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기고 글

눈 온 아침/남강문학 2010년

김현거사 2011. 6. 16. 16:51

눈 온 아침 

              김창현


새벽 6시에 밖을 보니 눈이 내리고 있다.눈은 화단 사철나무 울타리  푸른 잎에,텅 빈 어린이 놀이터 빈 그네 위에 내리고 있다.혼자 눈내리는 뜰 한참 보다가 문득 거실 베란다 매화 한송이가 핀 것을 발견했다.년초에 직장 후배한테 받은 매화다.하얀 향기가 주변 공간에 가날프게 퍼지고 있다.한송이만 홀로 피었고,가지엔 또다른 여나믄개 꽃몽오리가 맺혀있다.그가 나에게 붉은 紅梅가 아닌 푸른 靑梅를 준 뜻 알만하다.푸른 빛 도는 白梅를 靑梅라 부른다.청매 그 맑고 푸른 빛 보라는 것이다.정도전은 매화를 이리 읊었다.<옥을 쪼아 만든 듯 깨끗한 모습과 얼음처럼 찬 기운이 눈 속에서 핌은,선비가 누속에 물들지 않고  청정한 자세로 살아가는 모습과 같다>고.

나는 그에게 내 수필집과 통도사서 사온 무명베 한조각을 주었다.베에 반야심경이 찍혀있으니,그가 비자나무 차탁에 오지 찻잔 올려놓기 좋을 것이다.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마음으로 차 마시라는 뜻이다.

하필이면 눈 오는 아침에 청매가 꽃 피울게 뭐람.코를 대니 매화 향기 맑고 달콤하다.그 가날픈 향기는 오래 이어온 그와의 인연같다.보통 인연이면 은퇴 후 10년이면 끝나는데 그는 다르다.

눈 오는 아침을 그냥 보낼소냐.맹호연은 나귀를 타고 破橋를 건너 설산에 들어가 매화를 찾았다고 한다.친구와 법륜사 옆으로 광교산엘 올랐다.여름에 푸르던 계곡물 꽁꽁 얼어붙었고,옷 벗은 신갈나무 숲에 싸락눈이 내린다.눈 내린 산길은 고요한데 아무도 밟지않은 눈길 숲속으로 뻗어있다.581미터 시루봉 정상은 은빛 세계다.빤짝빤짝 눈가루는 천지에 흩날리고,눈으로 은회색이 된 솔잎 하늘을 덮었고,기암괴석에 쌓인 눈은 참 소담스럽다.암봉 하나 하나가 태산처럼 신비롭다.그 중 은가루 덮어쓴 키 작은 철쭉이 가장 아름답다.은반 위 하얀 바레리나처럼 바람에 춤추고 있다.환상의 백설 궁전에 초대된 느낌이다.올 겨울 가장 아름다운 풍경에서 놀다가 조심스레 지팡이 짚고 천천히 광교산 내려왔다.

빈 호주머니 탓 할 것 없다.검소함을 준다.고물 손전화 탓 할 것 없다.속세와 단절시켜 준다.한파 탓 할 것 없다.백설향으로 초대한다.매화 향기 맛본 후 설향을 거닐었으면 그로 족하지 않은가.(09년 1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