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11월의 노래

김현거사 2014. 11. 17. 14:10

  

  

      11월의 노래

 

 수원 아주대에서 종합검진을 받고 나오는데, 비에 씻긴 보도불럭이 새삼 정갈해 보이고, 그 위에 떨어진 단풍이 새삼 고와 보인다. 갑자기 이런 느낌이 오는 이유 알만하다. 나 자신이 이제 한 잎 단풍이기 때문이다. 11월은 토마스하디의 '귀향(歸鄕)' 첫구절에 나오는 달이다. 가능하면 내가 돌아갈 날이 11월이였으면 좋겠다. 갈 날 내가 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병원에서 떠나면, 누군가 찾아올 사람 아름다운 단풍을 보고 갈 것이다.

 친구들이 낙엽이 되고있다. 올 여름 가장 친하던 초등학교 친구가 타계했다. 이 가을에 부산 친구 하나 서울 친구 둘이 암 소식 전해왔다. 대학시절 가장 친하던 친구는 골수암으로 타계한지 이미 오래다. 우리는 낙엽처럼 흩어지고 있다. 기차는 종착역으로 달려가고 있다. 사람들은 기차에서 한명씩 하차한다. 입대통지서처럼 어딘가서 우리에게 통지서가 날라오고 있다.

  잊지말아야 할 것을 다짐해보았다. 그동안 탈 없이 살아온 인생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다. 그것이 이 세상에 남길 내 마지막 엽서다.

 새벽이면 나는 간혹 불교방송을 듣는다. 스님들은 어두컴컴한 새벽 도량을 돌면서 아미타불이 계신 곳으로 갈 것을 왼다. 범종 치고 목어를 두드린다. 황촛불 휘황한 부처님 전에 엎드려 절을 올린다. 기도하고 살아간 분들에 비하면, 나는 그동안 술 먹고 담배 피고, 처자식 거느리고 살았다. 돈 욕심, 명예 욕심, 다 챙기며 산, 취생몽사(醉生夢死), 철 없는 한 편 드라마였다. 천상병 시인은 명작이던 졸작이던 자기 인생에 감사드리고 갔다.

 돌아보면 세상은 요지경 속 이었다. 재미있고 괴로운 일 골고루 안배된 드라마 였다. 젊은 시절 나는 재벌 밑에서 일했다. 그가 벤츠를 타면 수행하여 같이 타고 다녔고, 그가 음식점에 가면 같이 먹은 후 계산했다. 그가 요인 만나면 옆에서 무슨 이야기하던지 다 들었다. 실장 된 후 맘대로 쓴 판공비는 중역 월급보다 많았다. 이렇게 걱정 없이 산 세월 20년 넘었으니, 속된 말로 진주 촌놈이 출세한 셈이다. 

나는 그 분과 한 방에 살면서, 몇 조(兆)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깨달았다. 벤츠 타는 사람도 하루에 세끼 이상 먹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걱정은 태산이고, 고민은 한강 이었다. 돈이 걱정의 씨요, 재앙이라는 것을 배웠으니, 좋은 인생공부 한 셈이다.

  사람들도 많이 만났다. 장차관, 국회의원, 대학총장, 언론인, 종교인, 작가들을 만났다. 대통령 된 사람과 노래방에서 마이크 잡고 노래 부른 적 있고, 대통령 동생과 룸싸롱에 간 적 있다. 저명 시인 평론가와 막걸리 잔을 부딪히곤 했다. 그동안에 세상에는 나보다 가문 좋은 사람, 공부 많이 한 사람, 재주 많은 사람이 충분히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나는 내가,  잎은 다 떨어지고, 찬서리 덮힌 가지 끝에 홍시만 몇 개 달롱거리는, 고향 집 늙은 감나무 같은 시절이 되자, 그들도 시들해졌다. 정작 좋은 친구가 따로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평생 가난하게 산 사람, 특별히 배운 것 없는 사람이 그들이다. 그들은 성격이 모나지 않았고, 잘난체 하지 않았다. 필부필부(匹夫匹婦)지만, 예술과 종교에 대해, 아는 경우가 의외로 많았다. 가장 깊은 공부는 고달픈 삶 이다. 그들은 그 과정을 거쳤고, 그점에서 나는 그들을 존경했다. 

 인터넷에 이런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60대에 이민 간다고 영어 배우는 사람, 70대에 골프 않맞는다고 레슨 받는 사람, 80대에 거시기 않선다고 비아그라 먹는 사람은 곤란하단다. 또 40대는 학벌, 50대는 돈, 60대는 자식의 성공, 70대는 건강이 제일이란다.

 귀밑머리가 저 쓸쓸한 강변의 갈대처럼 하얗게 변한 후에도, 돈 많거나 벼슬 높았던 친구에게 슬슬 기는 친구가 있다. 철이 없어도 한참 철 없는 사람이다. 다 그런건 아니지만, 돈 많은 사람 태반은 무식하고, 벼슬 높은 사람 태반은 자아도취적이다. 돈 많고 인색하면 죄인이고, 고관을 지냈어도 지탄 받는 정권 시녀였으면 죄인이다. 종교나 예술을 모르면 무식하다 하고, 겸손과 청렴을 모르면 저속하다 한다. 이걸 그들 자신만 모른다. 코메디다. 

  신(神)은 언제나 공평하다. 인간에게 하나를 주면 반드시 하나를 빼놓는다. 재능은 골고루 안배해준다. 사람은 하나 잘하면 하나 못한다. 당구를 잘 치면 바둑이 약하고, 바둑을 잘 두면 족구에 약하다. 소동파의 양주학(楊州鶴) 고사를 생각해보자. ‘네 사람이 모여 각자 자기의 소원을 말하기로 했는데, 한 사람은 '나는 억만금을 벌어 큰 부자가 되고 싶다.' 라고 말하고, 한 사람은 '나는 양주(楊州) 지방을 다스리는 관리가 되고 싶다.' 라고 말하고, 한 사람은 고개를 흔들며 '나는 돈도 벼슬도 다 싫고 신선(神仙)이 되어 학(鶴)을 타고 하늘로 오르고 싶다.'고 말한다. 그러자 마지막 한 사람은 '나는 십만 관의 돈을 옆구리에 차고, 학을 타고 양주자사(楊洲刺史)로 부임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나는 소동파를 믿는다. 그는 인간의 어리석은 욕망을 간파했다.

 내가 대학시절 존경한 은사가 있었다. 휜칠한 키에 미남인 그분은 항상 전날 과음한 모습으로 지팡이 짚고 강의실에 입장했다. 책을 펼치지 않고 칠판에 단어 몇자 써놓으면, 그걸로 동서고금을 종횡무진 오가며 한시간 강의 끝내는 해박함이 경이로웠다. 나는 그 분의  '얇은 사 하이얀 꼬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승무(僧舞)'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후에 나는 신문기자, 회사 중역, 대학교수 마치자 수필가가 되었다. 좋은 수필 남긴 일 없으나 새벽마다 불을 밝히고 글을 썼다. 글을 쓴다는 것은 한 테마로 생각에 잠기는 일이다. 그것은 명상이다. 명상은 많이 한 셈이다. 나는 두어 권 책을 남겼다. 그것이 내  정신의 사리(舍利)다.

 원고 쓰는 일 이외 하는 일은 화분에 물 주는 일이 전부다. 토요일이면 친구들과 족구하고, 바둑 두고 돌아온다. 막걸리가 나오나, 하나 둘 그들은 피한다. 이젠 잔 잡아 권해 줄 이 없어 그를 설워하는 처지다. 

  평일에 아파트 정원을 산책하면, 나무는 황홀한 붉은 단풍으로 물들었다. 어떤 나무는 잎이 반쯤 떨어진 것도 있다. 칠십 넘으니, 몸에 고장이 자주 난다. 치아도 간혹 아프고, 술 탓인지 담배 탓인지, 등도 자주 가렵다. 욕심은 은행나무처럼 은은히, 단풍나무처럼 황홀하게 물들고 싶지만, 세상 일이 어디 맘대로 되던가. 사람은 결국 한 줌 재로 귀착된다. 나는 한 줌 재로 남강에 뿌려지길 원한다. 망진산 절에 등이나 하나 달아주면 새벽마다 은은한 향냄새 속에 예불소리 목탁소리 들을 것이다.. 

  대학병원의 한 잎 고운 단풍에 맘이 촉발되어, 이번에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끝에 나는 쓴웃음 짓고 말았다. 불초 이 사람이 대학 은사 그분과 닮은 점이 딱 하나 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그것은 술이다. 나는 관우가 잔이 식기 전에 동탁의 선봉 화웅을 베고 돌아온듯 호쾌히 마시는 버릇이 있다. 그것 하나만 제자로서 기특했단 생각이 들어서 혼자 웃고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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