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성현감 사직소(丹城縣監 辭職疏)/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년, 소백산 아래 안동에서는 퇴계 이황이 태어났고, 지리산 아래 삼가(三嘉)에서는 남명(南冥) 조식(曺植 : 1501∼1572년)이 태어났다. 두 분은 동갑내기다.
퇴계는 소백산의 정기를 받아 설득력 품은 자모(慈母)와 같고, 남명은 지리산 정기를 받아 직선적이고 대쪽같은 엄부(嚴父)의 기풍을 지녔다.
실학자 이익은, 경상좌도의 퇴계는 성리학의 뿌리인 인(仁)을 세상에 펼쳤고, 경상우도의 남명은 일상생활에서 의(義)를 실천했다고 평했다. 사람들은 퇴계학파는 낙동강 좌편 강좌학파(江左學派)요, 남명학파는 낙동강 우편 강우학파(江右學派)라 부른다.
학문적 경향은, 퇴계는 주자학 이론에 일생을 바쳤고, 남명은 정자(程子), 주자(朱子) 이후에는 저술이 불필요 하다는 신념으로, 이론 보다 가르침을 실천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남명은 '경(敬)으로써 내면을 밝혀 마음을 곧게 하고 의(義)로서 행동을 결단하여 모든 사물을 처리해 나간다는 생활철학 이었다. 수기치인(修己治人), 실천궁행(實踐躬行), 즉 '몸소 갈고 닦은 것을 실제로 행동에 옮긴다,'는 실천을 강조했으며, 음양(陰陽), 지리(地理), 의학(醫學), 관방(關防) 등 현실에 활용되는 것을 추구한 실용주의(pragmatism)였다.
남명은 퇴계와는 단 한 번도 만나지는 않았지만, 세 차례 서찰은 주고받았다. 남명은 초학자들에게 심경,태극도설을 먼저 가르치는 퇴계의 교육을 비판하고, 소학, 대학 등 기초적인 내용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연히 퇴계와 기대승의 4단 7정 논쟁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었다. 사람이 도회지의 큰 시장에 놀러가면 진귀한 금은 보화가 즐비하다. 종일 거리를 오르내리면서 그 값을 묻곤 하지만 끝내 자기집에서 쓸 용품은 아니다. 차라리 내 한 필 포목으로 생선 한 마리 사가지고 오는 것만 못하다. 지금 학자들이 성리만을 말하여 자기에게 이익이 없으니 어찌 이것과 다르겠는가. 인사를 버리고 천리를 논하는 것은 한갓 입에 발린 이치이며,자신을 반성하여 실천에 힘쓰지 않고 견문과 지식이 많은 것은 바로 입과 귀로만 하는 학문이다.
퇴계는 예순 넘도록 벼슬 나아감과 물러남을 반복하며 사직서를 79번 썼지만, 남명은 수차례 조정의 벼슬 제의를 모두 거절했다. 퇴계가 임종 시, 영정에 벼슬 이름을 적지 말고 처사라고 쓰라는 말을 듣자, 남명은 '할 벼슬 모두 다하고 처사라니! 진정한 처사(處士)야 말로 나 뿐이야' 라고 말하였다.
선생의 자(字)는 건중(楗仲)이요, 호(號)는 남명(南冥), 산해(山海), 방장산인(方丈山人)이라 불렀다.
연산군 7년(1501) 합천군 삼가면 토동(三嘉面 兎洞)에서, 아버지 언형(彦亨), 어머니 이씨 사이 삼남 오녀 중 이남(二男)으로 태어났다. 본가는 삼가 판현(三嘉 板峴)에 있었고, 토동(兎洞 )은 선생의 외가다.
5세 때까지 외가에서 자라던 선생은 아버지가 장원급제 하자 서울로 이사했다. 아버지 조언형(曺彦亨)은 문과에 올라 벼슬이 외교문서(外交文書)를 관장하던 승문원(承文院) 최고 우두머리 정3품 판교(判校)를 지냈다.
1519년(19세, 己卯) 기묘사화가 일어나 작은 아버지인 조언경이 조광조 일파로 몰려 죽고, 아버지 조언형도 파직되었다.
남명은 20세에 생원, 진사 양과(生員 進士 兩科)에 일, 이등으로 급제했고, 고문(古文)에 능하여 시관(試官)을 놀라게 하였다.
25세 때 성리대전을 접하고 크게 깨달았다. '벼슬에 나가서는 유익한 일을 하고, 집에 있으면 지조를 지킨다. 대장부가 벼슬을 하면서 하는 일이 없고 집에 있으면서 아무런 지조가 없으면, 배우고 익힌 것을 어디에 쓸 것인가?'
그는 여기서 방향을 잡고, 그때까지 공부하던 것을 다 버리고 오로지 4서(論語, 大學, 中庸, 孟子)와 6경(易經, 詩經, 書經, 春秋, 禮記, 樂記)만 전념하였다.
26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고향인 삼가(三嘉)에 장사지내고, 3년 려묘생활(廬墓生活)을 하면서 가난과 민생의 고초가 어떤 것인가를 체험했다.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에 이사하여 거기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안정된 공부에 들어갔다.
38세에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고사하고, 1544년 관찰사의 면담도 거절하였다.
1549년 명종 4년 전생서주부에 특진되었으나 고사하고, 집 근처의 계복당과 뇌룡사를 지어 강학에 전념하였다.
1544년 벼슬길에 나가라는 퇴계의 권고를 거절하였다.
1545년 인종 즉위 후 조정에서 불렀지만 나가지 않았고, 명종 즉위 후 여러 번 불렀으나 사직상소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48세 때 18 년간 살던 김해를 떠나 고향인 토동에 돌아와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짓고, 후진을 가르치면서, 처사(處士)의 언론(言論)으로 국정을 비판하였다.
뇌룡(雷龍)이란, 장자의 淵默而雷聲, 尸居而龍見,(깊은 연못처럼 고요하다가 우뢰처럼 소리치고, 죽은 듯이 가만있다가 용처럼 나타난다.)는 뜻이다.
호(號) 남명(南冥) 역시, 장자의 <
이때부터 사림(士林 )은 그를 영수(領首)로 추앙하기 시작했고, 조정은 그 세력을 포섭하기 위해 벼슬길로 나오도록 했으 나, 사퇴했다.
55 세 때 단성현감에 임명되었으나, 그 유명한 <단성현감 사직소(丹城縣監 辭職疏)>를 올리고 나가지 않았다.
*요즘은 장관 자리 하나 얻어도 너나 없이 대통령 눈치나 보다가 쫒겨나는 세태이다. 국회의원, 장관이 자랑 아니다. 여기 남명이 단성(丹城) 현감을 사직하면서 당시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을 소개한다.
조선조 500년 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이 파천황(破天荒) 상소문은 왕과 대비를 진노케하고, 조정 중신들을 놀라게 하고, 사림(士林)이 겁에 질려 손에 땀을 쥐게 하였다.
그러나 이 상소문을 받자, 왕은 남명이 초야에 묻힌 선비라는 구차한 말로 변명하며, 감히 남명을 처벌할 수 없었다.
단성현감 사직소(丹城縣監 辭職疏)
선무랑(宣務郞)으로 새로 단성현감에 제수된 조식은 진실로 황공하여, 머리 조아려 주상전하께 소를 올립니다. 엎드려 생각건데, 돌아가신 임금님(중종)께서 신이 보잘것 없는 줄 알지 못하시고, 처음에 신을 참봉에 제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전하(명종)께서 왕위를 계승하셔서는 신을 주부(主簿)에 제수한 것이 두 번이었거니, 이번에 또 현감에 제수하시니, 신은 떨리고 두려워 미쳐 큰 산을 짊어진 것 같아, 감히 인재등용에 정성을 쏟고 계시는 임금님 앞에 나아가 하늘의 해와 같은 그 은혜에 감사드릴 수 없습니다.
신이 생각하건데, 임금이 인재를 등용하는 것은 마치 대목(大匠)이 목재를 취해 쓰는 것과 같습니다. 깊은 산 큰 골짜기에 버려지는 재목이 없도록 모든 좋은 재목을 다 구해다가 훌룽한 집을 이루는 것은 대목에게 달렸지 나무가 스스로 참여할 일은 아닙니다.
전하께서 인재를 등용함은 한 나라를 알아 다스리는 책임입니다. 전하의 인재를 등용하려는 큰 은혜를 감히 사사로운 일로 생각할수 없습니다. 신은 혼자서 걱정되어 견딜 수 없는 지경이므로, 머뭇거리며 벼슬길에 나가기를 어려워하는 뜻을 전하께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벼슬길에 나가기 어려워하는 이유는 두가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신은 나이가 예순에 가깝고 또 학문이 엉성하면서도 어둡습니다. 신은 문장실력은 전날에 과거의 끝자리에도 끼지 못했고, 신의 행실은 물 뿌리고 비질하는 예절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과거에 합격하려고 10년 동안 노력했지만 세번 실패하고서 그만 두었으니 애초부터 지조 있게 과거를 일 삼는 사람도 아닙니다. 가령 과거 합격을 탐탁찮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조그마한 절개나 지키는 선량한 사람에 불과할 뿐, 크게 나라를 위해 무슨 대단한 일을 할 수 있는 훌륭한 인재가 아닙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훌륭한가 않는가 하는 것은 결코 과거에 합격하기를 바라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이 과거를 통해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고 해서 신을 대단하게 보실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보잘 것 없는 신이 명예를 도둑질해서 담당관리의 눈을 속였고, 담당관리는 저의 이름을 잘못 듣고서 전하를 그르쳤습니다.
전하께서는 신을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십니까? 도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장에 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문장에 능한 사람이라고 꼭 도가 있는 것은 아니고, 또한 도가 있는 사람은 신처럼 이렇치 않습니다. 전하께서 신을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정승도 또한 신을 알지 못합니다. 그 사람됨도 모르면서 저를 등용한다면 훗날 국가의 수치가 될 것이니, 그 죄가 어찌 이 보잘것없는 신에게만 있겠습니까?
신이 거짓된 이름을 바쳐 몸을 팔아 벼슬에 나가는 것이 진짜 곡식을 바쳐 벼슬을 사는 것 보다 어찌 나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차라리 이 한 몸을 저버릴 수는 있어도 전하를 져버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신이 벼슬길에 나가기 어려워하는 첫번째 이유입니다.
전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없어졌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미 이반되었습니다. 비유컨대, 큰 고목나무가 100년 동안 벌레에 속이 패어 그 진이 다 말라버려 언제 폭풍우가 닥쳐와 쓰로질지 모르는 지경에 이른 지 이미 오래입니다.
조정에서 벼슬을 하는 사람들 치고 충성스런 뜻을 가지고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부지런히 일하지 않는 이 없지만, 나라의 형세가 아주 위태로워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 쓸 곳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들은 아랫자리에서 히히덕거리며 술과 여색에만 빠져있고, 높은 벼슬아치들은 윗자리에서 빈둥빈둥 거리며 뇌물을 받아들여 재산 긁어모으기에만 여념이 없습니다.
오장육부가 썩어 뭉크러져 배가 아픈 것처럼 온 나라의 형세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직의 벼슬아치들은 자기들의 당파를 심어 권세를 독차지하려 들기를, 마치 온 연못 속을 용이 독차지하고 있듯이 합니다. 외직에 있는 벼슬아치들은 백성 벗겨먹기를, 마치 여우가 들판에서 날뛰는것 같이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죽이 다 없어지고 나면 털이 붙어있을데가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백성을 가죽에 비유한다면 백성으로부터 거두어들이는 세금은 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신이 자주 낮이면 하늘을 우러러 깊이 탄식하고 밤이면 천장을 바라보고 답답해하며 흐느끼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대비(문정왕후)께서는 신실하고 뜻이 깊다 하나 실은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는 아직 어리니 다만 돌아가신 임금님의 한 고아에 불과합니다. 백 가지 천 가지로 내리는 하늘의 재앙을 어떻게 감당하며 억만 갈래로 흩어진 민심을 어떻게 수습하시겠습니까?
냇물이 마르고 하늘에서 곡식이 비처럼 떨어지니 하늘의 재앙은 이미 그 징조를 보였습니다. 백성들의 울음소리는 구슬퍼 상복을 입은 듯하니, 민심이 흩어진 형상이 이미 나타났습니다. 이런 시절에는 비록 주공같은 분의 재주를 겸하여 가진 사람이 대신의 자리에 있다 해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풀잎이나 지푸라기처럼 보잘것 없는 신 같은 사람이겠습니까?
신은 위로는 만에 하나라도 나라의 위태로운 사태를 붙들 수 없고, 아래로는 털끝만큼도 백성들을 보호할 수 없으니 전하의 신하되기는 또한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조그마한 헛된 이름을 팔아서 전하께 벼슬을 얻는다 해도, 그 녹을 먹기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은 신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 점이 신이 벼슬하러 나가기 어려워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또 신이 요사이 보니, 변경에 일이 있어(전라도 일대 왜구의 침략) 여러 높은 벼슬아치들이 제 때 밥도 못먹을 정도로 바쁜 모양입니다만, 신은 놀라지 않습니다. 이 일이 벌써 20년전에 일어날 일인데도 전하의 신성한 힘 때문에 지금에 와서야 비로소 발발한 것이지, 하루 아침에 갑자기 발발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평소 조정에서는 뇌물을 받고 사람을 쓰기 때문에 재물은 쌓이지만 민심은 흩어졌던 것입니다. 결국 장수 가운데 자격을 갖춘 자가 없고, 성에는 수성할 군졸이 없으므로, 왜적이 무인지경에 들어온 것입니다. 어찌 이상한 일이겠습니까?
이번 사변도 대마도 왜놈들이 몰래 결탁하여 앞잡이가 되었으니, 만고에 씻지 못할 큰 치욕입니다. 전하께서 영묘함을 떨치시지 못하고서 머리를 재빨리 숙였습니다. 옛날에 우리나라에 대해서 신하로 복종하던 대마도 왜놈들을 대접하는 의례가 천자의 나라인 주나라를 대접하는 의례보다 더 융숭하였습니다.
윈수인 오랑캐를 사랑하는 은혜는 춘추시대 송나라보다 한술 더 뜨십니다. 세종대왕 때 대마도를 정벌하고 성종대왕 때 북쪽 오랑캐 정벌하던 일과 비교하여 오늘날의 사정은 어떻습니까?
그러나 이런 일은 겉으로 드러난 병에 불과하지, 가슴속이나 뱃속의 병은 아닙니다. 가슴 속이나 뱃속 병은 덩어리지고 막혀서 아래 위가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랏일을 맡은 공경대부들이 이 문제점을 해결해보려고 목이 마르고 입술이 타 들어갈 정도로 열심히 노력하였지만, 형편은 나아지지 않아, 백성들 가운데 수레가 있는 이들은 수레를 타고 피난 가고, 수레가 없는 이들은 달려서 피난가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에게 호소하여 군사를 불러 모아 전하를 위해 부지런히 일하게 하고 나랏일을 정리하는 것은 자질구레한 형벌제도 따위에 달린 문제가 아니라, 오직 전하의 마음 하나에 달려있습니다. 마음을 극진히 하면 그 효과를 크게 기대할 수 있는바, 그 틀은 전하에게 달려 있을 따름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무슨 일에 종사하시는지요?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풍악이나 여색을 좋아하십니까? 활쏘기나 말타기를 좋아하십니까?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어디 있느냐에 나라의 존망이 달려있습니다. 만약 하루라도 능히 새로운 정신으로 께달아 분연히 떨쳐 일어나 학문에 힘을 쏟으신다면, 하늘이 부여한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날로 새롭게 만드는 일에 얻으시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늘이 부여한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만드는 일 안에 모든 착한 것이 다 포함되어 있고, 모든 교화도 거기로부터 나옵니다.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을 거행한다면, 나라는 고루 잘 다스려질 것이고 백성을 화합하게 될 것이며, 나라의 위기도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는 일을 요약해서 잘 간직한다면, 사람을 알아보거나 일을 판단함에 거울처럼 맑고 거울처럼 공평하지 않을 수 없을 것 입니다. 그렇게 되면 생각에 사악함이 없어질 것 입니다.
불교에서 이른바 '眞定(참된 경지의 선)'이라 하는 것도 단지 이 마음을 간직하는 것에 있을 따름입니다. 위로 하늘의 이치를 통달함에 있어서는 유교나 불교가 한가지입니다만, 일에 적용할 때 불교는 그 발 디딜 곳이 없다는 점이 다릅니다. 그래서 우리 유가에서는 불교를 배우지 않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불교를 좋아하고 계신데, 그 불교를 좋아하시는 마음을 학문에 옮기신다면, 공부하는 것이 우리 유가의 것이 될 것이며, 그것은 마치 어려서 집을 잃은 아이가 그 집을 다시 찾아 부모, 친척, 형제나 옛 친구 등을 만나보게 되는 것과 같을 것 입니다.
더욱이 정치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전하 자신의 경험으로 인재를 선발해 쓰시고 도(道)로써 몸을 닦으십시오. 전하께서 사람을 취해 쓰실 때 솔선수범 하신다면 전하를 가까이서 모시는 신하들이 모두 사직을 지킬만한 사람으로 가득 찰 것 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사람을 취해 쓰실 때, 눈으로 본것만 가지고 하신다면, 곁에서 모시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전하를 속이거나 져버릴 무리로 가득 찰 것 입니다. 그런 때가 되면 굳게 자기 지조라도 지키는 고견 좁은 신하인들 어찌 남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뒷날 전하께서 정치를 잘하셔서 왕도정치의 경지에까지 이르신다면, 신은 그런 때에 가서 미천한 말단직에 종사하며 심력을 다해서 직분에 충실하면 될 것이니, 어찌 임금님 섬길 날이 없기야 하겠습니까?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반드시 마음을 바로 잡는것으로서 백성을 새롭게 하는 바탕을 삼으시고, 몸을 닦는 것으로서 인재를 취해 쓰는 근본을 삼으셔서, 임금으로서의 원칙을 세우십시오. 임금이 원칙이 없으면 나라가 나라답게 못하게 됩니다.
엎드려 생각건데, 전하께 신의 상소를 굽어 살펴 주시옵소서. 신은 두려워 어쩔 줄 몰라하며 죽음을 무릅쓰고 아뢰옵나이다.
* 이 무렵 조정은 12세 어린 임금의 어머니인 문정왕후(文定王后)가 수렴청정 섭정(攝政)으로 권력을 좌지우지하는 가운데, 왕후의 친정 동생인 윤형원(尹元衡)이 함부로 세도를 부려 세상이 그럴 수 없이 어지러웠다. 남명은 단성소에서 문정왕후를 세상 물정 모르는 과부 또는 아녀자라 하고, 민암부(民巖賦)에서 22세의 명종을 물 위의 배에 비유하며 어린애(고아)에 불과하다고 했다.
민암부(民巖賦)
물이 배를 띄울 수도 뒤엎을 수도 있듯이, 백성도 임금을 추대할 수도 쫓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물을 떠나서는 배가 움직일 수 없듯이, 백성과의 관계를 떠난 임금은 존재할 수가 없다.
같은 물이라도 고요할 때가 있고 성낼 때가 있듯이, 백성들도 온순할 때가 있고 무서울 때가 있다. 그러므로 한 나라도 백성들에 의해서 세워지기도 하고 멸망되기도 한다.
국가를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백성이다. 백성들의 마음을 얻느냐 얻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 국가의 존망을 결정하게 한다.
그러므로 백성들의 마음을 얻는 쪽으로 정치를 해나가는 것이 지배계급이 지켜야 할 대원칙이다.
배를 저어가는 사람은 물이 위험하다는 것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어 조심하지만,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임금은 백성의 마음을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소홀히 하여 업신여기게 된다.
임금이 이런 지경에 이러르면, 백성들은 그들의 손에 있는 대권(大權)을 발동하게 된다. 하(夏) 나라의 걸(桀), 은(殷) 나라의 주(紂), 진(秦)나라의 호해(胡亥) 등이 백성들을 업신여기다가 백성들의 대권에 의하여 밀려난 예이다.
민심을 잘 파악하고 있는 임금에 대해서는 백성들이 잘 협조한다.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펴나가면, 백성들도 그 임금을 떠받들어 그 임금은 성군이 되고 그 나라는 융성한다.
3년 뒤, 1558년 4월 삼가를 출발, 화개동천 유람길에 나섰다. 불일폭포(不一瀑布)를 전설의 청학동(靑鶴洞)으로 생각하며 다음 시를 지었다.
獨鶴芽雲歸上界 외로운 학은 구름을 뚫고 하늘나라로 돌아가고
一溪玉流落人間 한줄기 옥같은 물이 인간 세계로 떨어지도다.
從知無累繁爲累 성가신 일 없는 게 오히려 괴로운 걸 알았으나
心地山河語不看 심지는 산하의 말을 볼 수가 없구나.
61세 때,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덕산의 사윤동(絲綸洞)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60년 동안 갈고 닦은 학문을 후세에게 가르쳤다.
덕산에 터를 잡고서(德山卜居)
春山底處無芳草 봄 산 어딘들 향기로운 풀 없으랴만,
只愛天王近帝居 하늘 가까운 천왕봉 마음에 들어서라네.
白手歸來向物食 빈손으로 왔으니 무얼 먹고 살건가
銀河十里喫有餘 10리에 걸친 은하수처럼 맑은 물 마시고도 남겠네.
덕산 냇가 정자 기둥에 쓴 시(題德山溪亭柱)
請看千石鍾 청컨대, 천석의 거대한 큰 종을 보소서
非大扣無聲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오
爭似頭流山 어떻게 해야만 마치 두류산처럼
天鳴猶不鳴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지 않을까.
욕천(浴川) 세심정에서 목욕하고 나서 쓴 시
全身四十年 前累 온몸 40년 동안 쌓인 티끌
千斛淸淵 洗盡休 천 섬 되는 맑은 물에 싹 씻어 버렸다,
塵土倘能 生五內 만약 티끌이 하나라도 내 속에 생긴다면,
直金刳腹 付歸流 지금 당장 배를 쪼개 흐르는 물에 부쳐보내리라.
설매(雪梅)
한 해 저물어 홀로 서있기 어려운데
새벽부터 날 샐 때까지 밤새 눈이 내렸구나
선비의 집 오래도록 매우 외롭고 가난했는데
네가 돌아와서 다시 조촐하게 되었구나.
*산천재 앞에 남명선생이 심었다고 하는 수령(樹齡) 450여년을 자랑하는 남명매(南冥梅)가 있다.
* 지리산 기상처럼 대쪽 같은 시를 지었고, 다음 시조도 남겼다.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맑은 물에 산영( 山影)조차 담겨세라
아이야 무릉이 어디냐 나는 옌가 하노라
66세에 (명종 21년) 왕과 독대(獨對)하여 치국지방(治國之方)과 학문지요(學問之要)를 말하고 귀향하였다.
71세 때 선조(宣祖)가 여러번 불렀으나 가지 않고, 헌책(獻策)을 진언했으나, 조정에 반영되지 않아 속히 실행해 줄 것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이것이 국정에 대한 마지막 발언이다.
72세(1572) 되던 해 2월, 천수를 다하고 산청군 시천면 사윤동(絲綸洞)에서 운명하였다. 조정에서는 제물과 제관(祭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사림(士林)은 모두 곡(哭)하여 만장(輓章)과 제문(祭文)을 올렸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남명의 제자들이 의병장으로 가장 많았다. 곽재우는 조식에 손녀사위이며, 정인홍. 김천일 등이 모두 제자이다.
1615년, 선생 사후(死後) 광해군(光海君) 7년에 영의정(領議政)으로 추증(追贈)되고 시호(諡號)를 문정(文貞)이라 하였다.
후세 문인들은 이렇게 평하였다.
'선생의 처세는 불구종(不苟從) 불구묵(不苟默)이니, 불의를 보고 구차하게 따르지도 않았고, 구차하게 침묵하지도 않았다.' 미수 허목(眉叟 許穆)
'선생의 공덕은 입유렴완(立濡廉頑)으로, 나약한 선비를 강하게 만들었고, 탐악한 관료들을 청렴하게 만들었다.'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선비의 지조를 끝까지 지킨 이는 이 세상 오직 남명 뿐이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
남명은 차고 다니던 패도(佩刀)에 '내명자경(內明者敬) 외단자의(外斷者義)'라고 썼다. '안에서 밝히는 것은경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이 의'라는 것이다. 이 패도의 이름을 '경의검(敬義劍)'이라고 불렀다. 또 선생은 '성성자(猩猩子)'라 이름한 방울을 허리춤에 차고 다녔는데, 움직일 때 마다 들리는 그 소리로 자신의 의식을 깨우는 수행을 하였다.
선생인 남긴 저술은, 시문집(詩文集)인 <남명집(南冥集)>과 <학기류편(學記類編)>이 있는데, 시문집은 직접 지은 시(詩)와 문(文)을 모아 편찬한 것이고, 학기류편은 선생이 독서하는 과정에서 학문하는데 절실한 문구를 뽑아 기록해 둔 것으로, 문인(門人) 정인홍(鄭仁弘)이 유별로 모아 편찬한 일종의 독서기(讀書記)다.
남명의 유적은, 합천(陜川)에 생가, 용암서원, 뇌룡정이 있고, 김해 대동면에 산해정(山海亭) 숭도사(崇道祠), 유위재, 환성재, 남명선생의 본처 정경부인 묘소가 있고, 산청에 덕천서원, 세심정, 숭덕사, 산천재가 있다.
'책 한 권에 소개한 동양고전 50'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름 낀 숲에 사는 한 선비/ 화담 서경덕 (0) | 2015.09.23 |
---|---|
눈 속에 소를 타고 친구 찾아가며/ 율곡 이이 (0) | 2015.09.22 |
도산십이곡 / 퇴계 이황 (0) | 2015.09.14 |
선시 소개 제6편/ 한암, 효봉, 경봉 (0) | 2015.09.10 |
선시 소개 제5편/ 영호, 구하, 만공 (0) | 2015.0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