는 바가 되어 작자 톨스토이에게 정교회 파문선고(1910년)를 내리게 되었다. 이때 그가 교회에 대한 답변을 통해서 어떠한 권력도 그를 신으로부터 파문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성명으로 응수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톨스토이는 《부활》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예수 그 자신은 지금 교회에서 하고 있는 온갖 행위를 다 금했었다. 그리고 사제들이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하는 그러한 장황한 말과 모독적인 요술을 금했을 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들이 딴사람을 스승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금했었다. 교회에서는 기도를 금하고 누구나 혼자서 기도하기를 가르쳤고, 교회 자체를 금했을뿐더러, 자기는 교회를 헐기 위해서 온 것이며, 교회에서가 아니라 정신과 진리 속에서 해야 한다고 말했다.……"


톨스토이는 이같이 교회의 일체의 권위를 부정했다. 교회의 의식, 기만에 찬 미사, 교회 안에서의 우상숭배 등 교회 자체의 존재를 부정했다. 그는 사람들이 기독교의 참된 가르침에 어긋난 생활을 하고 있으며, 위선과 부정과 불평등을 기조로 한 사회가 강압과 허위에 의해서만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부활》에서 강조하고 있다.


한편 톨스토이 자신은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 당한 후 자신의 신념을 다음과 같이 천명했다.


"나는 정신으로서, 사랑으로서, 만물의 근원으로서 이해되는 신을 믿는다. 나는 신이 내 속에 있으며, 또 내가 신 속에 있음을 믿는다. 나는 신이 내 속에 있으며, 또 내가 신 속에 있음을 믿는다. 나는 신의 의지가 인간 예수의 가르침 속에 알기 쉽게 명백히 표현되고 있다고 믿는 것일 뿐, 예수를 신으로 생각하고 그에게 기도를 드리는 것을 가장 큰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또 인간의 참된 행복은 신의 의지를 표현하는 것에 있으며 신의 의지라는 것은 인간이 서로 사랑하고 남을 자기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톨스토이의 이런 사상은 《부활》의 에필로그 속에 선명하게 피력되어 있다. 그는 산상의 설교 속에 모든 본질적인 도덕률이 있다고 믿고, 만일 인간이 불화와 위선과 폭력을 버리고 자유로운 협조와 형제애를 소중히 여기려고 애쓰기만 한다면 이 지상에서도 신의 왕국을 건설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마태오의 복음서》 제5장 중에서 이 해답을 찾았고, '어떠한 악이라도 거기에 항거하지 말라'는 설교를 지상명령으로 믿었다. 그리고 그의 독특한 〈무저항주의〉와 〈무교회주의〉는 러시아 정신생활의 중심이 되었으며 전세계에 새로운 사상적 파문을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톨스토이는 무저항을 설교하면서도 자기의 세계가 공격당할 때는 성난 사자와 같았다. 그는 어떠한 권위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당시의 제도, 도덕, 생활양식을 비판했다. 바로 여기에 톨스토이의 비극이 있었던 것이다. 즉 그 거부의 효력은 사랑과 자비를 요구하는 호소보다도 훨씬 강했던 것이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모든 점에서 완전무결하게 자기의 무저항주의에 철저했다면 그는 이미 인간이랄 수가 없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인간다운 인간, 성자 아닌 거룩한 인간 속에서 우리는 가장 다정한 벗으로서의 인간 톨스토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톨스토이가 《부활》에서 자기가 사상과 감정의 일면을 대표시키는 인물로서 기꺼이 네흘류도프의 이름을 내세운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미 그의 초기의 작품 《지주의 아침》(1856년)이나 《청년시절》(1857년)에서 드미트리 네흘류도프라는 인물을 보아왔다. 이것은 이미 작자 자신의 주관적 자서전적 인물의 하나로 톨스토이 정신생활의 어느 한 시기를 대표하고 있다. 그런데 톨스토이는 그의 만년에 《부활》이라는 위대한 예술적 경험을 종합함에 있어서, 또다시 드미트리 네흘류도프의 이름을 새로이 등장시켜 1890년대의 자신의 사상을 대표시키고 있다.


네흘류도프에게는 지적 방종이나 정신적인 방황이 거의 없으며, 정신의 균형과 합리성이 그 특징으로 되어 있다. 이 같은 네흘류도프의 특이성은 《부활》에서 보듯이 도덕적 경험의 통제에 꽤 적응되어 있다. 또한 네흘류도프에게는 《청년시절》의 주인공 이르쩨니예프가 《까자흐 사람들》(1863년)의 주인공 올레닌이나 《안나 까레니나》(1877년)의 등장인물 레빈이 겪는 정신적 혼란도 소요도 없다. 네흘류도프의 내면세계는 투명하게 곧잘 우리 앞에 전개되어 있다.


"네흘류도프의 마음속에도 보통 사람과 마찬가지로 두 가지의 자아가 있었다. 그 하나는 다른 사람에게도 행복이 될 수 있는 자아만을 찾는 정신적인 자아였다. 또 하나는 자기 행복만을 찾고 이를 위해서는 만인의 행복도 희생시키려는 동물적 자아였다." (제1부제14장) 그러나 최초의 몇 장을 읽게 되면, 네흘류도프의 마음속의 동물적 자아가 정신적 자아를 압도한 것은 극히 일시적이었음을 대뜸 알게 된다. 많은 관계에 있어서 규범적 현상이기나 한 것처럼 보이는 동물적 자아는 네흘류도프로서는 변태적 현상이며, 그의 본성의 악신이며, 이기주의적인 발작에 지나지 않는다. 네흘류도프는 본래"도덕적 요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희생은 고상한 정신적 기쁨을 가져오게 한다."(제1부 제12장)고 생각하고 있는 인간이었다.


이 정신적 자아의 동물적 자아에 대한 승리, 이를테면 그의 갱생, 즉 "부활이 너무나도 빨리, 그리고 힘차게 그의 눈뜬 양심 속에서 이루어져가고 있다." "그렇다, 까츄샤를 만나서 사과하자. 그렇다. 어린애가 하듯이 빌자." "주여, 저를 도와주소서. 저를 가르쳐주소서. 나의 마음속에 들어오셔서 모든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주소서!"(제1부 제28장). 그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린다. 이 눈물은 그의 마음속에서 잠자고 있었던 정신적 존재에 대한 각성이기 때문에 선의 눈물인 것이다. 이 같은 사상은 바로 그의 《인생론》(1887년)에서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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