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시(禪詩) 소개 제5편/ 영호(映湖,), 구하(九河), 만공(滿空).
석전 영호(石顚 映湖, 1870-1948)
정인보(鄭寅普)는 석전스님을 ‘계행(戒行)이 엄정(嚴正)하신 분’으로 회고했고, 최남선(崔南善)은 ‘통철한 식견으로 내경(內經)과 외전(外典)을 꿰뚫어 보신 분’으로 회고했다. 이광수, 이능화, 오세창, 홍명희, 안재홍, 등 그 시대를 풍미했던 지성들과 교류했고, 1926년 동대문 밖 개운사 스님께 서양화가 고휘동, 동양화가 김은호, 문인 이병기, 이광수, 조지훈, 신석정, 김동리, 모윤숙이 출입했다. 서정주는, 항일 학생 운동으로 서울 중앙고보에서 퇴학 당하고 방황하던 자신을 중앙불교전문학교 제자로 받아준 스님을, 자비로운 은사이자 또 한 분의 아버지였다고 술회했다. 청담, 운허, 만암, 경보스님이 석전 제자이며, 백양사 서옹, 성륜사 청화스님이 만암의 제자이니, 다 스님 법맥을 이어받은 분이다.
전북 완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9세 때 위봉사(威鳳寺)의 금산(錦山)스님에게 출가하였고, 법호는 영호, 법명은 정호(鼎鎬), 시호(詩號)는 석전(石顚)이다. 세속에서는 박한영(朴漢永)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48년 4월8일 세속 나이 79세, 법랍 61세에 내장사에서 입정하였다.
저술은 600여수의 한시를 모은 석전시초(石顚詩抄), 석림수필(石林隨筆), 석림초(釋林草), 정선치문집설(精選緇門集說)이 있다.평생 4만 권에 가까운 도서를 읽었는데, 선운사에 장서가 보존되어 있다.
백두산에 올라
曉日天池浴 천지에서 몸을 씻고 솟아나는 새벽 해
虹霓斷復連 무지개는 끊어 질 듯 이어지고 있는데
光風吹瀨急 햇살 실은 바람이 급한 여울처럼 불어오더니
蕩破西峯煙 서쪽 봉우리의 안개를 몽땅 쓸어버리는구나.
*스님의 백두산행에 수행한 최남선은 여기서 스님으로부터 단군고사(檀君古史)와 동명고강(東明古疆), 한겨레 강역(疆域)에 관한 가르침을 받고, 후일 <불함문화론>을 썼다.
해인사에서(海印寺感懷)
天寒木落梵鐘稀 날은 차고 낙엽 지는데 범종소리는 잦아들고
遠客蕭然向晩歸 먼 길 나그네는 호젓하게 느지막이 돌아가네.
雪後靈岑多戍削 눈 온 뒤 영봉에는 삭막한 기운이 감돌고
煙中庵樹却依微 안개 속 암자의 나무도 희미하게 보이는구나.
名泉慣我留飛屧 좋은 샘물은 나와 친하여 가는 발길 멈추게 하고
法苑無人感落暉 산사에는 사람이 없어 저녁 햇살만 느껴지네.
悵望白雲如我嬾 게을리 떠가는 흰 구름을 초창히 바라보며
澹忘石翠已霑衣 돌이끼 옷에 물든 줄 까마득히 몰랐네.
대흥사에서
문에 다다르자 그윽한 향기 이상히 여겼는데, 연못의 붉은 연꽃이 막 피려 함이었네.
맑음과 진(眞)에 접하였으며, 묘법(妙法)에 통한, 티끌을 떠난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볼 뿐이네.
불국사에서
蕭條今佛國 이제 불국사가 쓸쓸하다만
在今最神雄 그래도 이 땅의 웅장한 가람일세.
幢影侵蹊曲 당간의 그림자는 굽이굽이 뻗었고
林暉背墖紅 숲 속 햇살 탑 너머 붉게 어렸네.
經疎僧語硬 독경 소리 다하자 법어 우렁차고
夕近鍾飯空 저녁이 가까우니 범종 소리 공중을 채운다.
霜後中庭菊 서리 내린 뒤뜰에 핀 국화꽃
獨凌衰俗風 홀로 속풍 쇠함을 능멸하노니.
송광사에서
내 벗 금봉스님이 20여 년 전에 금릉종의 매화 몇 그루를 구해, 조산의 천불전 앞과 대승암의 누대 곁에 손수 심었다.
꽃은 지금 한창 무르녹게 피고 제비들은 재잘거리지만, 그는 세상 떠난지 이미 오래다.
나는 아직도 떠도는 몸으로 여기 왔다. 매화는 웃지마는 고인은 보이지 않으므로, 나는 꽃 앞에 우두커니 그 감회가 자못 깊다.
구하스님(九河, 1871-1960)
구한말 울산에서 태어나 일제시기를 지나 대한민국 초기 어려웠던 시기에 통도사를 이끌어오신 스님이다. 주지 재임시에 상해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내, 김구, 이승만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다. 초대 조계종 총무원장을 지냈으며, 서예가들도 고개를 들지 못하는 명필이었다. 만년에 귀가 어두워 문하생들이 인사를 하면, '시시한 세상 이야기는 안 듣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고 하였다.
선원잡지(禪院雜誌) 권두언
참말은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참말은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성월당(惺月堂)에게
시방(十方)의 *박가범(薄伽梵)이 한 길로 열반문에 들었거니와, 오늘 성월당도 또한 그런가, 그렇지 아니한가. *삼독(三毒)이 왔다가 삼독이 갔을 뿐.
*성월당은 범어사를 선찰로 개창한 홍진선사를 말한다.
*박가범이란 "자재(自在), 치성(熾盛), 단엄(端嚴),명칭(名稱),길상(吉祥) 존귀(尊貴) 여섯가지 덕을 성취하여 생사(生死)의 흐름을 뛰어넘은 분.
*삼독이란 탐(貪, 탐욕)) 진(瞋, 분노) 치(痴, 어리석음)를 말한다.
금강산 신계사
집선봉 위 가을 하늘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땅이 넓고 평평하여 걸음 또한 편하도다. 골짜기 외진 곳에 승려들이 집을 지으니, 그윽하고 한가로워 물소리만 들리누나.
부채
종이에 종이 없고, 대에 대가 없는데, 맑은 바람은 어디서 나오는가? 종이가 공(空)한, 대도 공(空)한, 그곳에 맑은 바람이 스스로 오고가네.
행녀(行女)에게
얻는 곳에는 잃음이 있고, 잃는 곳에는 얻음이 있다. 얻고 잃음 모두 버리면, 만상(萬象)이 모두 부처의 스승이라.
오도송
心塵未合同歸宿 五體投空空歸依 (마음에 티끌이 따로 없어 같이 존재하고, 오체를 공중에 던지고 함께 귀의한다네)
*오체란 사람의 머리와 팔 다리.
만공스님(滿空, 1872-1946)
만공은 법호이다. 법명은 월면(月面). 전북 태인에서 고종 8년(1871) 3월 태어났다. 14세 되던 해 서산 천장사에서 태허 성원(泰虛 性圓)스님을 은사로, 경허 성우(鏡虛 惺牛)스님을 계사로 득도했다. 경허 스님을 좇아 서산 부석사와 부산 범어사 계명암 선원에서 정진했는데, 통도사 백운암에서 정진하던 중 새벽 종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비로봉에서
이천구백삼십사년 가을에 월면(月面)이 하늘에 올랐다.
비로봉 곡대기에 빛을 내쏘고, 동해에 빛의 도장을 찍는다.
자화상
나는 너(汝)를 여위지 않았고, 너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
너와 내가 나기 전에는, 알지 못해라 이 뭣고(是甚磨)?
오도송
空山理氣古今外 (빈 산의 이치가 다 옛과 지금 밖이니)
白雲淸風自去來 (흰구름 맑은 바람 예부터 스스로 왔도다)
何事達摩越西天 (달마대사는 무슨 일로 서천을 넘어왔는가)
鷄鳴丑時寅日出 (닭은 축시에 울고 해는 인시에 뜨는구나)
전법게(傳法偈, 후계자에게 법을 전함)
雲山無同別 (구름과 산은 같은 것도 다른 것도 아니고)
亦無大家風 (역시 대가의 기풍도 없는 것)
如是無文印 (이와같이 글자 없는 인(印)을)
分付惠菴汝 (혜암 너에게 주노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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