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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의 여인

김현거사 2015. 7. 20. 08:22

 

 언제가 신이 내게 은총을 베풀지 모른다. 그리하여 내가 아득히 50년 전에 사랑한 소녀를 만나게 해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가 너무 당당한 모습이길 원치 않는다. 몸에 명품을 걸치고, 자신만만한 눈초리로 상대를 쳐다보는 사람, 호사스런 외국 관광지 이야길 하는 그런 여인이길 원치 않는다. 겸손한 척 하다가 어느새 출세한 남편과 자식 자랑 하는 그런 사람을 원치 않는다. 아득한 세월 저쪽에, 희미한 기억 속으로 사라져간 그가, 이제 눈치 빠르고, 물질의 풍요를 이 세상 가장 중요한 덕목인 줄 아는 사람이길 원치 않는다.

그런 사람 앞에서 내 어찌 한 때 떨리는 심정으로 밤마다 그의 집 앞을 한없이 헤매었고, 그가 떠나자 절망과 비탄으로 몇 년을 남해에서 헤매였다는 순진한 이야길 털어놓을 기분이 나겠는가. 차라리 만나지 말아야 한다. 추억은 창고 안에 가둬두어야 한다. 사람들이 흔히 나이든 후엔 첫사랑을 만나지 말라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세월이 사람의 얼굴에 주름살을 더하고, 젊은 시절 빛나던 눈에서 빤짝이던 생기를 뺏아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그러나 나는 그가 차라리 초라한 모습이면 좋겠다. 입은 옷도 신발도 초라하고, 가난의 차거운 파도에 시달린 눈가에 애수 가득한 그런 여인이면 좋겠다. 달동네에 살지만 작으나마 이웃 위해서 봉사한 이야길 하는 여인이면 좋겠다. 젊을 때 읽은 명작의 감흥을 말하는 여인, 우리가 애창하던 샹숑 한구절 기억하는 여인이면 좋겠다. 이제 그 노년의 피곤이 깃든 모습 앞에서, 나는 한 때 그가 얼마나 순결하고 고결한 향기를 풍기던 존재였던지 말해줄 것이다. 들국화처럼 청초했고, 백합처럼 향기로왔다고 말해줄 것이다. 서점에 가서 그의 손에 책 한 권을 쥐어줄 것이다. 그의 얼굴 한 쪽에 아직도 예전에 내가 가슴 태우며 황홀히 바라보던 그 모습이 많이 남아있다고 말해줄 것이다. 나는 속으로 이제 그의 눈물을 딱아줄 손수건이 되리라 작심할  것이다.  

 

 커피솦에서 우리는 많은 이야길 나눌 것이다. 봄나물 돋아나던 들판, 남강에 헤엄치던 버들피리 이야길 할 것이다. 옥봉 백사장에서 열리던 씨름대회, 칠암동 백사장에서 열리던 소싸움 이야길 할 것이다. 사천 선진나루 벚꽃 향기, 삼천포 남일대 해수욕장 나들이 이야길 할 것이다. 영남예술제와 촉석루와 의암 이야기도 할 것이다. 밤마다 그 집 담장 너머로 내가 던진 편지를 이야기, 죽은 초등학교 친구 이야기도 할 것이다. 서로 언제 진주를 떠났던지, 그 후 타향에서 서로 살아온 내력도 이야기 할 것이다.

 그가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초라한 여인이어도 상관없다. 병고에 시달리는 상태라도 상관없다. 만약 신이 나에게 은총을 베풀려고 생각하신다면, 가난한 그런 여인을 보내주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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