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 권에 소개한 동양고전 50

눈 속에 소를 타고 친구 찾아가며/ 율곡 이이

김현거사 2015. 9. 22. 08:17

 

 눈 속에 소를 타고 친구 찾아가며/ 율곡(栗谷) 이이(李珥)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은 어떤 분인가.?

'퇴율(退栗)'이라 하여 이퇴계와 함께 조선 최고 성리학자요, 임진왜란이 오기 전에 양병십만론(養兵十萬論)을 미리 주창하신 선각자요, <격몽요결>, <성학집요>, <성리설> 같은 저술을 남긴 문장가요, 병조판서 호조판서 같은 요즘으로 치면, 국방장관 내무장관 같은 요직을 지낸 분이요, 모친은 유명한 사임당 신씨요, 부친은 사헌부 감찰, 조부는 좌참찬을 지낸 본가 외가 두루 양반 집안이라고 소개하고, 마지막으로 향년 49세, 때는 선조 17년, 1586년이라고 하면 대충 설명한 것일까?

이것이 바로 수박 겉핧기라는 것이다. 수박 맛은 한 입이라도 쪼개서 실제로 먹어봐야 아는 법. 그런 의미에서 시(詩)부터 소개한다.

 

  눈 속에 소를 타고 친구를 찾아가며

 

올해도 다 저물고 눈이 산에 가득한데 / 歲云暮矣雪滿山
들길은 가늘게 고목나무 사이로 갈렸구나 / 野逕細分喬林閒
소를 타고 어깨 으스대며 어디로 가느냐 / 騎牛聳肩向何之
내 우계만에 있는 미인이 그리워서라네 / 我懷美人牛溪灣
저물녁 사립짝을 두드려 맑은 모습 얼굴을 바라보며 인사하니 / 柴扉晩扣揖淸臞
작은 방에 갈포 걸치고 짚방석을 깔고 있네 / 小室擁褐依蒲團
고요한 긴 밤을 잠 안 자고 앉았으니 / 寥寥永夜坐無寐
벽에 걸린 등불만 깜박거리네 / 半壁靑熒燈影殘
반평생에 이별의 슬픔 많았으니 / 因悲半生別離足
다시금 천산에 험한 길을 생각케 되네 / 更念千山行路難
이야기 끝에 뒤척이다가 새벽닭이 울어 / 談餘輾轉曉鷄鳴
눈 들어 보니 온 창문엔 서리 달만 차갑구나 / 擧目滿窓霜月寒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

 

* 이 곡은 율곡이 은거했던 해주 석담(石潭)의 구곡(九曲)을 노래한 것이다. 

 

 고산의 아홉 굽이 계곡 / 高山九曲潭
세상 사람들이 모르더니 / 世人未曾知
내가 와 터를 닦고 집을 짓고 사니 / 誅茅來卜居
벗들이 모두 모여드네 / 朋友皆會之
무이산을 여기서 상상하고 / 武夷仍想像
소원은 주자를 배우는 것일세 / 所願學朱子

일곡은 어디인가 / 一曲何處是
관암에 해가 비쳤도다 / 冠巖日色照
펀펀한 들판에 안개 걷힌 뒤에 / 平蕪煙斂後
먼 산이 참으로 그림 같구나 / 遠山眞如畫
소나무 사이에 술 항아리 놓고 / 松閒置綠樽
벗 오기를 우두커니 기다리네 / 延佇友人來

이곡은 어디인가 / 二曲何處是
화암에 봄 경치 늦었구나 / 花巖春景晩
푸른 물결에 산꽃을 띄워 / 碧波泛山花
들판 밖으로 흘려 보내노라 / 野外流出去
이 경치 좋은 곳을 사람들이 모르니 / 勝地人不知
알게 하여 찾아오게 한들 어떠리 / 使人知如何

삼곡은 어디인가 / 三曲何處是
취병에 잎이 벌써 퍼졌도다 / 翠屛葉已敷
푸른 나무에 산새가 있어 / 綠樹有山鳥
그 울음소리 높고 낮을 때로구나 / 上下其音時
반송에 맑은 바람 불어오니 / 盤松受淸風
여름에 더운 줄 조금도 모를네라 / 頓無夏炎熱

사곡은 어디인가 / 四曲何處是
송애에 해가 넘어가는구나 / 松崖日西沈
못 가운데 바위 그림자가 거꾸로 서니 / 潭心巖影倒
온갖 빛이 모두 잠겼구나 / 色色皆蘸之
숲속의 샘물 깊을수록 더욱 좋으니 / 林泉深更好
그윽한 흥을 스스로 이기기 어려워라 / 幽興自難勝

오곡은 어디인가 / 五曲何處是
은병이 가장 보기 좋구나 / 隱屛最好看
물가에는 정사가 있어 / 水邊精舍在
맑고 깨끗하기가 한량없네 / 瀟灑意無極
그 가운데서 항상 학문을 강론하며 / 箇中常講學
달도 읊어보고 또 바람도 읊조리네 / 詠月且吟風

육곡은 어디인가 / 六曲何處是
조계가 물가에 넓게 차지하였구나 / 釣溪水邊闊
모르겠다 사람과 물고기 중에 / 不知人與魚
그 즐거움 어느 쪽이 더 많을런지 / 其樂孰爲多
황혼에 낚싯대 메고 / 黃昏荷竹竿
무심히 달빛 받으면서 돌아오네 / 聊且帶月歸

칠곡은 어디인가 / 七曲何處是
풍암에 가을빛이 선명하구나 / 楓巖秋色鮮
맑은 서리가 살짝 내리니 / 淸霜薄言打
절벽이 참으로 비단빛이로구나 / 絶壁眞錦繡
찬 바위에 홀로 앉았을 때에 / 寒巖獨坐時
무심히 집 생각까지 잊는구나 / 聊亦且忘家

팔곡은 어디인가 / 八曲何處是
금탄에 달이 밝구나 / 琴灘月正明
옥 거문고와 금 거문고로 / 玉軫與金徽
무심히 두서너 곡조 타는구나 / 聊奏數三曲
옛 곡조 알아들을 사람 없으니 / 古調無知者
혼자서 즐긴들 어떠하리 / 何妨獨自樂

구곡은 어디인가 / 九曲何處是
문산에 한 해가 저무는구나 / 文山歲暮時
기이한 바위와 괴상한 돌이 / 奇巖與怪石
눈 속에 묻혀 버렸구나 / 雪裏埋其形
구경꾼이 제 안 오고 / 遊人自不來
공연히 좋은 경치 없다 하네 / 漫謂無佳景

 

山中(산중에서)

 

採藥忽迷路 (약초 캐다 그만 길을 잃었네.)

千峯秋葉裏 (천의 봉우리 가을 낙엽인데)

山僧汲水歸 (산승이  길어 돌아가더니)

林末茶烟起 (나무 끝에 차 다리는 연기 피어오른다.)

 

 율곡(李栗谷, 1536~1584년)은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 성리학을 이끈 대표 인물이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ㆍ석담(石潭)ㆍ우재(愚齋)이다.

1536년(중종 31) 음력 12월 26일에 사헌부 감찰 이원수(李元秀)와 사임당(師任堂) 신씨(申氏)의 4남 3녀 중 셋째 아들로 외가가 있던 강릉에서 태어났다. 태어나기 전날 밤, 신사임당은 흑룡(黑龍)이 큰 바다에서 날아와 침실의 처마 밑에 서리는 꿈을 꾸었다. 율곡의 아명을 '현룡(見龍)'이라 불렀고, 그가 태어난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 하였다. 

*신사임당(1504~1551)은 시, 그림, 글, 바느질과 자수에 이르기까지 정묘하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묵포도도, 산수도, 초충도, 등의 작품을 남다.

네 살 때 글방에 가서 글을 배우기 시작했고, 8세에 아버지와 함께 파주 율곡촌으로 이사갔다.

8세 때 '화석정(花石亭)'이란 시를 썼다.

 

花石亭 

 

林 亭 秋 已 晚  (숲속 정자에 가을은 이미 깊은데)  

騷 客 意 無 窮  (소란한 시인의 마음 끝이 없다) 

遠 水 連 天 碧  (저멀리 물은 하늘에 닿아 푸르고) 

霜 楓 向 日 紅  (서리 맞은 단풍 해를 향해 붉구나) 

山 吐 孤 輪 月  (산은 외로운 바퀴 달을 토해내고) 

江 含 萬 里 風  (강은 만리에 불어오는 바람을 머금었네) 

塞 鴻 何 處 去  (변방의 기러기 어디로 날아가는가) 

聲 斷 暮 雲 中  (소리가 끊긴 곳 저녁구름 속이네)

 

열살 때 강릉 경포대의 경치를 묘사한 <경포대부(鏡浦臺賦)>를 지었다.

부(賦)는 율곡이 나이 10세인 1545년(명종 즉위)에 지은 것이라는데, 워낙 문장이 조숙하여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경포대부(鏡浦臺賦)

 

*개괄

 

 한 기운의 조화가 뭉치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니, 그 신비함을 우리나라에 벌여놓아, 맑은 기운이 강원도에 모였다, 물결은 바다에 나뉘고 차가운 거울처럼 투명한데, 왼편 다리를 신선이 산다는 봉래섬에 두고, 두어 점 푸른 봉우리 나열한 여기에 한 누각 경포대가 호수에 임하여 마치 발돋움하여 날아갈 듯하다.

 다리를 건너면 무지개는 물 속에 박힌 것처럼 보이고, 궁궐이 구름결에 솟으니, 흡사 신기루가 허공에 뜬 것 같다. 봄철에는 동군(東君, 봄을 맡은 神)이 조화를 부리어, 꽃과 풀이 빼어남을 경쟁하고, 버들 언덕은 연기가 노래하는 꾀꼬리 집을 덮고, 도원(桃源)의 꽃에는 이슬이 날아가는 나비 날개를 적시네. 아지랑이 피고 먼 봉우리가 아득한데, 향기로운 비가 어부(漁父)의 집에 뿌리고, 비단 물결이 모래톱에 일렁인다.

이에 거문고를 뜯으며 옷을 벗으면, 기수(沂水)에서 목욕한 증점(曾點, 공자의 제자)의 즐거움 방불케 하고, 바람에 임하여 술잔을 들면, 세상을 근심한 범희문(范希文, 송나라의 재상)의 심정을 상상하게 하네. 

 가을철에는 금신(金神, 가을을 맡은 神)이 위세를 떨쳐 온 땅이 처량해지면, 기러기가 엉성한 전자(篆字)처럼 줄지어 날고, 맑은 서리가 나뭇잎을 붉게 물들였네. 여귀 붉은 언덕에는 백로가 출몰(出沒)하는 물고기를 노리고, 마름 하얀 섬 곁에 백구가 오가는 낚싯배를 놀래인다.

 

 창문엔 어부의 피리(漁笛) 소리가 들려오고, 드높은 하늘은 아득하고 흰 달은 더욱 휘영청하게 밝네.

이에 장한(張翰, 동진 때 시인)의 고향 오나라 옥 생선과 은 미나리의 맛에 배부르고, 소선(蘇仙, 소동파)의 적벽(赤壁)을 상상하며 명월(明月)의 노래와 요조(窈窕)의 시를 외우네. 

금계(金鷄, 천상의 닭)가 울어 새벽을 알리면, 부상(扶桑, 산해경에 나오는 동쪽 바다 속의 나무) 만 이랑의 붉은 물결을 잡을 듯하고, 옥토(玉兎, 달의 별칭)가 어둠 속에 솟아오르면 용궁(龍宮) 천층의 흰탑을 엿보는듯, 사방을 두루 바라보니, 신선이 된 것 같구나. 뿌연 모래를 밟으며 산보하기도 하고, 백조를 벗삼아 졸기도 하네.

 

'아! 명예의 굴레가 사람을 얽어매고, 이욕(利欲)의 그물이 세상을 덮어씌우는데, 그 누가 속세를 초월하여 한가로움을 즐길 건가?' 

그러자 곁에 있던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만약 몸에 덕을 쌓아 남들이 그 혜택을 입게 되어, 군민(君民)에게 충혜(忠惠)를 바치고 덕업(德業)을 죽백(竹帛, 역사)에 남기었다면, 용을 부여잡고 봉에 붙어서 사후의 명예를 이룩했을 거네. 뜻을 게을리 하고 자신을 잊어가며 눈앞의 즐거움일랑 따르지 마시기를!'

그러자 한 나그네가 웃으면서 대답한다.

'죽고 사는 것도 분별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오래고 빠른 것을 논하겠는가? 주(莊周)는 내가 아니고 나비는 실물이 아니니, 생각컨대 꿈도 없고 진실도 없으며, 보통 사람이라 해서 없는 것도 아니고 성인(聖人)이라 해서 있는 것도 아니거늘, 마침내 누가 득(得)이고 누가 실(失)이겠는가? 

 마음을 텅 비워 사물에 응하고 일에 부딪치는 대로 합당하게 하면, 정신이 이지러지지 않아 안(內)이 지켜질 터인데, 뜻이 어찌 흔들려 밖으로 달리겠는가?

달(達)하여도 기뻐하지 않고, 궁(窮)하여도 슬퍼하지 않아야 출세와 은거의 도를 완전히 할 수 있으며, 위로도 부끄럽지 않고, 아래로도 부끄럽지 않아야 하늘과 사람의 꾸지람을 면할 수 있다네.

융중(隆中)의 와룡(臥龍, 제갈공명)이 문달(聞達)을 구한 선비가 아니었으며, 위천(渭川)의 어부(漁父, 태공망)가 어찌 세상을 잊어버린 사람이었겠는가?

아! 인생은 바람 앞 등불처럼 짧은 백년이고, 신체는 넓은 바다의 한 알 좁쌀이라네.

여름 벌레가 겨울에 얼음이 있음을 의심하는 것이 가소롭고, 달인(達人)도 때로는 고독(孤獨)한 환경에 놓일  때가 있음을 생각하네. 풍경(風景)을 찾아서 천지를 집으로 삼을 것이지, 하필이면 중선(仲宣, 삼국시대 魏나라 시인)이 부질없이 형주(刑州)에서 고국을 그리워함을 본받으랴?'

 

13세 때 생원과 진사를 뽑는 시험인 소과에 응시하여 장원급제 했고,

16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19세에 금강산(金剛山)에 입산(入山)하여 1년간 불학(佛學)을 연구하였으나 유학으로 전환하였고, 20세 때 보응(普應) 스님으로부터 의암이라는 불명을 받았다.

그 당시 스스로 경종을 울린다는 뜻의 '자경문(自警文)'을 썼다.

 

 자경문(自警文) 

 

 개괄

 

 '마음이 안정된 자는 말이 적다. 마음을 안정시키는 일은 말을 줄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오래도록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었던 마음을 하루아침에 거두어들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마음이란 살아있는 물건이다. 정력(定力)이 완성되기 전에는 마음의 요동을 안정시키기 어렵다. 마치 잡념이 분잡하게 일어날 때에 의식적으로 그것을 싫어해서 끊어버리려고 하면 더욱 분잡해지는 것이 마치 나로 말미암치 않는 것 같다. 가사 잡념을 끊어버린다고 하더라도 다만 이 ´끊어야겠다는 마음´은 내 가슴에 가로질러 있으니, 이것 또한 망녕된 잡념이다. 분잡한 생각들이 일어날 때에는 마땅히 정신을 수렴하여 집착없이 그것을 살필 일이지, 그 생각에 집착해서는 않된다. 그렇게 오래도록 공부해나가면 마음이 반드시 고요하게 안정되는 때가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정심(定心) 공부이다.
 늘 경계하고 두려워하며 홀로 있을 때를 삼가는 생각을 가슴속에 담고서 유념하여 게을리함이 없다면, 일체의 나쁜 생각들이 자연히 일어나지 않게 될 것이다.
홀로 있을 때를 삼간 뒤라야 논어의 ´기수에서 목욕하고 시를 읊으며 돌아온다.´는 의미를 알 수 있다.
 밤에 잠을 자거나 몸에 질병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눕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며, 비스듬히 기대어 서도 안 된다. 한밤중이더라도 졸리지 않으면 누워서는 안 된다. 다만 밤에는 억지로 잠을 막으려 해서는 안 된다. 낮에 졸음이 오면 마땅히 이 마음을 불러 깨워 십분 노력하여 깨어 있도록 해야 한다. 눈꺼풀이 무겁게 내리누르거던 일어나 두루 걸어다녀서 마음을 깨어 있게 해야 한다.' 

 

22세(1557년)에 성주목사(星州牧使)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고,

이듬해 23세 때 예안(禮安)에 낙향해 있던 이황(李滉)을 찾아가 성리학에 관한 논변을 나누었다.

 둘은 35년의 나이 차이가 있었지만 성리학에 대한 열정과 공감대 때문에 만나자마자 상통했다. 당시 율곡이  불교에 입문했던 것을 사람들이 두고두고 입에 담고 비난하던 때였고, 퇴계는 58세로 사림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퇴계를 찾아가 도를 묻고 문답을 주고받은 후퇴계가 율곡을 동학(同學)으로 인정하자, 사림에서 율곡에 대한 이단 시비가 많이 수그러졌다.

율곡이 돌아간 뒤 퇴계는 제자 조목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평했다.

'일전에 서울에 사는 선비 이이가 성산으로부터 나를 찾아왔었네. 비 때문에 사흘을 머물고 떠났는데, 그 사람이 밝고 쾌활하며 지식과 견문도 많고,  우리 학문에 뜻이 있으니, '후생이 가히 두렵다(後生可畏)'는 옛 말씀이 참으로 나를 속이지 않았네.'

 1558년(명종 13) 별시(別試)에 장원 급제했으며, 1564년(명종 19년)에 실시된 대과(大科)에서 문과(文科)의 초시(初試)ㆍ복시(覆試)ㆍ전시(殿試)에 모두 장원 합격했다.

 그 뒤 생원시(生員試), 진사시(進士試) 등 아홉 차례 과거에 모두 장원으로 합격하여 사람들은 그를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고 불렀다.

34세 때 정철(鄭澈)과 함께 임금의 도리와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사회개혁안에 대해서 논한, <동호문답(東湖問答)>을 써서 선조에게 바쳤다.

1574년(선조 7) 당시의 사회문제들에 대한 구체적인 대책을 논한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써서 선조에게 바쳤다. 그 내용은 공안(貢案)의 개혁, 군적을 고치고 지방의 군현을 합병하여 불필요한 공직자 수를 줄이고, 관찰사의 임기를 보장하여, 관찰사로 하여금 지방을 제대로 다스릴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하는 요구였고, 서얼 제도를 폐지하며 신분에 관계 없이 천민이나 노비 중에서도 능력 있는 사람은 평등하게 공직에 발탁하여 나랏일을 맡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1575년 40세 때 선조의 왕명으로 제왕학인 <성학집요(聖學輯要, 임금의 도를 상술함)>를 저술했다.

1576년(선조 9) 동인과 서인의 대립·갈등이 심화되면서 벼슬을 그만두고 파주 율곡리로 낙향하였다.

1577년 해주에서 어린이 교육을 위해, '무지몽매함을 깨뜨리는 중요한 비결’이란 뜻의 <격몽요결(擊蒙要訣)>을 편찬했다. 독서궁리(讀書窮理, 책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는 일), 입신칙궁(立身飭躬, 스스로 조심하여 행실을 바르게 가짐), 봉친접물(奉親接物, 어버이를 받들어 모시고 사물에 접하는 일) 등이 그 내용이다.

1578년 해주 석담 청계당 동쪽 수양산(首陽山) 밑 고산(高山)에 은병정사(隱屛精舍)를 창건하고, 고산구곡가(高山九曲歌)를 지었다.

1580년에는 기자(箕子)의 사적을 정리한 <기자실기(箕子實記)>를 저술했다.

 1583년(선조 16) 병조판서에 임명되고, 그해 음력 2월 국방 강화를 위해 시무(時務)에 관한 6조계(六條啓)를 진술(陳述)했다.

그 내용은, 첫째 어진이를 등용하고, 둘째 군대와 백성을 제대로 키우고. 셋째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마련하고, 넷째 국경을 견고하게 지키고, 다섯째 전쟁에 나갈 군마(軍馬)를 충분하게 길러야 하고, 마지막 여섯 번째는 교화(敎化)를 밝히라는 것이었다.

당시 도승지(都承旨) 유성룡(柳成龍)에게 '내금위(內禁衛)의 이순신(李舜臣)이 장차 삼한(三韓)을 구제할 인물이니 후일 기회가 있으면 조정에 천거하여 등용하라'고 소개하였다

 

3월 '십만양병론(十萬養兵論)'을 주장하였으나 좌절되었다. 

당시 조선에서 일본에 사찰단 2명을 파견했는데, 한명은 동인이고 한명은 서인이다.둘은 돌아오자 의견이 달랐다. 김성일은 일본은 걱정할것이 안된다.서인은 일본은 조선을 침략할 우려가 된다고 했다. 이에 이율곡은 도성에 2만, 8도에 각각의 1만의 병력을 주둔하자는 십만 병사를 양성하자는 안을 선조께 건의했으나, 유성룡이 '변방방위책 5개조’를 내놓고, '10만양병설'의 문제점을 설파했다. 10만양병의 주목적은 남으로는 왜를 막고 북으로는 여진을 비롯한 오랑캐를 막아야 하는데, 남쪽 수군에 대한 언급이 없고, 이동에 따른 교통이 열악하며, 또한 당시 조선의 열악한 재정상항과 농사일을 들며, 무사한 때에 군사를 양성함은 화를 기르는 것’이라며 반대하였다.

선조는 유성룡의 의견을 채택했다. 

1583년 6월에 사임하고 율곡으로 돌아갔다.

 

1584년 49세 정월(正月) 한양 대사동(大寺洞)에서 서거하였다. 이때  집안에는 부싯돌 한개가 유산으로 남아 있었으며, 서거한 소식을 들은 임금은 사흘 동안이나 슬피 울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